아르코미술관강의5
Dada and Surrealism
다다는 이 운동을 정신적으로 이끈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시인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189~1963)의 말처럼 새로운 정신의 상태였다. 해프닝, 퍼포먼스가 다다의 공식 표현이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세계대전(1914-18 11월 11일 독일의 항복)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공격하면서 반예술anti-art의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으므로 다다의 허무주의적 분규 이면에 감춰진 긍정적 목적을 명확히 규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광기insanity, 비도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도덕적 고찰. 허무주의의 배경으로서의 진화론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 알아냈을 때이다. 기원전 6세기는 동양과 서양이 동시에 자기의 존재 이유를 고찰한 시기였다.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82)이었다.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가 진화의 산물로 이기적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자기의 존재 이유를 물리적 DNA 분자의 생명은 수개월 정도이다. 그러나 DNA 분자는 이론적으로 자신의 사본 형태로 1억 년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유전자는 사본 형태의 잠재적 불멸의 성질을 갖는다. 자연선택은 유전자의 수준에서 이뤄지고, 같은 유전자들의 복제를 공유할 것 같은 혈연자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보호함으로써 ‘유전자들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생물 개체들이 있다. 이타적 기부행위는 자기우위 과시 신호인 것이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 의미로서의 단위이고, 개체는 ‘운반자’ 의미로서의 단위이며, 이 둘은 완전히 종류가 별개인 단위이다. 다른 유전자들은 각 유전자가 살아가는 환경의 일부분이다. 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배경’ 유전자들은 자신이 수많은 세대를 따라 이어온 시간여행 중 몸체를 공유하는 길동무이다. 침팬지와 인간은 진화역사 중 대략 99.5%를 공유하고 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인간 스스로를 전지전능자로 가는 디딤돌로 여긴다. 반면 침팬지는 꼴이 흉하고 엉뚱하며 괴상한 짐승으로 여긴다.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자연선택의 결과가 현재 우리가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자연선택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가 진화의 산물로 이기적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유전자의 특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egoism는 이기적 개체 행동의 원인이 된다. 유전자가 한정된 이타주의altruism를 육성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수행하는 특별한 경우가 있다. 보편적 사랑이든 종 전체의 번영이든 이러한 것은 진화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세히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제로는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남극의 황제펭귄은 바다표범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으므로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한다. 그중 하나가 뛰어들면 나머지 펭귄은 바다표범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느 펭귄도 자기가 희생물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누군가가 뛰어들기만 기다린다. 때로는 서로 밀치다가 무리 중의 하나를 떠밀어 버리기도 한다. 더욱 일반적인 이기적 행동은 먹이나 영역, 교미의 상대와 같은 가치 있는 자원을 서로 나누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이타적 행위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이 새끼에 대한 어미의 행위이다. 어미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며 큰 위험에 몸을 던져 포식자로부터 새끼를 지킨다. 그렇지만 생물이 종의 이익을 위해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도록 진화한다고 말하면 오류이다. 동물의 생활은 대부분 번식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이타적 자기희생적 행위는 어미가 새끼에게 하는 것이다. 이는 종의 존속 혹은 종의 번식을 위한 행동이다.
그러나 동일한 종족에 대한 이타주의도 있다. 국가는 이타적 자기희생의 주요한 수익자이며,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한다. 그들은 타국인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는 타인을 살상하도록 훈련받는다. 최근 인종차별주의자나 애국심에 반대하여 동지의식의 대상을 인류의 종 전체로 대치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무도한 범인에 대해서조차 사형집행을 꺼려하는 데 반해 별로 해로운 야수도 아닌 동물을 쏴 죽이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태아는 성숙한 침팬지보다 경의와 법적 보호를 받는다. 침팬지는 풍부한 감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도 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 태아는 우리 종에 속하므로 특혜와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어떤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윤리의 혼란은 진화론적인 면에서 볼 때 어느 수준에서의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생물학에서의 문제와 혼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마르셀 뒤샹은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found object)’를 구별했다. 뒤샹이 처음 제시한 레디메이드는 자전거 바퀴, 병 건조대, 소변기 등 공장에서 생산된 일상적인 상품이었다. 레디메이드는 익명성을 띠며, 개성 없이 밋밋하고, 인간의 노동이 가해진 느낌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발견된 오브제는 낯설고 오래된 사물들로 대개 구석진 가판대나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억압된 욕망을 보여주거나 사회의 낙오된 생산양식을 보여준다. 이 아리송한 두 가지를 보여주는 오브제로 브르통이 파리 외곽의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구두-숟가락’을 예로 수 있다. 손잡이 밑을 조그만 구두가 받치고 있는 이 시골풍의 목공예 숟가락은 낙오된 사물이었으며, 브르통은 이것을 과거의 욕망과 미래의 사랑이 담긴 것으로 바라보았다. 뒤샹은 발견된 오브제가 미적 특질이나 아름다움, 독특함으로 인해 선택되거나 발견된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개성이나 독특함이 없는 대량생산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예술가의 취향이 개입되지만 레디메이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는 하나의 사물이 미술품의 위치로 승격된 것을 말하며 초현실주의자들은 발견된 오브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병치를 탐구했다.
레디메이드는 몇몇 미국의 팝아티스트들과 유럽의 누보 레알리스트들이 아상블라주에 사용한 기계 생산물과 폐기된 기계의 일부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지만, 숭배가치나 자율적 능력을 지닌 물신으로 변모시킨 그들의 레디메이드와 뒤샹의 것은 본질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갖는 충격효과는 그것이 격리되었다는 점 그리고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오브제에서 완벽하게 그 기능을 박탈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이다.
레디메이드와 관련해 지적할 점은 조형물과의 관계인데, 전통 조형물에 대한 20세기 예술가들의 도전은 원시주의 예술가들의 부족 물건과 뒤샹이 사용한 레디메이드의 두 형태로 진행된 것이다. 둘 다 일종의 물신적 힘을 소유하거나 이를 유희 대상으로 삼은 듯이 보였다. 부족의 물건이 그 자체 특별한 생명력이나 주술적 힘을 지닌 제의적 대상으로서의 물신을 연상시킨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상업적 생산물로서의 물신, 즉 상품 물신을 연상시켰다. 상업적 생산물이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는 이 사물에 자율적인 삶과 힘을 부여하는 가운데 그것을 물신화시킬 수 있다. 부족의 물건이 상품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경제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던 데 반해 레디메이드가 도발적이었던 이유는 미술품도 생산품처럼 전시와 판매를 주요 목적으로 하는 상품 경제에 구속되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오브제 만들기에서 이 같은 부분적인 유형학은 성sex이라는 세 번째 물신을 끌어들인 초현실주의 오브제의 출현에 의해서 확장되었다.
뉴욕 다다
1915~23년 사이에 행해진 뉴욕 다다가 남긴 긍정적인 결과는 반예술 개념으로 이 개념은 1950년대 말에 등장한 네오다다이즘, 특히 플럭서스 운동 덕분에 국제적 무대에 올라 실질적으로 소생했으며, 20세기 후반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고, 이런 생명력이야말로 다다가 단순히 전통 예술 개념을 희화, 패러디, 조롱하며 거부한 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전통 미술의 전당이던 갤러리, 미술관 등을 대신할 새로운 것을 창출한 증거였다. 반예술의 목표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시키려는 데 있었다. 다다이스트들은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있어 우연의 원리를 처음 사용하고 작품의 제작에 있어 문학에서 시작된 자동주의Automatism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험했다. 이후 자동주의는 초현실주의자와 뉴욕의 추상표현주의자들에 의해 진전되었다.
뉴욕 다다의 중심인물은 뒤샹이었고, 취리히 다다와는 달리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대량생산품인 레디메이드를 미술품이라고 주장한 뒤샹의 행위에서 다다의 요소가 이미 표출되었다. 레디메이드는 기성품을 임의로 선택해 미술품으로 전시한 데서 비롯된 명칭으로 이 경우 그 사물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격리되고 동일한 종류의 대량생산품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그 기능을 박탈당함으로써 일종의 실존적 개성과 물신숭배fetishism의 특질, 그리고 혼란스러운 위엄을 얻게 된다. 종종 마술적이거나 신적인 힘으로 해석되는 물신fetish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무역업자들이 아프리카 부족들이 무역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사물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말이었다. 그 후 물신은 최하등급의 정신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10일 독립예술가협회가 주최한 전시회 개막일 일주일 전 뒤샹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모트J.L. Mott 철공소 전시장에서 소변기 하나를 구입했다. 그것을 작업실로 가지고 가서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변기제조자의 이름을 서명하듯 적고 <샘 Fountain>이란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 자신이 관여한 잡지 『장님』에 기고했다. 뒤샹은 미술품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 본래 사물의 용도는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미술에 대한 그의 재정의는 미술을 규정하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이란 단지 눈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지성을 활용해야 만한다고 했다. 그에 의해서 미술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사라지고 어떤 것이 미술품이냐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샘>이 제기한 비도덕성과 유용성 그리고 독창성과 의도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술가라는 권위에 의해 미술이 선택되는가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뒤샹은 자신의 업적만큼이나 삶을 통해서도 다른 어느 예술가보다 미술의 개념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그는 심미안의 신화를 깨뜨리고 미적 아름다움의 개념을 무너뜨리고자 노력했다. 발견된 오브제를 사용해 미술품을 제작하는 것이 유행하자 뒤샹은 1962년 네오다다에 “레디메이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미학을 타파하려고 했다. 반면 네오다다이스트들은 나의 레디메이드를 취하면서 거기서 미적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병 건조대와 소변기를 던졌으나, 지금 그들은 그것들의 미적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다”는 말로 공격을 가했다.
프란시스 피카비아도 미술에 있어서 진지함을 배척하면서 “내게 진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진지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 나는 진지함을 알프스 사냥꾼이 입고 있는 제복처럼 사람들이 지어낸 제안이나 관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취리히 다다
취리히 다다를 결성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인 후고 발은 1916년에 어린이들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책임한 요소를 환영하면서 이런 요소가 새로운 미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일기에 적었다. 명칭 다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리히터는 1917년 그룹에 가입했을 때 트리스탄 차라와 마르셀 얀코가 슬라브어로 대화하면서 다-다(예, 예)하는 걸 보고, 다다란 명칭이 슬라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휠젠베크는 1916년 4월 18일쯤 자신과 발이 독불 사전을 보다가 우연히 다다라는 단어를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어에서 다다dada는 ‘장난감 목마’를 의미한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이 야만적인 행위와 부조리를 조장한다고 자소하면서 이성 자체에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런 자연발생적 혁명은 따지고 보면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44~1910)의 회화에서 그리고 조르조 데 키리코와 마르크 샤갈의 잠재의식 세계에서 시각적 환상들로 분출된 적이 있었다. 파리에 체류하던 시절 데 키리코가 그린 그림들은 샤갈의 회화와는 달리 순진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의도가 잔뜩 실린 매우 감성적인 회화였다. 그는 외적 세계 이면에 감추어진 내적 모습을 묘사하려고 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데 키리코의 회화가 인간에게만 있는 피할 수 없는 외로움과 치유할 수 없는 두려움의 상태를 놀라울 만큼 잘 표현했다고 말했다. 환상주의, 혹은 형이상학파 화가들로 알려진 샤갈과 데 키리코는 인간이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사고와 꿈을 이성이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이런 경향이 파리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질 무렵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데 키리코는 자신의 회화를 형이상학적이라고 했다. 형이상학 회화에는 이미지가 물리적 세계를 넘어, 마네킹이 인간을 대체하고 평범하게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린 사물들, 즉 성냥갑, 물고기, 고무장갑, 비스킷, 빵 등이 화면에 예측할 수 없게 자리 잡은 세계, 따라서 환영과 실재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데 키리코는 오브제들을 비이성적으로 병치해 당황스러움을 야기하는 시각적 은유를 통해 그 효과를 확대시켰으며,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의도로 가득 차 있으며 강렬한 건축적 요소와 감성으로 채워진 이상한 풍경화”라고 했다.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1896~1963)가 1915년 가을 취리히로 온 것은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미 로젠스톡이란 본명 대신 ‘고향에서 슬픈’이란 뜻의 트리스탄 차라를 가명으로 사용했는데, 루마니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차별행위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다다는 1916년 2월 5일 발이 약간 소문 나쁜 구역에 있는 주점 마이어라이를 예술 활동의 중심이 될 카바레 볼테르로 개점하면서 시작되었다. 구소비에트의 혁명가 레닌이 한동안 카바레 볼테르 맞은편 슈피겔가스 21번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떠들썩한 다다의 동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카바레 볼테르는 나이트클럽과 예술가들의 사교클럽 중간 역할로서 젊은 예술가와 시인들이 그들의 사상과 원고를 가지고 와 큰 소리로 낭독하거나 회화를 소개하거나 노래와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예술적 오락센터가 되었다. 카바레 볼테르는 1916년 6월 23일 입체주의 가면을 쓴 발의 전설적인 퍼포먼스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정기간행물 『다다』의 창간호가 발간된 것은 1919년 7월이었다. 차라는 『다다』 3호에 발표한 「1918년 다다 선언문」에서 예술적 논의라는 핑계 하에 모든 원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쟁의 조건 하에 그 원칙들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칙은 위선이다. ‘네 자신을 알라’는 유토피아적이지만, 그 뜻에 악의가 있으므로 좀 더 수용할 만하다. 동정이란 없다. 대량학살 이후 우리는 순화된 인간성을 바라게 되었다. ... 회화란 우리 눈앞 캔버스 위에서 기학적 평행으로 보이는 두 개의 선이 만나도록 만드는 미술이며, 그 만남은 새로운 조건들과 가능성에 따라서 위치가 달라지는 세계의 실재에 따라 이뤄진다. 세계는 작품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변화를 통해 관람자에게 속하는 것이다. 세계의 창조자에게는 어떤 원인이나 이론도 없다. 질서=무질서, 자아=비자아, 긍정=부정 이는 절대적인 미술의 숭고한 광채이다.”
차라는 다다를 “뒤틀리는 고통의 고함소리, 반대적인 것들, 모든 모순, 변덕, 무관계의 얽힘을 의미하는 삶”으로 규정했다. 1918년 여름에 전쟁은 종국을 치닫고 있었다. 아직 살인행각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종전에 대한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과 독일에서의 시민동요 징후의 뒤를 이어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다가올 분위기가 퍼졌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들은 갑자기 기존 정설들에 대한 다다의 혐오와 보조를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다다에 참여하기 전에 파리 아방가르드 진영에서 활동한 취리히 다다의 주요 인물 장 아르프는 입체주의 콜라주를 다다 방식으로 바꿔 사용했다. 그의 콜라주는 기호학적 분석의 매체라기보다 우연적인 구성의 매체가 되었다. 아르프는 자동주의 구성과 무작위로 취한 우연의 요소 및 총체적 구성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인 말라르메가 제기한 우연의 허용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색종이를 찢어 그 조각들을 떨어뜨려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한 정사각형 콜라주>(1916~17)를 제작했다. 정사각형들을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정하게 질서를 이루게 하여 우연이 구성을 결정하는 전부가 아니란 점을 그는 시위했다. 그가 주장하고자 한 점은 우연의 법칙이 창조의 본질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에 대한 그의 탐색은 무의식을 미술과 연관시키는 생생하고 실질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나는 화면 구성에서 의도대로, 자동적 제작과정에 따라 파피에 콜레 기법을 발전시켜나갔다. 이것을 나는 ‘우연의 법칙에 따라 작업하기’라고 불렀다. 그 법칙은 다른 모든 법칙을 안고 있으며, 또 우리를 벗어나 있다. 모든 생명력을 분출시키고 완전히 무의식에 맡김으로써만 체험될 수 있는 최우선적 원인이지만, 나는 이런 법칙에 따르는 것이 삶을 순수하게 만든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쾰른 다다
쾰른 다다는 막스 에른스트의 특이한 콜라주를 낳았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그는 삽화를 잘라 암시성을 띠도록 이를 다시 배치함으로써 평범한 삽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 기법은 후에 초현실주의에서 사용되었다. 에른스트는 또한 회화적 목적으로 프로타주frottage 기법을 개발했다. 프로타주(문지르기)는 울퉁불퉁한 무늬 결에 종이를 대고 부드러운 화필로 문지르는 기법으로 그가 1925년 8월 10일에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뭇결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를 종이 위에 옮겼다. 그 후 나뭇잎의 잎맥, 마포의 결, 붓자국 등으로 동일한 작업을 했으며, 이런 우연적 패턴을 회화적 디자인의 기초로 활용했다. 이 기법은 나중에 유화에도 사용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기법을 잠재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했다.
에른스트는 1920년대에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그는 유화물감이 마르지 않은 화면을 빗으로 긁어서 물감이 묻어 있는 층 밑의 캔버스 면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물감이 칠해진 면과 긁어낸 면이 대조되게 했다. 그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나이프로 물감을 덧바르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실험을 거듭한 끝에 그라타주grattage(긁어내기) 기법이 만들어졌다. 프로타주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라타주 기법은 물감이 마르지 않은 캔버스 위를 울퉁불퉁한 표면에 대고 누르면서 불규칙하게 물감을 긁어내는 방법이다.
에른스트는 1937년에 유화에 데칼코마니아decalcomania(옮긴 그림) 기법을 도입했는데, 자동주의 회화에 사용된 것으로 1936년경 스페인 화가, 조각가 오스카르 도밍게스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에른스트가 유화에 적용했다. 흰색의 얇은 종이 위에 넓은 붓으로 물감을 바른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로 덮고 가볍게 문질러 물감이 아무렇게나 우연적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격찬한 이 기법의 핵심은 미리 주제나 형태를 구성하지 않고 회화를 만든다는 데 있다. 에른스트의 명성은 프랑스 문단에 빠르게 퍼졌고, 그는 1922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심리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았던 에른스트는 미술을 탈숭고desublimation, 즉 미술을 성 심리적 충동과 불안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성충동인 리비도libido의 욕구를 숭고화했다. 에른스트는 1938년에 폴 엘뤼아르와 함께 브르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운동과 결별했지만 이로 인한 회화 양식상의 변화는 없었다.
베를린 다다
베를린 다다는 시인 리하르트 휠젠베크가 1917년 초 취리히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오면 시작되었다. 독일 군대는 프러시아식 훈련을 유지하면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국민에게 속이고 있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그러한 모순을 19세기가 제시했던 이상들에 대한 배신으로 느꼈다. 1917년의 상황은 더욱 격렬해지고 이전보다 대립적 충돌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전쟁이 쉽게 종료될 것 같지 않았다. 미국이 1917년 참전함으로써 전쟁이 연장될 우려를 불러일으킨 반면,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시킨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지배체제가 서양 산업사회에 유입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런 상황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휠젠베크는 1917년 5월 23일 좌익 정기간행물 『신청년』에 기고한 「새로운 인간」에서 기존체제를 일소할 수 있는 전후의 희망적 존재에 기대를 걸었다. 그는 계급도 권력도 민족주의도 모두 화해하게 되며, “모든 것이 살아남되 확실히 한 가지만 사라질 것이다. 배부른 속물, 살찐 돼지, 지적인 돼지이자 모든 비참함의 양치기인 시민계급burgher, 즉 부르주아는 사라지고 말 것”으로 믿었다. 그는 잔존하는 모든 위계질서에 대한 공격만이 수도 베를린에서 할 수 있는 문화적 활동으로 새삼 인식했다.
휠젠베크는 「다다 선언문」에서 다시금 표현주의를 공격하면서 표현주의자들에게 특징 지워지는 자아성찰의 고뇌에 대항해 거리의 현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는 경험을 강조했다. 독일의 상황은 베를린 다다이스트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갖게 했으며, 이는 취리히 다다이스트들로부터 그들이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휠젠베크가 말한 대로 “스위스에서와 같이 조용하게 앉아 있는 것과 베를린의 우리들처럼 화산 위에 누워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베를린 다다는 혁명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에너지를 끄집어냈으며, 사회의 상황에 지쳐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반응을 얻어냈다. 더러 부조리해 보이는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적 언어와 예술적 형식의 재창조를 이뤄내고자 한 그들의 활동은 몰락한 사회의 전 체제를 개혁하려는 서막으로 보일 수 있었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에게 나타난 공통점은 포토몽타주의 사용이다. 시기적으로 게오르그 그로츠와 하트필드가 먼저 이 기법을 사용했다. 두 사람은 1919년 독일에서 창립된 공산당 당원이었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하는 방법은 이미지의 창조에 있어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트필드와 그로츠는 1919년에 “예술가라는 명칭은 모욕이다.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동등함을 파괴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인플레이션과 혁명을 겪은 베를린에서 다다는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다. 다다이스트들은 “다다는 독일의 볼셰비즘이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몇몇 다다이스트들은 좌파로서 공산당과 목표를 같이 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예술적 재현에 즉각 반응하고 베를린이 서쪽의 러시아가 될 수 있도록 협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를린 다다는 독일에서 전례 없던, 명백하게 정치화된 아방가르드 기획이었다. 이 점은 베를린 다다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기획은 고급미술의 부르주아적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난 프랑스의 다다의 수용, 바이마르 출판 산업이라는 신흥 대중문화 권력을 뒤흔들고자 했던 몽타주 기법의 체계적 전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광범위했다.
베를린 다다와 관련된 대부분의 화가들은 사실주의 양식만이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양 사회적 비판을 위해 회화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실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다다의 긍정적인 관심은 주로 정치적인 사회풍자 면에서 그로츠의 작품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 그로츠와 더불어 베를린 다다의 대표적인 화가 오토 딕스는 국제다다박람회에만 작품을 출품했다.
1918년 11월 독일의 패배는 황제의 하야를 동반했고, 승전국 프랑스와 벨기에는 패전국 독일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제재를 가하며 앙갚음했다. 국내의 정치적 분쟁은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사업가와 장군들이 일반 군인들의 희생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상이군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리에서 구걸을 했다.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들끓었다.
베를린 다다의 영향을 받은 신즉물주의(신객관주의)
게오르그 그로츠와 오토 딕스는 신즉물주의를 주도한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새로운 객관성New Objectivity’, 혹은 ‘새로운 합리성New Sobriety’으로 다소 부적절하게 번역되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는 1920년대 초 독일 회화에서 발전한 풍자적ㆍ사회적 사실주의 운동으로 당시 유행하던 표현주의의 특징인 사회 비판적 요소를 수용했으나 브뤼케의 추상 경향을 거부했다. 신즉물주의는 “명백히 실재하는 현실에의 충실함”을 기조로 하는 회화였다. 신즉물주의는 초기에 다다의 냉소적 파괴성과 전통 가치에 대한 경멸, 그리고 여러 시점에서 본 것을 동시에 결합하는 것과 같은 미래주의 기법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로츠와 딕스는 격렬한 사회풍자를 목적으로 진실주의 기법을 이용하여 사회의 추악한 면모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공부한 게오르그 그로츠는 1915년에 군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제대했으나 1917년에 다시 징집되었고, 그 후 상사를 폭행해 정신병동에서 군복무를 마감했다. 그로츠는 공공 공간에서 허가받지 않은 낙서에 관심이 많았다. 예술가의 진정한 사고의 변화를 끌어내주는 조작적 사례로서의 낙서는 진솔한 표현에 접근하기 위해 사색하고 따라야 할 사례로 모사될 수 있는 대상으로 예술가들의 관심거리였다. 그의 큰 공헌은 광범위한 수준에서 재생산된 풍자적 드로잉이다. 그로츠는 1924년에 “나는 대상의 비인간성과 기발하고 일관성을 빚어낼 수 있는 양식을 얻으려고 거칠게 표현되는 예술적 본능을 연구했다. 가장 즉각적인 표현이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옮기는 것으로 보인 민속적 데생을 다시 베껴 그리려고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어린이 회화의 그 총명한 의미도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나는 인간에 대한 나의 절대적 혐오에서 비롯된 관찰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무쇠 같은 단단한 데생 양식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많은 다다이스트들이 유화물감을 기피했지만 그로츠와 딕스는 유화물감을 사용했는데, 중상계층이 선호하는 유화의 전통 가치에다 계급체계를 부수려는 목적을 가진 작품의 공격성을 결합시키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츠는 신문에서 잘라낸 표제나 기사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콜라주를 만들었으며, 재료가 지닌 본래의 의미를 파괴하는 방식을 즐겼다. 정치적ㆍ풍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포토몽타주는 유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널리 알리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다다의 정기간행물들은 포토몽타주를 통해 당대의 모든 양상을 잘 이용했고, 공식 간행물에 등장하는 정치지도자들의 사진이나 그와 비슷한 광고들을 이용해 존재의 위선과 멍청함이 드러나게 했으며, 이는 이미지들이 전복되는 효과를 창출했다. 다다이스트들은 여기에 자신들의 각종 사진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들은 미래주의자와 취리히 다다이스트들의 선전 방식을 취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표명했다. 몇 년이 지난 뒤 포토몽타주를 누가 발명했는가에 대한 문제로 베를린 다다이스트들 사이에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로츠는 정치적 검열을 피할 계책으로 자신과 하트필드가 그 기법을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설명에서 그로츠는 발명시기를 조금 이르게 계산하면서 1915년이나 1916년 군인들이 전선에서 만들어 보낸 우편엽서에서 이 기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그의 설명은 결과적으로 이름 모를 군인들에 의해 참호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1933년 1월에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고, 9월경 선전국 장관이던 요제프 괴벨스는 제국문화부를 신설해 모든 예술은 나치의 기준에 따라 제작할 것을 공표했다. 노골적으로 나치즘을 비난한 그로츠와 하트필드는 일찌감치 독일을 떠났다. 하트필드는 프라하로 갔다가 런던에 정착했다. 미국에 정착한 그로츠는 풍자 양식을 대부분 포기하고 암울한 미래를 묵시론적 시각으로 표현하는 낭만적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다.
그로츠와 더불어 신즉물주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화가 오토 딕스의 회화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가 뚜렷했다. 표현주의의 신랄한 캐리커처 전통을 부활시킨 그의 회화에서 모델은 모든 허식을 벗고 사회구성체의 희생자나 지지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딕스는 종종 의도적으로 반예술, 혹은 독일어로 ‘값싸게 하다’, ‘감상적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verkitschen’에서 비롯한 것으로 ‘천박한 쓰레기’를 의미하는 키치에 해당하는 작품이나 추한 재료를 사용하는 진실주의 몽타주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타락한 사회의 부패와 전쟁의 추악한 본질을 심리학적 진실에 근거해 묘사했다.
파리 다다
파리는 전쟁의 직접적인 위협 속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 1914년 가을에 독일군은 파리 외곽 20마일 안으로 공격해왔고, 파리 시민들은 포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대포들의 사정권 안에 있었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문명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였다. 다다가 긴장된 상황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1917년 후반이었고, 그해 가을 아폴리네르는 차라로부터 여러 편의 시를 받아 절충주의 잡지에 실었으며, 동시에 피카비아의 『391』지를 바로셀로나에서 전해 받아 읽고 있었다. 그는 시인 아드리엔 모니에가 운영하던 서점 ‘책의 친구들’에서 가졌던 정기 독서모임에 참석했는데, 이 모임은 장 콕토,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필리프 수포, 그리고 훗날 파리 다다의 간사가 된 조르주 리브몽 데세뉴의 관심을 끌었으며, 시인이자 화가 리브몽 데세뉴는 취리히에서 발간되는 『다다』지에 글을 싣고 있었다.
차라는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의 평론지 『노르-쉬드 Nord-sud』와 브르통, 아라공, 수포가 편집한 『문학 Littérature(레타라튀르)』지에 기고했다. 이들 젊은 문인들이 아직 다다라는 명칭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기존의 사회적·문학적 관행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다다의 부정적·파괴적 측면에 상당히 가까운 경향을 나타냈다. 프랑스의 시각예술 부문에서는 다다가 자생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다는 1919년 피카비아가 자신의 『391』지 9호를 프랑스에서 발간함으로써 파리에 도입되었으며, 그는 『391』지에서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고 다다의 반메시아 트리스탄 차라가 곧 도착할 것임을 알렸고, 차라가 그해 파리에 도착했다. 피카비아가 파리로 돌아온 것은 1919년 3월 10일이었다.
파리 다다의 절정은 1920년 5월 26일 근대적인 가보회관Salle Gaveau에서 열린 다다 축제였다. 다다이스트들은 5월에 발생한 총파업에 공감을 표명하면서 파업의 정당함을 그들의 퍼포먼스에 포함시켰다. 파리 다다는 브르통과 차라의 분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브르통이 1922년 2월에 멋대로 기획한 파리 대회가 분열의 촉진제가 되었다. 대회의 목적은 다다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의욕과 함께 근대 문화를 보호하는 아방가르드의 가능성에 관해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차라는 그 대회가 본질적으로 반다다anti-dada를 전제하고 있으며 성격이 명확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코미디 Comoedia(코모에디아)』지를 통해 격한 논쟁이 오갔는데, 브르통이 어리석게도 차라를 ‘취리히로부터 수입한 운동의 주동자’로 규정지었다. 브르통이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엘뤼아르, 리브몽 데세뉴, 사티는 차라의 편에 섰다. 그리고 2월 17일의 카페 클로즈리 데 릴라에서 잇달아 벌어진 논쟁에서 브르통은 루이 아라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했다. 파리 대회는 열리지 못하고, 그에 대한 중상모략이 지속되자 브르통은 마침내 『문학』지에 4월호에 기고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라는 글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 다다로부터 떠나라. 아내로부터 떠나라. 애인으로부터 떠나라. 희망과 두려움으로부터 떠나라. 아이들을 숲속에 버려라. 그림자의 실체에서 떠나라. 편안한 삶으로부터 떠나라. 미래를 위한 것을 버려라. 그런 길에서부터 출발하라.”
이러한 난잡한 공개논쟁들이 파리 다다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브르통은 피카비아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피카비아는 『솔방울』지 2월호에서 차라에 반대하며 브르통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차라와 그를 지지하는 동료들이 『털 난 가슴』지 4월호에서 반론을 펼쳤지만, 결과는 브르통의 우세로 나타났다. 파리 다다의 분열은 미술계 전체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다의 표적이 되어왔던 예술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입체주의자와 순수주의자와 같이 다다이스트들이 아니었던 예술가들은 잇달아 벌어지는 급박한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찾으려고 애썼다. 브르통은 1922년 『문학』지의 편집을 혼자 맡게 되었고, 1924년 초현실주의의 계획과 방향을 제시한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다다에 치명타를 가했다.
파리 다다가 지속되지 못한 또 다른 요인은 종전 후의 정치적 현실이었다. 침략전쟁을 반대했던 대부분의 독일 아방가르드들은 패전과 더불어 혁명적 사회변화를 추구한 반면 애국적ㆍ방어적이었던 대다수의 프랑스 아방가르드들은 전승과 함께 보수주의 문화를 옹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보수주의의 승리는 1919년 후반에 있었던 국민총선거에서 확인되었는데, 재향군인의 군복 색깔을 따서 이름 지은 ‘청색평의회’라는 우익 다수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회화에서는 앵그르, 쇠라, 세잔, 그리고 그 밖의 19세기 화가들의 명성이 지중해적 고전주의라는 프랑스 전통에 비추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특히 앵그리슴Ingrism이 유행했는데, 이는 피카소가 입체주의 회화를 계속하면서 고전회화에도 관심을 기울인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은 마리네티와 마찬가지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출판을 주로 했으며, 전쟁 기간에 파리의 발 드 그라스 병원에서 전쟁의 충격으로 신경증을 앓던 환자들을 감호하는 간호병으로 복무하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다른 어떤 이론보다 인간의 심리를 잘 설명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브르통이 무의식, 쾌락, 꿈의 표현 가능성, 거세 공포, 심지어는 죽음 충동 같은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열렬히 수용하게 된 것은 외상성 신경증 환자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삶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충격의 연속이라는 생각은 브르통에게 있어 일종의 영화구경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몇 년 뒤 브르통의 시집 『자기장 Les Champs magnétiques』(1920)에서 형상화되었다. 필리프 수포와 함께 쓴 이 시집에서 브르통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시도했고, 그에 걸맞게 글의 구성 또한 자동기술을 따랐다.
「자장」은 브르통과 수포가 자동주의로 쓴 첫 번째 습작이었다. 자동주의는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상상력을 검열 없이 분출시킴으로써 새로운 시적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들은 10시간 동안 계속되는 집필행위를 유지함으로써 당시 거트루드 스타인과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에 관련된 소설들에 비교할 만한 자유로운 흐름을 획득했다. 그 결과 문법이나 이론상으로 틀린 문장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는 정통 글쓰기 형식에 대한 불신을 과장한 것이었다. 「자장」은 관습에 대한 어떤 공격도 거부하는 문학의 위선을 뒤흔든 결과를 초래했다.
작품
피카비아의 기계주의 드로잉 <경외 Reverence>(1915)는 미술에 대한 허무주의를 시위한 것이었다. 피카비아가 스티글리치의 정기간행물 『291』지에 게재한 <누드 상태의 미국 소녀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American Girl in the State of Nudity>(1915)은 일종의 삽화적 레디메이드로 뒤샹의 <샘>과 평행을 이루는 작품이다. 피카비아는 기계에 성을 부여했으며, 스파크 플러그는 여성을 은유하며 성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녀의 생의 목적은 욕망, 혹은 오르가슴과 동의어인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기계는 피카비아뿐만 아니라 뒤샹과 만 레이의 작품에서 사람에 대한 반복적인 은유로 작용했다.
피카비아의 <카코딜과 같은 눈 The Cacodylic Eye>(1921)은 회화의 해체이자 회화라는 역설적인 작품으로 그는 작업실에 커다란 캔버스를 놓고 방문자들로 하여금 서명하거나 무엇인가를 쓰게 했다. 결국 50개가 넘는 서명, 말장난, 낙서, 경구들이 가득 찼고 눈 하나가 관람자를 빤히 바라본다. 이 작품이 1921년의 살롱 도톤에 선보였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공중화장실 벽”으로 묘사한 평론가도 있었다. 이 작품으로 피카비아는 회화가 화가의 독창적이고 일관된 시각 및 정체성의 표현이라고 사칭하는 데 대해 공격을 가했다.
만 레이가 해부대 위의 재봉틀을 담요와 노끈으로 포장한 <이시도르 뒤카스의 수수께끼 The Enigma of Isidore Ducasse>(1920)는 뒤샹의 존재론적 모순과는 다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이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알고 있었으며, 프로이트는 「기괴한 것」이란 글에서 왜 오브제가 낯설고 불안함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앙드레 브르통이 언급했듯이 프로이트가 사용한 독일어 ‘기괴한’ 것, 혹은 ‘익숙하지 않은’ 것은 관람자를 과거와 환상으로 데리고 감으로써 성적인 것이 되면서 동시에 낯설어지는 오브제의 위기인 것이다. 브르통은 <이시도르 뒤카스의 수수께끼>를 가장 순수한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꼽았다. 이시도르 뒤카스는 24살에 요절한 우루과이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 시인, 배우였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혁명』지 창간호에 실린 첫 작품이 되었다.
<셀레베스 섬의 코끼리>(1921)는 환각적 힘을 지닌 작품이다. 화가 교습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기계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면서 신화를 회화로 표현하기 위해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구사했다. 하늘에 물고기와 가상의 구멍들이 있고, 중앙에 있는 아프리카인이 사용하는 옥수수 저장통 같은 위협적인 형태는 유기적이면서도 기계적 이미지로 보이고 그 옆의 목이 없는 인물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드리운다. 사적인 강박증보다는 집단 무의식에 호소한 에른스트의 회화는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원동력을 제공해주었다.
에른스트는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꿈을 단순히 형상화하기보다는 꿈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나이팅겔로부터 위협받는 두 아이>(1924)에서 불안한 분위기가 창출되었고, 제목은 수동적 오브제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효과를 초래했다. 그의 도발적인 이미지들은 주체가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 파열을 만들어냈다.
<커다란 도시 The Big City>(1916~17)에서 보듯 일찍이 사회 풍자의 경향이 강한 풍자화로 시작하여 소묘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표현했으며, 폭력과 잔인함, 그리고 격하시킨 성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프로이센 지배층이었던 군 장교, 자본가와 성직자의 부패를 비난했다.
<사회의 기둥 The Pillars of Society>(1926)에서 보듯 그로츠는 폭력과 잔인함, 그리고 격하시킨 성을 암시하는 회화를 제작함으로써 프로이센 지배층이었던 군 장교, 자본가와 성직자를 웃음거리로 만든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풍자 화가였다.
<실비아 폰 하르덴 기자 The Journalist, Sylvia von Harden>(1926)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전형적인 인물의 잊을 수 없는 초상으로 남녀 구별이 모호한 상태로 그의 퇴폐적인 밤 생활과 함께 그려놓은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전후 베를린에서 부상한 새로운 지식인 사회의 대담성과 퇴폐성이 집약되어 있다.
고도의 조직과 통제 하에 전개된 미술운동 초현실주의
다다가 남긴 폐허에서 건설을 시작하려는 긍정적인 행동의 열망에서 비롯한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사조들 가운데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브르통은 정신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그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상상력과 감정적 힘이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왔다고 믿었으므로 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예술가들,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문학』지의 편집인이 되었다.
다다는 일상의 모든 걸 부정했으므로 결국 스스로를 부정해야 했으며, 이는 악순환으로 빠져 거기로부터 탈피가 필요했다. 이는 브르통 주위에 모인 젊은 프랑스 예술가들이 가장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브르통은 다다 운동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지만 초현실주의와 다다의 관계는 복잡한데, 여러 면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유산계급을 그들의 적으로 계승했고, 최소한 이론상으로 전통 형태의 미술에 대한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다다와 관계가 있던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로 적을 옮겼으므로 더욱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대용물이었기 때문이다. 자발적 창조행위의 힘을 인정함으로써 초현실주의는 다다가 미술에 걸었던 거부권과 역설적인 다다 입장의 필연성을 제거했다.
‘초현실surrealiste’이란 용어를 아폴리네르가 1917년에 처음 사용했으며, 1924년 10월 15일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문 Manifeste du surréalisme」에서 규정되었다. 브르통은 1920년에 이미 현실주의의 상위, 혹은 현실주의를 초월하는 의미의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선언문을 통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란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문」은 브르통의 말대로 장황하면서 산만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초현실주의의 정의는 선언문의 중반 이후에야 나타나는데, 그 의미를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는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사람이 입으로 말하든, 붓으로 쓰든,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 사고의 참된 운동이 표현된다. 사고는 이성에 의한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관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기록된다”는 말로 규정했다.
브르통에게 초현실주의란 파열적인 방식으로 “두 개의 다소 어긋나는 현실을 병치”하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브르통의 규정은 문학작품의 창작에 관한 것이지만,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운동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서의 자동주의는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에 사용되었다.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지를 일종의 꿈으로 파악했으며, 프로이트는 꿈을 전치displacement된 소망의 왜곡된 상형문자로 이해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대상을 일종의 증상으로 파악했으며, 프로이트는 증상을 갈등상태의 욕망이 신체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꿈을 해석하면서 발전시킨 응축condensation의 보완 개념인 전치는 꿈에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과정으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또 하나의 본질적인 꿈-작업이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1924년 12월 새로운 정기간행물 『초현실주의 혁명』지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 잡지는 10년 동안 발행되었다. 1929년 12호가 발간된 후 이 잡지는 『혁명을 위한 초현실주의』지에 밀려났으며, 미학적으로 훨씬 과감했던 『미노토르』지에 의해 퇴색되었다. 초기의 『초현실주의 혁명』지는 브르통과 이 간행물의 초대 편집장 피에르 나빌 사이의 내부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나빌은 192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손을 떼고 레온 트로츠키의 비서가 되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으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때 무장봉기에 공헌하고, 외무인민위원, 군사인민위원, 정치국원 등을 지냈고, 레닌이 사망한 뒤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여 추방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유럽이 전통적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이브 탕기와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세한 것은 1925년 말이었으며, 스물네 살의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그룹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적 목적보다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다. 그는 양식에 대한 다다의 불신을 계승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자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를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했다. 브르통은 달리가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미술에 의도를 가지고 결합시켜 초현실주의 미술의 효과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했다. 그가 보기에 달리의 조작은 이중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욕망의 흐름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자동주의 원리를 중요하게 받아들였지만 단일한 초현실주의 양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이러한 두 경향이 바로 정신분석학과 미술의 관계를 괴롭혀온 문제로 등장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에 관한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암시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회화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학적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 대부분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정신과 미술품을 너무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으로 연결시킨 결과, 작품의 고유성이 상실되거나 둘 사이의 관계가 지나치게 의식적ㆍ계산적으로 설정되어 정신이 작품을 통해 단순하게 그려질 수 있는 것처럼 여긴 데 대해 프로이트는 의문을 제기했다. 프로이트는 근대 미술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고대와 아시아의 소형 입상을 수집할 정도의 보수적 취향을 가졌지만, 정신과 미술품의 관계를 파악하는 두 경향에 의문을 제기할 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무의식은 자유로울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이므로 억압에서 자유로운, 적어도 관습에서 자유로운 미술을 제안한다는 것은 정신병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정신분석학적 미술이란 이름 아래 그것을 제안하는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못 말리는 괴짜들’이라고 불렀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화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으며,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38년 파리의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된 국제전들은 초현실주의의 국제적 확장을 말해준다. 영국에서는 낭만주의의 재출현으로 인식되어 즉각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의 초현실주의는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발생했다. 그들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갤러리와 줄리앙 레비 갤러리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표현적 추상의 선구자 호앙 미로
바르셀로나 태생의 스페인 화가 호앙 미로는 1912년부터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와 아카데미 갈리에서 공부하며 눈으로 보지 않고 촉감으로만 사물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1918년 달마우 갤러리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카탈루냐 민속을 연상시키는 주제와 야수주의 기법을 결합한 회화를 선보였다. 미로는 1919년에 파리를 방문해 같은 나라 예술가 피카소를 만났고 잠시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와 세련된 원시주의를 혼합한 그림을 그렸다.
미로는 바로셀로나에 있을 때부터 그들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고 있던 피카비아와 브르통 중에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에 대해 앙드레 마송의 충고를 구했다. 마송의 작업실은 미로의 작업실 바로 옆에 있었다. 마송은 미로에게 “브르통이 ... 곧 미래다”라고 말해주었다. 미로는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이듬해 이 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카다브르 엑스키’라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집단 놀이 방식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절묘한 송장’이란 뜻의 이 놀이는 아이들의 놀이를 흉내 낸 것으로 각각의 참여자가 다른 사람이 무엇을 그렸는지 알지 못한 채 그려 보탤 수 있도록 연속해서 포개 접은 여러 장의 종이에 그린 드로잉을 일컬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교묘하게 왜곡된 이미지들을 만들었으며, 평생 순수추상과 구상적 요소가 남아 있는 회화에서 논리와 이성의 통제에서 해방된 무의식적인 사고로부터 발생하는 창조력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의 기본 원칙에 충실했다.
미로는 1926년 5월에 에른스트와 함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를 장식해주었는데, 이 일로 두 사람은 브르통에 의해 공식적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 이유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르주아 상업주의와 타협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미로는 평생 순수추상과 구상적 요소가 남아 있는 작품에서 논리와 이성의 통제에서 해방된 무의식적인 사고로부터 발생하는 창조력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의 기본 원칙에 충실했다. 또한 전통적인 회화적 묘사와 구성 방식을 거부했고 비논리적인 환상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 사실적인 경험을 덧붙임으로써 더 높은 차원의 사실성을 구현하는 회화를 창조했다. 완숙기의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에서 선호했던 피상적인 표현 방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초현실주의의 여러 양식 범주와는 동떨어진 경향을 보여주었다.
선들을 뒤섞어 사용한 앙드레 마송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 중의 경험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쳐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심오하고 난해한 호기심, 모든 사물의 상징적 통일에 대한 모호한 신념을 갖게 했다. 그는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로트레아몽 그리고 그 외의 작가들의 저술을 읽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철학으로 발전시킬 만한 지적 훈련이 부족했으므로 회화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데 전념했다. 모호한 신념이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일관성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고 전혀 관계가 없는 회화를 말한다면 그런 회화는 두 가지 수준에서 해석이 가능한데, 마송의 회화는 그가 사용한 질감이 감정, 기분 그리고 특별한 분위기를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화로 보이지만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인물과 대상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이러한 조형적 요소들이 화가의 의식적 통제가 없는 가운데 선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
마송은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자동기술에 의한 글쓰기와 대등한 것을 회화에 적용하는 일을 사명처럼 여겼다. 마송의 자동주의 선은 시인들이 행했던 실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의식적인 결정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다시 손질할 수 없도록 몽환상태를 유지하면서 더욱 빠르게 연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초현실주의 혁명』의 첫 호부터 모습을 드러낸 그의 드로잉들은 대부분 반복되는 주제들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비밀스런 분위기 속에서 신체부위들이 레몬, 석류, 건축물 따위의 다른 요소들과 나란히 등장했다. 시인들이 단어나 구문들을 가지고 그랬던 것처럼 마송은 이것들을 예기치 않은 형태로 조합했다.
마송은 1929~32년 독일과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1933년 뉴욕에서 미로와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며, 1940년 다시 뉴욕으로 가서 그곳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미국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특히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초기단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마송의 모래회화의 자동주의와 잭슨 폴록이 실행한 액션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마송의 회화에 영향을 끼친 것은 자동주의 외에도 그가 받은 초기의 교육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고전문학, 신화 등이었다. 이런 영향 하에서 그는 전쟁, 대량학살, 영웅주의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알지 못한 채 본능에 의지하여 무방비한 상태로 삶의 조수에 휩쓸리는 모티프를 다뤘다.
존재 방식의 문제를 제기한 르네 마그리트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1910년 가족과 함께 샤틀레로 이사한 뒤 그 지방 어린이들과 더불어서 회화와 소묘를 배웠다. 어머니가 자살한 이듬해인 1913년 아버지, 형제 두 명과 함께 샤를루아로 이주했다. 1916년 브뤼셀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18년 가족이 브뤼셀에 정착할 때까지 비정기적으로 아카데미에 재학했다.
마그리트는 브뤼셀에 있을 때 집 뒷마당 창고에서 상업미술 전문 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파리에서도 때때로 의뢰받은 책 디자인과 광고 업무를 병행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일부 평론가들에게 그의 냉담한 재현 양식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재현을 구성하는 시각적ㆍ언어적 요소들 간의 관계와 이런 요소들이 대상이나 관념을 환기시키는 상호작용에 대한 마그리트의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이후 그가 그의 주요작품들을 다수로 복제했던 의도 등은 이 같은 상업미술 경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또한 그가 왜 그의 중요한 회화들을 여러 차례 복제품으로 제작하기를 원했는지도 설명해준다. <이미지의 배반>은 다섯 차례 복제되었고, 한 번은 대형 간판으로 제작되었다. <빛의 제국>(1952)은 열여섯 점의 유화와 일곱 점의 과슈 작품으로 복제되었으며, 1965년에 마그리트는 사베나 항공사의 광고 ‘하늘-새’를 위해 그의 <대가족>(1963)을 표절하기도 했다.
마그리트는 1925년에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특유의 이미지에 도달했다. 데 키리코로부터 받은 영향 가운데 각각의 이미지들이 서술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 감각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그는 양식과 이미지, 형태와 내용, 감각과 의미에 있어서 본능적으로 핵심적인 문제에 도달했는데, 이는 미적 문제나 양식의 문제가 아닌 존재 방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점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이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아니었다.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 수수께끼 같은 상황, 예기치 못한 만남 등과 같은 주제를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인 대중적 양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자주 머리에 떠오르지만 명학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으며, 순수한 시각적 충격을 자아내는 솜씨로 원근법에 혼란을 일으키도록 조작하면서 초현실주의자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한 그는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에 그럴 듯한 현실감을 부여할 수 있었다. 도상에 있어서도 그가 집착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일상적이나 부조리한 배경 속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는 실재 풍경, 실내와 실외, 낮과 밤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주제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마그리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초현실주의자들조차 그의 회화 양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그의 사실주의 양식이 자동주의에 의한 초현실주의자 회화 양식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마그리트가 1927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 자동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브르통이 마그리트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것은 1930년에서였다.
마그리트의 목적은 논리와 회화가 보여주는 것과의 대립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회화는 구상이지만, 미술에 있어서의 재현의 법칙을 끊임없이 공격한다. 관람자는 심사숙고하는 태도를 통해서만 그의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게임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접근한다고 해서 수수께끼를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성이 단지 그 수수께끼를 감지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그의 이미지는 철저하게 시적이다.
마그리트는 1932년과 1936년 두 번에 걸쳐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그의 사회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브뤼셀에서 지내면서 언제 있을지 모르는 공습과 자신의 ‘퇴폐한’ 작품에 대한 공격을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이것이 1945년 이후 그의 회화 양식을 바꾸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르누아르 양식의 밝고 아이러니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회화가 거칠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실존주의 인생관을 표현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어울리면서 초현실주의에 대해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유일한 운동”이라고 했다. 그는 브르통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934년경부터 상상적인 초현실주의적 구성물을 제작함으로써 현실세계로부터 너무 동떨어지게 되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5년에는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끊고 모델과 실재의 재현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10년 가까이 실용적인 지각 현상학에 매달렸는데, 이는 매우 다른 맥락이지만 인상주의자들이 한 세기 전에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각에 대한 전통적이고 익숙한 관습과 상관없이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실재를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특히 멀리서 볼 때처럼 머리와 인물상을 작게 만듦으로써 절대적 크기와 관련해 조형물에 ‘거리’ 개념을 도입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을 때 사물의 모습에 변화를 일으키는 시각법칙에 대한 실제적 탐구는 1940년대를 거쳐 1947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관람자가 그의 조형물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든 상관없이 5m나 10m, 또는 그 이상으로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글에 따르면 “자코메티는 조각상에 어떤 상상의 불가분한 공간을 돌려주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인간을 보이는 대로 조형화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 되고자 했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자코메티의 각각의 형상은 “하나의 상호 주관적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거리를 유지한 채 나타나는 인간을 보여준다. 인간은 미리 존재해서 나중에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실존하는 본질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코메티의 형상이 지닌 고립성과 부동성은 상호주관성 자체가 숨쉬기 힘든 분리나 고독, 심지어 공포로 보였다.
자코메티는 1947~51년경에 길게 늘어지고 해골같이 앙상한 인물상 양식을 전개했으며 실존주의 인생관을 표현한 이런 조형물로 유명해졌다. 이런 인물상들에서 조형물은 하나의 미적 현존, 즉 지각된 실재와 동일한 미적 실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한 이 성숙된 양식은 그가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시기를 거치고 난 이후 현상계를 지각하는 보다 새롭고 직접적인 방법을 탐구한 결과였다.
망상의 그림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
데 키리코와 카르라의 형이상학 회화의 영향을 받은 살바도르 달리는 라파엘로전파와 18세기 이탈리아계 프랑스 화가 메소니에와 같은 19세기 화가들의 섬세한 사실주의를 동시에 추종했다.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숨겨진 삶』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격렬한 히스테리 발작으로 점철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마드리드 미술학교에서 정학을 받았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잠시 감옥에 보내졌으며, 1926년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달리는 전 생애에 걸쳐서 기괴함을 추구했고 과대 망상적인 과시욕을 보여주었으며, 이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 기교를 받아들여 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변형시켰으며 이를 ‘편집증적 비평 방법’으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편집증 증상의 일종인 망상을 개발해야 하며 동시에 이성과 의지의 조절이 의도적으로 중지되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미술이나 시의 창작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어야 한다. 그는 종종 라파엘로전파와 연결되는 섬세한 방법을 사용하여 환각적 현실감을 창출해냈는데, 이것은 때때로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로 불리었으며 그가 묘사한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 이미지의 기이하고 환각적인 측면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반쯤 열린 서랍이 달려 있는 사람의 형상, 왁스로 만들어져 햇빛에 녹은 것처럼 구부러지고 늘어진 시계와 같은 이미지들을 선호하여 반복했다. 이런 회화는 카탈루냐 지방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이런 환각적 이미지와 미술적 사실주의가 이루는 대조를 통해 그의 회화는 미술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자동주의의 주된 방식으로 사진을 제안하면서 자신의 유화의 목표를 손으로 그려낸 사진으로 설명했다.
달리는 1940년에 미국으로 가서 15년 동안 체류하다가 1955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작품 활동보다는 주로 자신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했다.
비현실적인 꿈의 풍경을 그린 이브 탕기
이브 탕기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3년 폴 기욤의 갤러리에서 조르조 데 키리코의 회화를 본 후 깊은 감동을 받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데 키리코의 공간 표현기법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1927년부터 꿈과 같은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브르통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가하고 선언문에도 서명했다.
탕기의 회화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수중공간 속에서 형상, 손, 그리고 구성물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들은 호앙 미로의 회화에 등장하는 것들과 유사한 선 그리고 형상들이 주를 이룬다. 마송과 마찬가지로 탕기 또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를 통해 혼돈스럽거나 꿈처럼 보이는 개인적 이미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그의 드로잉에서 뚜렷하게 나타났으나 캔버스 작업에서는 서서히 진행되었다.
인형과 마네킹을 사용한 한스 벨머
폴란드 예술가 한스 벨머는 인형과 마네킹을 사용하면서 일대 변화를 겪었다. 그는 자신의 강박관념에 초점을 맞춘 인형의 다양한 변형에 몰두했다. 그의 인형 대부분은 프로이트가 묘사한 ‘두려운 낯설음’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다양한 무대를 배경으로 그가 찍은 사진으로 소개되었다. 이는 그가 그의 작품을 다양한 자세로 조작하여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은 비의도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런 반복으로 인해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을 그 무엇을 숙명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벨머의 작품은 성욕과 사진조작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작품 속의 모델이 확실히 사춘기 이전의 소녀이며 작품의 구조상 그 소녀가 성적인 것과 관련 있다는 점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도착적인 인성과 물신적인 도착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동시에 남성적 잣대와 여성 신체의 대상화에 대한 문제를 일으켰다. 인형 자체로도 이런 경험과 연계될 수밖에 없었지만 벨머 자신 또한 관람자 앞에 인형이 등장하는 방식이 꿈이나 브르통이 말한 객관적 우연 작용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사진에서 그는 광학적으로 중복하기를 통해 인형을 거세 공포의 표상으로 제시했다. 발기한 여성의 형상은 남근 모습으로 다시 중복 재연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경증 환자는 객관적 우연에서 통상적으로 실현되어버리고 말 불길한 예감을 갖는다.
벨머는 베를린의 카이저 프리드리히미술관에서 알브레히트 뒤러 시대에 만들어진 관절인형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인형에 관절을 갖추어주었다. 벨머의 주요 아이디어는 신체를 에로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몸은 그 부조리한 왜곡 속에서도 늘 기본적인 성적 패턴을 반영한다. 그의 작품은 기존의 여성 이미지에 대한 풍자도 아니었으며, 페미니즘적 비평도 아니었다.
작품
<농장 The Farm>(1921~22)은 미로가 가장 관심을 보인 사물과 생물을 목록화한 것으로 후기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상징의 원형이다. 새가 앉아 있는 횃대의 역할을 하는 사다리는 그의 강박적인 기호 중 하나인 탈출의 사다리로 진전된다. <탈출의 사다리 The Ladder of Escape>에서 보듯 사다리는 촉각과 비촉각을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그는 별과 동물, 카탈루냐 지방 농부의 모자, 파이프, 남성을 상징하는 관 모양의 형태와 여성의 성적 상징인 아몬드 형태 등의 기호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기호들은 극단적으로 간결해지고 제스처가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을 결정했다. 그는 얇게 펴 바른 물감 위에 장대한 서체의 우아함을 지닌 최소의 기호들을 그려 넣었다.
<카탈루냐 풍경(사냥꾼) Catalan Landscape(The Hunter)>(1923~24)은 독창적인 유머를 보여준 것으로 수수께끼 같은 몇몇 기호는 이해가 가능하지만 비밀에 싸인 것들도 있다. 특히 생각을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낸 경우는 비교적 이해가 수월하다. 짙은 수염, 날카로운 눈, 주의 깊게 기울이고 있는 큰 귀는 사냥꾼의 수염 난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오른팔은 죽은 새를 들고 있고 왼팔은 기다란 원추형을 들고 있는데, 끝에서 화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총인 듯하다. 삼각형 물고기에 꼬리지느러미가 달려 있으며, 오른편 토끼가 내민 혀는 날개 달린 곤충을 향해 뻗어 있다. 오른편 하단에는 카탈루냐 전통 민속무용인 사르다나Sardana의 첫 네 글자가 적혀 있다. 이 모든 것을 햇빛 가득한 겨울 하늘과 따뜻한 적도 사이에 살고 있는 카탈루냐 농민의 목가적 즐거움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작품은 미로가 독자적인 기호언어를 창조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준 예라 하겠다. 전체의 구성을 보완하는 것이 배경의 통일성이다.
<물고기들의 전투>(1926)에서 우리는 자동주의 선에 의한 물고기들이 마주한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열정을 동물적 폭력으로 은유한 회화이다. 마송의 회화에는 선들이 뒤섞이는 것이 보통이어서 일견에 우연에 의해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도 통제가 없는 임의적인 창작과정으로 인해 관람자의 눈앞에서 구성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화면의 질감은 모래 뿌리기로 인해 더욱 고조되었다. 물감 대신 풀을 이용하여 캔버스 위에 자동주의 그림을 그린 후 채색된 모래를 뿌려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방식은 지속되었다. 마송은 1929년에 브르통과 말다툼한 뒤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되었다.
마그리트는 장난기 있는 해학성으로 관람자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이미지의 배반>(1929)에서의 파이프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는 처음에 부조리해보이지만 틀린 문장이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환영인 회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과 읽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동요는 관례상 분리된 이 두 가지 작용이 동시 발생한 결과이다. 파이프 연작은 마그리트의 언어-회화word-picture 중 하나다.
마그리트의 회화 대부분에는 파이프 연작에서처럼 동일한 종류의 재치문답이 등장한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 반드시 물리적 법칙에 따라 묘사되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물은 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믿었다. 때때로 그는 생물체와 무생물체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관람자를 놀라게 한다. <붉은 모델 II>(1937)에서 보듯 한 쌍의 장화가 사람의 발로 바뀐다. <투시도: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1949)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회화를 모사하면서 원래 인물이 있던 자리에 관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는 당시 회화 속에 있던 모델이 지금은 죽었기 때문이다
달리와 브르통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매달린 공 Suspended Ball>(1930~31)은 새장처럼 생긴 사각형 틀 안에 모로 누운 쐐기와, 사각형 틀에 매달린 공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의도적으로 불만족스럽고 불안정한 운동을 만들어냈다. 공은 아래의 초승달 모양의 쐐기 위에서 애무하듯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암암리에 사용한 성적 표현과 일치했다. 쐐기와 공에 대한 성적 정체성은 불확정적인데 여성의 외음부처럼 생긴 쐐기는 남근 모양의 칼과 같으며, 남성의 역할을 담당하는 공의 쪼개진 자국은 보기에 따라서 여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태를 흩트리기보다는 범주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경계를 제거한 무정형은 범주를 없앤다는 점에서 매우 구조적이다.
<새벽 4시의 궁전>(1932~33)은 가장 문학적이고 복잡한 조형물로 작은 규모의 구성물이다. 이것은 나무 자투리 및 천사와 현을 조립한 것으로 자코메티가 사랑에 빠진 여인과 몇 달을 지낸 경험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파편들을 섬뜩하게 조합하기도 했는데, <목이 잘린 여인>(1932), <허공을 붙잡은 손, 혹은 보이지 않는 오브제>(1934) 등이 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육체적 욕망으로 축소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각자의 성기를 의인화했다. 폭력적 표현으로 나타난 <목이 잘린 여인>에서 커다란 곤충 같은 여성은 죽어서 바닥에 방치되어 있다. 지나치게 길고 가는 팔다리는 거미 같으며, 커다란 척추와 흉곽은 딱정벌레의 껍질을 상기하게 하며, 작은 머리는 벌레를 연상시킨다. 가는 허리 위로 곡선을 그리는 젖가슴만이 여성의 몸이다.
달리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기억의 영속성>(1931)에서도 환영적인 사물들이 황량한 해변을 가로질러 배치되어 있다. 배경의 길게 뻗은 해안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축 늘어진 시계는 훗날 달리를 대표하는 특징적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데 키리코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상자 위의 시계는 개미들로 뒤덮였는데, 달리는 개미를 죽음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는 죽은 도마뱀의 부패한 몸을 소멸시키는 개미떼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단 중앙의 성적 연관성이 짙은 얼굴 형상은 앞서 그린 <위대한 수음자>(1929)에서 기인하며, 바위 위에 걸쳐진 이것은 달리의 자화상이자 바위 무더기의 윤곽에 기초하고 있다. 달리의 회화에 등장하는 구성물은 물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색과 일관성도 파괴되어 있다.
달리는 <기억의 영속성>의 기원에 관해 설명했다. 스페인 북부의 리가트 항구 마을 근처의 연안 풍경을 그리던 시절에 그는 그 풍경이 “어떤 놀라운 이미지와 아이디어의 배경이 될 것”임을 간파했으나 좀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오후 아내 갈라가 친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고, 그는 두통에 시달리며 집안에 남아 있었다. 갈라는 엘뤼아르의 아내였으나 달리와 사랑에 빠져 그의 아내가 되었다. 달리는 잘 숙성된 까망베르 치즈로 식사를 마치고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편두통으로 인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급히 팔레트를 준비하고 미친놈처럼 그림을 그려댔지. 두 시간 뒤 갈라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회화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어!”라고 회상했다.
작품의 원제는 <부드러운 시계>였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달리는 ‘극도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그려낼 방법에 몰두해 있었다. 이에 대한 집착은 성적 문제와 관련이 있고, 많은 평론가들은 발기불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했다. 남성 성기 모양의 죽은 올리브나무 그루터기에서 튀어나온 가지 위에 걸려 축 늘어진 시계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게다가 또 다른 시계는 땅 위에 떨어진, 입도 없이 해괴하게 생긴 머리 위에 걸쳐져 있다. 그는 극도의 부드러움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심리 상태와 관련시켰다.
탕기의 회화는 매우 개성적이다. 반은 유기적이고 반은 기계적인 모습이지만 관람자의 눈에는 결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정형의 사물이나 존재가 사는 기괴한 추상풍경을 그렸다. <숙녀의 부재>(1942)에서 보듯 그는 바다괴물과 선사 시대의 유물, 혹은 암석 등 명확하지 않은 물체의 모습을 비현실적인 꿈의 풍경 같은 해변 위에 흩어놓았다. 그리고 다른 초현실주의자들보다 성공적으로 꿈의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어 현실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을 표현했다. 상징주의나 심리학적 장식이 없는 고요하고 시간을 초월한 꿈의 풍경화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의 몽상적인 면을 자연발생적으로 가장 잘 나타냈다. 그가 묘사하는 세계는 달리의 세계와 유사하지만, 달리가 정밀한 환상을 통해 개인적 강박관념을 표현하는 데 반해 탕기는 마술적인 냉랭한 분위기와 잠재적인 위협을 통해 초연하고 냉정한 면을 보여준다. 관람자는 악몽 같은 환상으로 나타나는 그의 회화에서 막연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의 회화의 특징은 우아한 것과 추한 것을 별난 아름다움으로 전환시키는 점이다.
<인형>(1932/45)은 목재에 그림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씌우고 양말과 신발을 신긴 작품으로 초현실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에 속하는 가학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분위기의 성적 망상에 대한 기록이다. 뒤틀린 토르소들이 외설스럽게 노출된 채 삼위일체를 이룬다. 성폭력의 환상을 여과 없이 드러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