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7
Luminism(1967), Optical art, Kinetic art
루미니즘은 선의 리듬과 색의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낸 프란티셰크 쿠프카(1871-1957)를 선구자로 꼽을 수 있고, 그 후 빛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심이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는 데 더 나아가서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미술의 매체로 간주하게 했다. 루미니즘과 옵아트 그리고 키네틱 아트는 구성주의를 기반으로 창안된 장르들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오르피즘에서 이런 가능성들이 예고되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에 로베르 들로네와 쿠프카의 작품을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서의 새로운 구조 회화로 이해하고 오르피즘Orphism(혹은 동시주의)이란 명칭으로 부르면서 입체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들로네는 오르피즘의 기원을 입체주의보다는 오히려 인상주의와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로 파악했다. 색의 구성으로 음악적 소리와 같이 공명하는 비구상화를 그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표현적 추상을 이끌어낸 19세기 말의 주요 개념 중 하나였으며, 이런 경향이 쿠프카의 회화에서 결실을 맺었다. 운동의 묘사와 에티엔 쥘 마레의 고속연속촬영법에 관심을 기울인 쿠프카는 비재현적 추상 형태로 운동을 암시하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회화에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선의 리듬과 색의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를 창조했다. 그는 일찍이 1909년 음악의 법칙에 따른 운동과 연속운동을 묘사한 파스텔화와 소묘 연작을 내놓았다.
Optical art
광학, 혹은 망막에 기반을 두는 옵아트는 옵티컬 아트Optical art를 줄인 용어로 1965년 뉴욕의 모마에서 열린 ‘감응하는 눈 Responsive Eye’ 전시회에 관한 『타임』지의 비평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평행선이나 바둑판무늬, 동심원 같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상태를 유발했다. 그 결과 관람자는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고 한 부분을 오래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옵아트는 지각적 모호함과 최소한의 시각적 장치를 이용해 시각에 충격과 혼란을 줌으로써 작품이 진동하거나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환각적 운동을 창출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시각적 변칙에 관한 예술적 탐구와 지각심리학에 관한 과학적 탐구 사이의 경계는 매우 미미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옵아트의 목적은 망막에 매우 강력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관람자의 생리적 시각반응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팝아트의 상업주의와 지나친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등장한 옵아트 대부분의 작품은 지각 심리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잘 알려진 착시현상이나 시각적 놀이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옵아트 예술가들은 화면이 진동하거나 뒤틀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유발하기 위해 크기, 형태, 방향, 명암, 많은 연속 단위들 등을 체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팽창과 확대 등과 같은 착시현상을 야기하기 위해 주기적 패턴 체계 속에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대, 혹은 축소시키기도 한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또 다른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패턴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켜 모호하고 대립적인 착시를 유발하는 걸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이다. 패턴이 전면에 걸쳐 그려진 화면에서 형태들은 흔들리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무한히 후퇴하는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종종 가상의 비현실적 공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Kinetic art
조화를 이룬 색은 느린 운동을, 조화되지 않는 색은 급격한 운동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운동의 표현에 대한 들로네의 생각은 키네틱아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런 성향은 프랑수아 모를레(1926~)의 작품에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추상화를 그리는 데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그는 1952년에 <회화>라는 단순한 제목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은 흰색 바탕에 녹색 줄무늬 수평-수직 지그재그가 전면적으로 가득 채워진 것이었다.
희랍어 키네시스kinesis(운동성), 키네티코스kinetikos(움직임)에서 유래한 키네틱아트Kinetic art란 운동을 수반하는 미술을 말한다. 키네틱아트는 운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 즉 작품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의 운동을 나타내는 미술로 미술품 자체가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키네틱아트 특유의 효과는 작품 앞에서 움직이는 관람자에 의해서, 혹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조작하는 관람자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 키네틱아트라는 명칭이 비평적 분류 기준으로서 첨가되고 승인된 것은 1950년대였다. 그때부터 이 명칭은 광범위한 양식과 기법을 망라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운동을 처음 사용한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등받이 없는 걸상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자전거 바퀴>는 반미술의 원칙을 보여주기 위한 레디메이드 중 하나였다. 뒤샹은 또한 1920년대 초 뉴욕에서 <회전 부조>와 <회전 반구>를 제작했으며, 그것들은 회전할 때 양감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그는 동심원들이 그려진 평편한 원반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입체적 외형을 띤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움직이는 물체가 급격한 변화 속에 전혀 다른 물체로 보이는 걸 입증한 것이다.
광선회화를 창조한 라슬로 모홀리 나기
콜라주와 포토몽타주(콜라주의 변형) 작품을 제작하여 추상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한 헝가리계 미국 예술가 라슬로 모홀리 나기(1895~1946)는 광선변조기를 제작하는 데 기술자와 공학가의 도움을 받아 1930년에야 가동이 가능했다. 그는 “그 장치는 운동과 내가 거의 마술이라고 생각한 빛과 그림자놀이의 질서정연함에서 너무도 놀라웠다”고 했다. 이후 예술가들은 기술자와 공학가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모홀리 나기는 바우하우스에서 요제프 알베르스와 더불어서 기초과정을 이끌면서 회화와 조형물뿐 아니라 실험영화, 연극, 산업디자인, 사진, 도서와 전시를 위한 타이포그래피에서도 다재다능함을 발휘했다. 그는 구성주의에서 가장 실험성이 강했으며, 특히 미술에 광선, 운동, 사진,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영화, 연극, 오페라 제작에도 참여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되고, 나치를 피해 1935년에 런던으로 가서 「서클 선언문」으로 대표되는 구성주의 그룹에 합류한 그는 광선회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미술품에 광선, 운동, 사진, 영화,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3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막 설립된 시카고 뉴바우하우스의 학장이 되었다. 학장직을 그로피우스에게 요청했으나 그가 하버드대학의 건축학 과장으로 가는 바람에 모홀리 나기가 학장이 된 것이다. 그는 이전의 바우하우스에서처럼 기초과정에서 재료, 도구, 구성, 재현을 분석하는 한편 새롭게 과학, 사진, 영화, 디스플레이, 광고를 강조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새로운 유형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예술가나 장인이 아니라 디자이너라고 말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새로운 유형의 디자이너란 과학기술 분야와 전문교육을 인간의 근본적인 수요와 결합시킬 수 있는 사람을 의미했다. 1944년에 인스티튜트 오브 디자인으로 다시 명칭을 바꾼 이 학교는 현재 일리노이즈 공과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새로운 재료와 과학기술을 차용한 훌리오 레 파르크
2차 세계대전 후 광선투사기는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아르헨티나 실험예술가 훌리오 레 파르크(1928~)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광선을 투사하기 위해 회전하거나 곡면을 지닌 거울과 반사기, 편광, 렌즈와 프리즘을 이용한 굴절 조절, 막힌 부조 표면 등을 이용한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레 파르크는 1958년에 파리로 가서 한동안 빅토르 바자렐리 밑에서 작업한 후 1960년 시각예술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프랑수아 모를레, 장 피에르 바자렐리 이바랄 등이 구성원으로 참여한 시각예술연구회(GRAV)의 목적은 빛과 운동을 미적으로 다룬 것에 대한 연구로서 근대 산업재료를 미술의 용도로 이용하는 것에 관해 연구했다. 구성원들의 표현양식은 달랐지만, 미술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과학기술의 차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자극 이용, 전통 미적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레 파르크는 옵아트, 키네틱아트, 광선을 이용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예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과학의 원칙에 따라 작업하면서 작품에 대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시각예술연구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 제작을 선호했다. 그는 관람자의 주관적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자극에 따라 발생하는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각반응을 모색했다. 1960년경에 색과 광선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프리즘과 입방체를 사용해 모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했는데,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은 투명성과 반사광 측면에서 계산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부조도 제작했으며, 재료들의 다양한 표면 질감을 이용해 반사광을 얻었다.
광선 스펙터클로서의 광선 환경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된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나움 가보의 <광선 축제>(1929)였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1905~81)가 1938년에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다. 이 작품은 근대의 ‘소리와 광선’ 퍼포먼스의 효시가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루초 폰타나와 브루노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으로, 특히 오토 피네, 하인츠 마크, 귄터 위케르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다.
제로Zero Group은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오토 피네와 하인츠 마크가 결성한 것으로 두 사람 모두 키네틱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으며, 뒤에 귄터 위케르가 가세했다. 제로 그룹은 새로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침묵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이런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순수 색과 빛의 효과를 위해 구체적 형상과 형태를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제로 그룹의 주장은 그룹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의 정기간행물 『제로』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미술에 광선을 이용한 실험예술가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이 사용한 기법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선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으로, 광선이 매우 환상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한마디로 규정해서 설명할 수 없다.
고밀도의 강력한 광선 빔을 산출하는 레이저LASER를 사용함으로써 광선 환경은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레이저라는 말은 방사의 유도방출에 의한 빛의 증폭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의 머릿글자의 집합에 의한 합성어이다. 레이저의 중요한 성질은 간섭성을 가지며 단색성을 나타내고, 강력한 가는 빛을 방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저빔은 처음에는 군대에서 사용되었으나, 농축된 가는 빛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나가는 특성 때문에 예술가들이 재료로 선호하게 되었다. 레이저빔이 처음 사용된 때는 1965년이었고, 그때부터 설치, 거대한 규모의 환경미술, 그리고 홀로그래피holography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사용되었다. 홀로그래피라는 용어는 전자현미경의 분해 능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헝가리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 데니스 가보르(1900~79)가 고안해낸 영상방법이다. 가보르는 홀로그래피의 발견과 이론적 연구로 197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종래의 사진이 물체의 밝고 어두운 면의 분포만을 기록한 데 반해 홀로그래피는 파동으로 빛이 지닌 모든 정보, 즉 진폭과 위상을 동시에 축적하고 재생한다.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독특한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로서의 홀로그래피는 레이저 입체영상으로 불리며, 사물을 깊이, 관점, 시차적 영상의 재현, 모양, 크기 컬러 안에서 실물과 똑같이 그려내는 첨단 영상매체로서 레이저 개발과 더불어서 실물을 재생산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발명되었다. 레이저를 포함한 입체영상의 발명은 현대의 테크놀로지 분야에 그 사용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표현방식을 넓혀주는, 표현 가능성을 무한정 확장시켜주는 적극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첨단 영상매체의 멀티미디어 시스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정보전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이차원 평면 미디어에서 삼차원 입체 미디어로의 이행은 보다 필요한 많은 정보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한 오토 피네
뮌헨과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1948~53)한 후 뒤셀도르프의 패션 인스티튜트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쾰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1952~57)한 오토 피네(1928~)는 주로 모노크롬 회화를 제작했지만 차폐장치를 사용해 광선을 조절함으로써 화면 위에 보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반사경, 일광 반사 신호기 등을 이용하여 광선을 연구했다. 피네는 야외에 기념비적인 빛의 투사물을 만드는 것을 야망으로 삼았다. “나의 가장 큰 꿈은 광막한 밤하늘에 빛을 투사해 빛과 우주가 만남에 따라 우주를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에게 빛은 리듬과 운동의 양식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것은 예술가의 재량에 맡겨진 모든 요소 가운데 가장 비물질화된 것이다. 빛은 그 자체 비물질화된 것일 뿐만 아니라 물질을 비물질화시키는 효과도 가진다. 피네는 1964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학에 교환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고, 1972년에 MIT공과대학 환경미술부 교수가 되었다.
레이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폴 얼스
미국의 작곡가이면서 실험예술가 폴 얼스(1934~)는 레이저빔이 흩어지지 않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동일한 힘으로 뻗어나갈 뿐만 아니라 빛으로 에너지와 열을 생성하며, 생생하고 진동하는 레이저의 특성을 십분 활용했다.
20세기 후반에 레이저를 통한 아름다움의 창조가 예술가들의 분별력 있는 최상의 도전 목표가 되었다. 홀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매우 섬세한 도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가 창출해낸 것들 중에서 가장 섬세한 도구이다. 레이저는 정제되고 명료한 빛을 발하는 기술과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간섭성과 직접성을 가지도록 만들어졌다. 홀로그래피는 예술 작업에 있어서 더 많은 기술이 요구된다. 예술가들은 공간구성의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기술적 이해는 물론 직접 제작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섬세히 다룰 수 있는 장인적 기능이 요구된다. 홀로그래피는 미래의 창window of the future으로 불린다. 그것은 화가의 캔버스와 같은 역할 속에서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옵아트의 선구자 요제프 알베르스
요제프 알베르스(1888~1976)는 색이 얼마나 착각하기 쉬운지, 어떻게 다른 색들과 같아 보이는지, 어떻게 세 가지 색이 두 가지 색으로, 혹은 반대로 네 가지 색으로 보이는지를 실험했다. 1920년에 바우하우스에 입학해 특히 유리회화와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에 몰두했으며, 1925년에는 바우하우스 교사가 된 그는 미술교육 과정에서 미술이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형태의 요소와 구도의 본질적 특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했으며, 미술은 이성적으로 통제된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 재현적 묘사를 피했으며 “회화는 재현이 아니라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절제된 형식을 꾀하고 회화의 수단과 효과 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 즉흥적 경향이나 개성적 표현을 기계와 같은 개성 없는 정밀함으로 대체시킨 그의 회화는 기하학적 추상이나 구성주의로 분류된다.
바우하우스가 폐교하자 알베르스는 193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부터 블랙마운틴 칼리지에 가르쳤다. 그는 드로잉 수업에서 시각화의 기법을 강조하고 디자인 수업에서는 비례, 등차수열, 등비수열, 황금비율, 공간연구에 초점을 두었다. 그 유명한 색채 수업에서는 물감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된 종이를 가지고 색채를 분석했다. 그는 색채 심화과정으로서만 회화를 가르쳤으며, 그것도 대부분 수채화만 가르쳤다. 모홀리 나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론을 통해 알베르스가 주장한 것은 “추상화는 인간 정신의 본질적 기능”이며, 이를 위해서는 “눈과 손을 단련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모홀리 나기와는 달리 그는 모든 사물에는 형태가 있고, 모든 형태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미술은 형태의 근본 법칙에 대한 지식과 응용에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태, 즉 조형Gestaltung(게슈탈퉁)에 관한 오랜 관심을 통해 새롭게 시작된 시각에 관한 연구를 완성했다. 알베르스는 1949년까지 블랙마운틴 칼리지에 재직하고 1960년대에는 예일대학에서 가르쳤다.
복수 제작을 추구한 빅토르 바자렐리
부다페스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1929년에 ‘부다페스트의 바우하우스’로 불린 알렉산데르 보르트니크의 뮈헤이아카데미에서 모홀리 나기로부터 바우하우스의 전통 교육을 받은 헝가리계 프랑스 화가 빅토르 바자렐리(1908~97)는 수공적, 혹은 산업적 제작원리에 따라 동등한 중복제작을 허용했다. 이런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모홀리 나기가 1925년에 산업적 가능성을 고려해 미술 보급 방식을 제안하면서 “최근의 기술은 원작을 대량으로 유포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바자렐리는 1930년에 파리로 가서 정착하고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상업예술가로 활동했으나, 곧 자신의 작업에 전념했다. 1930년대에 그는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1940년대에 이르러 기하학적 형태와 그에 상호작용하는 생기 넘치는 색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독창적인 양식, 즉 옵아트로 발전하게 될 시각적 모호함을 점차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양식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러 더욱 성숙해졌다. 이때 그는 더 밝고, 더 역동적인 색을 사용하여 시각적 환각을 통한 움직임의 형태를 표현했다.
바자렐리는 망막에 자극을 주는 중요성에 관해 “이제는 더 이상 심장이 아니라 망막에 모든 것이 달렸다. 재담꾼이 임상심리학의 주인공이 된다. 흑백의 예리한 대조, 보색의 견디기 힘든 떨림, 율동적 망상과 교대하는 구조의 반짝임, 조형적 구성요소의 시각적 이동효과.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놀라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극하고 또 우리에게서 야만적 즐거움을 끌어내려는, 우리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이다”라고 했다.
파리의 응용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바자렐리의 아들 장 피에르 바자렐리 이바랄(1934~)은 신경향의 일원이었으며, 시각예술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허상적인 운동의 느낌이나 엄격하게 제한된 깊이 내에서 다가오고 물러나는 형태들의 모호한 패턴을 창출하기 위해 주로 무아레 패턴에서 흑백의 사용에 집중했다.
신경향Nouvelle Tendance은 1960년대 초반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표면화되고 있던 매우 다양한 구성주의적 경향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명칭으로 표현 양식은 다를지라도 공통적으로 미술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과학의 기술의 차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운동과 같은 직접적 자극 이용, 전통적인 미학적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운동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시각예술연구회가 신경향의 이념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신경향의 이념을 활발하게 전개시킨 아르테 프로그라마타Arte Programmata란 명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키네틱아트에 대해 붙여졌고, 프로그램 중에 무작위적 요소가 개입될 수도 있으나 대체로 모터로 작동되는 일련의 일정한 운동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일컬었다.
물질을 에너지로 변형시킨 헤수스 라파엘 소토
베네수엘라의 예술가 헤수스 라파엘 소토Jesus Rafael Soto(1923~)는 1950년에 파리로 가기 전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회화를 도판으로 접하고 영향을 받았으나 피트 몬드리안과 구성주의자들의 작품을 본 뒤에는 시각적 현상과 옵아트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 초에 수열, 반복, 연속과 같은 연작을 통해 단순하고 획일적인 공업재료들을 엄격한 모듈체계를 좇아 조립하는 시리얼아트Serial Art를 실험했다. 미니멀아트에 속하는 시리얼아트는 산업재료를 단순하고 획일적인 구성요소로 모듈module 체계에 따라 조립하는 것을 말한다. 재료의 부분들이 방해받지 않고 연속적으로 배열되는 시리얼아트의 양식을 헤수스 라파엘 소토, 칼 안드레 등이 사용했다.
소토는 이전부터 플렉시글라스 위에 이미지를 중첩시켜 부유하면서 진동하는 형태를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운동’ 전시회 직후에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간단한 방식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규칙적인 줄무늬 배경만 있으면 관람자가 좌우로 움직일 때 배경에 투사되는 형태의 윤곽을 광학적으로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소토는 1957년에 그때까지 사용하던 기하학적 형식들을 거의 버리고 제스처적인 추상을 모방한 진동하는 와이어 드로잉을 시작했으며, 이것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전체적 패턴을 만드는 데 능통한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
미래주의 회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런던 태생의 영국 화가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1931~)는 1960년에 과학자들이 지각작용의 연구를 위해 사용하는 도표를 개작하는 작업을 통해 강렬한 흑백회화로 옵아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은 거의 동일한 단위들이 반복되는 격자에 바탕을 둔다. 그녀는 구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후기모더니즘의 신조, 즉 구성 내의 부분들이 크게 구분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형태가 바탕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치밀한 계산 하에 그녀가 다양하게 제작한 형태와 색의 총합은 관람자를 포위하는 착시를 일으켰는데, 이는 관람자의 지각능력을 사로잡지만 결국에는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어느 모로 보나 심리적 변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과학적 도형과 같은 정확함과 필연성을 지녔으며, 이런 것은 실제로 과학적 도표와 같은 정확함과 정밀함을 요하는 세밀한 밑그림이나 지시사항에 따라 조수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시각적 자극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작품 패턴이 관람자의 눈을 현혹시키고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정확함 때문이다.
모빌을 도입한 알렉산더 캘더
키네틱아트의 선구자 알렉산더 스터링 캘더Alexander Stirling Calder(1898~1976)는 1923년에 뉴욕의 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1926~36년에는 주로 파리에 체류하면서 몬드리안, 미로, 아르프, 뒤샹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그는 1927년에 작업실에서 철사, 나무 조각, 종이, 가죽 등 여러 가지 재료들로 제작한 서커스로 매주 사흘 동안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매우 즐거워했다. 그들 가운데는 레제, 르 코르뷔지에, 몬드리안도 있었다.
실제 운동을 끌어들여 만드는 구조물 중 가장 단순한 유형은 동력을 가하지 않은 모빌Mobile인데 이는 1930년대 초 캘더에 의해 도입되었다. 뒤샹은 1932년 파리의 비뇽 갤러리에서 캘더가 전시한 손이나 동력을 이용한 키네틱 구조물을 지칭해 처음으로 모빌이란 말을 사용했다. 캘더는 1934년부터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동력에 의하지 않는 모빌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은 대체로 여러 모양의 채색된 금속판들을 가는 철사나 끈에 매달아 놓은 것들로 자체의 중력에 의해 미미한 대기의 흐름에도 흔들리며 운동에 의해 야기되는 다변적인 빛의 효과를 활용하도록 고안된 것들이었다. 그의 모빌은 검정색, 흰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칠해진 금속판으로 이뤄졌다.
모터를 동력원으로 사용한 폴 뷔리
코브라 그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벨기에의 화가 폴 뷔리(1922~)는 1953년에 움직이는 조형물을 제작하기 위해 회화를 포기했다. 그는 모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감추는 방법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키네틱 구조물들이 빠르게 움직이도록 제작된 반면 뷔리의 것은 매우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익살스럽고도 시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 규모가 작으며 실내 조형물의 성격을 띤다.
복잡한 키네틱 구조물을 제작한 장 탱글리
스위스의 예술가 장 탱글리(1925~91)의 사용 불가능한 기계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은 우스꽝스럽고 활기에 넘쳤다. 1939년에 음향효과를 내는 메타-기계 수력 터빈을 제작하면서부터 운동에 관한 실험을 시작한 탱글리는 뷔리와는 달리 동력원을 작품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그는 모터에 의한 운동에 의도적으로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냄비나 술잔 등과 같은 물체를 때림으로써 음향효과를 내는 움직이는 구조물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기계시대와 미술 그 자체를 조롱하는 다다의 전통에 속했다.
작품
모홀리 나기는 기술자와 공학가의 도움을 받아 <빛-공간 변조기>(1930)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움직이는 하나의 판, 그 위에 막대와 틀,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금속판과 금속격자로 구성되었으며, 모든 요소가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작동했다. 조명하는 환등기 불빛은 연마된 금속면에 반사되고, 또한 그것이 설치된 실내 벽면에 움직이는 그림자를 투영했다.
시각예술연구회의 두드러진 활동은 1966년 파리 시내의 길거리에서 펼쳐졌으며, 관람자들은 오브제와 더불어 즐기면서 당황스런 행보에 연루되도록 초대받았다.
제로 그룹의 일원인 귄터 위케르의 <빛과 어둠 사이>(1983)는 뒤샹의 <회전부조>(1935)를 상기시킨다.
오토 피네는 1960년대 말부터 전기 광선과 플렉시글라스로 오브제를 만들어 그것을 헬륨 조형물이라고 부르고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했다. 피네는 루미니즘과 다감각적인 환경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한 선구자이다.
폴 얼스는 오토 피네와 함께 스카이 오페라 <이카루스>(1983)를 제작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홀로그래피를 접한 네덜란드의 디자이너이면서 무대조명 전문가 루디 버카우트(~2008)는 커다란 크기의 시각 시스템을 이용하여 흰빛으로 보이는 단순한 흑백 전송 홀로그램, 보조적인 특별한 빔으로 흰빛을 분해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색들과 함께 놓이는 홀로그래피의 시각적 요소를 새롭게 사용하는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면서 추상으로부터 유기적 형태를 띤 구성으로 나아갔다. 그는 1982년 판 위에 색의 배치와 이미지 구성을 용이하게 해주는 홀로그래피 뷰파인더를 만들었다. 제작자의 공간-이미지 안에서 전송 상태를 보여주는 이 장치는 움직이는 점이 찍힌 사각판의 형태로 되어있으며, 상호 반응하는 구부러진 표면의 점으로 이루어진 윤곽선을 이용한 <델타웍>, <델타>, <델타 IV> 등과 같은 작품에 영감을 제공했다.
요제프 알베르스는 1950년에 시작해 오랫동안 연작으로 그린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연작은 치밀하게 계산된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극히 비슷한 색채 범위 내에서 미묘하게 변화시킨 색조들로 채색한 정사각형의 닮은꼴들을 중첩시킨 것이다. 앞서 칸딘스키가 보여준 것처럼 그는 인접한 색들이 서로 반응하여 팽창하거나 수축하고, 또 후퇴하거나 전진하는 경향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매우 유사한 색조의 색들이 병치되었을 때 제3의 색으로 보이게 된다는 시각현상을 활용했다.
바자렐리는 ‘시네티즘cinetisme’(혹은 아르 시네티크art cinetique)이란 용어를 적용한 작품들을 통해 시각적 모호함으로 움직이는 듯한 환영의 인상을 창출해내는 방법과 수단을 탐구하며, 이런 목적을 위해 나오고 들어가는 형태들을 서로 교차시키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나도록 했다. 이런 작품은 통상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이나 미적 경험이 아니라 지각의 불안을 통해 야기된 시각적 경험을 목적으로 한다.
소토는 늘 요소들의 변형, 고형 물질의 비물질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변형의 과정을 작품에 합성했다. <무제>(1959~60)에서 그는 관람자로 하여금 착시에 의해 순수한 선이 순수한 진동으로, 물질이 에너지로 변형되는 것을 보도록 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이 단순하고 평범하더라도 그것들이 결합될 때 산출하는 효과는 매우 신비롭고 복합적이라는 것이다.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는 옵아트 예술가들이 사용한 대부분의 기법에 정통했으며, 특히 크기나 형태를 미묘하게 변화시키거나 <흐름 Current>(1967)에서 보듯 연속적 단위를 배치하여 전체적 패턴을 만드는 데에도 능통했다. 또한 옵아트의 특징인 망막 효과를 추구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운동에 대한 환각적 환영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망막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일시적 안정감과 질서감을 가진 비교적 작은 영역에 눈을 고정시킴으로써 유발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각적 피로감이 빠르게 일어나면서 서로 충돌하는 패턴과 이차적 형태들이 나타나며, 이것들이 겹쳐져서 안정되고 판단 가능한 지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캘더의 모빌은 검정색, 흰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칠해진 금속판으로 이뤄졌다. 이런 금속판들은 막대에 매달려 있어 어느 방향으로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작품들을 ‘사차원의 드로잉’이라고 부르면서 1932년 뒤샹에게 보낸 편지에서 “몬드리안의 회화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몬드리안을 만나 크게 감화되었으며, 자신이 몬드리안식의 기하학적 추상에 운동을 도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품성과 미학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달랐는데, 희극적이며 환상적인 것을 즐긴 캘더의 익살스러움은 그의 대작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런 품성은 신지학에 심취한 몬드리안의 구원자 같은 진지함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폴 뷔리는 1959년경 표현적 목적 하에 운동을 도입한 복잡한 삼차원 구조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못 뭉치나 철사, 혹은 작은 나무못의 예기치 않는 운동에 부여한 신비로운 생명감이다.
장 탱글리는 1955년의 ‘운동’ 전시회에 참가하여 일련의 ‘메타-기계’의 선구적인 작품인 두 점의 <그림 그리는 기계>를 소개했다. 이 기계들은 계속해서 추상드로잉 패턴을 그려내며 미술품이란 고정되거나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작품에 부여된 가능성 내에서 그 자체로 창조적이고 지속되는 것이라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었다.
탱글리의 제작 의도를 가장 멋지게 반영한 작품은 1960년 뉴욕의 모마 정원에서 전시된 엄청난 자기파멸장치인 <뉴욕에 대한 경의 Hommage to New York>였다. 설치하는 데만 3주가 걸린 이 작품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파괴되지 못했지만, 소방당국이 출동해 소화기와 도끼로 진화할 때까지 전대미문의 구경거리를 보여주었다. 탱글리는 늘 자신이 고안해낸 괴상한 장치가 보여주는 묘기를 보면서 즐거워하며 그 속에서 자유를 누렸다. 그는 미술품을 예술가와 관람자가 함께 참여하는 눈높이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종종 자신의 작품을 중국의 불꽃놀이에 비유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전시회 개막일 밤 축제행사에서 실제로 불꽃놀이를 펼치기도 했다.
탱글리는 또한 움직이는 여러 개의 막대기를 층층이 쌓아 구성한 부조를 제작했으며 1960년대에는 보다 복잡한 키네틱 구조물을 제작했는데, 이런 구조물들 가운데 몇몇은 기계에 대한 역설적인 풍자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의 구조물 대부분 키네틱아트의 원리와 캘리포니아 주의 정크아트 화파, 특히 스탕키에비치 조형물의 영향을 결합시킨 폐품 구성물이었다. 그는 떠들썩한 유머를 조형물에 통합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