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 6

지난 강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다다는 이전의 아방가르드를 포함하여 모든 전통을 부인했고, 진지함을 인위적인 것이라며 배척했다. 다다는 논리적으로 스스로도 부인해야 했으므로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24년 시인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면서 다다는 종료된 것으로 보였으나, 시인 차라가 말한 다다의 ‘새로운 정신’은 1950년대에 네오다다에 의해서 그리고 1960년대에 플럭서스 운동을 통해서 삶과 예술이 하나라는 정신으로 다시 재생되었으며, 이런 정신은 20세기 후반에 지속되었다. 한편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정신을 계승했더라도 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재건하려는 당대의 정신과 일치하면서 새로운 긍정적인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우연과 자동주의를 예술에 도입한 것이다. 우연을 창조의 동력으로 간주하고 자동주의를 통해 잠재의식을 의식의 흐름으로 표현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뉴욕으로 도피하면서 초현실주의, 즉 우연과 자동주의를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이 받아들였으며, 특히 추상표현주의를 통해 초현실주의가 지속되었다. 돌이켜보면 다다는 해프닝과 퍼포먼스를 방법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두 장르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고, 본질에 대한 회의는 개념미술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미술 혹은 미술품 혹은 예술가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 것은 모더니즘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우연과 자동주의는 오늘날에도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에 사용되면서 그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두 가지 유형의 구성주의
구성주의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용어로 1920년대에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 구성주의 다른 하나는 국제 구성주의International Constructivism이다. 1921년 1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예술가들은 구축과 구성의 개념을 두고 오랜 토론을 거듭했으며, 그들이 도달한 합의는 구축이란 어떤 ‘물질이나 요소의 과잉’도 수반하지 않는 ‘과학적’ 방식이나 조직화에 근거를 둔다는 것으로 기호학적 용어로 말하면 ‘동기를 부여받은’ 기호인 것이다. 구성이 자의적인 것에 반해 구축은 동기를 부여받은 기호인 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은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보편적·객관적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그들은 순수주의자들과 달리 단순성ㆍ명료성ㆍ간결성에서 더 나아가 비재현적ㆍ비표현적ㆍ기하학적이거나 기하와 유사한 요소로 구성된 추상 구성을 지지했다. 그렇지만 구성주의가 비개성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보, 페프스너, 몬드리안, 조르주 반통게를로 등의 작품은 개인적이고 독특하다.

유럽 구성주의 단체의 최초 공식 선언은 1922년 5월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 진보예술가대회International Congree of Progressive Art에서 이뤄졌으며, 그때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시위를 벌였다. 이 대회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흩어진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통일을 다시 건립하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함을 증명하게 되었다.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대회의 조직운영자들이 금전적인 문제에 주로 관심을 두는 것에 반대하면서 ‘진보예술가’라는 용어를 규정하는 데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래서 결성된 것이 국제 구성주의 분파라는 독립적 단체였다. 1920년대에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으나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구성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지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파리는 러시아를 떠난 구성주의자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자들이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에 정착했다. 나움 가보, 가보의 형 앙투안 페프스너, 모홀리 나기, 그로피우스, 몬드리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데임 바버라 헵워스, 벤 니컬슨, 헨리 무어, 평론가 허버트 리드와 교류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는 생기지 않았다.

모터로 움직이는 최초의 키네틱 조형물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가보와 페프스너 형제는 러시아의 생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은 자신들의 독자적 구성주의를 유럽에 전파했다.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고, 페프스너는 이듬해 파리로 향했다. 가보는 베를린에서 10년 동안 체류했다. 가보는 1920년대 초에 플라스틱과 유리를 사용하여 순수 기하학적 평면들로 조형물을 구성했으며, 그 형태들은 서로 가로지르며 개방되고 외관상 가볍게 보였다. 그는 플라스틱을 최초로 사용한 조각가로도 알려졌다.

가보는 입체주의 이후 미술에서의 회생이 어렵다고 보고 구성주의를 미술 회생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에게 구성주의는 선, 색,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가 외부세계와 무관한 독자적 표현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구성주의는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 추상 미술을 아우르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조형물이 추상으로 불리는 데 찬성하지 않았다.

공리적 목적을 추구한 블라디미르 타틀린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병적으로 사람을 싫어하고 작업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은 불행한 그의 유년시절의 결과였다. 그는 18세에 선원이 되기 위해 가출했다. 많은 초기 드로잉이 항구와 어부들이었고, 그는 바다를 좋아했다. 타틀린과 말레비치 두 사람의 계속되는 경쟁은 여러 차례 몸싸움으로 끝난 적도 있었지만, 말레비치는 타틀린이 진정으로 존경하는 유일한 러시아인 동료였다. 비록 그를 불행에 빠뜨린 질투심이 극단까지 이르러 말레비치와 한 동네에 사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지만, 그는 비밀리에 말레비치의 회화와 개념에 접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편지와 글이 그가 타계한 후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타틀린은 자신의 작품에 관한 글 외에 말레비치에 관한 모든 참조할 만한 것에 푸른색 밑줄을 그어놓았다. 타틀린은 오랫동안 말리비치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35년 페트로그라드에서 있었던 말레비치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타틀린은 “나의 기계는 생명의 원리와 유기적 형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형태를 관찰함으로써 가장 미적인 형태가 가장 경제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재료를 구성하는 작업이 바로 미술인 것이다”라고 했다.

최초의 키네틱 조형물을 제작한 나움 가보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1890~1977)는 뮌헨대학에서 의학 및 자연과학,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며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 수업을 수강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코펜하겐, 스톡홀름, 오슬로로 갔으며, 오슬로에서 가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입체주의 특성과 후에 유럽 구성주의의 전조가 되는 기하학적 추상을 결합해 첫 번째 구조물을 제작했다. 가보는 1917년에 형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1920년에 공동으로 ‘사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문은 타틀린이 이끄는 생산주의자 그룹에 대립하는 유럽 구성주의의 기초 원리를 제시했다. 그는 ‘사실주의 선언문’을 포스터 형식으로 만들어 거리에 뿌렸다. 가보가 쓴 글에는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에 대한 조소가 담겨 있었는데, 가보는 미래주의자들의 보수적 애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질주하는 자동차, 덜컹거리는 기차역, 뒤엉킨 전신줄, 분주한 거리의 소음, 금속성의 음향” 따위를 근대적 삶의 역동성인양 착각해 이에 열광하는 것에도 조소했다.

러시아에서 가보는 모터로 움직이는 진동하는 철제막대를 제작했으며, 최초의 키네틱 조형물이 되었다. 그의 의도대로 관람자가 경험하는 것이 필수이므로 조형물에는 앞뒤가 없고 관람자는 주위를 돌면서 감상할 수 있다. 조형물이 투명하므로 관람자는 그것을 통과해 바라볼 수 있다. 그는 공간에 대한 입체주의의 관심과 운동에 대한 미래주의의 관심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미술이 공간과 시간에서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조형물이 부피에 얽매여있으며, 이는 거부되어야 할 고정관념이다. 그는 기계시대를 맞아 새로운 물질로 작업할 것을 주장했다. 미술 활동에 대한 통제가 분명해지자 그는 1922년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10년 동안 머물렀다. 1946년 이후 가보는 미국에서 살았으며, 1952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공간을 통제한 엘 리시츠키
엘 리시츠키(1890~1941)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건축과 공학을 전공하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는 1917년에 샤갈 및 다른 유대인 그래픽 화가들과 함께 책의 삽화를 그리는 데 참여했다. 그들의 작품은 유대인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였던 키예프에서 주로 출간되었다. 샤갈이 비테프스크의 대중예술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을 때(1918) 리시츠키도 건축 및 그래픽 아트 교수로 동행했으며,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입체-미래주의 양식의 삽화가 든 책을 계속 만들었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블라디미르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구성주의 추상을 예견한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트첸코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트첸코는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물>을 외로운 예술가가 전통적인 수공예의 도구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든 낭만적인 물건으로 치부했다. 로트첸코는 극장의 소품을 만드는 수공업자 아버지와 세탁하는 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상이 농노였으므로 그의 가족은 도시민으로서는 제1세대였다. 로트첸코는 극장의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미래주의와 말레비치 양식을 섞은 듯한 독창적 모방은 추상적인 디자인으로 나타났다.

로트첸코가 1916년 타틀린의 ‘상점’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은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중 드로잉 다섯 점은 자와 컴퍼스로 제작한 것이다. 로트첸코의 삼차원 구조물은 매우 독창적인 새로운 고안물로서 타틀린의 부조의 전통을 훌륭하게 완성시킨 것이다. ‘상점’ 전시회를 통해 그는 처음으로 타틀린과 전시회에 참여한 말레비치를 만났다. 그의 다음 2년 동안의 작업은 말레비치의 초기 작품에 대한 매력과 타틀린의 개념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처음에는 이차원의 구성으로, 후에는 삼차원의 구조물로, 1920년에는 모빌로 작업했다. 타틀린과 함께 그는 재료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이렇게 말레비치와 타틀린의 영향을 결합시킨 로트첸코는 구성주의 디자인의 체계를 발전시켜 선구자가 되었다.

로트첸코는 1921년 9월에 열린 전시회 ‘5☓5=25’에서 모노크롬 세쪽화를 전시한 것을 끝으로 회화에 이별을 고하고 “나는 회화를 그것의 논리적 귀결로 환원시켜 세 점의 캔버스를 전시했다. 즉 빨강, 파랑, 노랑이다. ... 단언하건대 모든 것이 끝났다. 원색이다. 모든 평면은 하나의 평면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재현은 없을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우상파괴적인 세쪽화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정표가 되었으며, <마지막 회화>로 불리었다.

조형물에 색을 입힌 바버라 헵워스
헨리 무어와 함께 동시대 영국을 대표한 조각가 바버라 헵워스는 무어와 마찬가지로 깎는 것으로 조형물을 제작했고, 모두 영국적인 풍경의 은유를 종종 사용했다. 그녀는 완전 추상조형물을 제작한 최초의 조각가 중 하나였다. 브랑쿠시의 영향을 말하면 그녀가 무어보다 더 많이 받았다. 헵워스가 제작한 1930년대 중반의 작품들은 인간화된 기하학으로 브랑쿠시가 강조한 본질과 관련 있지만, 브랑쿠시와는 달리 구상적 형태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조형물에서 인물을 은유한 것으로 보이는 요소가 발견되더라도 인물을 추상화한 것이 아니며, 아르프의 인간 응결물이나 무어의 유기적 형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녀의 조형물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물이다. 헵워스에게는 브랑쿠시가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신화 같은 유산은 부족하지만, 대신 곧장 자연, 광물과 조개, 바위, 파도치는 바다와 같은 형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의 특성이 가장 잘 담긴 조형물에서는 형태와 리듬이 억제되어 있으며, 아름다움은 절대적 평형이라는 브랑쿠시의 신념을 확인하는 듯 보인다. 후기 작품 다수는 1939년 이래 줄곧 살았던 웨스트 콘월의 경치에 반응해 제작된 것이다.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조형물을 제작한 헨리 무어
헨리 무어는 1920년대 초에 둥그스름한 작은 돌, 매끄러운 도식적 두상, 모자상을 암시하는 풍만한 인체 등과 같은 선사시대의 목조와 석조 모델을 모사하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반추상의 어머니상과 와상을 주로 제작했다. 다음단계는 추상화된 신체를 확장하고 심지어 각각 다른 크기로 부숴 긴 좌대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피카소, 브랑쿠시, 아르프로부터 유기적 형태를 영향을 받은 무어는 혁신적인 작업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예술가에게 열려 있던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브랑쿠시가 자신으로 하여금 형태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고 말했는데, 표면에 있는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은유를 배워 이를 자신의 조형물에 적용했다. 그의 주된 모티프는 여인상으로 일반적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하지만 때로는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며, 또는 어린이를 안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원형의 모습, 즉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특정화되지 않으면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도한 것이다. 그는 인체의 이해에서 출발해 한 부분을 과장했는데, 뿌리와 뼈의 형상을 끌어와 유기적 성장을 암시하거나 풍경의 모양으로 여성이 자연에 속한 일부분임을 보여주었다.

무어의 다섯 가지 창조원리
무어는 『조각가의 목표』에서 자신의 조형물을 다섯 가지 관점으로 요약했다. 첫째, 재료에 대한 충실성을 꼽으면서 재료가 아이디어를 형상화하는 데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직접 깎는다고 했다. 둘째, 완전한 삼차원의 구현을 위해 부분들 사이의 역동적 긴장과 다양한 시점을 보여줄 수 있는 환조를 높이 평가했다. 셋째, 자연물에 대한 관찰로 형태와 리듬의 원칙이 자갈, 뼈, 나무, 조개 같은 것에서 나온다고 했다. 넷째, 비전과 표현으로 디자인의 추상적 특질과 인간의 심리적 요소에 전념한다고 했다. 마지막은 생동감으로 조형물이 재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인, 강렬한 생명감 그 자체를 높이 평가했다.

무어의 조형물이 겪는 과정을 두 가지 측면, 즉 기법과 양식에서 살펴보면 그는 처음에 직접 깎는 기법을 선호해 몇 점의 테라코타(양질의 점토) 작품을 제외하고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제작한 거의 모든 작품이 돌과 나무였고, 콘크리트 작품을 몇 점 제작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작품도 대부분 깎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지만, 테라코타로 된 습작 모델이 점차 늘었다. 테라코타 습작은 나중에 동일한 주제로 대작을 제작할 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임시 재료에 기록해두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무어의 조형물은 청동이 주조를 이룬다. 그에게 청동이 작품의 최종 재료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모형들을 수정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양식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1929~30년에 제작된 비스듬히 누운 사람과 가장 나중에 제작된 1961~63년의 비스듬히 누운 사람 사이에 형태의 변형이 거의 없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비스듬히 누운 사람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계속 사용한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양자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차이는 덩어리가 아닌 표면의 차이, 즉 단단한 뼈와 살을 감싸는 피부의 주름이며, 리듬이 아닌 강조의 차이다. 이는 그가 조형물의 독특한 성질인 부피와 표면을 지속적으로 연구했음을 말해준다.

무어는 “비록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체이지만, 뼈, 조개, 자갈 등과 같은 갖가지 자연의 형태들에도 늘 많은 주의를 기울여왔다. 나는 같은 해변을 여러 해 동안 거닐곤 했다. 그러나 매년 새로운 모양의 자갈이 내 눈길을 끌었다. 비록 그것이 그 자리에 수백 년 동안 있었겠지만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해변을 따라 거닐 때 스쳐 지나가는 수백만 개의 자갈 중에서 나는 내가 관심을 둔 형태에 맞는 자갈들만을 설레는 마음으로 고른다. 앉아서 자갈을 한 움큼 집어서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른 일이 벌어진다. 새로운 형태에 적응할 시간을 갖는다면 나의 형태 경험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자연에서 형태를 발견하고 그것이 암시하는 점을 조형물의 기초로 삼았다. 그의 창조원리는 고대 그리스, 고대 멕시코, 고대 이집트, 고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메소포타미아, 로마네스크, 초기 고딕조형물 등에서 활성화된 것이었으며, 아프리카, 폴리네시아의 원시부족 조형물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었다.

허상의 공간을 거부한 루초 폰타나
루초 폰타나는 아버지를 통해 키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19세기 아카데미의 절충주의 조형물을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르헨티나로 건너온 이탈리아 출신으로 장례기념물을 전문으로 제작한 상업조각가였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 밀라노 미술학교에 입학한 폰타나는 1922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모던 키치라고 말할 수 있는 아르 데코, 마욜, 아르키펭코의 작품을 모방했다. 6년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무솔리니 정권이 후원하는 노베첸토 이탈리아노 운동, 즉 반모더니즘적 수정주의에 한동안 매료되었다.

노베첸토 이탈리아노Novecento Italiano는 밀라노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그들은 유럽식 아방가르드 운동을 거부하고 고전적인 이탈리아 전통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미술로 복귀하고자 했다. 그들의 운동은 이탈리아 정부의 편협하고 국수적인 예술관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폰타나의 키치적 경향은 1930년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나쁜 취향으로 불릴 만한 길을 따라가다가 이후 갑자기 과격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정부가 요구한 단정함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으므로 자연히 관료들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을 즉각 비판했다. 그는 1930년에 원시주의적인 다채로운 대리석 조형물 <흑인>를 선보였고, 이듬해에는 무늬를 새겨 넣은 채색 시멘트 널판, 에나멜을 칠한 테라코타, 색을 입힌 청동, 금박을 입힌 석고, 세라믹 작업 등을 진행했다. 채색은 모더니스트들이 저주해 마지않던 조형물의 속성이었다.

폰타나 이전에 채색 조형물을 제작한 예술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고갱, 피카소, 알렉산더 캘더 등이 채색 조형물을 제작했고,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이 조형물에 색을 입혔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회화와 조각의 한계를 서로에 대한 관계 속에서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폰타나가 시도한 것은 공간에 그리기보다는 여러 재료들을 동시에 사용하는 은밀한 방식으로 다채색을 재도입한 프랑스 제2제정기(1852~71)의 네오바로크 조형물이나 반추상의 장식적 오브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급진적인 물성을 드러내기 위해 색을 사용한 것이다. 그에 의해 조형물의 영역으로 침입한 색은 미학적 담론에 의해 옹호되던 균질의 조화를 교란시키고 성가시게 만든 일종의 소음이 되었다.

폰타나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4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체류하며 그곳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이끌었다. 그는 1946년에 「백색 선언문 Manifesto Blanco」을 발표하면서 추상과 구상 모두에서 벗어나 미학, 합리주의, 형식주의를 공격하고 공간주의spazialismo라 불릴 그의 개념을 공표했다. 또한 네온 및 TV와 같은 첨단기술을 사용해 전후의 새로운 정신을 표현한다는 새로운 미학을 표명했다. 예술가는 전통 이젤화의 환영, 혹은 허상의 공간을 거부하고 대신 색과 형식을 실제 공간에서 자유로이 전개하여 캔버스의 틀이나 조형물의 부피에서 벗어나는 미술품을 창조해야 하며, 새로운 과학기술을 사용해 미술품을 건축과 주변 공간에 완전히 통합시켜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선언문은 이후에 대두될 공간주의 이론의 발판이 되었다.

폰타나는 미술을 지속적인 작품의 창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제스처나 퍼포먼스의 개념으로 파악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였으며, 또한 환경미술의 선구자였다. 전후 재건의 시기에 그는 쇼 비즈니스의 화려함에 매혹되어 문화 사업에 참여하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영화관이나 상점 천장부터 성당의 거대한 문에 이르기까지 장식적 작품을 주문받는 일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1947년 방을 검게 칠해 소개한 <검은 공간 환경>은 환경미술의 선구적인 작품이 되었다.

에콜 드 파리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는 인상주의 이후 세계 각지로부터 온 예술가들에 의해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사조들, 즉 후기인상주의, 나비파, 야수주의, 입체주의, 순수주의(퓨리즘), 초현실주의, 표현적이고 시적인 사실주의를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이다. 이 명칭은 평론가, 화상, 미술품 감식가들에 의해 널리 통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파리는 20세기 초 약 40년 동안 혁신적인 미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좁은 의미에서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의 표현주의를 말하며 외국 태생의 표현적 사실주의자들, 즉 ‘저주받은 화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들이 파리로 온 이유는 파리가 먹고 살기에 그리고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토론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파리의 미술은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고 외국인 예술가들이 이 동네에 모여 살았다.

일화가 아닌 회화적 상징주의를 담은 마르크 샤갈
러시아 비테프스크에서 하시디즘 계열의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 샤갈은 정규 교육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의 회화는 교육에 의하지 않은 민속미술의 자발성이나 야수주의의 세련된 천진난만함을 연상시킨다. 그는 1914년에 후원자 비나베르의 도움으로 파리를 방문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므로 낡은 건물 라 뤼슈La Ruche에 살았으며, 그곳에는 수틴, 모딜리아니, 레제, 아르키펭코의 작업실이 있었다. 라 뤼슈는 박애주의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포도주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주최 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개축한 곳이다. 라 뤼슈에는 약 140개의 작업실이 있었고, 전 세계에서 온 떠돌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그렇지만 파리는 샤갈에게 빛, 색, 자유, 태양, 삶의 즐거움을 의미했다. 샤갈은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전보다 강렬하고 밝은 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샤갈의 회화는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등과 같은 아방가르드 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대변인이었지만, 자신이 말하는 이른바 초현실sur-réalisme이라는 상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일상을 넘어서는 방법을 발견할 만한 예술가들을 찾고 있었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나와 마을>(1911)을 매우 좋아했다. 샤갈은 양차대전 사이 파리에서 꽃피운 에콜 드 파리의 유파로 막연하게 분류되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독창적인 화가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을 받았다.

샤갈은 자신에게 유용한 여러 교훈을 받아들였지만 20세기 초에 널리 확산된 많은 운동이나 사조 중 어느 것도 추종하지는 않았다. 아폴리네르는 그의 회화를 초자연주의로 분류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예고했고, 앙드레 브르통은 샤갈로 인해 은유가 근대 회화에 당당하게 진출했음을 환호했다. 그러나 샤갈은 초현실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무의식적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발산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교리를 부인했다. 입체주의에 대한 관심은 다수 작품에서 나타나더라도 그는 입체주의자가 아니었다. 색에 있어서는 입체주의의 한 부분인 오르피즘 화가들의 발견을 도입했으며, 로베르 들로네의 ‘동시성’ 개념도 받아들였다. 그는 외부의 영향을 받았으나 작품 모두 독창적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그의 회화를 반겼지만, 그는 브뤼케 화가들의 대담한 왜곡보다는 프랑스 회화의 고전적 자제와 고갱의 장식적 서정주의에 더 가까웠다. 
 

낭만적 천재로 알려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쇠락한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학창시절이던 1895년에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고, 후에 결핵으로 진행되어 요절했다. 1906년 파리로 간 그는 피카소가 거주하는 바토 라부아와 그 밖의 지역에 있는 여러 작업실에서 열린 예술가들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그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극도로 빈곤한 생활을 했다. ‘세탁선’이란 뜻의 바토 라부아는 시인 막스 자코브가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라비냥 가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든 지역에 붙인 명칭이다. 모딜리아니는 다락방에서 굶주린 채 마약과 술, 그리고 결핵에 시달리면서도 회화와 조각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형적인 낭만주의 천재로 묘사된 이런 이야기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는 없다. 모딜리아니 신화는 그가 1920년 1월에 요절한 뒤 시작되었으며, 짧은 생애가 자멸한 천재의 극적인 이야기로 전래되면서부터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간혹 고뇌가 담겨 있는 까닭은 그가 주제에 대해 느끼는 연민에 직접 호소하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를 드러내는 암시 때문이다. 이러한 주정주의는 뭉크와 반 고흐의 회화에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하다. 모딜리아니가 1917년에 제작한 일련의 누드화와 풍경화 몇 점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인물화였으며, 크게 둘로 나누면 친구와 친지를 모델로 그린 것과 무명 모델을 그린 것이다. 친구와 친지를 모델로 한 것들은 조형물 시기 이후에 제작한 것들로 최초로 ‘모딜리아니식’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20세기 초 20년 동안 파리 미술계에 속해 있었지만, 당대의 미술운동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그의 작품은 양식화되었고 일정한 경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뛰어난 독창성을 지닌 당대의 예술가 중 하나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길게 늘어나 양식화된 그의 인체 표현은 회화와 조각 모두에서 특징이 되었으며 매너리즘에 빠지기는 했으나, 모델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으나 양식화된 독특함을 통해 발휘되었다.

극렬한 감정 표현한 샤임 수틴
민스크 근교 스밀로비치 태생의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은 에콜 드 파리의 표현주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며 뛰어난 영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가난한 유대인 가문의 열 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수틴은 구두제작자의 견습공이 되기를 거부하고 회화를 배우기 위해 가출했다. 1910년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빌나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고, 1913년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가서 라 뤼슈에 있는 페르낭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했다. 1900년경 보기라르 도살장에 인접한 둥근 원형 건물로 물과 가스 같은 편의시설도 없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라 뤼슈의 작업실을 싼값에 얻었는데, 그곳에는 수틴 외에도 모딜리아니, 샤갈, 아르키펭코, 립시츠 등이 있었으며, 프랑스 화가들로는 레제, 들로네, 로랑스 등이 잠시 이곳에 작업실을 얻고 작업했다.

수틴의 회화에 나타난 주정주의는 친구 화가 모딜리아니의 것에 비하면 거의 신경과민에 가까운 강렬한 것이었다.

작품
타틀린의 초기 작품은 세잔의 영향을 받은 정물화, 바다 풍경, 선원 등이었다.

타틀린은 1914년부터 1917년까지 평면에서 끌어낸 역부조counter reliefs와 코너 역부조corner counter reliefs 등의 구조물을 제작하여 재료의 특성을 탐구하던 러시아 구성주의의 한 맥락을 형성했다. 코너 역부조는 실재의 깊이와 회화로 나타낸 표현 사이의 입체주의 관계를 버리고 부분적으로 나무뿐만 아니라 쇠, 유리 등을 사용하여 재료들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췄다. 사진과 훌륭한 복제품들로만 알려진 그의 구조물은 끈이나 줄로 벽에 매달린 채 공간 속에 전개되었다. 이것은 폐쇄된 조각덩어리로부터 공간을 조각한다는 개방적ㆍ역동적인 구성으로 발전하는 삼차원적 형태의 첫 단계였다. 그는 알루미늄, 구리, 유리, 석고, 아연, 나사못, 철판, 목재 등의 재료를 사용했으며, 선명하고 눈부신 재료들은 타고난 에너지를 찬란하게 발산했다. 재료와 솜씨의 결합이 새로운 전망을 낳았다. 코너 역부조가 처음 선보인 것은 타틀린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주도권을 두고 말레비치와 다툰 페트로그라드에서 1915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0-10: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 전시에서 코너 역부조는 젊은 예술가들을 구성주의의 실험단계로 진입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제3인터내셔널 기념물>(1919~20)(은 나움 가보의 신조와는 매우 동떨어진 공리주의 원리를 구체화한 조형물로 구성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게 했다. 이 기념물은 1919년 초 러시아 미술부가 모스크바 중심 네바 강 위에 세울 396m 높이의 구조물로 타틀린에게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인 에펠탑보다 삼분의 일이 더 높은 이것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3주년이 되는 1920년 11월 8일에 레닌그라드에서 제막일을 거행했고, 그 후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레닌이 러시아 전력화 계획을 논의한 소비에트 제8차 전당대회장에 다시 세워졌다. 작품이 공개될 때 발행된 카탈로그에 실린 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 니콜라이 푸닌의 글과 타틀린이 발표한 다수의 선언문을 통해 그 내용이 알려졌다. 타틀린의 디자인에서 가장 뛰어난 요소는 기울어진 구조였다. 나선형 강철로 된 틀이 원통형, 원추형, 입방체형 유리로 된 방의 몸체를 지탱한다. 몸체가 비대칭적인 축에 매달리게 됨으로써 나선형의 리듬을 공간 너머로 확장시킨다. 원통형은 그 축을 따라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며, 이 부분은 강연, 회의, 대회 모임 등으로 사용되도록 계획되었다. 원추 부분은 한 달에 한 번 완전한 공전을 하도록 되어 있으며, 행정 활동에 할당된다. 최고급의 입방체 형태는 하루에 한 번 돌게 되어 있고, 다른 나라로 ‘혁명을 퍼뜨릴’ 임무를 띤 소비에트 조직인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제3국제당), 레닌에 의해 1919년 3월에 창설되어 1943년 5월 15일에 해체된 마르크스-레닌당의 국제적 조직체)이 들어와 뉴스, 선언문 발표 등을 전보, 전화, 라디오, 확성기를 통해 내보내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은 밤에 불이 켜지는 야외 스크린으로, 최근 뉴스를 계속 중계할 것이다. 또한 특수영사기를 설치해 흐린 날에 하늘에 문장을 쏘아 올려 예를 들면 ‘사나운 북풍을 위한 유용한 제안’과 같은 그 날의 모토를 알린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첨가된 최상층의 작은 반구형은 한 시간마다 회전할 계획이었다. 이렇듯 <제3 인터내셔널 기념물>은 혁명의 위대한 신호인 동시에 사회운동과 화해한 전위의 상징이었다. 타틀린은 이 기념물을 “공리적 목적을 위해 회화, 조형물, 건축과 같은 순수 조형적 형태들을 결합한 것”이라고 밝혔다.

타틀린이 1919년과 1920년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세 명의 조수들과 함께 금속과 나무로 제작한 모형의 높이는 5.5-6.5m였다. 모형물은 1920년 12월 소비에트 제8차 전당대회 전시장에서 전시되었다. 소비에트 엔지니어 팀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했지만, 가보는 기념물의 구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난했으며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실험적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강력한 영향을 주었고, 이후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가보가 제작한 첫 조형물들은 <여인의 머리>(1917~20)처럼 추상적 두상들로서 철판이나 셀룰로이드 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머릿속을 열어놓은 것으로 외부의 피부로 머리의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직각으로 자른 평면들을 교차함으로써 공간에서 머리의 형태를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입체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의 조형물은 사물과 그 주변 공간 사이의 뚜렷한 구분을 무너뜨리려는 야심을 지닌 점에서 입체주의의 영역에 속한다. 이 조형물을 피카소의 <여인의 머리>와 비교하면, 피카소의 조형물은 엄격한 자연주의적 목표, 즉 형태를 정리하고 애매한 명암 대조를 제기하면서 대상의 사실주의를 강화하려는 목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가보는 타틀린처럼 공간적 실재성을 창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여인의 머리>는 모티프의 원래 형태를 일깨워주는 착각을 제공하며, 우울함이나 명상 같은 느낌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끌면서 다른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것은 정확하게 다듬어진 면의 배치, 끼워 맞추기, 공간의 율동적 배열이다.

1920년대 이후에 제작된 가보 특유의 조형물들은 투명한 구조물로 되어있다. 투명한 재료를 사용하여 형태상의 핵심으로부터 밖으로 확장되거나 나무나 분수처럼 위로 솟는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된 경우가 많다. 그것들 대부분이 섬세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물질적 존재로서보다는 빛을 흡수함으로써 형태를 드러낸다. 그의 조형물은 거시적 우주와 이를 지배하는 힘에 대한 미시적 우주에 대한 은유이다. 가보는 자신의 조형물에서 그 이상의 특수한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리시츠키는 1919년부터 1924년경까지 제작한 일련의 이차원적 실험물에 프로운Proun,이란 명칭을 부여했는데, 이는 새로운 것을 주장하려는 계획을 뜻하는 러시아어의 축약어이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프로운은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 재료로 된 경제적 구조물을 가지고 형태를 창조하는 (공간을 통제하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리시츠키가 처음 비테프스크에서 작업하면서 프로운은 크기, 힘, 구성적 배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프로운 19D>(1922?)에서 보듯 프로운은 어느 정도 절대주의와 구성주의 원칙을 종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동적인 축과 절대주의의 특징인 비대칭을 이용했으며, 구성주의의 규칙적인 기계 리듬을 도입한 포토몽타주를 이용했다.

로트첸코의 매달린 조형물은 알루미늄 페인트를 칠한 원이나 오각형, 직사각형, 혹은 타원형 모양의 동판 한 장을 중심으로 점점 커지는 동심원처럼 절단한 것으로 연작 중에 타원형이 유일하게 현존한다. 그의 작품은 중심점을 기준으로 회전하면서 삼차원의 다양한 기하학적 입체를 만들어냈다. 이 조형물은 쉽게 접어 원래의 평면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작품의 생산과정을 드러낼 수 있다. <매달린 구조물>(1920)(은 구성주의 추상을 예견한 것이다. 로트첸코가 이 전시회 직후에 내놓은 동일한 크기의 나무 블록으로 제작된 각각의 모듈 구조물에서 평면도와 입면도가 동일하다. 그의 구조물을 지배하는 형식논리는 연역적 구조로 40년 뒤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칼 안드레는 로트첸코의 모듈 구조물이 서양에 소개되었을 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브제가 없는 회화 No. 80(검은색 위의 검은색)>(1918)의 정사각형은 말레비치의 <흰색 위의 흰색>(1915)의 정사각형에 대한 빈정대는 화답이었다.

로트첸코는 1920년대에 주로 산업 디자인과 지형학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영화와 산업 디자인, 선전 포스터와 사진 등에 주력했다. ‘로트첸코 원근법’과 ‘로트첸코 단축법’은 1920년대에 유행어가 되었다. 그는 광선과 그림자를 혁신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벤 니컬슨은 1930년경 두 번째 아내가 된 조각가 데임 바버라 헵워스와 작업실을 함께 쓰기 시작하고 기하학적 추상으로 관심을 돌려 특히 마분지를 잘라 저부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니컬슨과 헵워스 부부는 1932년에 파리로 가서 피카소, 브라크, 브랑쿠시, 아르프를 만났다. 니컬슨은 1939~58년 콘월의 예술가 마을 세인트아이브스에 머물면서 눈부신 활동을 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그의 명성이 급속히 높아져 국제적 수준에 도달했다.

헵워스는 형태들 간의 긴장뿐 아니라 공간, 크기와 질감, 중량감과의 관계에 천착했다. 이 긴장에서 그녀는 조형물 고유의 절대적인 본질을 발견하기를 바랐으며, 그 절대적인 본질은 인간관계의 특징을 전달해야 만한다고 보았다. 이 마지막 조건이 특히 중요했는데, 그녀의 조형물이 추상이 되었을 때조차 그 형태들의 관계 속에 구상성이 함축되었기 때문이다.

헨리 무어는 아르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형물이 야외 공간에 놓이기를 바랐으며, 일부 조형물을 광야나 공원에 자연스럽게 배치했다. 그러나 그의 조형물은 브랑쿠시나 아르프의 조형물보다 훨씬 더 복잡한데, 이런 복잡성은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인간성에서 비롯했다. 그는 처음부터 두세 가지 기본 주제인 비스듬히 누운 사람, 엄마와 아기, 가족 등에 빠져들었다. 그는 신화적 동기와 브랑쿠시와 아르프가 보여준 자연의 비밀스런 방식을 결합시켰다. 신화적 동기란 바빌론과 수메르, 이집트와 에게, 멕시코와 페루,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조형물과 같은 과거의 주술적ㆍ종교적 이미지의 영향을 말한다.

무어가 1945~46년에 제작한 <비스듬히 누운 사람>은 연작 중 하나로 모든 연관성을 제시한 조형물이다. 관람자는 여인상의 자연주의의 재현뿐만 아니라 땅의 여신을 나타낸 것 같은 재현과 마주하게 된다. 조형물의 비어 있는 부분과 구멍은 보금자리인 동굴이나 인체의 움푹 팬 곳인 자궁에 둘러싸인 따스함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관람자는 피카소와 아르프의 조형물과 같이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또 다른 예를 발견하게 된다. 무어는 때때로 추상조형물을 제작했지만, 인체의 형상을 보여주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개념은 1950년경부터 단색, 혹은 거의 단색의 구멍 뚫린 캔버스였다. 그는 1949년 나비글리오 갤러리에서 자외선을 사용하고 관람자에게 의도적으로 왜곡된 공간을 제공하는 일종의 예측 가능한 작품 <공간 개념, 65 T 46(예측 가능한 것)>을 선보였다. ‘아테세 Attese’로 불린 구멍 뚫린 캔버스를 제작하게 된 동기는 캔버스 뒤에 펼쳐지는 무한한 공간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캔버스의 앞, 혹은 뒤에 착시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전통 방법을 버리고 캔버스 표면을 파열시킴으로써 관람자에게 실제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었다. 1958년부터 단색의 가늘게 찢긴 캔버스의 양식으로 진전했다. 가늘게 찢긴 캔버스는 또한 미술을 행위와 제스처의 기록으로 규정하는 개념을 가장 극대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샤갈의 <나와 마을>(1911)은 샤갈이 어린 시절에 본 것들, 즉 행상인, 수염을 기른 유대교의 율법교사,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괴짜 삼촌, 농가, 농장의 동물들로 채운 향수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노스탤지어의 감정이 듬뿍 담긴 여기서는 위와 아래가 거꾸로 뒤집혔고, 인물이 잘리기도 했으며, 이상하게 관련된 사물들이 병치되어 있고, 크기와 공간의 심각한 불균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졌으므로 시인 아폴리네르를 매료시켰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1920)에서 보듯 기억나는 고향 유대인 마을의 이미지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비현실적 신화의 세계를 창조했는데,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상들을 비자연주의 구성 속에 배치하며 단편적 장면에 일화가 아닌 회화적 상징주의를 담았다. 그의 회화는 문학적 해석 가능성을 배제하는데, 1946년 자신의 회화에 관해 언급하면서 “나는 나의 회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회화는 문학이 아니다.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배열한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모딜리아니의 조형물 제작 시기는 새로이 파리 교외로 떠오른 몽파르나스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작업실을 갖고 있던 브랑쿠시를 만났다. 모딜리아니는 조형물 제작에 사용할 석재를 주변 공사장에서 가져왔으며, 지하철 철로의 침목을 가져와 두상을 제작하는 데 사용했다. <머리>(1912)에서 보듯 그의 조형물은 시적이며 극도로 양식화된 형태였고, 목이 길고 코가 창처럼 아래로 길고 뾰족했으며, 눈은 윤곽선으로만 표현되었다.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함으로써 우아한 느낌을 주는 그의 조형물은 원시미술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자크 립시츠와 그의 부인 베르트, 막스 자코브, 디에고 리베라, 장 콕토, 샤임 수틴 등을 모델로 인물화를 그렸다. 수틴은 모딜리아니와 가장 가까이 지낸 예술가 중 하나였으며, 수틴은 모딜리아니를 존경했다.

혼란스러웠던 1919년 전후 몇 달 동안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회화에 몰두했다. 이때에 제작한 회화 가운데 건장한 소년 농부, 야윈 하녀, 사랑스런 어린이, 노인, 사교계 여인,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 등 다양한 인물들을 모델로 한 것들이 있다. 그는 타계하기 전 2년 동안 열네 살 어린 잔 에뷔테른을 모델로 무려 25점의 인물화를 그렸다.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숨을 거두자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틴은 반 고흐의 말기 작품보다도 더 극렬한 감정 표현을 담은 환상적인 풍경화를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수틴은 카뉴에 잠시 머물다가 네덜란드를 방문한 후 렘브란트의 말기 회화에서 감동받았으며 1925년에 파리로 돌아와 가죽을 벗긴 소의 시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 가죽을 벗긴 말의 시체를 그린 적이 있었다. 1920년대에 그는 심리적으로 비정상임을 나타내는 기이하고 과장되게 왜곡시킨 인물뿐 아니라 성가대 소년, 성찬 배수자(, 시중드는 소년, 과자 제조인과 같은 세심하고 온화한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매우 극단적이기는 했으나 그의 표현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의 주요 관심사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으며, 그의 회화를 오스카르 코코슈카 및 에밀 놀데의 회화와 유사하게 보는 것은 과장된 시각이다. 그의 표현주의는 추방된 많은 그의 동포들과 공유하던 비극적ㆍ묵시록적 기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표출이었다. 그는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신의 회화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늘 불안해하며 고통을 겪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만족해하지 못하고 과거에 그린 것들을 파기하곤 했으며, 전시회 개최도 꺼려해서 생존에는 대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수틴은 1929년에 자신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던 카스탱 부부와 함께 샤텔기용에 은거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투렌의 샹피니쉬르뵈드라는 마을에서 방해받지 않고 풍경화를 그리는 데 전념하다가 궤양 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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