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9
미국의 고유한 양식 추상표현주의
미국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역할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한스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의 역할도 중요하다. 1915년에 뮌헨에 처음 미술학교를 세운 그는 1932년에 미국으로 와 캘리포니아대학과 뉴욕의 아트 스투던츠 리그에서 가르쳤고, 그리니치빌리지에 한스 호프만 미술학교를 세웠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순수추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면에 물감을 붓는 기법을 최초로 실험한 것도 호프만이었다. 자유로운 붓놀림과 색채들의 반발과 흡인작용(밀고 당기기)을 통해 모호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형태는 색채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색채는 형태를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모마The Museum of Modern Art가 1929년 11월 7일에 문을 열었다. 모마는 세 명의 미술품 여성 콜렉터들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부인인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 내무부장관의 여동생 릴리 P. 블리스, 코넬리어스 J. 설리번에 의해 건립되었다. 미국 미술전용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 1931년에 개관했다. 휘트니미술관은 역시 여성이며 부호이자 조각가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가 1914년에 설립한 자신의 휘트니 스튜디오를 발전시켜 미술관으로 건립한 것이다. 1936년에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에서 비롯한 기하학적 추상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화가들이 AAA(American Abstract Artists)라는 단체로 모였고, 이어서 페기 구겐하임이 1942년 10월 20일에 비구상의 요람인 금세기 갤러리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열었다. 이러한 토양이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그리고 유럽 근대 미술의 기수들이 대대적으로 이민해 오기 전에 마련되었다.
앨프레드 H. 바 주니어Alfred Hamilton Barr, Jr.(1902~81)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1923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이듬해에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바는 1924년에 하바드대학 박사코스에 들어갔고, 1926년 웨슬리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46년이었다. 바는 1929년에 카네기 장학금을 받고 뉴욕대학에서 모던 아트와 입체주의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서른 살도 체 안 되어 개관한 모마의 초대 관장이 된 바는 후기인상주의 예술가들 고갱, 반 고흐, 폴 세잔, 조르주 쇠라의 전시회를 개최했고, 1935년에는 반 고흐의 회고전을 열었으며, 1939~40년에는 피카소의 회고전을 여는 등 유럽 모더니즘을 미국에 소개하는 일에 앞장섰다. 모마의 이사장 넬슨 록펠러는 1943년에 바를 관장직에서 해임했으나, 고문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미술사학자 마이어 셔피로는 1957년에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취한 독립성은 해방적 성격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어떤 다른 미술도 최종 결과에서 개인의 존재, 개인의 즉흥성 그리고 그 구체적 과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와 로젠버그 같은 몇몇 평론가들은 뿌리고 흘리고 칠한 물감을 실존적 행위, 즉 미국 문화에서 살아 있는 개인의 정체성의 마지막 호흡으로 간주했다.
마이어 셔피로Meyer Schapiro(1904~96)는 가족과 함께 1907년에 라투아니아로부터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26년부터 컬럼비아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하고 1952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근대 미술의 지지자인 셔피로는 반 고흐와 세잔에 관한 책을 썼고, 그 밖에도 근대 미술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셔피로는 1966~67년에 하바드대학의 명예교수Norton professor를 지냈다. 양식에 관한 그의 논문은 미술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셔피로에게 양식은 미술품의 형식상의 특색이며 시각적 특징이다. 그에게 양식은 특정한 시기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단적 연장이기도 하다. 양식은 작게는 한 예술가를 크게는 문화를 암시하는 지표이며, 또한 예술가로 하여금 문화적 가설과 규범적 가치를 드러내게 해주는 경제적ㆍ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 말하자면 형태와 양식에 대한 우리의 묘사는 우리의 시기, 우리의 관심, 우리의 편견을 가리키며, 특정한 시대에 미술사학자들의 양식에 관한 담론은 그들의 문화적 정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전후 미국의 이미지는 전 세계에 경제적·정치적 그리고 예술에서 강국으로 부상되었고, 많은 나라가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럽은 전후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했으며 파리는 더 이상 미술의 중심이 못되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창조적 미술이 억압받고 있었다. 전후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의 고유한 양식으로 등장하자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렇지만 1940년대에 출현한 추상표현주의는 유럽의 경향과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들이 새롭게 종합되고 인식된 것이다. 완전 추상도 아니고 전적으로 표현적이지도 않았지만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미국 미술운동이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1950년대 등장한 유럽의 추상표현주의 경향인 타시즘이나 앵포르멜과는 약간 다른 양상이었으며, 초현실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구상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미국인의 자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을 모마의 초대 관장이자 미술사학자 앨프레드 H. 바 주니어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초기 유동적 작품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는 추상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표현주의라는 의미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의 견해에는 타당성이 있었는데, 칸딘스키는 색채 대비에 대한, 그리고 추상에 여러 해 동안 자취가 남아 있던 유동적 몸짓에 대한 취향을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칸딘스키의 취향과 미국 화가들의 취향을 근본적으로 묶어주는 점이 있었는데, 모두 의미 있는 추상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폴록의 경우 중요한 것은 오로지 결과이며, 기법이 아무리 독특하더라도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뉴먼에게는 회화를 통해 소통하려는 그 사실이 중요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주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공통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예비적 스케치를 거부하고 로스코의 말대로 회화가 “영원히 친숙한 요구에 대한 예기치 못하고 유례가 없는 응답인 폭로”가 되도록 창작의 행위에서 모험을 감행했다.
추상표현주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동일한 취지하에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한 적이 없었으며 개성 있는 그들은 각기 상이한 회화를 추구했다. 활동시기와 장소가 우연히 일치한 것을 제외하면 하나의 사조로 묶을 근거는 없다. 게다가 그들의 작품이 모두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이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추상표현주의란 명칭은 적절하지 않았지만, 추상표현주의라고 묶을 만한 근거는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에서 창작하는 방법을 실행한 것으로 이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주의 기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미술사에 기여한 중요한 점은 전체론적all over 구성, 자동주의 기법으로 푸마주, 프로타주, 데칼코마니아를 활용한 것이다. 자동주의 기법 중 하나인 푸마주fumage는 빈 태생의 오스트라아계 유대인 화가 볼프강 팔렌Wolfgang Paalen(1905~59)이 1930년대 말에 발견한 것으로 파렌은 종이 밑에 촛불을 대고 움직여 그을린 자국으로 기이하고 꿈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이는 무의식에 의한 자유로운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의 우연에 관한 이론의 좋은 예가 되었다. 파렌은 자신이 고안한 푸마주 기법을 ‘암울한 왕자’라고 명명했다. 그는 그림 속에 유성과 같은 줄무늬를 그려 넣었으며, 이를 훗날 ‘숨겨진 신의 얼굴’이라고 설명했다.
프로타주frottage(문지르기)는 울퉁불퉁한 무늬 결에 종이를 대고 부드러운 화필로 문지르는 기법으로 막스 에른스트가 1925년 8월 10일에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뭇결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를 종이 위에 옮겼다. 그 후 나뭇잎의 잎맥, 마포의 결, 붓자국 등으로 동일한 작업을 했으며, 이런 우연적 패턴을 회화적 디자인의 기초로 활용했다. 이 기법은 나중에 유화에도 사용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기법을 잠재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했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 기법을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결시켜 “침대 앞에 놓인 옷장의 인조 마호가니 문양이 반쯤 졸고 있던 나의 시각적 연상을 자극했다”고 했다.
에른스트는 1937년에 유화에 데칼코마니아decalcomania(옮긴 그림) 기법을 도입했는데, 자동주의 회화에 사용된 것으로 1936년경 스페인 화가, 조각가 오스카르 도밍게스Oscar Dominguez(1906~58)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에른스트가 유화에 적용했다. 흰색의 얇은 종이 위에 넓은 붓으로 물감을 바른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로 덮고 가볍게 문질러 물감이 아무렇게나 우연적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격찬한 이 기법의 핵심은 미리 주제나 형태를 구성하지 않고 회화를 만든다는 데 있다.
자동주의는 1939년부터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고 1948년까지 뉴욕에 거주한 로베르토 마타를 통해 특히 고르키와 머더웰의 회화로 알려졌다. 비교적 늦은 1937년에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을 만난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고 칭한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자동주의를 이용해 무의식의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가끔은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그의 화면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운동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그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뉴욕의 젊은 화가들에게 자동주의를 통한 자유로운 공간의 창출을 보여주었다.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부분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키는 전통 구성과는 대조적인 전체론적 구성에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고, 일정한 체계가 없는 회화 공간 속에 단일한 이미지만 있다. 잭슨 폴록은 물론 모노크롬에 가까운 바넷 뉴먼, 애드 라인하르트, 마크 로스코의 회화나 좀 더 표현적인 아슐리 고르키, 클리퍼드 스틸, 프란츠 클라인, 윌렘 데 쿠닝, 애돌프 고틀리브, 로버트 머더웰, 필립 거스턴의 추상화가 전체론적 구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체계가 없는 회화 공간이란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이 전체론적 구성이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젤화의 위기 The Crisis of the Easel Picture」(1948)에서 ‘전체론적’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특정 추상표현주의 회화, 특히 폴록의 회화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촘촘한 그물망과도 같은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표면의 균일함을 설명했다. 그는 이 개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젤화’ 개념과 대비시켰다. 이젤화가 캔버스 너머로 극적인 서사가 펼쳐지는 무대와 같은 삼차원의 환영을 만들어서 관람자의 관심을 거기에 집중시킨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전면적인 표면은 평면성, 정면성 그리고 서사의 부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망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대량학살과 악명 높은 나치의 강제수용소는 유럽의 선도적인 건축가, 예술가, 이론가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유럽인을 미국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미국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으며, 여기에 힘입어 미국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세계 최고의 경제력을 갖춘 토양에서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 모더니즘의 기수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 앙드레 마송,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쿠르트 젤리히만, 마르크 샤갈, 일래노 캐링턴, 살바도르 달리, 호앙 미로, 로베르토 마타 등이었다.
미국 예술가들이 받은 영향: 초현실주의, 기하학적 추상, 혹은 구성주의, 신조형주의, 그리고 절대주의였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건 초현실주의였으며 구성주의의 영향은 서서히 드러났다. 기하학적 추상 분야에서는 피트 몬드리안의 영향이 두드러졌고, 라슬로 모홀리 나기, 나움 가보, 요제프 알베르스, 리오넬 파이닝거, 요하네스 이텐 등도 영향을 끼쳤다. 마송이 뉴욕 그룹의 피신해 온 초현실주의자 중에서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초기단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마송의 모래회화에 나타난 자동주의와 잭슨 폴록이 실행한 액션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유럽에서 피신해 온 예술가들과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 유럽이 몇 십 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를 짧은 기간에 알게 되고 그 기반 위에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켰다. 여기에 문필가, 평론가, 시인들이 가세하여 미술에 대한 논의를 더욱 진전시켰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의 회화를 염두에 두고 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1906~78)는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이란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뉴욕화단에서 유일하게 그린버그를 대적할 만한 로젠버그는 1952년 12월호 『아트 뉴스 ARTnews』(1902년에 창간)지에 기고한 시각예술에 관한 첫 중요한 글 「미국 액션페인팅 화가들 The American Action Painters」에서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으며, 그가 회화에 대한 해석으로 중요하게 다룬 것은 화가의 창조행위였다. 그는 뉴욕화단에 대해 “요즘 더 이상 추구되지 않던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 예술가의 상상력을 위축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미술운동은 예술가의 외부세계와 무의식에서 나오는 통찰력 그리고 느낌을 예술가의 손아래 결집시킨다. 생기 있는 미술운동은 일련의 개념이기보다는 공통된 에너지의 방향이다. 그리고 미술운동에 대한 정의는 제한된 범위의 개별 예술가들, 특히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만 적용될 것이다”라고 적절하게 적었다.
화가의 충동적 창조력에 자유로운 표현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액션페인팅을 정의한 로젠버그는 그리는 행위를 완성된 작품보다 더 중시했다. 그는 일부 화가들, 특히 폴록이 캔버스를 표현의 장이 아니라 창조행위를 위한 투기의 장으로 삼은 데서 화면에서 발생하는 것이 회화가 아니라 이벤트임을 발견했다. 그가 폴록의 회화를 이벤트로 해석한 것은 적중했는데, 그 밖에 달리 설명할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액션페인팅은 예비적 데생 없이 곧장 화폭 위에서 작업하는 화가의 자유와 전적인 개입을 전제로 한다. 이런 조건에서 삶과 회화는 구별이 없이 밀접해져서 로젠버그의 말대로 “회화 그 자체가 삶의 불순한 복잡성 속에 있는 한 순간이다. ... 회화의 행위가 화가라는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가 된다. 폴록은 1950년에 “나는 데생이나 채색 밑그림 없이 작업한다. 곧바로 그린다. 습관대로 바닥에 깔아놓고 그린다. 커다란 화폭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거대한 공간이 편하고 기분이 좋다. 화폭을 바닥에 깔아놓음으로써 나는 한 점의 회화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느끼고, 그래서 주로 그 방침을 따른다. 이런 식으로 네 귀퉁이에서 시작해 주위를 빙빙 돌아다닐 수 있으며, 서부 인디언이 모래에 그림을 그리듯 회화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작업할 수 있다. 때로는 붓을 사용하지만 막대를 더 빈번히 사용하는 편이다. 깡통에서 직접 물감을 쏟아 붓기도 한다. 나는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묽은 물감을 좋아한다. 또한 모래, 깨진 유리, 조약돌, 끈, 못, 그리고 회화에 낯선 여러 요소들을 사용한다. 회화적 방법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듬어진다. 나는 나의 감정을 도해로 설명하기보다는 표현하고자 한다. 기법은 단지 거기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뿌리고 튀기는’ 기법으로 폴록은 ‘전체론적’ 구성 회화를 창안해낸 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와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작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라져 있다. 이후 이런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회화적 화가들이 캔버스의 형태를 회화의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전체론적 구성 양식의 영향이다.
로젠버그와 달리 그린버그는 입체주의가 쇠퇴하고 미국의 미술이 미국의 새로운 힘과 함께 부상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고르키, 폴록, 스미스 등이 유럽 미술을 압도할 만큼 독특하고 독자적인 작품을 제작한다면서 “애석하게도 피카소, 브라크, 레제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쇠퇴한 것은 그들의 활동을 보장했던 전반적 사회조건이 유럽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면 지난 5년 동안 아슐리 고르키, 잭슨 폴록, 데이비드 스미스와 같이 에너지와 자신감으로 충만한 새로운 예술가들의 출현으로 미국 미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 따라서 놀랍게도 서양미술의 주요한 전제들이 산업생산과 정치권력의 중심과 더불어 마침내 미국으로 이동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근대 회화가 가로 12m나 15m이면 크다고 여겨지던 때에 폴록의 벽화는 가로가 38.9m에 달했다. 구겐하임은 막스 에른스트와의 결혼을 종료하고 새로운 남편과의 보금자리를 위해 얻은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폴록에게 벽화를 의뢰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폴록은 빈 캔버스를 6개월 동안 응시한 후 단 하룻밤의 작업으로 전 영역을 순식간에 채웠다. 전시의 목적을 위해 미술을 조정하는 자유가 폴록의 벽화를 거는 일로 시작되었다. 뒤샹이 구겐하임의 아파트에 그 설치를 감독하기로 부탁을 받고 있었는데, 폴록의 벽화가 아파트 실제 공간에 비해 약 3m 더 길었다. 뒤샹은 그 초과된 분량을 절단하자고 제안했고 폴록은 그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폴록은 서예적 글쓰기로 자동주의 기법들에 능가했는데, 유럽 화가들의 기법은 의도적으로 사용된 데 반해 폴록의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우연에 전적으로 의존한 방식이었다. 이런 효과를 그는 붓을 사용하지 않고 깡통에 구멍을 내 흘리거나 붓에 물감을 묻혀 붓을 흔들어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하는 ‘뿌리고 튀기는drip and splash’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이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 방법 대신 캔버스를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런 뒤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형물, 혹은 이물질을 혼합해 임파스토impasto(물감을 두텁게 칠하기)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법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와 공통점이 있다.
폴록의 회화에 대한 그린버그의 해석
폴록 내면에 구상과 추상의 가치가 갈등했다면, 그의 회화를 해석하는 데도 구상과 추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그의 회화가 모더니즘 역사에서 중심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의 갈등은 자연히 치열할 수밖에 없다. 1940년대 초부터 폴록의 회화에 호의를 나타낸 그린버그는 폴록의 회화가 그 표면을 공간적으로 압축했다고 호평했다. 그에 따르면 폴록의 회화는 어두침침한 평면성fuliginous flatness을 창조했고, 표면을 따라 뻗어나간 이 평면성은 환영적 공간을 지닌 이젤화를 거대한 벽화처럼 변형시켰으며, 이것을 관찰 가능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연구하는 근대 과학과 연결된다. 1940년대 말에 과학적 모델이 아니라 반영적 모델을 채택해 모더니즘을 다시 독해하기 시작한 그린버그는 추상의 필연성을 재검토했다. 그는 시각작용이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행위를 하는 주체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았다. 시각작용은 보는 행위가 투사하는 행위이며, 보는 행위는 시야를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에 포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모더니즘의 가장 원대한 야심은 보는 행위에 관련된 고유한 의식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다. 그린버그는 “실체를 완전히 광학적인 것으로 만들어 대기의 공간을 구성하는 필수 적인요소로 만드는 것, 이를 통해 반환영주의가 완성된다. 사물들의 환영 대신에 양상들의 환영이 나타난다. 즉 물체는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이 오로지 신기루처럼 광학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폴록의 회화는 추상이 단지 메커니즘이나 기하학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격정적ㆍ감동적인 것임을 입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유부단하게도 그가 1951년 “내게 엄습하는 초창기 이미지”가 담긴 구상화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그의 회화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51년 폴록은 그를 엄습한 초기의 이미지를 담은 흑백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구상화로 되돌아갔다. 그는 멕시코 벽화와 스승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방주의 양식이 혼합된 양식으로 회귀했으며, 알코올중독도 재발했다. 1955년 시드니 제니스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그의 방향전환으로 인해 근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없는 전시는 회고전과도 같았다. 폴록은 1956년 여름 술에 취한 채 운전하다가 자동차가 전복되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의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1960년대 말 로버트 모리스는 “추상표현주의자 중에서 폴록만이 과정을 회복시켰고, 과정이 최종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임을 주장했다. 폴록이 과정을 회복시키면서 미술 제작의 재료와 도구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모리스는 이런 새로운 착상을 ‘반형태Anti-form’로 명명했다. 폴록의 작업이 중력이라는 조건에 의존한 것에 주목한 모리스는 폴록이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깡통에 담긴 물감에 막대기를 담갔다가 꺼내서 캔버스에 흩뿌린 작업은 중력에 내맡긴 것으로 그렇게 해서 반형태가 되게 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함축된 의미는 반형태는 어떤 형상의 창조와도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폴록 회화의 반형태적 충동을 확신한 다수의 화가들이 모리스와 같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폴록의 캔버스가 미술관의 벽에 걸림으로써 형태적인 장식으로 돌아갔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접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에는 타당성이 있었는데, 폴록 외의 모든 추상표현주의 화가가 이젤을 사용하거나 캔버스를 벽에 고정시키고 작업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데 쿠닝이나 고르키의 회화에서 보듯 물감이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형태를 띠면서 흩뿌린 자국이 그 자체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오직 폴록만이 이에 저항했으며, 그의 저항은 작품을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그 자체로 유지된다. 즉 그의 작품은 하나의 수평적 반형태이며, 수직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 추상이다.
화면 전체가 구조적으로 거의 구별하기 불가능하게 균일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양식인 폴록의 ‘전체론적’ 구성을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1928~)가 받아들였다. 트웜블리의 회화는 데 쿠닝보다는 폴록의 드립페인팅을 드로잉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그 후에도 그는 수년에 걸쳐 연필과 같이 끝이 뾰족한 도구로 캔버스 물감에 흠집을 내서 폴록의 엉킨 실타래를 날카롭게 패인 선으로 바꾸어놓았다. 그의 전략은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흔적을 자발적인 붓질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국 자체를 낙서의 형태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자국을 오염되지 않은 화면을 난도질한 익명의 흔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이는 ‘아무개가 이곳을 다녀가다’라고 사실을 선언하는 무수한 낙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형태상 낙서는 드리워진 그림자나 타이어 자국보다는 덜 지표적이더라도 이전에 침투된 적이 없는 공간에 침입한 외부 존재의 흔적이란 점에서는 숲속의 나뭇가지나 범죄현장에 남겨진 단서와 유사하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낙서는 액션페인팅 화가의 신조의 근거가 되는 기본 전제를 깨는 것이다. 그 신조란 회화는 화가의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이며 화가는 이런 자아인식의 행위를 통해 회화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울이 존재의 모델로 작용한다면, 낙서는 부재의 기록이자 사건이 일어난 후에 남는 흔적이다. 구조상 낙서는 제작자의 부재를 입증함으로써 그것이 더럽힌 표면을 공격할 뿐 아니라 거울에서 으레 기대되는 화가의 반사이미지를 깨뜨리며 화가마저 공격한다.
서예적 글쓰기에 한해서 말하면 이를 먼저 회화적 양식으로 실행에 옮긴 사람은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였다. 1925~27년에 유럽과 근동 지역을 여행하고 상하이에서 중국 서예를 배운 뒤 ‘화이트 라이팅 white writing’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확산된 비개성주의를 과도한 산업화와 물질주의의 산물로 본 토비는 ‘화이트 라이팅’ 기법을 통해 근대 도시의 광기 어린 리듬을 그릴 수 있었는데, 전통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서예를 연상시키는 선과 형태로 전체론적 구성 회화가 되게 했다.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추상화를 주로 그린 아슐리 고르키Arshile Gorky(1905~48)는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났고, 열다섯 살 때 뉴욕으로 와 디자인 및 공예를 배우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주로 독학으로 회화를 익힌 그는 기하학적 추상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주의를 보다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의도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 마이어 셔피로에 따르면 고르키는 그의 최초 실습 대상인 마타의 표현방법에 통달했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터운 임파스토 때문에 딱딱한 껍질 같았던 그의 회화가 좀 더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준 것은 로베르토 마타였다. 마타의 영향을 받고 비로소 추상표현주의 양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고르키의 초기 작품은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솜씨 좋게 뒤섞어 모방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말년의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와 호앙 미로의 생물 형태적 추상을 매우 독창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훌륭한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1940년대 말 뉴욕파New York School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는데, 하나는 네덜란드계 미국 화가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1904~97)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액션페인팅, 혹은 제스처 회화에 해당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를 완성작이라기보다는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과정 중에 있는 화가의 내적 정신 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보았다.
데 쿠닝은 1930년대에 여러 기법으로 그렸고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자코메티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켰는데, 이는 1970년대까지 그의 회화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동시대 화가 중 유일하게 인물을 주제로 삼은 그는 처음에는 남성을 후에는 여성을 그렸다. 고르키와 그 밖의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유기적이고 생물 형태적 형태를 들쭉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폴록과 더불어 자발성과 액션페인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상표현주의 비공식적 리더가 된 그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여성 주제를 발전시키면서 에로틱한 상징, 흡혈귀, 출산의 여신으로 바꾸어갔다. 인물의 모델링을 생략하고 울퉁불퉁한 윤곽선만을 사용해 인물과 환경이 뒤섞여 흐르도록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환경의 혼합체인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데 쿠닝의 연작 <여인>은 그린버그에게 미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이전에 옹호해온 대상, 즉 뉴욕 화파의 회화가 거둔 그 성공에 의해 야기된 특정한 문제에 직면했다. 데 쿠닝의 사례로 인해 점점 더 그 윤곽이 드러난 문제는 새로운 표현을 발견할 형식적 어휘의 부재였다. 더욱이 추상적 개개의 붓질로 환영의 평면을 확립하고 평면들을 서로 포개는 데 쿠닝 특유의 방식은 구상의 암시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는 더 큰 문제였다. 또한 회화적 제스처를 끌어들인 재스퍼 존스의 작업에 함축되어 있는 아이러니도 그린버그의 가치 체계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데 쿠닝과 존스 두 사람을 ‘정처 없는 재현’이란 경멸적인 범주 아래 두었다. 심지어 폴록마저도 1956년에 타계하기 몇 해 전부터 구상화를 그렸는데, 폴록을 그 세대의 주도적인 예술가로 옹호했던 그린버그는 이를 후퇴로 보았다.
그린버그의 첫 대응은 그동안 간과했던 바넷 뉴먼Barnett Newman(1905~70)의 회화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뉴먼이 몰두해온 개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주의적 지시작용을 철저하게 거부한 면모가 데 쿠닝과 존스 양쪽으로 기운 무게중심을 바로 잡는 평형추가 필요한 상황에 답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데 쿠닝, 폴록과 달리 표현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린 뉴먼은 원시미술에서 인간의 공포심에 일정한 형태를 부과하는 중재가자 되는 바로 그 미적 기능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태초 미술의 기원을 확립하고, 창조성을 선사문화의 지배적 양식으로 부각시키려는 그의 바람은 유럽이 미술의 원천이라는 지배적인 믿음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그의 견해는 그린버그의 사상과도 맥이 닿은 것으로 근대 미술의 권좌에서 파리를 축출하고 미국 미술을 재평가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카드뮴 빛 빨강 캔버스에 밝은 카드뮴 빛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일체감 Oneness>을 제작하여 비약적 결과를 성취했다. <일체감>은 하나의 표의문자이다.
뉴먼은 1947년에 표의문자ideograph 개념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뿐만 아니라 마크 로스코와 클리퍼드 스틸 같은 동료 화가들도 도입하기를 원했던 의미작용 방식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초현실주의가 제공한 모델과 프로이트로부터 파생된 초현실주의 상징론을 거부했으며, 추상화가 제공한 모델도 형식주의적 실천이라며 반대했다. 대신 그는 ‘표의문자 회화’라고 명명한 북서부 해안 인디언들의 회화에 주목했다. 뉴먼의 기록에 따르면 북아메리카 북서부 연안 문화영역에 속하는 콰키우틀족Kwakiutl에게 “하나의 형체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추상적인 사유-복합체의 전달체이고, 미지의 공포 앞에서 느끼는 두려운 감정의 운반체”이다. 여러 평론가들이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뉴먼의 친구 애돌프 고틀리브의 캔버스를 가득 채운 사이비-상형문자의 흔적에 관련하여 표의문자 개념을 계속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뉴먼은 이 어휘를 공식화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이 개념을 폐기시켰다. 뉴먼은 순수하게 표의문자적인 소통 방식조차도 메시지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공유하는 정련된 코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1948년 무렵부터 그는 더 이상 그의 회화에서 순수 관념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뉴먼은 1960년대에 와서야 자신의 이론이 직관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몬드리안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니멀아트 예술가들과의 토론 덕분에 자신의 일체성 개념이 관계적 구성이라는 전통 방식에 의존한 몬드리안의 회화와 전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뉴먼은 과거처럼 몬드리안의 형식주의와 내용의 부재를 비난하기보다는 그의 추상에 내재된 사회적 기획에 반감을 갖는 자신의 무정부주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이런 재평가의 결과 연작 <누가 적색, 황색, 청색을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1966~68)가 탄생했다. 이 연작을 구성하는 네 점의 회화 중 첫 번째 작품과 세 번째 작품은 비대칭적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은 대칭적이다. 그는 대칭을 통해 대칭을 금기시했던 몬드리안을 직접 겨냥했다. 뉴먼은 중앙의 적색 평면을 양편으로 늘려 너비를 거의 5.5m에 가깝게 만들면서 색상의 채도를 최고조로 높였다. 황색과 청색은 가장자리에 겨우 걸린 것처럼 보인다.
뉴먼은 1960년 초부터 10여 년 동안 <십자가의 길 Stations of the Cross>이란 제목으로 몇 개의 수직선zip만을 그은 일련의 캔버스 작업을 했다. 명암의 상호작용을 극도로 최소화한 14점의 작품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예수의 절규에 대한 시각적 등가물로 구상된 것이었다. 뉴먼은 예수가 불확실성과 의심에 빠지는 순간을 선택했으며, 복음서에서 따온 이 순간은 구약성서의 신이라는 얼굴 없는 인물이 자신을 즉시 재주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의 개념은 하느님과 닮은 형상의 제작을 금하는 유대교의 성상 파괴적 명령 그리고 자연적 닮음을 넘어서는 심오한 소재의 추구라는 추상표현주의의 근본 명령을 혼합한 것이었다.
뉴먼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로 라인하르트 외에 드코와 스틸이 있고, 래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 같은 젊은 화가들도 영향을 받았다. 뉴먼은 추상표현주의 이후에 나타난 여러 새로운 양식의 선구자로, 모노크롬의 색면 회화, 전체론적 회화, 혹은 비관계적 회화, 그리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의 등장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70)는 1903년에 러시아 비테프스크의 드빈스크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대인 아버지는 약사였으며, 가족은 1913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오레곤 주의 포트랜드에 정착했다. 그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고, 동유럽에서 난민들이 왔으며 유대인이 많았다. 로스코는 1921년에 명문대학 예일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일어난 반유대인 감정으로 장학금을 지불받지 못하자 1923년에 자퇴하고 뉴욕으로 향했다.
로스코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캔버스를 두 개 또는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을 엷게 칠한 뒤 그 위에 좀 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구름과 같은 이런 형태는 점차 단순해지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 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는 회화 안에서의 형태들을 “당황하지 않고 극적으로 움직이며 부끄럼 없이 동작을 연출하는 배우들 단체를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진 ... 연기자들”에 비유하며, 1958년에 “친밀한 상태를 원하기 때문에 대형화를 그린다. 대형화는 즉각적인 거래인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을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했다. 그의 회화는 뉴먼의 것에 비해 신비성에 대한 감각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냈는데, 화면에 나타난 투명과 반투명의 환상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말로 “초월적인 영역에 관련된 것으로 인정되는 의식”의 한 양상이었다. 1957년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로스코는 점차 어두운 색상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빨강, 노랑, 오렌지 계열보다는 갈색, 회색, 짙은 파란색, 검은색을 즐겨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회화는 다가가기 어렵고 우울하며 더욱 신비로운 색을 띠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색은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로스코는 1970년 2월 25일에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클리퍼드 스틸Clifford Still(1904~80)는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다”라고 했고,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가 로스코를 만난 것은 1943년이었고, 두 사람에게는 공통된 미학이 있었는데, 색에 바탕을 두고 순수하게 시각적 공간을 창조하는 색면이었다. 여기에는 공간적 깊이에 대한 환영이 없다. 로스코가 흐릿한 테두리에, 때로는 어두운 빛을 방사하는 기법으로 몇 개의 색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배치한 데 비해 스틸은 잘려진 넓은 면으로 화면을 덮었다.
스틸은 1945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뉴욕으로 가서 로스코를 통해 페기 구겐하임을 만났다. 금세기 미술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은 그가 뉴욕을 대표하는 소수의 예술가 중 하나임을 고지하는 중요한 전시회였다. 그는 장사꾼들에 의해 미술계가 조작되고 있다면서 장사꾼들은 예술가들의 존엄성이나 번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평론가들은 백정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중의 창자를 위해 햄버거로 만든다. 미술사학자들은 단순히 마비되었다”고 불평했다.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1906~65)는 회화와 조형물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고, 조형물의 전통 기법에서 벗어나 기법상의 자유를 얻은 데 스페인의 조각가 훌리오 곤잘레즈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는 금속을 용접하는 기교에서 그러한 것이고 미학적으로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그리고 입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30년대에 강철, ‘발견된’ 폐물, 농기구 부품 등을 사용해 1950년대 리처드 스탕키에비치의 아상블라주를 예견한 듯한 방식으로 구성물을 만들면서 독창적인 조형물을 선보였다. 오브제를 용접한 후 채색하는 것은 스미스가 1930년대 중반에 작업할 당시 통용되던 기법의 특징이었다. 그런 기법은 1910년대 중반 피카소의 콜라주에서 발전하여 1920년대 후반 곤잘레스의 작품에서 절정에 달한 입체주의 조형물, 혹은 구성주의 조형물의 맥락 속에 있다. 금세공사 아버지에게 금속공예를 배운 곤잘레스는 스페인 전통 기법인 쇠의 제련과 용접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스미스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개방적이고, 선적이며, 금속으로 된 삼차원의 서예처럼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조형물을 제작했다.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67)는 컬럼비아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유럽 근대 미술의 몇몇 특징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체주의와 입체주의에서 파생된 양식을 받아들인 그의 회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양식상 급격하게 변화하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추상이었다. 1930년대에는 입체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양쪽으로부터 다소 영향을 받아 뚜렷하고 윤곽선이 분명한 기하 양식을 사용했다. 그의 회화는 행위적이기보다는 기하학적이었고 점차 단색조가 되었다. 그는 액션페인팅과 그것의 허세에 비판을 가하면서 1952년부터 쓴 글에서 미술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을 주장했다. 그는 “미술은 미술로서의 미술이며, 그 밖의 것은 그 밖의 것이다 Art is art as art, everything else is everything else”라고 했다. 훗날 개념주의 예술가 조셉 코수스가 “미술은 개념으로서의 개념이다 Art as Idea as Idea”라고 말한 것은 라인하르트에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라인하르트는 미술계의 위선을 꼬집는 만화를 그리는 풍자화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사회주의 잡지에 만화를 실으면서 미술세계를 풍자했다. 그 중 하나를 보면 중절모자를 쓰고 있는 한 남자가 추상화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겠어?’라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그 밑에는 발이 달리 그림이 깜짝 놀란 남자에게 삿대질하며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나타내는데?’라고 소리치고 있다.
라인하르트는 빈 형태, 공허, 반복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추구함으로써 다가올 1960년대의 미니멀아트를 예견했다. 1950년대에는 색을 어둡게 하고 색채 대비를 억제하기 시작하여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배경 색과 약간의 명도 차이만 있는 색으로 칠하여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한 모노크롬에 가까운 회화를 제작했다. 모노크롬은 부재 상태의 언어, 즉 침묵하는 미술이다. 그의 회화는 일견에 뉴먼의 숭고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무시간성’, ‘불변의 순수 상태’라고 말한 것에 가깝다. 그는 미술이 보편적이라는 뉴먼의 말에 동조하면서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미술을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닌 미술로 제시하는 것, 그것을 점점 더 분리하고, 규정하며, 보다 순수하고 비어있게 하고, 보다 절대적이며 배타적으로 만들어 오로지 그 자체이게 하는 것, 즉 비대상적ㆍ비재현적ㆍ비구상적ㆍ비형상적ㆍ비표현적ㆍ비주관적으로 만드는 것”임을 강조했다.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1915~91)은 스탠퍼드대학으로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고 졸업논문으로 정신분석 이론에 관한 것을 썼으며, 평생 이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하버드대학 대학원과 프랑스의 그르노블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40년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며 마이어 셔피로의 지도를 받고 그때부터 입체주의자들의 자동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머더웰은 1958년에는 헬렌 프랭컨탤러와 결혼하고 1962년부터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지의 미술 편집장을 지냈다.
작품
901 폴록 85 환영에 대항하여 오로지 빛만을 창조할 수 있는 신기루 같은 즉자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 폴록의 얽히고설킨 드립페인팅은 새로운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드로잉의 주요 요소인 순수한 선으로만 이뤄진 그의 그물망은 드로잉의 목표, 즉 대상의 윤곽선을 묘사하여 그 대상을 드러내려는 목표를 좌절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린버그와 그의 동료 마이클 프리드에 따르면 선과 색의 구별을 없애거나 중지시킨 폴록의 선으로 이뤄진 그물망은 현실의 조건을 초월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추상의 종착지에 도달했다. 프리드에 따르면 폴록의 선은 “어떤 의미에서 오로지 보는 행위만을” 드러내고 경계를 짓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폴록의 회화는 추상이 단지 메커니즘이나 기하학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격정적ㆍ감동적인 것임을 입증한 것처럼 보였다.
903 모마 370 <무제 Untitled>(1970): 1957년에 북아프리카, 프랑스, 스페인을 여행하고 로마로 정착한 사이 트웜블리는 폴록처럼 자유로운 제스처가 빚어내는 흔적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했으며, 그렇게 해서 제작된 화면은 준비된 대규모의 표면 위에 연필과 크레용으로 갈겨쓴 난잡한 서체 같은 것이었다. 그는 ‘쓰인 이미지들written image’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여기서 보듯 끄적거림이나 낙서와 외형상 유사했다. 납심, 색연필, 분필, 펠트펜, 유성물감을 선호한 그는 우연의 효과를 격렬한 형태로 표현하면서 절제된 리듬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격렬한 욕망의 흔적을 남겼다. 그는 조잡하고 창피한 모티프들, 예를 들면 나폴리 만의 고대적 광휘 위로 대소변을 갈기면서 풍선처럼 둥둥 떠 있는 경쾌한 엉덩이 같은 모티프를 그의 필적에 섞어 넣음으로써 자신의 기법이 낙서처럼 외관을 손상시키는 제스처와 유사함을 명백하게 강조했다. 1962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트웜블리의 전시회는 뒤셀도르프에서 리히터와 나란히 작업하고 있던 젊은 화가 지그마르 폴게Sigmar Polke(1941~)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904 폴록 68 <세계 먼지 World Dust>(1957): 이것은 개별 부분들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전통 구성을 탈피한 것이다. 그는 “회화에서 중심을 제거하고 모든 부분을 서로 침투하게 함으로써 동등한 가치를 갖도록 했다. 심지어 나는 원근법을 관통하여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가져오고자 했다”라고 했다.
905 폴록 99재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Man Looking at Woman>(1949): 애돌프 고틀리브Adolph Gottlieb(1903~74)는 1937~39년에 애리조나주의 사막에 살면서 그곳 환경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1년부터 ‘상형문자pictographs’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형문자로서의 이 작품에서 시각적 요소를 본질적으로 평면적이며 고르게 배치했다. 그는 원시인들의 감정 표현과 동시대인들의 감정 표현이 유사하다면서 “모든 원시적 표현은 강력한 힘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 공포, 근심에의 직면 및 삶의 영원한 불안정뿐 아니라 자연세계의 야만성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와 로스코는 “오로지 비극적이고 영원한 주제만이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원시적이고 고대적인 미술과 정신적인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라고 믿었다. 그의 상형문자 회화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초현실주의뿐만 아니라 클레와 몬드리안으로부터 비롯된 개성적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규칙적인 격자를 즐겨 사용하여 교란적으로 불확정한 회화 공간을 만들었다.
907 폴록 7-1재 아슐리 고르키는 기법에서 혁신을 시도했는데, 형태를 만들어내는 구불구불한 선들로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색의 영역으로부터 약간 이탈되는 것을 허용했다. 그 결과 그의 회화는 유럽의 초현실주의 회화보다 더 자유로우며 자동주의의 산물이 되었다. 고르키는 1944년에 이사무 노구치를 통해 1941년 5월 뉴욕으로 온 앙드레 브르통을 만났고, 브르통은 이듬해 줄리앙 레비 갤러리에서 열린 고르키의 첫 번째 개인전을 위해 서문을 써주었다. 브르통은 자연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감을 끌어내는 유일한 초현실주의자로 고르키를 꼽았다. 고르키는 초현실주의 그룹의 충실한 회원으로 활동해달라는 브르통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브르통의 권유가 도를 지나치자 그는 1947년에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의 탈퇴는 초현실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고르키의 아내는 고르키와 마타와의 동성애에 대해 비난하고 그와 이혼했다. 1947년에 고르키의 작업실에 화재가 발생해 중요한 작품들이 불태워졌고, 그가 암에 걸렸다는 진단이 내려졌으며, 뒤따라 일어난 자동차사고로 인해 그림을 그리는 팔에 마비가 왔다. 이러한 재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1948년에 자살로서 생을 마감했다.
908 폴록 92재 <여인 I Woman I>: 데 쿠닝은 1950~51년에 강렬하지만 천박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연작의 첫 작품인 이것을 선보였다. 여성상은 창조와 동시에 파괴의 행위자로 나타났는데, 파괴적인 요소는 그 형상들을 구현해나가는 격렬한 붓놀림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의 여성상은 일상문화의 프리즘을 통해서 관찰된 것이다. 이 연작은 추상표현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팝아트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여성 누드화를 선호하면서 누드화를 모든 면에서 공격하며 부수고, 형태와 비형태가 격렬한 상관관계가 되도록 회화와 데생을 뒤섞음으로써 회화를 미완성으로 보이게 했다.
909 폴록 81재 <영웅적이고 숭고한 사람 Vir Heroicus Sublimis>(1950~51): 바넷 뉴먼은 에세이 「숭고는 지금이다 The Sublime is Now」(1948)에서 “우리는 유럽 회화의 수단이었던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 등의 장애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그리스도, 인간, 혹은 삶에서 성당을 만들어내는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감정으로부터 그것들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에서 깊이를 자아내는 가식적 표현이 모두 사라졌다. 그림은 단지 대조적인 색조의 다섯 줄무늬, 혹은 집으로 생기를 띠는 색면일 뿐이지만 화면이 커서 관람자의 지각을 압도한다. 색채만이 뉴먼이 제공하는 경험인 것이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뉴먼의 회화를 '낭만적 고상함'으로 묘사했으며, 붉은색은 '바다'로서 우리를 이기심의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오게 한다고 했다. <영웅적이고 숭고한 사람>은 1960년대의 미니멀아트를 예고했다.
뉴먼에게 숭고는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 등에 기대지 않고 홀로 혼돈과 마주하여 용감하게 운명과 대면하는 누군가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이다. 즉 숭고는 그런 누군가에게 ‘여기’ 그리고 ‘지금’에 대한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1948년부터 뉴먼은 관람자에게 장소에 대한 감각, 즉 그 자신의 규모에 대한 감각을 주고 싶다고 말해왔다.
910 폴록 107 <존재 I Be I>: 뉴먼은 1960년대 초 처음으로 조형물을 세 점 제작하면서 제목을 <여기 I Here I>, <여기 II>, <여기 III>라고 붙였다. 그는 회화에 <저기가 아니라 여기 Not over There, Here>, <지금 Now>, <존재 I Be I>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뉴먼은 우리가 말하는 현재로서의 시간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지 이전에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발생occurence을 의미했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1924~98)는 뉴먼이 말하는 발생을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단순한 발생으로서의 사건ein ereignis과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을 실행하는 정신활동으로서의 극도의 긴장, 혹은 동요agitation와 같은 의미로 보았다.
911 폴록 78재 <무제>(1953): 마크 로스코의 색은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광휘를 띠는 채색과 재료의 부드러운 접합으로 자유로운 회화를 구현했다. 밀도와 표면, 그리고 가장자리는 관람자의 명상에 순수한 대상을 이루는 두드러진 구성요소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정신성을 창출하고 미술과 성스러움의 결합을 되살려냈다. 한낱 화가의 도구에 불과했던 색이 초월적인 실체의 경험에 이르는 매개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색의 공간, 즉 색면이 신화적 힘을 지니고 그 힘이 관람자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
912 폴록 80재 <무제>(1950): 이 작품은 사물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상징할 필요가 없는 회화로서 회화 그 자체가 권리를 가진다는 클리퍼드 스틸의 신념을 드러낸 작품이다. 그는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고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미지가 형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모두 살아 있는 정신 속으로 융합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스틸은 초현실주의적인 모호한 형태로부터 출발해 거의 모노크롬(단색화)에 가까운 대형 회화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스코와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 달리 그는 두텁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으며,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를 그렸다. 그는 생애 후반 20년 동안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은둔생활로 보냈으며, 그곳에서 1980년에 타계했다.
913 마스터 255 <무제>(1957): 프란츠 클라인은 붓놀림의 독립적 의미를 지닌 표의문자로 변화시키고, 기원은 다르지만 동양의 서예를 상기시키는 흰색 바탕 위에 넓은 검정색 패턴을 대담하게 사용하여 매우 독창적인 표현적 추상 양식을 발전시켰다. 클라인의 회화는 종종 동양의 서예에 비유되지만, 그의 회화가 제작된 동기는 이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1940년대 말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의자를 그린 소묘를 집어 들고 호기심에서 그것을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캔버스 틀 가장자리까지 포개질 정도의 크기로 빈 캔버스에 투사해 보았다. 그 결과 강렬한 추상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이 작품에서 보듯 작은 것을 확대한 듯한 추상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는 종종 회화를 상황에 비유했으며, 캔버스에 첫 번째로 가해지는 붓질을 ‘상황의 시작’이라고 했다. 폴록과 마찬가지로 회화를 활동무대, 즉 사건이 발생하는 장으로 여겼으므로 폴록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그의 회화에서 가시화된 행위가 읽혀질 수 있었다. 또한 클라인은 로스코와 마찬가지로 구속받지 않는 감정에 역점을 두었다.
914 모마 356 데이비드 스미스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개방적이고, 선적이며, 금속으로 된 삼차원의 서예처럼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조형물을 제작했다. 이런 조형물들은 크기가 거대하고 야외에 전시하는 것으로 기획되었으나 무거워 보이지 않고 그것의 비중과는 모순되게 불안정하며 역동적 특성을 띠었다. 채색을 하거나 광택을 낸 금속을 사용하며, 때때로 형태를 겉보기에 일시적이고 우연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후기회화적 추상의 특징인 일종의 사물성을 부여했다.
915 폴록 100 애드 라인하르트는 1952년경에 화면을 대칭적으로 삼등분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각 부분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완전한 검은색’ 양식으로 그렸다. 그는 1960년에 자신이 궁극적인 회화라고 생각한 것에 도달했다. 그의 캔버스는 전체가 획일적으로 검게 칠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충분히 오랫동안 바라보면 십자가 구성이 드러난다. 각 회화는 거의 검정에 가까운 아홉 개의 사각형으로 이뤄졌다. 그의 회화는 추상의 두 가지 주요한 틀paradigm을 결합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20세기 초에 완성된 그리드와 모노크롬이었다. 라인하르트의 검은 회화는 그리드의 경계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모노크롬 회화 표면과 비슷한 효과를 냈으며, 이를 통해 배경에서부터 형상이 드러나는 것을 차단했다. 그 결과 자기지시는 그리드와 모노크롬 모두가 보증하는 것, 즉 그 자체로 시작해서 그 자체로 끝나 버리고 미술 이외의 다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916 폴록 36 로버트 머더웰은 1949년에는 유명한 연작 <스페인 공화국에 부치는 애가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회화 연작을 내놓았다. 1936년에 일어난 스페인 동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되었다. 스페인 동란은 3년 동안 지속되면서 약 70만 명이 죽었고, 역사상 최초로 일반시민을 전투기로 공중 공습한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스페인 동란의 비극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는 유명하며, 같은 나라 예술가들 호앙 미로와 훌리오 곤잘레스로 회화와 조형물을 제작했다.
917 모마 360 <무당벌레 Ladybug>(1957): 조앤 미첼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뉴욕의 한스 호프만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녀는 반 고흐, 세잔,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았다. 미첼은 데 쿠닝, 폴록, 클라인 등과 교류했다. 그녀는 1955년에 캐나다의 화가 장 폴 리오펠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고 1959년 이후부터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했다. 스케일에 있어 남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 비교할 만한 미첼의 회화는 말년에야 인정을 받았다. 흰색 바탕에 다양한 색의 얼룩으로 중첩된 <무당벌레>는 행위적 추상의 즉흥적 특성을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추상은 양식이 아니다. 나는 단지 표면이 작동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추상은 단지 공간과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다. 즉 공간과 형태의 모호함이다. 젊었을 때 내게 혁신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리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추상화가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풍경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는 폴록이나 클라인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사례를 확장시키고 거기에 변화를 주었다. 그녀의 주제는 풍경과 색채, 그리고 빛이며 자연에 대한 정감이 넘치는 기억과 감성을 회화적 선과 동력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녀의 커다란 화면은 거침없는 붓질로 에너지가 넘치고, 강렬한 색채는 자연의 변화무쌍한 동력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녀는 캔버스를 이미지가 탄생하는 장으로 보았으며, 그곳에 회화를 완성해가면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행위 그 자체로부터 영감을 얻어 움직였다. 그녀는 1992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