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14

미니멀아트ㆍ프로세스아트ㆍ개념미술
작업 수단을 최소화한 미니멀아트  

미니멀아트Minimal art란 명칭은 미술사학자이면서 평론가 바버라 로즈Barbara Rose(1938~)가 1965년 『아트 인 아메리카 Art in America』지 10, 11월호에 기고한 논문 「ABC 아트」에서 사용되었다. 미술평론가 어빙 샌들러Irving Sandler(1925~)는 1965년에 시리얼아트의 한 유형으로 쿨아트Cool art란 말을 사용했는데, 그 유형 내에서 작품이 추상이든 팝아트이든 상관하지 않고 이 용어를 적용했다. 그는 쿨아트의 특징을 계산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유용하지 않고 지루하다고 규정하면서 표현주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로즈는 이 용어를 미니멀아트, 혹은 ABC 아트의 동의어로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간결한 작품에 대해 쿨아트와 ABC 아트 외에도 거부미술, 기초의 구조, 즉물주의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댄스, 음악, 문학, 회화, 조각 등에서 생겨난 유사한 경향을 설명하는 미니멀리즘이란 용어와는 달리 미니멀아트는 시각예술에만 국한되었다. 미니멀아트의 특징이 입체 영역 안에서 추상에 대한 논란이었으므로 회화는 선구적인 역할을 넘겨주게 되었다. 입체 영역에서의 주도적인 미니멀 예술가는 도널드 저드, 솔 르윗, 칼 안드레, 댄 플레이빈, 로버트 모리스였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저드와 모리스였다. 저드, 르윗, 플레이빈 등은 1963년경 회화에 등을 돌리고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미니멀 예술가로 불리는 데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평론가들에 의해 규정된 미니멀아트는 절제된 조형언어, 연속성, 비관계적인 구성, 새롭고 산업적으로 가공된 재료의 사용 그리고 공업적 제작과정 등이다.

미니멀아트 중에서도 최소한의 내적 차별성을 지닌 한 부류에만 주목한 로즈는 1950년대에 일어난 새로운 감수성으로의 전환에 대해 언급하며 “공허하고 중립적이며 기계적인 비인격성을 지녀 앞서 등장한 낭만적이고 자전적인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격심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관람자가 감정과 내용의 명백한 부재를 목격하고서 얼어붙도록 만드는” 미술에 대해 서술했다. 로즈는 새로운 종류의 미술이 독창성, 감상적이거나 표현적 내용, 복잡성과 같은 전통 필요조건들을 의도적으로 폐기 처분했음을 지적했다. 미니멀아트에는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이 된다.

미니멀아트의 선구자 토니 스미스
미국 조각가 토니 스미스Tony Smith(1912~80)는 “내 조형물은 의식적인 계산의 산물이 아니라 수수께끼와 무의식의 격정에서 유발된 것이며, 내 모든 조형물은 꿈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1960년대 그의 작업은 추상표현주의의 정신과 1960년대 새롭게 전개된 미니멀아트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그는 주제에 관한 한 추상표현주의의 신념을 유지했지만, 르윗, 저드, 모리스 같은 미니멀 예술가들에게 규범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56년에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의 첫 개인전은 1964년에 열렸다. 주로 입방체와 사면체의 매우 단순한 형태의 그의 조형물은 미니멀아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단일한 완전한 미니멀 형태의 조형물이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그의 조형물은 규모가 크고, 강철 또는 채색한 강철로 제작된 단순 기하학적 형태들이다.

단색조의 부조를 제작한 도널드 저드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94)(뉴욕 60)는 1946~47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다. 1953년 컬럼비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1904~96)의 지도를 받아 미술사를 공부하여 1962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드는 1959~65년 『아트 뉴스』, 『아트 인터내셔널』, 『아트 매거진』 등에 고정적으로 실린 그의 비평은 공격적 산문체로 유명했다. 그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학계의 모더니스트들이 늘어놓는 휘황찬란한 말재간에 대해서는 모리스만큼이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 공간이 평편한 표면 위의 물감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력하고 특수하다”고 주장하면서 나중에 자신의 작업에서 이러한 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그의 목표는 환영주의를 격퇴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전체 형태에 의해서 직접 결정되지 않은 부분들 사이의 내적 관계를 모두 환영주의로 보았다.

저드는 미술에서 각 부분들 간의 상관적 관계를 피하고 주관적 결정을 제거하는 논리적 체계를 고안하려고 했다. 평론가나 대중은 저드의 이런 반합리주의적 태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저드와 스텔라가 자신들의 작품을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피트 몬드리안이 창시한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유럽 전통의 맥락에서 보는 것에 대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이라는 지리적인 이분법을 내세운 그들의 관점은 근거가 빈약했으며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상이거나 추상이거나 조형작품은 명백하게 눈에 호소하기 마련이다. 저드는 “미술이란 우리가 주시하는 그 무엇”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작품에 대칭을 사용한 데 대해서 “구성의 효과를 모조리 없애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중 칸막이 구조물을 제작한 솔 르윗
솔 르윗Sol LeWitt(1928~2007)은 시라큐스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일본과 한국에서 군복무를 했다. 1950년대 말에 르윗은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60년 모마에 근무할 때 그곳에서 일하던 플레이빈, 로버트 맨골드, 로버트 라이먼, 그리고 평론가 루시 리퍼드Lucy R. Lippard(1937~)를 만났다. 그의 작품은 눈에 띄는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르윗은 1961년에 간결한 기하학적 단색조의 벽 구조물wall structure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무에 채색하여 회화와 부조 사이의 영역을 차지하는 낯선 작품이었다. 동시에 그는 글과 그림문자를 통합한 회화를 제작했는데, 장식적 색은 팝아트가 수용한 장식적 양식과 조금이나마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일 년 뒤 그의 작품은 벽으로부터 뚜렷하게 자유로워져서 단순하게 만들어진 사물로 된 입체를 향해 나아갔다. 1964년부터 그는 단색의 물감을 칠한 많은 나무 입체작품을 제작하면서 그것들을 벽에 고정하거나 좌대 없이 바닥에 설치했다. 간결한 단순함을 지닌 그의 작품은 절제된 미니멀리즘 조형언어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작품의 변형은 예정된 변수에 기초한 기하학과 수학 체계에 대한 표현이며, 알루미늄, 강철, 콘크리트 벽돌과 같은 일반 산업재료로 제작되었다. 르윗은 작품을 구성하는 계획과 제작과정도 작품으로 간주했으므로 재료 가공이 필수적이지 않으며 그의 설명을 좇아 누구라도 실현할 수 있다.

오브제들을 일렬로 배열한 칼 안드레
칼 안드레Carl Andre(1935~)는 1951~53년에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패트릭 모간Patrick Morgan으로부터 수학했다. 졸업 후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신석기시대 유적지와 브랑쿠시의 조형물에 관심이 많아졌다. 1956년 뉴욕에 이주하고 1969년까지 시인, 단편소설가, 도안가,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가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프랭크 스텔라를 만난 후였다. 그는 한때 웨스트 브로드웨이에 있던 스텔라의 작업실을 함께 사용했다.

1966년 뉴욕의 유대인 미술관에서 열린 ‘기초의 구조’ 전시회에 선보인 안드레의 <레버 Lever>는 121.92m에 걸쳐 139개의 내화벽돌을 일렬로 배열해놓은 것으로 미니멀아트로 분류되며, 또한 시리얼아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조형물은 구성이란 생각을 극단적으로 드러냄으로서 저드가 말한 대로 “단지 하나 다음에 또 하나”에 불과한 구조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안드레는 스티로폼이나 벽돌, 시멘트 블록, 자성체 등 동일한 형태의 공업재료를 부착하거나 접합시키는 과정 없이 수학적 일정한 체계에 따라 쌓아올려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해체되었다. 그는 1967년부터 거의 정사각형인 얇은 철판을 단순한 수학적 원리를 좇아 큰 정사각형이나 선형으로 배열했다. 1967년 유럽에서의 첫 전시회 ‘존재론적 조형’에서 그는 뒤셀도르프의 콘라트 피셔 갤러리 바닥 전체를 강철판으로 덮었다. 관람자들은 갤러리에 들어서서 작품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전시 장소는 그에 의해 재정의되었다.

색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건축적 공간을 창조한 댄 플레이빈
댄 플레이빈Dan Flavin(1933~96)은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56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가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부터였다. 그의 작품은 벽에 고정된 상자들로 단색으로 칠해졌고, 한쪽 면에 다양한 종류의 전구와 형광등을 고정시킨 것이었다. 그는 형광등 불빛과 네온 빛을 사용하여 정적 환경을 창조했다. 그가 사용한 소재는 단순한 선과 직사각형의 구성으로 배열한 네온튜브였다. 이런 구성은 말레비치, 타틀린, 몬드리안과 같은 단순화를 지향한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다.

플레이빈은 1961년부터 간결하고 빛나는 공간적 효과를 표현하면서 팝아트에 대응해 형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려는 미니멀아트의 금욕주의적 의지를 보여주었다. 1963년 5월 23일에 플레이빈은 그의 유명한 예술적 전환점을 실험했는데, 2m 40cm 길이의 형광등 하나를 작업실 벽에 대각선으로 고정시켰다. 그는 1964년 그린 갤러리에서 <유명론의 셋(오컴의 윌리엄에게) The Nominal Three(to William of Ockham)>(1963)을 선보였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흰색 형광등을 연속적으로 배열한 작품으로 배열이 대수학의 진행 1+(1+1)+(1+1+1)이라는 무한한 계산의 단순한 공식이 연속성을 나타내는 최소의 수인 셋에서 임의적으로 멈춘 것이다. 공식이 중요한 이유는 수학적 구조 때문이 아니라 인접한 단위의 연속적 존재 때문이다. 이 작품은 조직적으로 선택된 체계를 작품에 도입한 저드와 르윗 같은 다른 미니멀 예술가들과 공유한 특징 진행과 연속적 과정 때문에 중요하다.

화면이 망막에 반응을 일으키게 한 애그니스 마틴
캐나다 태생의 미국 화가 애그니스 마틴Agnes Martin(1912~2004)은 45세가 될 때까지 북미의 서부 지역에서 학교 교사라는 여성에게 주어진 기회에 의존했고, 대도시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자연 속에서 객관적인 대응물을 결코 찾을 수 없는 주관적 사유와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는 추상으로 관심을 돌려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마틴은 1963년부터 연필로 세밀한 선을 그리는 그녀만의 작업 방식을 발전시켰다. 그녀의 회화는 자유롭게 그려진 유기적 추상에서 단조로운 회색이나 흰색 안료가 펼쳐지는 전면적 격자로 빠르게 변화했다. 라인하르트가 그의 마지막 <검은 회화> 연작을 진행하던 1960~64년에 마틴은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결합하여 라인하르트와 같은 형태의 모순적 조건을 보여주는 작업을 했다. 캔버스 전체에 격자 눈금 패턴이 있는 그녀의 작품은 1960년대 미술 경향에 일치했으며, 1964년경 정사각형의 모노크롬 캔버스를 수평 수직의 명확한 격자로 나누는 그녀만의 형식에 도달했다. 그녀가 단색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 칠한 바탕에 연필로 그린 가느다란 선들은 첫눈에 알아보기 어려우며 관람자가 그것에 주목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것들을 보는 데 겪는 어려움이 곧 그 작품이 제작된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인식으로서 화면이 망막에 일으키는 반응이다. 손으로 줄을 긋는 행위는 마틴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기하학은 비개성적인 것이지만, 흑연이 자국은 남기는 과정에서 미세한 사고를 거의 무한정으로 일으키게 한다. 이런 회화는 주장하는 바가 별로 없는 겸손한 것인 동시에 관람자의 시간과 집중력을 극도로 요구한다. 마틴은 작품에 바람 속의 잎, 우유 강, 오렌지 숲 같이 자연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드로 처리된 화면은 형용할 수 없는 빛이나 광채를 내뿜는 듯한 것이 자연을 그린 것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회화의 내적 고갈을 표현한 로버트 라이먼
애그니스 마틴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결합하여 라인하르트와 같은 형태의 무순적 조건을 보여준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1930~)은 고향 내슈빌의 테네시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에 입학하고 다음해에 조지 피바디 교육대학에서 음악을 공부(1949~52)했다. 원래 재즈 색소폰 연주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회화를 접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52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독특한 멜로디와 즉흥연주, 화성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재즈 피아니스트 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1919~78)와 함께 연주했다.

라이먼은 모마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으며, 모마에서 플레이빈, 르윗, 맨골드, 그리고 미래에 아내가 될 평론가 루시 리퍼드를 만났다. 그는 1954년에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회화의 기초에 대한 실험적 연구를 마쳤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는가 하는 데 있었다. 온통 하얀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물감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각기 다른 화면에 반응하는 방식의 효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초기에 주로 잡아당기고 밑칠을 하는 등의 가공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두터운 붓자국을 남기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1966년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체계적 회화’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처음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차세대 모노크롬 화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라이먼은 물감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각기 다른 화면에 반응하는 미묘한 차이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틀에 팽팽하게 고정시킨 캔버스뿐만 아니라 고정시키지 않은 캔버스를 비롯하여 넝마 펄프로 제작된 수제 종이, 플라스틱, 강철에 입힌 무광 안료, 칠보 등과 같이 매우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관람자가 작품을 잘 감상하려면 작품 자체를 가리키는 자기지시적 성립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재료가 거쳐야 하는 제작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포함된다. 관람자는 회화의 대상이 바로 회화 자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라이먼은 1971년에 작업과정을 알고자 하는 관심이 있다면, 작업을 주시하면서 단순히 그것을 보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면서 “회화의 시적 감흥은 감정의 세계에 속한다. 이는 일종의 폭로이자 신성한 경험인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즐겁고 흐뭇한 인상을 거두게 된다. ... 우리는 강해지고, 이는 여러 날 이상 지속된다. 이는 행복”이라고 했다.

소멸하는 재료를 사용한 프로세스아트
작품에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다양한 유형의 비자연주의 미술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프로세스아트Process Art이다. ‘진행 미술’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프로세스아트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작품의 형식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와 관련된 과정과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강조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한 경향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이와 같은 일시성에 대한 강조는 미니멀아트의 비개성성, 형식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의 한 측면이다. 포스트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미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지배적 경향이던 미니멀아트의 뒤를 이은 경향들을 지칭하기 위해 미국 평론가 로버트 핑커스 위튼Robert Pincus-Witten(1935~)이 1971년에 만든 명칭으로 핑커스 위튼이 기고한 1971년 11월호 『아트포럼』지에 「에바 헤세: 숭고함으로의 포스트-미니멀리즘 Eva Hesse: Post-Minimalism into Sublime」이란 제목의 글에서 처음 이 용어가 등장했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의 가치들에 대한 반동을 함축하지만 종종 보다 적극적인 반감을 제시하는 데 사용되던 반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극도의 지적 단순화를 추구한 로버트 모리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1931~)는 1961년 헌터 칼리지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1966년 콘스탄틴 브랑쿠시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니멀아트 주창자 가운데 뛰어나며 자신의 의도를 명료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로 꼽힌다. 그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관계적non-relational’, 혹은 ‘전체론적holistic’ 미학을 표방했다. 1961년에 플럭서스 운동의 맥락 안에서 처음 절제된 구성물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두 개의 기둥 Two Columns>(1961)은 최초의 미니멀아트 작품으로 꼽힌다.

모리스는 <세 개의 L자형 빔 Untitled(Three L-Beams)>(1965~66)에서 거대한 L자형 구성물이 하나는 옆으로 바닥에 뉘이고, 다른 하나는 똑바로 앉아 있게 하고, 세 번째의 빔은 양 끝으로 아치형을 이루며 서 있도록 했다. 중력의 당김이나 빛의 방출에 대한 감각이 각각의 실제 두께와 무게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세 형태들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간의 효과로 인해 각각의 형태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거기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인 작품을 보여주면서 형태를 파악하기 쉽고 관람자에게 그 본질의 자명성을 전해줄 수 있는 ‘단일 형태unitary forms’를 사용하라고 권했다. 그가 단일 형태라고 명명한 기초적 구조이론은 1966년 『아트포럼』지 2월호와 10월호를 통해 알려졌다.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부분적으로 하나 이상의 감각을 동시에 지각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순수한 감각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다. 즉 색을 지각하게 되면 차원도 감지하게 되고, 평면을 느끼게 되면 질감도 인지하게 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나 색 대 질감, 크기 대 부피 등 여러 상대적 감각은 남아 있더라도 개별 부분들로 분리할 수 없는 형태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들은 강한 게슈탈트 감각을 낳는 더욱 단순한 형태이며, 그 부분들은 개별적으로 지각되지 않도록 최대한 결합되어 있다. 입체와 조각에 적용할 수 있는 형태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게슈탈트는 더욱 단순화된 다면체이다."

공간을 중요하게 여긴 리처드 세라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1939~)는 샌터바버라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1957~61)한 뒤 1961년 생계를 위해 미국 서부의 제철소에서 일했다. 1964년 예일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유럽을 여행하며 2년을 보냈고, 1966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회화와 조각에 존재하는 관례적인 형상-배경 관계를 공격하기 위해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정 재료의 본래의 모습이나 균형을 잃어버리게 하는 변형, 왜곡 등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7~68년에 ‘구르기’ ‘구기기’ ‘접기’ ‘던지기’ ‘건축하기’ ‘튀기기’ ‘던지기’ 등 동사목록을 작성하고 거기에 따른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8년에 납에 열을 가한 뒤 던져서 창조적 행위의 물질성을 연구했으며, 금속이 고체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납의 형태는 그의 행위의 물리적 증거이자 조각적 대리물로 나타났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사용하는 코르텐cor-ten 강철 등 평범하고 귀중하지 않은 재료에 관심을 기울였다. <던지기 Casting>(1969)는 과정이 제작물이 된다는 점에서 프로세스아트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재료, 행위, 장소의 통합은 그의 장소 특정적 조형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세라에게 과정은 “서로 분리된 사물을 시간을 통해 경험되는 조형물의 장 속으로 용해” 시킴으로써 장 효과field effects로 나아가게 했다. 그의 장소 특정성은 과거 예술가들이 거의 개입하지 않았던 변경된 장소를 의미하며,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이다. 장소 특정성은, 미술을 소비될 수 있는 실체를 지닌 대상으로 보는 관념에 여전히 의존하는 미니멀리즘을 비판했지만, 한편으로는 미니멀리즘의 감각을 확장한 것이다. 장소 특정적 작업은 표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제거하고 산업적 건축 재료를 사용했으며, 대상보다는 공간의 형태에 관한 것이더라도 기하학적 형태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의 몇몇 원칙들을 확장시켰다.

세라는 실외, 도시 공간에서의 조각가로 작업을 계속하는 가운데 시각성의 종류를 추구했으므로 그의 조형물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곳에 놓여졌다. 그는 조형물 자체와 그 작업 구조에 주어진 성격 사이의 연계를 찾는 탐색을 난감하게 만들려고 했다. 조형물과 그것의 설치 장소 사이의 어떤 연관도 배제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확하고 심적으로 긴장된 비관계non-relation를 이뤘는데, 이것이야말로 조형물이 하나의 의미 있는 활동으로 구제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사고에서 조형물은 조형물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종속되고, 처하며, 채택되고, 예속되며, 요구되고, 유용되는” 참을 수 없는 위치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의 야망은 각 공공조형물 때문에 주위 공간이 “원초적인 조형물의 기능으로서 이해되는” 그러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것이지, 반대로 주변 공간이 조형물을 그런 식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그의 조형물이 갤러리 공간 안에서 작용하는 것과 비교해 어떤 변화도 갖지 않았다.

심리적 암시에 관심을 기울인 에바 헤세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유대인의 딸로 태어난 에바 헤세Eva Hesse(1936~70)의 가족은 1938년 이민을 떠나 1939년 뉴욕에 정착했다. 헤세는 1954년 쿠퍼 유니언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54~57년 추상표현주의의 그림을 그렸고, 1957년 예일대학의 미술건축대학에서 요제프 알베르스의 지도를 받았다. 헤세는 1964년부터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조형물을 시작했기 때문에 뇌종양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할 때까지 활동한 기간은 6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기이한 추상’의 대표적인 조각가로 명성을 얻었다. ‘기이한 추상’은 헤세의 친구이며 미술평론가 루시 리퍼드가 1966년 뉴욕의 피시바흐 갤러리에서 기획한 전시회 명칭으로 헤세의 작품도 포함되었다. 헤세는 형태를 뒤섞어서 관람자가 대립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을 즐겼다. 이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작품과 함께 그녀가 취하는 장난스런 포즈로도 알 수 있다.

모리스와 세라가 관람자로 하여금 사물을 현상학적으로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형태의 순수성이나 안정성을 동요시킨 데 반해 헤세는 그 동요가 심리학적으로 일어나게 만들었다. 미술에서 도덕적 요소는 배제될 수 없으며, 그녀의 작품에서는 자아성찰이 아닌 우의적 표현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환상이나 욕망, 충동에 의해 관람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브제들은 특별히 여성적인데, 이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자궁이나 부르주아의 작품에서 보듯 상처 같은 개념을 통해 여성 본질을 구체화하는 방식을 개척하려는 시도와 유사했다.

헤세는 1964년부터 타계할 때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 당시의 지배적인 미술운동인 팝아트와 미니멀아트의 패러다임인 연속주의serialism, 래스터 패턴raster patterns, 반복, 입방체, 산업재료의 사용과 제작과정을 언급하고 재해석한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유약함과 유기적으로 보이는 특성은 미니멀리즘 조형물의 차가운 엄격함에 인간성을 부여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부분-대상을 닮은 오브제를 통해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영역을 붕괴시켰다.

신체를 해부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키키 스미스
키키 스미스Kiki Smith(1954~)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아버지는 미니멀 아트의 선구자 토니 스미스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미술에 입문한 스미스는 기하학적 추상 조형물로 명성을 얻은 아버지와는 달리 구상 조각가로서 자신의 성장 배경인 가톨릭과 신화, 설화에서 소재를 찾았다. 그녀는 1979년부터 인간, 특히 여성의 신체를 주제로 삼았다. 1980년대 초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언더그라운드 비주류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1988년에 파부쉬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90년에 모마의 ‘프로젝트 Projects’ 전시회를 기점으로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적인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신체를 심미적 대상이 아닌 해부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며 응급의학기술 훈련을 통해 획득한 의학지식으로 늑골, 자궁, 신경, 근육, 난자, 정자 등 비가시적인 신체부위를 재현했다. 1982년 아버지의 죽음과 1988년 에이즈로 죽은 언니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질병과 죽음의 이미지가 결부된 파편화된 신체 조형물에 치중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미술계의 주된 담론으로 등장한 섹슈얼리티와 동성애, 그리고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신체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사상이나 개념을 본질로 간주한 개념미술
1965년경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은 곧 개념미술 예술가들로 불리게 될 예술가들과 뉴욕의 막스의 캔자스시티 주점에서 종종 만나 토론했다. 대학을 막 졸업한 그들은 그린버그에 의해서 주도되어온 형식주의를 해체하고자 했으므로 그들의 토론은 매우 이론적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토론했으며, 미술에서의 개념의 성격이 열띤 논쟁과 토론이 되었다. 미술은 침대나 의자처럼 명확하게 한정된 사물의 물리적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뉴욕에서 로버트 스미스슨이 매주 개최한 야외 모임에서, 늦은 밤 주점에서, 갤러리에서, 혹은 대규모 그룹전에서 미술에 관한 논쟁과 토론이 늘 있었다. 미술학교도 중요한 토론의 장이었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과 연관된 많은 예술가들이 학교에서 가르쳤고 그들은 이를 창조적 작업으로 여겼다. 그들 중 몇몇은 미술에 관해 글을 써온 사람들이었다. 도널드 저드는 1959년부터 써왔고, 멜 보크너와 댄 그레이엄은 이론가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1961년 반예술을 표방한 미국 퍼포먼스 예술가 헨리 플린트Henry Flynt(1940~)가 ‘개념미술’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1963년에 반예술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지만, 개념미술이란 용어가 이론을 갖추고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 Paragraphs on Conceptual Art」이 『아트포럼』지에 발표된 후부터였다.

어떤 예술가가 개념 형식의 미술을 사용할 때 이는 계획과 결정에 관한 모든 것이 미리 예상되고 그 실행은 무시해도 좋을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가 미술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된다. 이런 장르의 미술은 이론적이거나 이론의 예증이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여러 종류의 정신적 방법에 참여하며, 목적이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장인적 자질에 의존하지 않는다. 개념미술에 가담하는 예술가의 목표는 관람자에게 정신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을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일반적 규칙이거니와 그는 이러한 미술이 감정적으로 건조해지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개념미술은 1980년대 중반에 네오지오Neo-Geo의 대표적인 작품 등을 통해 개념미술에 대한 흥미가 실질적으로 되살아날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1980년대 중반의 새로운 관심에 대해 ‘신개념적Neo-Conceptual’이란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좀 더 쾌락적이고 대중적이 된 신개념주의는 한편으로 팝문화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오브제의 상태, 장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반향을 나타내는 개념미술의 회복으로 등장했다.

특유의 말장난으로 작품을 규정한 마르셀 뒤샹
개념미술의 선구자는 특유의 말장난을 즐긴 마르셀 뒤샹이었다. 해학은 그에게 중요했는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 Sad Young Man in a Train>(1911)를 예로 들면 그렇게 제목을 붙인 이유로 그는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하고 과거의 작품들을 집대성한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1915~23)는 특유의 말장난이었다. 이 작품을 간략하게 <큰 유리 The Large Glass>라고 한다. 뒤샹은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해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회화와 무관하다. ... 좀 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고 했다.

뒤샹의 말장난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 The Passage from Virgin to Bride>,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 The King and Queen Surrounded by Swift Nudes>에서도 나타났으며, 이런 식의 유머는 평생 지속되었다. 그것들 모두 입체주의 양식으로 기계운동을 묘사한 회화이다.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을 말한 솔 르윗
정식 교육을 받은 건축가 솔 르윗은 1967년에 “개념미술은 개념이 훌륭할 때만 훌륭하다”고 했다. 우리가 개념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주는가, 그리고 우리가 개념 일반에 관해 얼마나 수용적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렸다. 개념미술 예술가들은 미술에 대한 보다 넓은 개념을 형성하는 데 공헌했으며, 여기에 르윗의 공헌의 정도가 매우 높다.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 조지프 코수스
개념미술의 선구자로서 개념주의의 제반 원리에 대한 영향력 있는 옹호자로서 전면에 부각된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필명은 아서 R. 로즈Arthur R. Rose, 1945~)는 논문 「철학 이후의 미술 Art After Philosophy」(1969)에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외관’에서 ‘개념’으로 이행하는 혁명을 이룬 것으로, 결국 “근대 미술의 출발이자 개념미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미술 행위란 미술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 즉 수학적 공식이 자체적으로 증명되듯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동어반복으로 보고 <하나이면서 세 의자>로 예증했다. 그는 레디메이드를 사물, 언어, 사진 복제물 등 세 개의 연관된 부분으로 나눔으로서 확장시켰다. 순수하게 개념적인 이 작품은 하나의 의자와 실물대의 사진 그리고 ‘의자’라는 단어의 사전 속의 정의를 복제한 복사물 한 점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언어가 시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한 합법적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물과 관련된 모든 미학적 형식주의를 근절하고 또 하나의 반성적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코수스는 미술품과 그것의 기록을 구분하면서 “어느 누구도 내가 미술품으로 이 사진 복사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 사진 복사된 개념은 그것이 폐기되어도 상관없다. 부적절한 과정의 일부로서 다시 제작한 것은 그것의 재형형태와 연관된 것이지 미술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사진 복사를 가짜회화로 보기 시작하자 그 작업을 중단했다.

코수스는 “개념미술에 대한 ‘가장 순수한’ 정의는 그것이 의미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미술’이라는 개념의 기초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뒤샹 이후 예술가들의 특별한 가치는 그들이 얼마나 미술의 본성을 질문해보는가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또한 ‘그들이 미술의 개념에 덧붙인 것’에 관해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는데, 그에게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동어반복tautology이었다.

작품  

토니 스미스의 <아마릴리스 Amryllis>, 1962~68, 강철, 340-273.4-367cm.
도널드 저드의 <무제 Untitled>, 1967, 22.9-101.6-78.7cm 각각의 간격은 22.9cm.
르윗의 <Three x Four x Three>, 1984, 알루미늄에 흰색 에나멜, 429.3-430.5-429.9cm. Walker Art Center
안드레의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Aluminum and Magnesium Plain>, 1969, 1-183-183cm. The Nasher Collection
댄 플레이빈의 <무제 6 Untitled(to Donna) 6>, 1971, 노랑, 핑크, 파란 형광등, 코너까지 243.8cm.
애그니스 마틴의 <무제 No. 7 Untitled No. 7>, 1977, 캔버스에 인디아 잉크, 흑연, 제소, 182.9-182.9cm. Walker Art Center
로버트 라이먼의 <쌍둥이 Twin>, 1966, 면에 유채, 192.4-192.6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조반니 안셀모의 <비틀림 Torsion>, 1967~68, 시멘트, 가죽, 나무, 입방체, 100-100-100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로버트 모리스의 <Untitled (L beams)>, 1965 and 1967, 세 개의 채색한 합판, 243.8-243.8-61cm. 원래의 것은 사라짐.
로버트 모리스의 <무제 Untitled>, 1968, 펠트, 덧테쇠, 365.8-289.6cm, Walker Art Center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아크 Tilted Arc>, 1918, Corten steel, 30.5-305cm. 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 Fereral Plaza, New York
에바 헤세의 <무제(일곱 개의 막대기) Untitled(Seven Poles)>, 1970.
애셔의 클레어 코플리 갤러리 전시 장면, 1974, 로스앤젤레스
조지프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세 의자 One and Three Chairs>, 1965.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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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13  

 

 후기회화적 추상ㆍ슈퍼리얼리즘ㆍ뉴이미지
실재성을 강조하는 후기회화적 추상: 색면 회화와 하드에지회화
1. 후기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새로운 후기회화적 추상 경향의 뛰어난 선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표현적 붓자국이나 특징적 화면 질감과 같은 회화적 특질을 거부하고 액션페인팅의 자발적이며 충동적 방법을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명료하게 규정하여 변화가 없는 색의 영역으로 대체했다. 그들은 촉감이나 기타 착각을 일으키는 특질을 제거하고 미술 재료의 실재성을 강조했으며, 그려진 이미지와 물리적 미술품을 동일시하고 일체의 부수적 연상효과를 배제함으로써 순수 시각적 색채 미술을 목표로 삼았다.

‘후기회화적 추상’이란 명칭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4년에 기획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서의 ‘후기회화적 추상’ 전시회 카탈로그에 처음 언급한 데서 비롯했다. 그린버그는 이 명칭을 추상표현주의와의 결별을 표방하면서도 구상화로 전환하지 않고 폭넓은 다양한 독자적 양식을 보여준 화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색면 회화와 하드에지회화였다. 하드에지는 말 그대로 ‘뚜렷한 테두리’를 뜻한다. 후기회화적 추상화가들은 촉감이나 기타 착시현상을 유발하는 성질을 제거하고 재료의 실재성을 강조했다.

색면 회화Color Field
색면 회화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방법에 의한 것으로 1951년 잭슨 폴록이 시작했고, 이를 헬렌 프랭컨탤러가 받아들였다. 단색 회화를 지칭하는 색면 회화는 특히 색채의 농도와 채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회화이다. 단색 회화를 지칭하는 색면 회화는 특히 색채의 농도와 채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회화이다. 색면 회화에서 색채는 형상과 드로잉으로부터 해방되어 고유한 실재, 순수하게 시각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회화적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색은 독립적이고 현실과 무관하며 비촉각적 실재성을 지니게 된다. 종종 색면 회화는 거대한 규모로 제작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시각 영역을 점유하고 크기의 효과를 창출한다. 색면 회화의 선구자로 일반적으로 이브 클랭이 꼽는다. 현대적 단색 회화는 1952~53년경 당시 파리에서 작업하고 있던 엘즈워스 켈리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고, 1952년 이후에는 애드 라인하르트, 1960년대에는 바넷 뉴먼 등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하드에지회화Hard Edge Painting
하드에지 회화는 평론가 쥘 랑스네르가 1958년에 ‘기하학적 추상’이란 기존의 낡은 명칭을 대신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명칭으로 로렌스 앨러웨이가 1966년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체계적 회화’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이 명칭의 채택 의도를 밝혔다. 그는 1959~60년경부터 단순한 형태와 풍부한 색의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뤄진 새로운 추상 미술 흐름을 과거의 기하학적 추상과 차별화하여 부르기 위해 하드에지란 용어를 이미 사용한 바 있다. 하드에지 회화라는 명칭은 다소 서술적이고 모호하지만 1960년 직전에 출현한 순수 색면을 강조하고 치밀한 계획에 의해 그려진 회화를 차별화하여 부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드에지 회화는 윤곽선이 분명한 넓은 색면으로 이뤄지며 자연발생적ㆍ충동적으로 제작되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와는 달리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해 그려진다.

색면 회화의 선구자 헬렌 프랭컨탤러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는 1951년에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고 그의 드립핑 회화dripping painting에 영향을 받아 1952년에 얼룩 회화stain painting를 시도했다.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을 직접 사용함으로써 얼룩이 생기거나 물감이 스며들도록 하는 이 기법은 화폭과 형상의 구분을 극복하여 완벽한 평면성에 도달하게 했다. 캔버스의 넓은 면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부분적으로 추상적 색만을 칠한 양식으로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받았다. 프랭컨탤러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회화적인 붓자국을 없애 추상표현주의에서 색면 회화로 연결되는 비약적 발전의 중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는 1962년경부터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므로 색이 더욱 강렬해지고 염색 기법을 고수하여 그려진 이미지와 캔버스의 표면을 완전히 일치되게 했다. 그녀의 회화는 1953년 그린버그의 눈에 띄면서 뉴욕 화단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린버그는 색으로만 이뤄진 그녀의 회화를 모더니즘 추상화의 과제로 제시한 평면성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았으며, 여기에 더해 시적 감수성과 여성 특유의 우아함,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그녀만의 독특한 회화 방식은 그린버그를 매료시켰다.

1965년 큐레이터 헨리 젤드자흘러Henry Geldzahler(1935~94)와의 인터뷰에서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계획을 세우거나 마음속에 미리 구상하느냐는 질문에 프랭컨탤러는 “어떤 때는 느낌만 가지고 그리기 시작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세 가지 다른 파란색과 다른 색 하나를 가지고 그리기 시작하다 도중에 다른 색의 필요를 느끼고 사용하기도 한다. 또는 캔버스를 채우고 또 채우는 방법으로 작업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작업이 많이 가해졌거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캔버스를 버린다”고 했다.

프랭컨탤러는 1958년 로버트 머더웰과 결혼하고, 1968년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일대학 캘훈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에 선정되었다.

색을 서정적으로 이용한 모리스 루이스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Bernstein(1912~62)는 1954년에 프랭컨탤러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산과 바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그녀의 기법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형상-바탕의 환영적인 대비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을 없애고 색을 순전히 시각적인 현상으로 서정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방문했을 때 프랭컨탤러는 물감이 천에 배어들게 하고 얼룩을 남기는 새로운 기법을 막 시도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루이스는 그녀의 아이디어를 진전시켜 묽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며, 두꺼운 면포에 초벌칠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부분적으로 풀을 먹이고 그 위에 물감을 부었다. 결과적으로 물감은 캔버스 위에 층을 이루는 대신 염색용 염료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캔버스 자체를 움직이거나 캔버스를 살짝 고정하고 있는 틀을 움직여 물감의 흐름을 조정했다.

평론가 마이클 프리드는 루이스가 윤리적 모범이 된다면서 그에게 “회화는 감각적으로 즐겁거나 매혹적인 오브제의 생산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다. 오히려 회화는 윤리적이고 지적인 열정에서 영감을 받지 않는 한 하찮은 것이 되고 말며, 윤리적이고 지적으로 비범한 식별력이 배어 있지 않는 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 운명의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색면의 색조 변화도 거부한 케니스 놀런드
파리에서 오시 자킨에게서 사사한 케니스 놀런드Kenneth Noland(1924~)는 귀국 후 루이스와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50년대 초반 놀런드는 루이스, 프랭컨탤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의 일원이었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정확하게 계산된 기하학적 형태를 더 선호했으며, 이런 이유로 그의 회화는 하드에지 회화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정사각형 캔버스 위에 동심원을 그렸으며 뒤이어 V 형태를 그렸는데 간혹 마름모꼴의 셰이프트 캔버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폭이 넓은 직사각형 캔버스 위에 수평 줄무늬를 그렸다. 표면상으로 단순한 모티프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색의 관계를 단순화하고 색면의 색조 변화도 거부했다. 그는 캔버스의 형태 및 크기와 회화의 이미지 사이의 명확한 관계를 설정하고자 노력한 화가 중 가장 뛰어났다. 특기할 점은 놀런드뿐만 아니라 조각가들도 점점 더 커지는 크기와 새로운 재료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반영이기도 했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추상표현주의가 실패한 이래 미술을 역사적 사명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갈 유일한 방법은 그가 1964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붙인 명칭인 후기회화적 추상이었다. 카탈로그에 실린 글에서 그는 추상표현주의가 자신이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퇴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프랭컨탤러, 루이스, 그리고 놀런드를 미술 발전의 투사들로 보았다.

색만으로 환영적 공간을 창조한 줄스 올리츠키
러시아계 미국 화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2007, 본명은 Jevel Demikovski)가 1960년대 초에 그린 이른바 ‘중심핵’ 회화는 놀런드의 동심원과 루이스의 ‘펼쳐짐’을 연상하게 하는 육중한 윤곽선을 결합한 것이다. 1964년에는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전체론적 구성회화를 시작했다. 윤곽선이 없어진 그의 회화는 1960년대 후반 단색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제작하는 색면 회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주로 이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작품에서 그는 형태나 물감의 물리적 영향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색감이 만드는 순수한 시각적 장을 창출하려고 했다. 또한 염색 기법과 그 이후의 스프레이 뿌리기 기법을 결합함으로써 유사한 톤의 색띠들이 이루는 미묘한 대비와 함께 신비롭게 떠다니는 색채 안개로 밝고 현란한 색채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형태나 원근법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색만으로 환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균일한 색면으로 회화를 제작한 엘즈워스 켈리
엘즈워스 켈리Ellsworth Kelly(1923~)는 파리에서 아르프, 브랑쿠시, 캘더, 피카비아, 미래주의에 동조한 이탈리아 화가 알베르토 메그넬리Alberto Magnelli(1888~1971), 신조형주의의 영향을 받은 조르주 반통걸루Georges Vantangerloo(1886~1965) 등과 교류하면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이때의 실험은 그의 독특한 추상화의 토대가 되었다. 커다란 색면과 칼로 자른 것 같은 날카로운 형태는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특히 색채에 있어서 인간의 감수성과 색채에서 배어나오는 신비감을 철저하게 배제한 점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선명한 색채와 윤곽선의 기하학적 형태는 오로지 강렬한 시각적 효과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당시 유럽 미술계는 통일적인 기하학 형태가 미래사회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메타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면서 균형 잡힌 구성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기하학적 구성 방식은 의식적으로 개인의 분노를 새겨 넣는 액션페인팅의 붓질과 거리가 멀었지만 여전히 표현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화가는 이성의 씨실과 날실로 세계를 직조하는 조물주였기 때문이다. 켈리는 이러한 구성의 정서에 저항했다.

켈리는 미국으로 돌아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양식과 가치관, 방법 그리고 특히 의미의 문제에 있어 정반대편의 입장에 섰다. 그는 내용의 관념이 시각적 측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들의 접근방식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회화에 시각성opticality이 지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환영과 속임수를 거부하고 명확한 경계선으로 분할되고 색조의 변화가 없는 균일한 색면으로 구성된 회화를 제작했다. 그의 회화는 하드에지 양식의 상징이 되었다. 켈리는 “내 회화의 형태가 곧 내용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직접 바라보아야 충격을 받게 되고, 실제 경험이 불가피하다.

하드에지 회화의 기하적인 형태를 사용한 앨 헬드
앨 헬드Al Held(1928~2005)는 1960년경 표현적 추상화를 포기하고 색면 회화, 하드에지 회화와 유사한 매우 개성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프랭컨탤러, 루이스와 달리 그는 애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를 엷게 염색하는 기법을 채택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육중한 질감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임파스토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는 알파벳 문자에 기초를 둔 단순한 하드에지 회화의 기하적인 형태를 사용했다. 1967년경 이런 기하적인 형태를 합치고 겹치게 해서 상자 모양과 입방체 모양의 복잡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회화가 거의 저부조의 입체성을 획득할 때까지 표면의 층을 겹으로 쌓았다.

회화 패턴의 평면성을 강조한 프랭크 스텔라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1936~)는 재스퍼 존스의 <국기> 회화를 보고 새로운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크고 간결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회화를 선보였다. 그것은 형태와 색의 관계에 의한 조형을 배척하고 연역적 방법에서 화면 윤곽을 화면 내부에 되풀이하는 검정 줄무늬 패턴의 그림이었다. 1959년 모마의 큐레이터 도로시 밀러Dorothy Canning Miller(1904~2003)가 기획한 전시회 ‘열여섯 명의 미국인 Sixteen Americans’을 통해 스물세 살에 데뷔한 스텔라는 존스 방식의 이미지-사물을 그는 미니멀리즘 오브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삼차원의 회화 이미지를 제거하고 회화 패턴의 평면성을 강조했지만, 존스식의 모호함을 달가워하지 않아 평면의 뒤로 깊이 후퇴하는 듯한 환영을 거부했는데, 그것을 즐겁게 다룰 수 있는 역설이 아니라 오히려 풀어야 할 딜레마로 생각했다. 형상과 배경의 관계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직선과 대각선이 캔버스의 형태를 따라 반복되는 그림이 구성되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회화를 이념으로 보는 데 반대하면서 스텔라는 “회화에서 과거의 가치, 즉 인본주의적 가치를 찾는 사람들과 논쟁하곤 한다. 여러분이 그런 가치를 명확히 규정한다 해도 캔버스 위에는 늘 물감 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가정으로 끝나게 된다. 내 회화는 거기에 보일 수 있는 것만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사물인 것이다. ... 여러분이 보는 것이 여러분이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2. 사진이나 인쇄물에 의존한 슈퍼리얼리즘
후기회화적 추상, 색면 회화, 하드에지 회화 예술가들에 의해 모더니즘은 시각성이란 개념을 둘러싼 정통성을 구축했다. 회화가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정제함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점차 눈에만 제공되는 허구fiction의 구성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예술가들은 실재를 더욱 자세히 바라보며 하나도 남김없이 재현하려고 했다.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 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슈퍼리얼리즘Superrealism에는 조각까지 포함된다. 극사실주의, 혹은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런 양식으로 작업한 예술가 중에는 사진, 질이 좋은 이미지 원색 인쇄물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한 사람도 있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슈퍼리얼리즘도 외부에 대한 직접적 관찰이 아니라 사진이나 인쇄물에 의존하는 구상 양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슈퍼리얼리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지만, 대부분의 슈퍼리얼리즘 회화에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슈퍼리얼리즘은 도시의 현실에 대한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거의 임상적인 시선이었다. 도시의 현실은 장식과 외양에 치중했으며, 그 속에서 세부에 천착하는 클로즈업을 통해 의미의 공허함이 강조되었다.

도시의 풍경만을 다룬 리처드 에스티스
도시의 풍경만을 다룬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 에스티스Richard Estes(1936~)는 초기에 인물에 초점을 맞추다가 1967년경부터 건물을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특별한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거리풍경 단편을 묘사했는데, 유일하게 잘 알려진 건물을 그린 작품으로는 주문을 받아 제작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을 그린 것이 있다. 그는 상점의 쇼윈도를 즐겨 그렸고, 그의 화면에 표현된 쇼윈도는 그것이 퍼뜨리는 투명함과 반사만으로 가득 차있다. 모든 환각적 기교는 차가운 이미지와 황량한 공간, 번쩍거리는 많은 사물들을 구성해내기 위해 한데 모아졌다. 이런 작품에 부여되는 타당성 중 하나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내려지는 그의 미적 판단이다. 카메라는 오직 기술적 변수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객관성을 갖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 화가라고 할지라도 카메라처럼 너그러운 평등주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카메라 특유의 모든 변형들을 복제한 척 클로스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슈퍼리얼리스트 척 클로스Chuck Close(1940~)는 1961년 워싱턴대학을 졸업한 뒤 1964년부터 예일대학에서 판화 조교로 재직하면서 초기에는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주로 흑백으로 그렸으나, 후에는 슈퍼리얼리즘 회화를 추구했다. 작품의 소재로 주로 주변 인물의 얼굴을 다뤘다. 1960년대 중반에 그는 거대한 여권사진처럼 얼굴 정면을 그린 초상화가로 유명해졌다. 작은 신분증 사진을 거대한 크기로 만들고, 사각형 틀에 맞춘 크기의 확장을 통해 초상화 미술의 판별 기준을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광각렌즈를 사용하여 두상의 크기가 개개의 초점대로 나누어지는 방식과 같은 카메라 특유의 모든 변형들을 복제해내는 데 전념했다. 처음에는 검정색과 흰색만 사용하여 그리고 1970년경부터 색을 도입했다.

스냅사진 같은 느낌을 낸 게르하르트 리히터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일찍이 광고디자인과 무대배경을 그리는 일을 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는 서독으로 이주한 뒤 계속해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그곳에서 그는 피셰 루엑, 지그마르 폴케 등과 교류하며 플럭서스 및 팝아트의 영향을 받고 소비에트와 서양의 열강 모두를 염두에 둔 채 상당히 반어적으로 자본주의 사실주의capitalist realism 운동을 전개했는데, 자본주의 사실주의란 동독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대응책으로 당시 미국에서 선풍을 일으킨 팝아트의 독일식 변형이었다. 이를 계기로 리히터는 독일의 팝아티스트로 불리었다.

리히터는 끊임없이 누보 레알리슴과 앤디 워홀의 작업을 주시하면서 독일 회화를 1960년대 초에 등장한 다른 모든 예술적 작업과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바젤리츠는 대중문화와 사진 모두를 거의 계획적으로 비난하고 부정했으며, 회화가 대항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이런 주장은 리히터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는 모든 시각적 작업을 결정하는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민감성과 국가 정체성 이후의 모델인 전 지구적 문화생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히터는 1966년에 10개의 수직 캔버스를 완성했는데, 가로 9.5m 세로 2.5m에 달하는 앙상블 작품이다. 그는 이 캔버스들에서 상업용 페인트 제조사의 색상표를 정확하게 복제했으며, 제작과정에서도 상업용 페인트가 사용되었다.

3. 특이한 이미지를 추구한 뉴이미지
뉴이미지New Image에 속한 화가들 가운데 일부가 신표현주의로 분류되는 이유는 만화 같은 이미지와 신표현주의의 특징인 거친 손놀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뉴이미지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일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보여준 눈에 거슬리는 구상 양식을 지칭한 모호한 용어로 1978년 뉴욕의 휘트니 미국 미술관에서 개최된 ‘뉴이미지 페인팅’ 전시회에서 유래했다.

뉴이미지 화가들의 공통점은 인식 가능하지만 매우 특이한 이미지를 비전통적이고 비환영적인 문맥 안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1930년대 연재만화의 원시적이며, 노골적이고 바보스러운 유머를 흉내 낸 듯한 눈에 거슬리는 그림을 그린 필립 거스턴은 이 분야의 선구자이다. 뉴이미지 화가로 불린 미국 화가들로는 낸시 그레이브스, 수잔 로선버그, 엘리자베스 머레, 제니퍼 바틀렛, 조나단 보로프스키, 닐 제니, 로버트 모스코비츠, 니콜라스 아프리카노Nicholas Africano(1948~), 린다 벵글리스Lynda Benglis(1941~) 등이 있다. 1966년 예일대학에서 조각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미국의 조각가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1942~)는 전 세계 여러 도시의 공공장소나 빌딩 앞에 초현실적이고 몽상적인 대형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광화문 흥국생명 앞에 높이 22m의 <망치질하는 남자 Hammering Man>가 있고, 과천 현대미술관 정원에는 <노래하는 남자 Singing Man>가 있다. <망치질하는 남자>는 1979년 뉴욕의 폴라 쿠퍼 갤러리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1966년부터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닐 제니Neil Jenney(1945~)의 회화는 1978년 평론가 Marcia Tucker로부터 ‘조악한 회화Bad Painting’란 말을 들었다. 제니는 자신의 양식을 사실주의라고 했다. 그는 미니멀아트와 수퍼리얼리즘에 반발했다.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로버트 모스코비츠Robert Moskowitz(1935~)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와 뉴이미지 추상 사이에 위치한다.

채색한 청동으로 추상조형물을 제작한 낸시 그레이브스
낸시 그레이브스Nancy Graves(1939~95)는 지방 뮤지엄에서 근무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연과 인류학에 관심이 많았다. 배서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그녀는 예일대학으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에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가서 1년 동안 회화를 수학했다. 1965년 말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여행했으며, 1965~66년에는 피렌체에 머물렀고, 이후 뉴욕에 거주했다. 피렌체에서 사실적으로 채색된 실물 크기의 쌍봉낙타를 연작으로 제작하여 유명해졌다. 그레이브스는 “나는 평면적이고 반환영적anti-illusionistic 회화를 추구하던 당시의 지배적인 미학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런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크고, 부드러우며, 무겁고, 강하며, 힘센 그런 형태들을 이용했다”고 훗날 말했다. 그녀는 채색한 청동을 사용하여 추상조형물을 제작했으며 추상화와 영화도 제작했다. 그레이브스는 리처드 세라와 결혼했다.

추상에 일치하는 재현적 형상을 그린 수잔 로선버그
낸시 그레이브스와 퍼포먼스 예술가 존앤 조너스Joan Jonas(1936~)의 조수로 일한 수잔 로선버그Susan Rothenberg(1945~)는 뉴욕 주의 버펄로에서 태어났고, 코넬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에 세 점의 커다란 말 그림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를 닮은 크고 단순화시킨 말 회화로 그녀는 곧 명성을 얻었다. 추상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재현적 형상을 그린 말 연작은 1973년과 1979년 사이에 그려졌다. 이런 회화는 겉보기에 거친 특성으로 인해 1980년대의 소위 ‘조악한 회화’ 운동에 연계되었다.

여러 개의 캔버스를 모아 하나의 미술품을 만든 엘리자베스 머레이
엘리자베스 머레이Elizabeth Murray(1940~2007)는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의 밀스 칼리지에서 미술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버펄로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판화 공방을 운영하다가 1967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1970년대 초 추상화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1976년부터 직접 제작한 셰이프트 캔버스를 사용했다. 그녀는 불규칙한 캔버스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개의 캔버스를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때때로 캔버스를 상하, 혹은 층층이 겹쳐 퍼즐을 맞추듯이 배열했다. 그녀는 이런 작품에 대해 “나는 패널이 벽으로 던져져 그곳에 박힌 것처럼 보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충동과 주관적 경향을 다룬 제니퍼 바틀렛
제니퍼 바틀렛Jennifer Bartlett(1941~)도 밀스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머레이와 우정을 나눴다. 1963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그녀는 예일대학으로 진학하여 1965년에 졸업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미니멀아트가 유행하고 있었다. 바틀렛의 회화도 머레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풍부함과 확신에 찬 외관을 특징으로 한다. 그녀는 1960년대에 점 그림을 그리면서 흰색과 검정색 및 원색들만 사용했다. 그 색깔들은 모델을 그리는 데 사용된 테스토어Testor 표 에나멜의 작은 병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훗날 전기 작가 캘빈 톰킨스에게 말했다. “원색들만 사용하는 것이 늘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오렌지색이나 보라색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초록색은 꼭 필요했다.” 초록색에 대한 필요성을 용인하는 것은 원색들이 지닌 신플라톤주의의 함축과 원추의 축이 함축하는 기하학적 의미를 부정하는 걸 의미한다. 이는 그녀가 충동과 주관적 경향을 다루고 싶다는 의지를 상징한다.

작품
헬렌 프랭컨탤러의 <산과 바다 Mountain and Sea>(1952)
모리스 루이스의 <테트 Tet>(1958)
모리스 루이스의 <베타 카파 Beta Kappa>(1960)
케니스 놀런드의 <가뭄 Drought>
줄스 올리츠키의 <순식간의 러브랜드 Instant Loveland>(1968)
엘즈워스 켈리의 <오렌지·진한 회색·초록색 Orange·Dark Gray·Green>
앨 헬드의 <만테냐의 가장자리 Mantegna's Edge>(1983)
프랭크 스텔라의 <재스퍼의 딜레마 Jasper's Dilemma>(1962~63)
프랭크 스텔라의 <하트라 II Hatra II>(1967)
필립 펄스타인의 <이젤 반대편의 두 모델 Two Models from the Other Side of the Easel>(1984)
척 클로스의 <커다란 자화상 Big Self-Portrait>(1968)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에마 (계단 위의 누드) Ema (Nude on Staircase)>(1966)
두에인 핸슨의 <관광객 The Tourists>(1970)
아프리카노의 <종이 가운 A Paper Gown>(1978)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폴라 쿠퍼 갤러리에서의 설치 Installation at Paula Cooper Gallery>(1983년 11월 5일부터 12월 3일까지)
닐 제니의 <소녀와 인형 Girl and Doll>(1969)
로버트 모스코비츠의 <생각하는 사람 Thinker>(1982)
낸시 그레이브스의 <방향 전환 Zag>(1983)
수잔 로선버그의 <문신 Tattoo>(1979)
엘리자베스 머레이의 <아트 파트 Art Part>(1981)
제니퍼 바틀렛의 <소년 Boy>(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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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12

Popular artㆍNeo-Realism(Nouveau Realisme)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팝아트
팝아트는 주관적·이상적 영감에 의존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며, 객관적·외향적·비개성적이었다. 팝아트는 대중 매체와 밀접하게 관련 있으며 미술과 일상의 간격을 없애려고 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미술의 풍토에 있었고, 대중 역시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되지 못하기란 마찬가지였다. 사실 팝아트는 만연하던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물결로부터 매우 느린 단계를 거쳐 진전되어왔으며,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데 쿠닝을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꼽았다. 미국의 팝아트의 출발은 1955년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재스퍼 존스가 두드러지게 대중적인 이미지를 주제로 삼았을 때였다. 그렇지만 팝아트는 인기 있는 미술이 아니었으며, 약 5년 동안 지하운동underground으로 존재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선정적 특징 때문이었다. 팝아트는 동시대의 상업광고미술, 만화, 인기 잡지, 대형 광고판의 떠들썩함으로부터 그 주제와 이미지들을 취했다.

1960년대: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
1960년대 초는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의 공민권을 주장하는 저항의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런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미국 팝아트의 특징은 표면상의 냉정함으로 묘사하는 주제에 대해 참여의식이 결여되어 보이는 점이다. 거기에는 다다의 기교와 다다의 수법이 재생된 듯 보이나 그 이면에서 다다의 정신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팝아티스트들은 반미술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새로운 미술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팝아트는 한 마디로 고도의 자의식 운동이었다.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양식이라는 개념이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워홀의 경우 미술품이 수공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다. 많은 그의 작품들이 형판 인쇄를 통해 캔버스에 직접 옮겨졌다.

미국 팝아트의 근원은 존 케이지를 거쳐 다다와 마르셀 뒤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평범한 것이나 흔해빠진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팝아트는 1930년대 미국 정경회화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 미술 개념을 풍자하고 동시대 일상문화의 평범함과 통속성을 미술의 재료로 끌어들여 격상시킨 것은 앞서 일어난 영국 팝아트와 공유하는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팝아트는 1960년대에 널리 퍼져있던 정신에 대한 진정한 표명이었으며, 1970년대의 가장 특징적인 여러 미술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술사의 관점에서 볼 때 팝아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특히 존스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서와 같이 통속성과 평범함이라는 외관 뒤에 숨겨져 있는 고도의 솜씨와 디자인이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97)은 팝아트가 처음 등장해 충격을 준 시기였던 1962년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상업미술, 만화 주인공, 광고, 풍선껌과 아이스크림소다 등의 포장에 등장하는 통속적이며 저급한 이미지들을 사용한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리히텐슈타인이 연재만화를 복제한 방식은 보기보다 복잡했으며 보이는 것만큼 기계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연재만화에서 한두 컷을 선택해 거기에서 한두 개의 모티프를 스케치하고, 실물 투영기로 스케치된 드로잉을 회화 평면에 맞춰 확대해 캔버스에 전사한 뒤 그 이미지를 스텐실 점, 원색 채색, 두터운 윤곽선 등으로 채웠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산업적으로 생산된 레디메이드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계복제, 수작업, 다시 기계복제, 다시 수작업이란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이런 반복을 통해 수작업과 기계작업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회화적인 것과 사진적인 것을 교묘하게 뒤섞은 예술가로 앤디 워홀, 리처드 해밀턴, 제임스 로젠퀴스트, 지그마르 폴케,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업은 전성기 팝아트의 핵심을 이뤘다.

손으로 그린 기계복제 이미지의 기호들이 가득한 리히텐슈타인의 회화는 손으로 만든 레디메이드였다. 특히 인쇄의 흔적을 다시 손으로 채색한 벤데이 점benday dots들은 이런 모순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벤데이 점은 1879년 벤자민 헨리 데이Benjamin Henry Day(1810~89)가 고안한 것으로 음영을 단계적으로 조절해 인쇄된 이미지를 점들의 체계로 만드는 기술이다. 워홀이 ‘캠벨’이나 ‘브릴로’ 같은 상품명을 그대로 사용한 데 반해 리히텐슈타인은 차용한 상품 이미지들에서 상품명을 제거했다. 그는 대상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서 만화의 이미지마저 자신의 이미지로 보이도록 했다. 예술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흔적과 그것을 감추는 기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이 그의 회화에서 분명 발견되지만, 그런 긴장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나는 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구성하기 위해 드로잉한다. 가능한 한 최소한의 변형만을 시도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나의 작품은 만화와 연관되는 만큼 입체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만화가들은 몰랐더라도 만화는 미로나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월트 디즈니의 초기 작품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다. 그는 피카소의 모호한 명암의 기호들, 마티스의 대담하지만 장식적인 윤곽선들, 몬드리안의 원색들, 레제의 만화에 가까운 형상들을 사용했다.

네오다라란 용어가 『아트 뉴스』지에 처음 등장했다. 이 잡지의 편집자 토머스 헤스와 로버트 로젠블럼 같은 평론가들이 제스퍼 존스에게 네오다다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존스의 초기 작품에서 뒤샹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미 만들어진, 관례적인, 탈개인화된, 실제의, 외부적인 요소들을 사용했다. 그는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상징적인 것과 지표적인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체계의 기호들을 가지고 조작했다. 또한 실제 사물들을 모호하게, 심지어는 알레고리를 지닌 것으로 작업하는 것을 즐겼다. 존스는 뒤샹이 “인상주의에서 수립된 망막적인 경계를 뚫고 언어, 사유, 시각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영역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1960년대 초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은 1987년 때 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미술과 광고, 패션, 언더그라운드 음악, 독립영화 제작, 게이문화, 고급문화, 대중문화 사이에서 중심적인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 영화를 제작했으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첫 번째 앨범을 제작했고, 『인터뷰』지를 창간했다.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미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워홀은 1949년에 뉴욕으로 이주하고 잡지 광고, 쇼윈도 디스플레이, 문구, 책 표지, 앨범 커버 분야에서 일찌감치 성공을 거뒀다. 그는 1950년대 후반에 재스퍼 존스, 프랭크 스텔라,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구입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워홀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당시 미국은 광고업자와 홍보활동가의 시대이자 눈에 띄는 소비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었다. 워홀이 선택한 것은 만화와 광고였다. 어린 시절의 영웅주의 인물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형물 등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와 광고의 모사본이 깨끗하고 명료한 선을 특징으로 한 데 반해 워홀은 의도적인 실수와 미디어의 이미지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 혹은 레디메이드들을 사용하여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는데, 조작한 레디메이드였다. 그는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들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들 트로이 도나휴와 워렌 비티를 다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전성기는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한 1962년부터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1968년까지였다. 워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이 시기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워홀은 철학자였다. 명백한 자아의식이나 억제 없이 그는 끊임없이 생산했다. 미술이 용이하기를 바랐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며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우며, 대중적이고, 그리고 숨김없는 행동의 영역이 되는 구성물을 만드는 걸 용이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워홀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다. 그는 그 자신의 사례, 제스처와 희극적 행동, 영웅적 삶을 남겼다.

평범한 일상문화를 격상시킨 영국의 팝아트
팝아트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그러나 각각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이뤄진 대중 매체에 대한 탐구는 팝아트가 부상하게 된 기반이었으며, 탐구의 원천은 미국이었다. 영국의 팝아트 이론은 런던의 컨템퍼러리아트협회의 분과 기구로서 모임을 갖던 인디펜던트 그룹에 의해 1952년과 1955년 사이에 수립되었다. 미술운동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스터디 그룹에 가까운 인디펜던트 그룹은 미술 기법에 관해 토론하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팝Pop이란 단어는 이런 일상문화와 이미지를 지칭하기 위해 얼마 전 런던으로부터 이주하여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의 큐레이터 직을 맡은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들어낸 것으로 전문지식을 갖지 않은 일반인과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앨러웨이는 1954년 매스컴 광고문화에 의해 창조된 ‘팝아트 popular art’를 가리키는 편리한 명칭으로 처음 사용했다. 1956년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이것이 내일이다’ 전시회는 팝아트를 예고한 첫 전시회였다.

영국에서 팝아트와 네오리얼리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리처드 해밀턴은 광고 및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묘사하면서 현대 문명과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경향을 비판적으로 들춰내 간파할 수 있도록 치밀하면서도 신중하게 작품을 구성했다. ‘이것이 내일이다’ 전시회의 기획에 공동으로 참여한 해밀턴은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1956)를 출품했는데, 영국 팝아트의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것은 비미술의 영역에서 가져온 많은 기성 소재들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서양 남성의 삶과 소망을 요약한 작품이다. 해밀턴의 이 작은 콜라주(25-26cm)는 미술품보다는 포스터나 카탈로그와 같은 것으로 의도되었다.

영국 미술의 신동으로 부각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1937~)는 처음에 포토콜라주photocollage로 작업했으며, 한 작품에 폴라로이드 스냅사진을 적게는 다섯 장에서 150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진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포토몽타주photomontage(합성사진)로 제작된 인물화나 풍경화는 입체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올빼미 모양의 안경을 쓰고, 금실로 짠 재킷을 입은 모습은 회화에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회화에는 해학이 깃들어 있으며, 빼어난 묘사와 능력이 관람자로 하여금 감탄하게 했다. 그는 매우 다채로운 양식을 구사하면서 구사적인 표현에 언어적인 암시와 기하학적 패턴을 결합하기도 하고 종종 유행을 회화의 주제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대부분의 팝아티스트들과는 달리 광고와 대중 매체를 주요 주제로 삼지 않았다.

팝아트와 동의어로 사용된 네오리얼리즘(누보 레알리슴)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1930~2003)는 1960년 10월 27일 파리 이브 클랭의 아파트에 모인 일군의 예술가들을 설득하여 하나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켰는데, 누보 레알리슴이다. 선언문은 단 한 문장으로 이뤄졌다. “누보 레알리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누보 레알리슴=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 운동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은 1970년 이후의 일이었다.

누보 레알리슴이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붕괴였다. 프랑스 군대는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 군대에게 기습적으로 포위당해 항복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통치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제국이 통합되었다는 프랑스 매체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알제리의 아랍인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하고 알제리와 아시아에서 혐의자들을 고문하고 즉결 처형했을 때 프랑스 문화는 그 독특한 문명적 힘을 결코 과시할 수 없었다. 누보 레알리슴은 네오아방가르드가 놓인 특수 조건을 가장 체계적으로 인식한 운동이었다. 그 조건이란 비판적 부정성을 의도적으로 취하는 일과 문화 사업이라는 의제를 긍정하는 일 사이에 놓인 네오아방가르드의 바꿀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을 말한다. 누보 레알리스트들은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1931~36년 시기의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재발견, 재생, 재분배했다. 아르망은 레디메이드에서, 클랭은 모노크롬에서, 탱글리는 키네틱 조형물에서, 뒤프렌, 앵스, 로텔라, 빌글레는 콜라주에서 패러다임을 바꿨으며, 이는 이후 광고업계가 아방가르드 문화를 조금씩 차용하여 간 방식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누보 레알리슴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대중 매체에서 평범하고 사실적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대량생산된 일상의 소비상품을 비롯한 실제 사물들을 아상블라주로 만들거나 화면에 부착한 경향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팝아트와 동의어로 혼동되어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이브 클랭은 1958년에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를 설득해 흰색으로 칠해진 텅 빈 갤러리를 보여준 <공허 Le Vide>(예일 200)로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같은 전시실에서 이전에 전시되었던 작품이 방사하는 광선을 소거해버리려고 벽을 흰색으로 칠했다. 그는 개막을 위해 문 밖에 공화당 경비대를 배치한 채 텅 빈 전시장으로 구성된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우리는 반항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휴가 중인 예술가이다”라는 그의 말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클랭은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신봉하는 장미십자회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에 체류하며 유도를 배워 유단자가 되면서 유도를 통해 선불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선불교가 그로 하여금 “미술 개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소망을 실현시키게 해주었다. 이런 사상을 통해 그는 1946년 캔버스를 한 가지 색으로 균일하게 칠한 비대상 회화인 모노크롬 작업을 시작했다. 모노크롬 회화는 부재 상태in absentia의 언어, 혹은 침묵의 회화를 말한다. ‘클랭의 국제 파란색 International Klein's Blue(IKB)’이라고 명명한 독특한 파란색을 사용하여 모노크롬 회화, 조각된 형상, 캔버스 위의 스펀지 부조를 제작한 ‘파란색 시기’를 맞이했다. 파란색은 하늘의 색, 혹은 정신적인 것의 색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색을 통해서 나는 우주와 완전히 동일해지는 느낌을 경험한다. 나는 정말 자유롭다”고 했다. 그의 회화의 목적은 비물질적인 것이었다.

클랭은 붓자국을 피하기 위해 캔버스에 분무기로 물감을 뿌리면서 파란색을 직사각형 패널에 칠했다. 그는 붓 대신에 가옥도장용 롤러를, 유화물감 대신에 회화적 흔적이 없는 메마른 표면을 산출하는 현대적 화학 용매를 사용했다. 그는 스펀지에 물감을 뿌려 화면에 붙였으며, 스펀지 자체를 조형물로 전시하기도 했다.

아르망(아르망 페르낭데즈)Arman(Armand Fernandez, 1928~2005)은 1967년 이브 클랭 및 영화배우이며 가수 장-클로드 파스칼Jean-Claude Pascal(1927~92)과 함께 유럽을 무전 여행하면서 세 사람 모두 가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망이란 이름은 1958년 카탈로그 표지에 식자공의 실수로 잘못 쓰인 걸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아르망의 오브제 미학은 아방가르드가 약속한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추구하거나 일상적 기능에서 해방된 초현실주의 오브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끝없이 확장되고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생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동일한 부류로 배열된 사물들은 인위적으로 분류될 수 없는 세계의 무수한 샘플로 보였다. 아르망은 조만간 조형물이 상품의 진열기법을 따르게 될 것이며, 미술관의 전시 관례도 백화점의 상품진열 방법에 동화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레스타니는 선언문에서 “누보 레알리슴=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고 밝혔지만, 아르망이 내놓은 작품은 소비사회를 어느 정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비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작품은 과잉생산과 낭비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작품
12-1 워홀 38: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1953)
래리 리버스는 1940년대 초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고 1944~45년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19세기 화가 에마뉴엘 로이체Emanuel Leutze(1816~68)의 대중적 아카데미즘 회화에 매료된 뒤로 대가들 작품을 주제로 삼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로이체가 1851년에 그린 애국적 주제의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리버스가 진부한 역사적 주제를 사용하든 동시대 삶의 평범한 오브제를 사용하든 그의 작품에는 통일성이 나타났으며 그는 액션페인팅의 회화적 기법을 통해 변형을 가할 수 있었다.

12-2 워홀 40: <나는 흑인 올랭피아가 좋다>(1970)
마네의 <올랭피아>(1863)를 복제한 것으로 한 세기 전의 주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리버스는 창녀 올랭피아 대신에 흑인 여인의 누드로 관람자에게 새삼 충격을 주려고 했다. 그의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팝아트라고 하기에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의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중간에 위치하지만 그의 개성은 팝에 더 가까웠다.

12-3 로이 5: <예술가의 작업실: 댄스>(1974)
리히텐슈타인은 또한 세잔, 피카소, 마티스, 레제, 미로, 몬드리안을 위시해 모더니즘 대가들의 회화와 그리스 신전, 일몰 광경, 풍경 등을 찍은 그림엽서, 1920년대의 변형된 아르데코 디자인을 풍자적으로 개작했으며, 키치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가 뛰어난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팝아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그는 모더니즘 양식은 물론 고대 그리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기와 그리기의 다양한 양태들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1963년 『아트 뉴스』지의 편집자이자 평론가 스웬선과의 인터뷰에서 “팝아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리히텐슈타인은 응답했다.

“나도 모른다. 상업미술을 회화의 주제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야비해서 아무도 벽에 걸려고 하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걸었다. 물감이 뚝뚝 떨어진 걸레를 벽에 거는 것도 거의 받아들여졌으며 이런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익숙해졌다. 모든 사람이 증오한 것 중 하나는 상업미술이었다. 그들이 충분히 증오하지도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기 Flag>(1954~55) 존스가 25살 때 그린 것으로 전설의 작품이 되었다. 성조기의 역사는 필라델피아의 재봉사 벳시 로스Betsy Ross(1752~1836)가 즉흥적으로 만든 수공예품에서 비롯되었다. 존스는 꿈속에서 커다란 국기를 그렸다면서 아이디어를 꿈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납화encaustic, 즉 뜨거운 왁스에 안료를 섞는 기법을 사용했다. 색띠와 별 그리고 푸른 바탕은 신문지 조각들을 모아서 각각 따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어디에서 콜라주가 끝나고 어디에서 회화가 시작되는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는 신문지 조각들을 해당 색의 왁스 속에 담가두었다가 알맞게 물이 들면 바닥의 얇은 바탕천 위에 굳혔다. 똑같은 과정의 반복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국기>에는 ‘공상pipe dream’이란 단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존스는 그림의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추구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붓놀림을 사용하면서 납화법을 통해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 이런 색조로 그린 미국 국기, 알파벳, 숫자, 과녁판 등은 그림이 사물 자체임을 입증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국기와 과녁판에서 상징적 이미지는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환상과 실제의 구분을 파괴한 후 그것들을 재정립하면서 창조과정 자체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최면술 같았으며 냉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음료수 애일 캔Ale can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하나는 다 마신 빈 깡통으로, 다른 하나는 음료수가 들어 있는 깡통으로 제작해 라우셴버그와 자신을 가볍고 무거운 관계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존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보는 것이 대조가 되게 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르네 마그리트가 담배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넣었듯이 그런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그리트는 “사물은 사물이 지닌 명칭이나 이미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회화에서 글자는 이미지와 같은 물질이다”라고 했는데, 존스가 회화에 사용한 글자는 마그리트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워홀은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가로세로로 반복하여 대량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인 요소로 사용했다.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 다르게 그렸다. 고르게 색칠한 병들은 반듯한 모습이지만, 어떤 병은 고의로 엷은 색조로 칠하고 어떤 것은 마시고 난 후의 빈 병이었다.

마릴린 먼로가 1962년8월 5일에 자살하자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했다. 즉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하고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그는 1950년대의 마릴린 사진이 수록된 책을 참조했다. 그녀의 목 아래 부분은 삭제하고 얼굴만 크게 실크스크린하거나 커다란 캔버스를 실크스크린 한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혹은 20개를 병렬하기도 했다. 마릴린의 초상도 수프깡통이나 우표, 혹은 코카콜라 병처럼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제작했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다가 나중에는 마릴린의 얼굴, 머리카락, 눈썹, 입술, 목덜미에 여러 가지 색을 칠했다. 캔버스에 먼저 색을 칠해놓고 색이 마르면 그 위에 그녀의 형상을 실크스크린 했는데, 사진의 이미지가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바탕의 밝은 색들과 어우러졌다. 실크스크린은 원래 상업용으로 활자 인쇄와 장식 인쇄에 사용되었고 포스터를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실크스크린이 순수 미술에 도입된 건 공황 때였다.

그는 <100개의 마릴린이 하나보다 낫다>에서는 많은 수로 반복했다. 반복에 나타난 연속주의serialism는 미술의 신비나 아우라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위계적 구성의 질서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졌다. 연속적인 이미지는 최면의 효과를 지닌 주문呪文으로 읽혀졌다.

근처에서 프랑스의 보잉 707기가 추락한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이다. 그는 죽음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듬해에 자동차 전복사고, 자살 현장사진, 사형수를 살해하는 전기의자 등을 제작했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실크스크린 뜨기가 빠르고 쉬웠다. 실크스크린 뜨기가 실재를 묘사하는 사진의 주장에 대한 효력을 약화시켰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들의 어리석은 리듬이 받아들인 진실을 이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단어들을 스텐실로 디자인 같은 형태로 제작하여 그림이라고 주장한 개념 미술의 선구자이다. 자동차 운전자에게 주의를 주는 표시판 같은 인디애나의 작품은 개념의 중요함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그는 단어를 초보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어릴 때 기차를 타고 가다가 거리에 걸려 있는 ‘식사’라는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려 제작한 <식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 기억 속의 많은 것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한 작품이다.

그가 ‘죽음’은 식이요법Dietary을 줄인 말이라고 했지만, 식이요법의 앞 글자 DIE는 ‘죽음’이란 뜻이므로 인디애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의 딱딱하고 단순한 형태의 글자와 숫자는 네온사인과도 같은 빛을 발했다. 그는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글자를 삼차원으로 제작한 뒤 색을 칠했다.

스톡홀름 태생으로 시카고에서 스웨덴 외교관의 아들로 성장한 클래스 올덴버그는 예일대학에서 영문학과 미술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라우셴버그의 작품처럼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거리에서 가져온 쓰레기 같은 것들을 멋들어지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콜라주했다. 그는 1961년 맨해튼 이스트 2번가에 107번지에 있는 상점을 빌려 작업장으로 사용하면서 ‘상점’이라고 부르고 채색된 회반죽으로 제작한 넥타이, 푸른 셔츠, 모자, 여성 내의, 모자, 손목시계, 구두, 코르셋, 바지, 알사탕, 도넛, 햄버거, 갈비, 소시지, 구운 감자, 케이크와 파이 등 100개가 넘는 오브제들을 팔았다. 그것들은 실재 사물로 착각하도록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거리는 저렴한 상품이나 중고 상품을 판매하는 싸구려 상점들이 즐비한 맨해튼의 한 구역이었다. 이 새로운 장소에서 대량 소비되는 식품이나 자잘한 물건들의 복제물들로 가득 채워진 올덴버그의 상점은 이웃한 상점들과 유사했다. 그의 오브제들 모두 악취미에서 나온 야한 색에, 급하게 흘러내리는 자국을 남기는 방식으로 채색되었으므로 역사적ㆍ사회적으로 연상될 만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상점은 소비문화가 상품을 팔기 위해 진열하는 방식을 모방한 일종의 환경으로 상업 활동에 대한 유머가 있는 패러디였다.

베네수엘라 부모로부터 파리에서 태어난 마리솔 에스코바르는 1953~54년에 ‘스페인 정복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미술’ 전시회를 보고 테라코타로 장난기 넘치고 에로틱한 소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1955년경부터 나무로 등신대의 인물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품의 주제로 가족, 사교계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를 다뤘다. 그녀의 인물은 상자 모양으로 된 나무 몸통에, 종종 에스코바르 자신의 얼굴이나 팔다리를 석고로 형을 떠서 제작한 얼굴이나 팔다리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또한 인물상에 목걸이, TV 수상기, 거울, 꽃병, 우산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여 거의 아상블라주와 유사하게 제작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은 유머와 사회 풍자, 캐리커처를 결합하는 독창적 방식을 보여주었지만 견고함과 강한 힘도 지니고 있다.

톰 웨설만은 고교시절에 스포츠와 만화를 좋아하여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 그는 앙리 마티스와 데 쿠닝의 영향을 받아 대형화를 그리면서 데 쿠닝의 야성적인 색의 사용과 마티스의 세련된 조화를 꾀했다. 그의 작품의 독특한 점은 원근법을 배제하는 가운데 콜라주 같은 방법, 즉 회화와 비중이 같은 오브제 등을 혼합매체mixed media로 사용한 것으로 마티스의 회화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였다.

포드Ford 사의 휘장 아래 대량생산된 상품들과 공장에서 제조한 전후 세대의 생활에 적합한 영화, 텔레비전, 깡통에 포장한 가공식품, 편리한 전기기구, 남성 육체미사진과 여성 누드사진이 있고, 거실 벽에는 「젊은이들의 사랑」이란 만화 표지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지배적인 요소는 근육과 젖가슴의 팽창 그리고 불가능한 길이로 연장된 진공청소기 호스의 팽창이다. 페니스인 양 투시팝 막대사탕을 든 보디빌더와 전등갓을 쓴 풍만한 몸매의 여성이 가정집 실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아도취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를 가리키는 팝-페니스와 장식된 가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대리물과 상품으로만 연결된다. 얼핏 가정을 통제하는 듯 보이는 여성 또한 상품이다. 심지어 보디빌더에 대한 환상을 품을 때조차도 그녀는 벽에 걸린 가장의 초상화와 신문이 놓인 안락의자가 암시하는 부재중인 집주인에 의해 감시당한다. 더욱이 외부세계는 철저하게 실내로 침투해 들어온다. 창문을 통해 흑인 얼굴로 분장한 러시아 스레드니케 태생의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가수이자 배우 알 졸슨Al Jolson(1886~1950)의 광고에 담긴 미국의 인종적 위선을 볼 수 있다. 최초의 유성영화로 1927년에 제작된 졸슨의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는 찰나적 쾌락으로 가득 찬 소비자의 매료시킨 영화였다. 평범한 것에서 미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리처드 해밀턴의 주장은 반전통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의 방법은 전통적이었다. 그의 회화는 오감으로 지각한 세계를 그린 르네상스 회화와 실내의 장면을 묘사한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와도 유사한 데가 있다.

팝아트의 선구자 에두아르도 파올로치는 1947년부터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병치하는 초현실주의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실재 사물과 기존 회화 재료를 결합하고 수정하는 원칙을 구체화한 콜라주를 제작했다. 그는 미국의 상품들이 가장 일상적인 것조차도 전복적인 마력을 갖고 있음을 알고 미국 잡지들을 수집한 후 그 잡지들을 활용해 엄청난 양의 콜라주 구성물을 생산했는데, 전후 재건이 시작된 초창기였다. 이 작품은 유럽인이 미국인에 대해 흔히 표현하는 경멸적인 태도, 즉 미국인은 위생에 대한 얄팍한 만족과 병적 집착을 갖고 있다고 보는 태도를 보여준다. 미국 내의 경제적, 인종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 작품은 틀린 것일 수 있으나 영국인의 맥락에서는 일정한 진실이 있는데, 특히 점잔을 빼고 속물적이며 모험을 삼가는 영국인 특유의 미술문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러했다. 이런 문화에 대한 항변이 팝아트를 낳았다. 그는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센트럴 미술디자인학교에서 직물디자인을 가르쳤고, 1955~58년에는 세인트마틴 미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60년에는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서, 1968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그리고 영국 왕립 미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1974년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했으며, 1979년에 런던의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89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의 회화에는 해학이 깃들어 있으며, 빼어난 묘사와 능력이 관람자로 하여금 감탄하게 했다. 그는 매우 다채로운 양식을 구사하면서 구사적인 표현에 언어적인 암시와 기하학적 패턴을 결합하기도 하고 종종 유행을 회화의 주제로 이용하기도 했다. 회화에 환영적인 실재를 표현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심오함과는 대조적으로 회화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를 반복적으로 결합하면서까지 최대한 쉽게 이해되도록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호크니는 키타이와 장 뒤뷔페의 영향을 인정했으며 대부분의 팝아티스트들과는 달리 광고와 대중 매체를 주요 주제로 삼지 않았다.

이브 클랭은 1960년 높은 데서 뛰어내렸는데, 말 그대로 허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증거로 남기기 위해 사진가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했는데, 사진은 위조된 것이다. 원래는 열두 명의 유도선수들이 그가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방수포를 붙들고 아래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위조된 사진은 클랭이 출판한 『일일신문 Journal d'un seul jour』에 실렸다. 『일일신문』은 가짜신문이었다.

아르망은 거리에서 발견한 쓰레기들을 화랑으로 가져와 가득 채웠다. 클랭의 ‘공허’ 전시회에 대한 정반대 의미로 의도된 것이었다.

대니얼  스포에리는 1960년에 처음으로 덫에 걸린 회화tableaux pieces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일상적인 물품들을 받침대에 고정시키고 그 전체를 벽에 걸도록 되어 있었다. 극도의 수정만을 가한 물건의 표면에 직접 풀을 먹인 ‘덫회화’는 스포에리가 시작한 것으로 이후 다른 누보 레알리슴 예술가들도 사용한 고안물이 되었다. 덫회화란 예를 들면 식사와 같은 실제 사건의 우연한 흔적인 접시, 병, 유리컵 등을 판자에 그대로 붙이고 이를 회화처럼 벽에 걸어놓은 것이다. 우연히 벌어진 상황에서 비롯된 덫회화는 ‘냉동된 기록’, 혹은 실제의 사건에 대한 지속된 기억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는 “덫회화가 미술품으로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차라리 일종의 정보이자 도발이며, 보통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에 눈길을 줍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미술이 무엇입니까? 일종의 삶의 형식 아니겠습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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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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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블라주
아상블라주와 정크아트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데, 정크아트 예술가들은 종종 정크 같은 것들을 조립하여 표현적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 목적을 위해 비미술의 재료를 조형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용어이므로 팝아트, 표현주의, 정크아트, 혹은 펑크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으며,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53년 장 뒤뷔페가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것으로 입체주의 콜라주보다 더 많은 물질을 부착하는 작품을 지칭했다. 콜라주는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풀로 붙여 제작한 작품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1954년에 아상블라주란 명칭을 풀 먹인 딱딱한 종이, 나무토막, 스펀지 등의 여러 파편으로 작은 형상을 만드는 기법에도 확대 적용하며 1956년 얇은 금속 조형물,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형물들로 이뤄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윌리엄 자이츠William Seitz(1914~74)는 아상블라주를 “색을 칠하거나 드로잉하거나 깎거나 모방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조립하며,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이미 형태를 갖춘 물질이나 공장의 생산품 또는 미술적 재료가 아닌 것들을 미술품의 요소로 사용하는 구성 미술”로 규정했다.

정크아트
로렌스 앨러웨이Lawrence Alloway(1926~90)가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작품을 정크아트라고 부른 후 이 명칭이 금속 조형물, 망가진 기계부품, 쓰다 남은 목재 등으로 제작한 조형물에도 확대 적용되었다. 정크아트는 좋은 재료를 고집하는 전통에 반대하고 쓸모없는 재료, 폐품, 도시의 폐기물 등으로도 미술품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을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195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었으며, 미국의 정크아트는 안토니 타피에스를 비롯한 여러 스페인 예술가들의 작업과, 알베르토 부리, 그리고 아르테 포베라 그룹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작업과 유사했다.

미국에서 정크아트의 기원은 라우셴버그의 ‘콤바인combines’, 혹은 결합 회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우셴버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쿠르트 슈비터스의 콜라주 방식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다양한 목적을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콜라주 방식을 활용했으며, 그 후 타블로와 아상블라주로 이어졌다. 아상블라주와 정크아트를 구분하기 어려운 까닭은 재료의 측면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물질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정크아트로 구분하더라도 작품이 조립으로 구성된다면 그것은 또한 아상블라주가 되기 때문이다.

쿠르트 슈비터스와 조지프 코넬의 차이:
쿠르트 슈비터스는 1918년부터 버려진 버스표, 담배껍질, 우표, 극장표, 잡지, 못, 머리카락, 낡은 상품 카탈로그, 끈 등을 사용해 콜라주로 회화적 구성물로 구축했는데,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시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의 시에서 표현하려는 글의 의미와 시적 리듬이 세심하게 균형을 잡고 있듯이 그의 콜라주 작품에서는 우연히 찾아낸 재료들의 배치도 균형을 이루도록 주의 깊게 구성되었다. 비꼬는 듯한 낭만주의와 부조리의 재치 있는 결합을 보이면서도 탄탄한 통제를 보여준 그의 작품은 당시에 콜라주로 불리었더라도 아상블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슈비터스는 닥치는 대로 수집한 종이들을 콜라주로 구성한 후 ‘메르츠 회화’로 명명했다.

시적이고 향수적이며 서정적이기는 조지프 코넬의 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슈비터스와 달리 코넬은 폐기물이나 쓰레기가 아니라 한때 아름답고 소중했던 물건들의 파편에 매료되었다. 종종 두려운 낯설음의 것과 유행이 지난 것들을 초현실주의풍으로 불합리하게 병치시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오브제들이 서로 공통점이 없더라도 그는 기억이란 매개를 통해 주관성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어떤 상자에는 욕망이 순환하고, 어떤 상자에서는 욕망이 고독해 보이거나 자위하는 듯 때로는 죽어 있는 듯이 보였지만, 구성주의의 형식적 엄격함과 초현실주의의 생동감 있는 환상이 조화를 이뤘다. 상자 안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꿈이 갇혀 있는 그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추억과 꿈을 상기하게 했다. 그의 작업은 강박상태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러한 강박적 상상력에 의해 탐험된 풍요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으며, 그가 사용한 물질은 팝 물질이었으므로 그를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1950년대 중반 물질들을 콜라주한 라우셴버그와 존스는 코넬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침을 뱉듯이 토해내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미술”이라고 말한 쿠르트 슈비터스는 미술품을 예술가 개인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예술가와 대상의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런 관점에서 그의 결정은 최고의 권한을 갖는다. 대중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중요하지 않는데, 대중은 결국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부터 하노버에 있는 발트하우스슈트라 5번가의 자신의 집에 <메르츠바우 Merzbau>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석고와 나무로 만들어진 뼈대에 미로와도 같은 이 구성물은 그의 집안에 있는 한 방으로부터 시작해 천장에 난 구멍을 뚫고 마침내 위층의 다른 방들 쪽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삶과 관련된 오브제들의 축적으로 끊임없이 자라난 이 구성물은 허망한 것들로부터 미술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보여준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은 슈비터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메르츠바우>를 “관능적 허망의 대성당”으로 불렀다.

물체의 난입이 미술의 범주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미술이 순수 미술 체제의 종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해럴드 로젠버그는 이러한 위기의 규모와 중요성을 1972년에 “미술의 본질이 불확실해진다. 적어도 모호하다. 그 누구도 미술품이, 또한 더 중요하지만 미술품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회화에서처럼 어떤 예술적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 그것은 내가 바로 ‘불안한 대상’이라고 부른 그것이다. 즉 나는 그것이 걸작인지 실패작(폐물)인지 모른다. 슈비터스 콜라주의 경우처럼 그것은 문자 그대로 둘 다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슈비터스의 선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사회를 비판하려는 예술가들에게 폐물이 훌륭한 재료로 각광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정크아트를 탄생하게 했다.

아상블라주와 환경미술의 기수 루이즈 네벨슨은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들을 평편하게 조립하여 균일한 검정색, 후에는 흰색이나 황금색으로 채색했다.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을 제작하고 상자 안에 수백 개의 물질을 배열했다. 네벨슨은 1976년에 자신의 작품에 관해 “누구에게도 사용되지 않는 폐기되고 나동그라진 것을 아름다운 장소인 미술관, 도서관, 대학, 저택에 가져다두는 것으로 ... 이런 낡은 나무는 역사와 드라마를 지녔다고 생각되었으며, 이는 마치 빠뜨리고 보거나 미처 보지 못한 바워리가 빈민굴에서 수년 동안 지내온 사람을 그곳에서 꺼내오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가 1951년 여름 내내 제작한 <흰색 회화>에서 발견되는 긍정적 확신은 작곡가 존 케이지가 전개한 입장과 유사한데, 케이지는 행위의 인위성, 즉 작곡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에 대한 반대로서 무작위를 찬양했다. <흰색 회화>는 케이지와의 상호교류를 통해 탄생되었다. 하나에서 두 개로 다시 세 개, 네 개, 다섯 개, 일곱 개로 단순한 수열공정에 따라 제작된 <흰색 회화> 연작은 내러티브는 물론 지시대상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대신 그 형태는 주변의 떠도는 인상을 붙잡는 듯했으며, 그 방식은 케이지의 <4분 33초>가 청중의 숨소리나 기침소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과 동일했다. 실제로 케이지가 언급한 대로 <흰색 회화>는 먼지입자, 빛, 그림자가 착륙하는 활주로였고, 라우셴버그 또한 이 연작에 대해 “그림자를 포착하는 흰색 회화”라고 했다.

자동차 몸체를 찌그러트린 세자르
세자르는 기계적 압축의 결과물에서 본질적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금속의 새로운 상태를 보았다. 그는 1954년경부터 스스로 ‘혼합물’로 지칭한 종합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철, 스프링, 얇은 깡통 등을 철사로 조립해 곤충을 닮은 괴상한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자동차 몸체를 수압 프레스로 찌그러트려 만든 조형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통제된 압착compressions dirigées’으로 불리었다.

용접하여 금속조형물을 제작한 리처드 스탕키에비치
스탕키에비치는 1951년 어느 날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화실 뒷마당을 파다가 벽돌과 녹슨 쇠파이프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용접하여 조형물의 부분으로 사용했는데, 아상블라주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사실주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런 아상블라주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명의 찌꺼기이다. 그는 1951~52년에 피카소와 훌리오 곤잘레스의 전례를 좇아 미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와 함께 녹슨 쇳조각들을 용접했으며, 이런 경험으로 버려진 쇳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후의 작품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구성으로 변했고, 1960년대에는 점차 밝고 서정적으로 진전되었다. 1970년대에는 다시 양식적 변화를 맞아 망치로 두들긴 원과 사각형의 강철들이 서로 맞물리는 추상 구성으로 전환했다.

추상표현주의와 조형주의의 원리를 이용한 마크 디 수베로
상하이에서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마크 디 수베로는 쇠막대기, 자동차 타이어, 쇠 끈, 의자, 그리고 건축재료 등과 쓰레기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들을 혼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환경 아상블라주 조형물을 제작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웅대한 에너지와 조형주의의 공학적 원리를 반기하적인 균형으로 나타냈다. 디 수베로는 1960년대에 철거된 건물이나 쓰레기장에서 가져온 갖가지 물질들로 기념비적인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면서 정크아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장소와 위치로서 규정되는 상황 미술
상황 미술은 영국 예술가들의 그룹 명칭으로 1960년 런던의 R.B.A. 갤러리에서 열린 ‘상황: 영국 추상화’ 전시회에서 명칭이 비롯되었다. 예술가들이 기획한 전시회의 조건 중 하나는 추상화이어야 하며 크기가 최소한 9.1평방미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시회에 참가한 18명의 화가들 대부분 미국 색면 회화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나 모노크롬은 시각의 전 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에 관람자를 하나의 사건, 혹은 상황 속으로 개입시킨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관람자는 단순한 외부 관찰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람자를 참여자로 포함시키는 상황의 개념은 곧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현대인의 정신적 고립과 소외감을 표현한 조지 시걸
조지 시걸은 석고로 인물상을 실물에서 떠낸 뒤 실물과 똑같이 제작한 상황 속에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인물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령처럼 보이는 인물상의 흰색이 사실주의의 환영을 없앴다. 1950년대 말 조형물로 관심을 옮겨 철사그물과 올이 굵은 삼베 위에 석고를 바르는 실험적 작업을 했다. 그의 조형물의 특징은 하나의 인물상, 혹은 군상으로 특정한 상황 속에 놓였다. 그가 제작한 실제 크기의 고독한 익명의 석고 인물들은 진부한 일상에서 따온 몇몇 실제 사물이 있는 상황 속에 자리 잡았다.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다루는 펑크아트
펑크와 ‘냄새나는’, 혹은 ‘더러운’이란 뜻의 펑키라는 용어는 재즈 용어에서 온 것으로 모순되고 이상야릇한 것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펑크아트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예술가 그룹이 시작한 것으로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의도적으로 불쾌하게 다룬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시크아트Sick art로 불리기도 하는데, 불쾌감을 유발하고자 하는 욕구와 병적인 자아현시욕을 다다, 팝아트와 결합시킨 것이다. 펑크아트의 특징은 감정이 배제된 비인간적인 순수성에 반발해 혼합물, 병적인 것, 싸구려, 기이한 것, 모조품, 사악한 것,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성적인 점을 선호한 것이다.

도덕적 분개를 표현한 에드워드 키엔홀츠
키엔홀츠는 1963년부터 그가 ‘개념회화concept tableaux’라고 명명한 것을 만들었으며, 구매자는 제목을 적은 판자와 함께 그의 개념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작품에 대한 드로잉을 주문하고 마음에 들면 돈을 더 지불하고 작품을 제작하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주립 병원>(1966)과 <포터블 전쟁기념물>(1968)을 포함한 네 점의 개념회화를 제작했지만, 대부분은 단지 개념들로만 남게 되었다. 그의 개념회화는 종종 최초의 개념미술 미술품으로 언급되지만, 임시방편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키엔홀츠의 1964년 작 <38년형 닷지 자동차 뒷좌석>은 전시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만신창이로 낡은 차의 문을 열어둔 채 사지가 잘린 두 여인의 오싹한 성교장면을 까발린 것이다. 그는 이 조형물이 아이다호의 작은 마을에서 그가 보낸 청소년기에 대한 기억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시회는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다가 15분 간격으로 차문을 열어 호기심에 찬 관람자에게 잠깐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이 났다.

키엔홀츠에 의해 펑크아트는 도덕적 분개의 차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활의 기이하고 하찮은 단편을 이용하며, 실제 오브제로 구성되는 환경 속에 인간의 육체, 혹은 시체를 설치하여 혐오스럽고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한 상황을 만들었다. 살인, 섹스, 출산, 죽음, 부패와 같은 잔혹한 이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를 막기도 한다.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하는 비디오아트
1953년경 미국 가구의 삼분의 이가 텔레비전을 구비했고, 1960년 즈음에는 소유 가구 비율이 90퍼센트로 증가했다. 미국인은 매일 7시간까지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세계가 점차 텔레비전을 위시한 미디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관점이 고려되고 기술적 혁신의 욕망과 결합된 미술품을 실현하려는 여망에 따라 텔레비전은 미술계로 편입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찍이 미래주의자들은 사용 가능한 모든 표현수단을 투입하고, 또 일반화한 장벽을 제거하려는 열망을 드러냈다.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의 유용성은 1970년대의 시각예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술계로 난입한 비디오카메라는 조립품 속으로 텔레비전 수상기가 침입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매체 자체와 그 영상을 동일한 몸짓으로 전용하는 대신 비디오를 사용하는 예술가들은 직접 영상을 제작하거나 그것을 보여줄 장치를 구상한다. 비디오카메라가 상용화된 것은 해프닝, 퍼포먼스 등이 요란했던 무렵이었다. 이러한 예술적 시위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어 이야기와 사진만으로 그 기억을 되살릴 수밖에 없지만, 비디오는 예술가들이 직접 작업에 착수하는 수첩으로 사용되었다. 비디오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는데, 영화와 달리 어떤 전시공간에서도 수상기를 설치하여 영상을 볼 수 있다.

프랭크 포퍼Frank Popper(1918~)는 비디오아트를 반문화, 특히 1960년대 초 일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업 중에 생겨난 해악적 상업 TV에 반대하는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파리 8대학의 미학과 과학예술의 명예교수인 포퍼는 비디오아트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첫째, 새로운 시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그는 ‘게릴라 비디오’라 명명했다.

넷째, 비디오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 설치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낸 백남준
백남준은 1956년 동경대학에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독일로 가서 1958년 다름슈타트의 하기 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존 케이지를 만났다. 다름슈타트 근교에는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주변의 음악가들이 몰려 있었으므로 백남준은 슈토크하우젠과 그 밖의 음악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 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출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선보였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1964년 뉴욕에 정착한 백남준은 처음에 텔레비전의 동기 신호를 조작한 뒤 자석으로 그 이미지를 단순하게 왜곡시켰다. 1965년에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하고 즉시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그 날 저녁 예술가 클럽 카페 고고에서 선보였다. 케이지의 조합한 피아노에서 감동을 받은 그는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 방영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렸다.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그는 종종 첼리스트 샤롯 무어만과 공동으로 작업했다. 1965년에 소개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제1번>은 에로틱한 작품이었다. 무어만은 <첼로 조곡>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교대로 계속했다.

샤롯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었다. 백남준은 신체와 테크놀로지의 매개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했고, 테크놀로지를 인간화, 심지어는 성애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불화를 중재하려는 그의 노력은 오히려 그 불화를 악화시켰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어만을 희생시켰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는 테크놀로지를 성애화했다기보다는 여성을 대상화한 것이다.

시간에 대한 탐구를 강화한 비디오 설치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비디오 설치는 반예술에 뿌리를 두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주요 거점이 미술관과 갤러리였다. 퍼포먼스아트의 조각적 공간이란 확장된 관념과 미술에 좀더 많은 관람자가 참여하기를 바라는 경향에 뿌리를 둔 설치는 미술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일상생활의 모든 재료와 양상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또 다른 진전을 이뤘다. 조각과 연관된 덕분에 미술관과 갤러리는 쉽게 설치를 받아들였다. 설치가 비디오아트 예술가들의 핵심적인 개념인 시간에 대한 탐구를 강화한다는 점도 그만큼 중요한 측면이다. 여러 대의 모니터나 프로젝션 화면, 종종 여러 개의 테이프를 활용하는 비디오 설치는 이미지의 총량을 방대하게 증가시킴으로써 시간의 조작 가능성을 극적으로 확대시킨다.

1990년대 중반 일반인도 쉽게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게 되어 비디오의 ‘시네마화’라 간주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디지털, 비선형 시스템 아비드Avid와 같은 정교한 편집장비들 덕분에 비디오 설치는 시네마와 더욱 가까운 연결고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매튜 바니 및 많은 예술가들은 설치에 통상적으로 사용하던 멀티모니터, 혹은 멀티오브제 환경과 대조적으로, 본질상 싱글채널 비디오를 벽 전체나 스크린에 영사하고 이를 설치로 부름으로써 시네마 관람 경험을 흉내 내는 경향을 반영한다.

감시카메라 형식을 사용한 브루스 나우먼
1970년대 많은 예술가들이 비디오에 대한 활용방법을 발전시켰다. 비디오 감시 장치는 관람자 촬영용으로 선회되어 모든 자율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련의 작품의 주역이 되었다. 브루스 나우먼은 <비디오 복도>(1968)에서 터널처럼 생긴 두 벽을 설치하고 밀실공포증을 느끼게 하는 좁은 복도 양쪽 끝에 모니터를 장착했다. 비디오를 보기 위해 복도로 걸어 들어온 관람자는 자신의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찍힌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이 작업이 주는 충격은 벽 구조가 만들어내는 전치의 맥락, 심지어 공포의 맥락에서 기인한다. 그는 양쪽 끝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설치한 좁은 통로를 만들었다.

작품
쿠르트 슈비터스는 1918년부터 버려진 버스표, 담배껍질, 우표, 극장표, 잡지, 못, 머리카락, 낡은 상품 카탈로그, 끈 등을 사용해 콜라주로 회화적 구성물로 구축했는데,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시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의 콜라주 작품에서는 우연히 찾아낸 재료들의 배치도 균형을 이루도록 주의 깊게 구성되었다. 비꼬는 듯한 낭만주의와 부조리의 재치 있는 결합을 보이면서도 탄탄한 통제를 보여준 그의 작품은 당시에 콜라주로 불리었더라도 아상블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슈비터스는 1919년에 <메르츠 Merz>를 창조했는데,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상업편지에 적힌 상업민영은행Kommerz und Privatsbank(코메르츠 운트 프리바트방크)에서 ‘상업’이란 뜻의 콤메르츠Kommerz의 앞 글자 메르츠merz만 따서 제목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닥치는 대로 수집한 종이들을 콜라주로 구성한 후 ‘메르츠 회화’로 명명했다. 이 작품은 <메르츠> 연작 중 하나다. 그는 메르츠에 관해 말했다. “본질적으로 메르츠란 단어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료의 예술적 목적에 따른 조립을 의미한다. 또한 원칙적으로 기법의 측면에서 재료 각각의 평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르츠 회화는 색과 화폭, 붓과 팔레트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재료와 유용한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도구를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사용되는 재료가 원래 다른 목적으로 구상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린이 장난감 차바퀴, 철망, 실과 솜도 색과 똑같이 가치 있는 요소이다. 예술가는 선택과 배치, 그리고 재료의 왜곡을 통해 창조한다.

슈비터스는 1923년부터 자신의 집에 <메르츠바우>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석고와 나무로 만들어진 뼈대에 미로와도 같은 이 구성물은 그의 집안에 있는 한 방으로부터 시작해 천장에 난 구멍을 뚫고 마침내 위층의 다른 방들 쪽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삶과 관련된 오브제들의 축적으로 끊임없이 자라난 이 구성물은 허망한 것들로부터 미술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보여준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은 슈비터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메르츠바우>를 “관능적 허망의 대성당”으로 불렀다. 그는 시인친구가 쓰다 버린 연필도 <메르츠바우>의 장식에 사용했고, 거기에는 도시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온갖 잡동사니, 구두끈자락, 손톱부스러기, 재떨이, 연필, 담배꽁초, 종이바구니, 머리카락 심지어 장 아르프의 아내 소피가 사용한 브래지어도 있었다.

조지프 코넬은 버려진 물질을 개인적인 상자 안에 배열하는 방법으로 물질에서 시와 노래, 그리고 향수를 찾아냈다. 골동품 상점을 뒤지면서 그렇게 얻은 것들을 우연성과 결합시킨 그의 방식은 슈비터스의 축적물에 가까웠지만, 슈비터스와 달리 폐기물이나 쓰레기가 아니라 한때 아름답고 소중했던 물건들의 파편에 매료된 그는 1930년대 후반에 상자를 이용한 표현방식을 발견했으며, 우표나 광고, 새와 나비의 삽화가 담긴 책, 그리고 십이궁도와 별자리 그림 같은 대중문화 재료들로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래된 비둘기 집이나 자동판매기 등을 모델로 한 상자들에 그는 종종 두려운 낯설음의 것과 유행이 지난 것들을 초현실주의풍으로 불합리하게 병치시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오브제들이 서로 공통점이 없더라도 그는 기억이란 매개를 통해 주관성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상자 안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꿈이 갇혀 있는 그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추억과 꿈을 상기하게 했다. 그의 작업은 강박상태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러한 강박적 상상력에 의해 탐험된 풍요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으며, 그가 사용한 물질은 팝 물질이었으므로 그를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1950년대 중반 물질들을 콜라주한 라우셴버그와 존스는 코넬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루이즈 네벨슨은 1950년대 말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조각의 벽’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는데, 많은 상자와 칸막이들로 이루어진 벽 형태의 부조로, 상자와 칸막이들은 의자다리, 금속조각, 난간조각, 꼭대기 장식과 같은 일상의 사물, ‘발견된 오브제’들이 모여 추상적 형태를 이뤘다. 그녀는 주위에 널려 있는 각종 작은 물질들을 배열하고 그것을 모두 동일한 색으로 칠해 입체적 구성의 느낌을 모두 제거했다.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을 제작하고 상자 안에 수백 개의 물질을 배열했는데, 이런 작품들로 아상블라주와 환경미술의 기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는 그가 존경한 데 쿠닝을 찾아가 미술품을 역逆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의 회화를 지워 없애는 것을 의미했다. 데 쿠닝이 그에게 회화 한 점을 주었고, 라우셴버그가 그것을 지우는 데 6주일이 걸렸다. 그것이 <지워진 데 쿠닝의 드로잉>이다. 그가 파괴를 통해 창조를 이룩한 것이다. 데 쿠닝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 1953년 그의 드로잉을 파괴했다는 발상은 그 자체 하나의 스캔들이었고, 라우셴버그는 허무주의, 혹은 다다의 재연으로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미술계를 장악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정크아트의 기원은 라우셴버그의 ‘콤바인combines’, 혹은 결합 회화이다. 라우셴버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쿠르트 슈비터스의 콜라주 방식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아상블라주와 정크아트를 구분하기 어려운 까닭은 재료의 측면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물질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정크아트로 구분하더라도 작품이 조립으로 구성된다면 그것은 또한 아상블라주가 되기 때문이다.

<샤를렌>은 콤바인 회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작품을 그는 한동안 제작했으며, 그가 오브제를 작품의 구성요소로 사용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에서까지 계속 유지되어온 환영의 공간을 부수고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작업에 관한 질문에 그는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도, 예술에 반하는 예술도 아니다. 나는 예술을 지지하지만 예술을 지지한다는 것은 예술과는 전혀 무관하다. 예술은 삶의 모든 면에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예술 자체와는 별 볼일이 없다”고 했다.

예술의 인상을 바꿔놓기 위해 라우셴버그는 삶을 예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작곡가 케이지로부터 직접 받은 영향이며, 동시적ㆍ다원적 암시성을 지닌 이미지로 관람자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을 원했던 점에서도 케이지와 공통적이다. 그는 신문지, 인쇄된 복제물, 낙서, 전구, 박제된 새와 동물, 의자, 문, 창문, 침대, 베개, 가방, 군화, 괘종시계, 걸레, 자동차바퀴, 스프링 등 삶의 도구들을 작품에 혼용했다.

1955년 5월 어느 날 라우셴버그가 아침잠에서 깨어나 문득 무엇인가 그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러나 재료와 캔버스를 구입할 돈이 없어 그는 침대 아래 있던 이불을 사용했으며, 그것은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이불에 그림을 그린 뒤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아 베개를 첨부했다. 그렇게 하자 이불의 개성이 지나치게 강하게 보이지 않았고, 베개가 멋진 백색 공간을 만들어주어 그 위에 색을 칠할 수 있었다. <침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세자르는 기계적 압축의 결과물에서 본질적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금속의 새로운 상태를 보았다. 그는 1954년경부터 스스로 ‘혼합물’로 지칭한 종합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철, 스프링, 얇은 깡통 등을 철사로 조립해 곤충을 닮은 괴상한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자동차 몸체를 수압 프레스로 찌그러트려 만든 조형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통제된 압착compressions dirigées’으로 불리었다.

스탕키에비치는 1951~52년에 피카소와 훌리오 곤잘레스의 전례를 좇아 미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와 함께 녹슨 쇳조각들을 용접했으며, 이런 경험으로 버려진 쇳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후의 작품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구성으로 변했고, 1960년대에는 점차 밝고 서정적으로 진전되었다. 1970년대에는 다시 양식적 변화를 맞아 망치로 두들긴 원과 사각형의 강철들이 서로 맞물리는 추상 구성으로 전환했다. 1997년 4월과 5월 맨해튼에 있는 상업갤러리 자브리스키에서 스탕키에비치 회고전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가 아상블라주의 선구자였음을 새삼 인식했다.

세자르와 달리 존 체임벌린은 조형물의 채색에 관심이 많아 선명하게 채색된 부분을 작품의 액센트로 활용하고 폐품으로 제작한 작품에 추상적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는 1950년대 말 버려진 자동차의 금속 부품을 구부리고 용접한 조형물을 제작해 정크아트에 속하는 예술가로 분류되었다. 그가 이런 재료를 사용한 의도는 사회적 논평보다는 완성된 조형물의 형식적 특성과 관련되었지만, 재료의 원래 출처가 조형물 속에 남아 있어서 전체적인 인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조형물의 표현적 에너지는 액션페인팅과 비교되었다. 그는 자동차 자체의 레디메이드 표면을 이용하고 소모성 폐품에 지나지 않는 일그러진 고철 뭉치를 회생시켰다. 그는 원색 에나멜을 칠한 자동차 몸체를 일그러뜨려 추상 아상블라주 조형물이 되게 했다. 일그러진 자동차 몸체는 얼어붙은 동력주의를 보여주었다. 체임벌린의 조형물은 회화에서 데 쿠닝의 충돌하는 붓질 같았으며 불안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정연함을 통해 에너지가 분출하도록 했다. 그는 1990년 11월 20일부터 1991년 2월 20일 한국에서 열린 서울 국제미술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마크 디 수베로는 커다란 나무막대들과 거칠고 두꺼운 판자 주위로 불안하게 비대칭적으로 자리 잡은 구성물에 종종 간이의자를 집어넣어 관람자를 조형물의 공간과 긴장 상태 안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1971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발해 베네치아로 이주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개최했다.

루카스 사마라스는 1959~62년에 컬럼비아대학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공부했다. 그는 초기에 회화, 조형물, 퍼포먼스아트에서 활동했고, 나중에는 사진으로 작업했다. 그는 자신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환경미술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예일대학과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사마라스는 평범하지 않은 어지러운 쓰레기를 나무상자 안에 조립하여 고전주의 감각에 일치하는 형태들로 제작했다. 어려서부터 금지된 물질과 에로틱한 물질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상자 안에 물질을 채워 넣기를 즐겨했으며, 그의 상자들은 변태성욕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다다의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는 1960년대에 수천 개의 핀, 털실, 못 등의 혼합매체를 사용한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무제>는 뜨개실과 핀을 사용한 조형물이다.

조지 시걸은 석고로 인물상을 실물에서 떠낸 뒤 실물과 똑같이 제작한 상황 속에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인물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판에 박힌 제스처 속에 고정되어 버린 유령 같은 인물들은 몰개성적 사회 속에서 영혼이 없는 육체들이다. 그의 인물상과 군상은 금세기의 어떤 예술가의 조형물보다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 주제인 현대인의 정신적 고립과 소외감을 잘 포착했다. 마크 로스코는 “시걸이 드나들 수 있는 호퍼 풍의 조형물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시걸의 조형물은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선언적 특질을 지녔고, 거기에 사용된 수단은 대담하고 간소하다.

에드워드 키엔홀츠가 1961년에 매음굴의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첫 펑크아트 작품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매음굴을 사실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평범한 장식의 침실 패러디에서 라디오는 멋없는 음악을 뱉어내고 거울은 성교를 준비하는 한 쌍의 사실적 이미지를 반영한다. 남자와 여자의 머리가 이불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미국 민속의 일면을 취해 부패하고 심리적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미국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실현된 ‘개념회화concept tableaux’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앞서 제작한 <주립 병원 The State Hospital>(1966)이다. 그는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기도 했는데, 군사 선전의 도상을 왜곡하여 그 기괴함을 드러낸 것이 <포터블 전쟁기념물>이다. 태평양 전쟁 때 이오지마 섬에 있는 170m 높이의 가장 높은 수리바치 산Mt. Suribach에 미국 국기를 꽂고 있는 일군의 병사를 표현한 이 조형물은 반군국주의적 응수로서 그의 표현에 의하면, ‘회화’인 이 조형물은 전원 서민극, 그리고 성사극의 상연을 위해 대성당 앞에 설치하던 무대의 전통을 되살린 것이다. 이 작품이 다룬 문제는 미국의 정치적 정신이 안이해지면서 왜곡되는 기억, 특히 2차 세계대전 동안 키워진 애국적 단결의 강력한 그러나 왜곡된 기억이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Galerie Parnass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ㆍ무작위적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샤롯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었다. 백남준은 신체와 테크놀로지의 매개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했고, 테크놀로지를 인간화, 심지어는 성애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불화를 중재하려는 그의 노력은 오히려 그 불화를 악화시켰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어만을 희생시켰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는 테크놀로지를 성애화했다기보다는 여성을 대상화한 것이다.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예술가 빌 비올라는 늘 첨단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고 종교적 경건함까지 느끼게 한다. 빛과 어둠, 운동과 정지, 물질과 정신 등의 대립적인 요소와 이미지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작품은 고도의 촬영과 편집기술을 동원한 것으로 웅장한 소리와 함께 관람자를 그의 세계로 몰입시킨다. 시러큐스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동양의 종교에 탐닉한 비올라는 현대 물리학, 지각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여러 종교를 연구하고 깨달은 바는 동양과 서양의 정신을 관통하는 건 인간의 기본 성향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탄생, 죽음, 존재 등이 나타나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동양 신비주의의 근본 개념인 자아와 비자아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으며, 오늘날까지 이런 요소가 그의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 부분으로 이뤄진 설치작품 <불, 물, 숨결 Fire, Water, Breath>(1996)의 한 부분 <전령 The Messenger>에는 벌거벗은 한 남자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와 깊은 숨을 내쉬고는 다시 물속에 잠긴다. <교차>에서는 한 남자가 점차 불길에 타버리며,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남자가 천천히 차오르는 물방울에 빠져 죽는다. 이런 이미지들이 다소 섬뜩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비올라는 언제나 어떻게든 회복될 것이라는 느낌도 제공한다. 슬로우 모션, 귀를 찌르는 것 같은 커다란 음향, 풍부한 색의 배열 그리고 거대한 규모 등의 요소들이 자연 속에 잠겨있는 인간을 영화 같이 경험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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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10

InformelㆍHappening, Performance artㆍBody art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볼스를 염두에 두고 1952년에 앵포르멜이란 용어를 창안해내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 앙리 미쇼, 장 폴 리오펠 등의 작품을 언급할 때도 이 용어를 적용했다. 타피에는 무정형의 미술이란 뜻을 지닌 앵포르멜의 자발적이고 조직화되지 않은 특성을 강조했다. 그는 칸딘스키의 견해를 좇아 비기하적인 표현적 추상은 실재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직관적인 자각을 끌어내어 전달해주는 수단으로 보았다. 앵포르멜이란 용어는 입체주의에서 나온 어느 정도 엄격한 추상 경향이나 몬드리안과 데 스테일 화가들이 보여준 것 같은 다양한 기하학적 추상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조르주 마티외가 창안해낸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해내는 ‘서정적 추상’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무의식적 서예 형태로서의 추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앵포르멜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며 정확히 구별되지 않은 채 혼용되기도 하는 것이 타시즘Tachism이다. 타시즘은 1954년 프랑스 평론가 샤를 에티엔Charles Estienne이 전후 유럽의 서정적ㆍ표현적 추상을 기하학적 추상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때’ ‘얼룩’ ‘자국’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타슈tache에서 파생되었다. 타시즘은 색채의 조화에 대한 의식적인 조직보다는 화가의 감정적 상태를 표현하는 기호와 제스처로서의 얼룩과 색면의 자발적인 상호작용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타시즘은 주제와 관계없이 색의 얼룩을 응용했지만, 극히 구성적이었고 입체주의 사상에 의존해 회화를 일종의 조화로운 총체로 여겼다.

장 포트리에의 생애는 앵포르멜의 배경을 설명해주기에 충분하다.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왕립 미술학교를 거쳐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선에서 중상을 입었다. 1920년에 파리로 돌아와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고, 대공황 때 회화를 포기하고 1935년부터 4년 동안 알프스산맥에서 스키 강사와 호텔 경영자로 생계를 꾸리다가 파리로 돌아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파리 근교 정신병원 소유지에서 과거 비둘기장이었던 곳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병원 주변의 나무들은 독일군에 의해 포로들을 고문하고 즉결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는 종종 희생자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총소리나 울부짖음 같은 청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공포를 제작한 것이 ‘인질 Otages’ 연작으로 작은 패널화들이다. 연작은 반쯤 뭉개진 사람의 얼굴 형상들이었다. 모호한 얼굴 형상은 시멘트와 석고가루와 물감을 뒤섞어 팔레트 나이프로 쌓아올리면서 형상화시킨 것이다. 크림처럼 두터운 물감이 감미로운 느낌을 주지만 그의 의도는 압박과 공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포트리에와 함께 앵포르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 뒤뷔페는 “나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유럽에 관해 무지하기를 원한다. 기존의 사실과 유행을 무시하고 원시적이 되고 싶다”고 했다. 뒤뷔페는 아이들의 드로잉, 슬럼가 벽의 낙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정신이상자의 회화 등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모든 종류의 개인적 경험의 즉각적인 기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그들의 회화를 수집하면서 그것들이야말로 인간의 창조성을 보여주는 진정한 실체임을 알았다. 그는 낙서에 나타난 본능과 정열, 공상과 폭력, 그리고 망언 등 야만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화려하게 치장되거나 점잔을 부리는 미술을 혐오한 그는 미숙한 것, 잘못 만들어진 것, 미완의 것, 뒤섞인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발성과 충동을 존중하고 본능적 필기와 자취를 선호했다.

뒤뷔페는 자신의 회화에 아르 브뤼Art Brut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프랑스어로 ‘조야한 미술’이란 뜻이다. 그는 아르 브뤼의 연구와 보존을 허용하게 될 컬렉션을 만들기로 하고 “우리는 여기서 예술적 교양이 없는 사람이 제작한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는 지성인의 작품에서 벌어지는 것과 반대로 모방정신은 거의 전무하거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따라서 예술가는 고전미술이나 유행하는 미술의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바탕으로부터 모든 것, 주제, 제작에 필요한 재료, 이동수단, 리듬, 글쓰기 수법 등을 끌어낸다. 우리는 여기서 온전히 순수하고 꾸밈없고, 오로지 예술가 자신만의 충동에 따른 모든 표현 양상의 전체성 속에서 재발명된 예술적 작용을 목격한다. 유일한 창의성만이 드러나는 교양적 미술에서 지속되는, 카멜레온과 원숭이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뒤뷔페는 1950년대 후반부터 전체론적 구성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 얇은 금속 조각,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버려진 모든 가치들을 새롭게 주목받도록 이끌어낸” 여러 경향들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예술가로 부각되었다. 그는 예술가를 사로잡는 것은 마구잡이 우연이 아니라 사용된 재료의 본질에 고유한 특수 우연이라면서 차라리 저항하는 재료를 앞에 두고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기분과 열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벗어난 해프닝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에 앨런 캐프로가 창안해낸 것이다. 해프닝은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그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해프닝은 공공연하게 자유를 강조하고 억압을 깨뜨리는 것에 관련되었더라도 매우 거만한 방식으로 행해졌는데, 곧잘 관람자들에게 명령했다. 덧없는 것, 변화, 자연스러운 것, 심지어 실수를 수용하는 해프닝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다. 해프닝의 개념은 미술에 있어서 영속성과 장인 정신에 대한 전통 원칙을 주도면밀하게 거부하는 캐프로의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연극적 퍼포먼스와 매우 유사하며 환경미술과 마찬가지로 갤러리나 어떤 장소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작곡가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갤러리와 미술관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해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스가 벌인 수많은 해프닝과 같이 정치적ㆍ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다.

해프닝의 개념을 가장 명확하게 해준 작품은 1952년 여름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존 케이지가 작곡한 3악장으로 이루어진 <4분 33초>이다. 튜더가 <4분 33초>를 공연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세 부분으로 된 피아노 소나타지만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는 것처럼 처음에 손을 한 번 들어올리고 4분 33초 동안 팔을 두 번 더 들어 올린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침묵에 잠긴 이 작품은 음악이 흐르지 않을 때 생겨나는 소음을 들려주었다. 청중이 모욕과 조롱이라고 느끼지만 않는다면 처음의 당황스런 순간이 지나고 멀리 있는 새소리와 자동차소리, 의자가 삐거덕거리는 소리 등을 들을 수 있다. 케이지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둘러싼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라고 항상 권유했다. 그는 “소리로 하여금 그 자체가 되게 하라”고 했는데, 모든 소음이 잠재적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에 네 가지 요소, 즉 음의 고저, 음색, 큰 소리, 지속이 있으나 정적이 오히려 유일한 지속이라고 주장했다. <4분 33초>는 단지 지속만을 강조한 음악이다.

케이지는 1957년에 자신의 음악 연주의 목적을 목적 없이 연주하는 것이라면서 “혼란된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창조행위 속에서 무엇인가를 향상시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일깨워주는, 즉 삶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일단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면 너무도 멋진 일인데, 사람들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한다”고 했다.

블랙마운틴 칼리지의 신화적 해프닝 이후 ‘이벤트’란 용어가 미술의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머스 커닝엄은 자신의 발레를 이벤트로 규정했다. 케이지가 모든 소음을 잠재적 음악으로 간주한 것과 마찬가지로 커닝엄도 신체의 모든 동작을 잠재적 발레로 간주했다. 커닝엄은 주요 무용수와 나머지 무용수들의 구별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무대 위에서의 집중방식도 계층 및 위계질서와 연관되는 기분 나쁜 것으로 보았다.

해프닝을 집단적으로 벌인 Fluxus
해프닝을 집단적으로 벌인 플럭서스 그룹은 다다의 정신을 되살리면서 예술 전통과 예술에 있어서 전문적 경향을 띠는 모든 것에 격렬히 대립했다. 독일에서 형성된 플럭서스는 196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활약했다. 플럭서스는 선언문에서 그룹의 목적을 “이 세계에서 부르주아적인 병과 ... 죽은 미술을 몰아내고 미술에서 혁명적인 조류를 촉진하며 살아 있는 예술과 반예술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제적인 활동을 벌인 플럭서스는 예술과 삶을 구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틀에 박힌 평범한 일상도 예술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럭서스의 창설자로 플럭서스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조지 마키우나스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전후 이민자로서 서독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마키우나스는 칼이나 손가락으로 사전을 찔러서 들춰보다가 라틴어 ‘fluere흐르다’에서 유래한 이 명칭을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다이스트들이 자신들의 명칭을 찾았던 것과 꼭 같은 방식이었다. 기원전 5세기 에페소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 모든 것은 흐른다”면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마키우나스는 이런 철학적 함의를 넘어서 플럭서스란 단어를 인체의 배변활동이라는 의학적 과정이나 분자의 변형 및 화학 결합과 같은 과학 작용에 노골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플럭서스의 목적을 명쾌하게 “반예술 형태는 우선 직업으로서의 예술을 공격하고 예술가와 대중의 인위적 분리를 공격하며, 예술가와 관람자, 혹은 삶과 예술의 인위적 분리를 공격한다. 그 형태는 인위적 형태, 예술 자체의 모범과 방법을 반대한다. 목적의 추구,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추구를 반대한다. 반예술은 삶이며 자연이고 실제 현실이다. 그것은 하나이자 전부이다”라는 말로 규정했다.

플럭서스 활동에서 단연 돋보이는 결과는 요제프 보이스가 명성을 얻은 것이다. 플럭서스는 1966년경 일련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40여 편의 단편 영화를 남겼다. 백남준의 <영화를 위한 선>(1962~64)은 플럭서스를 대표할 만한 영화로 뉴욕의 캐날 스트리트에 있는 마키우나스의 로프트에서 상연되었다. 이것은 거의 1천 피트 분량의 투명한 16mm 필름 리더를 현상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30여 분 동안 스크린에 영사한 것이다. 백남준의 영화는 아무런 이미지나 소리도 없는 관람자의 자유연상을 위한 백지상태가 되었다. 영화를 상영하면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스크래치, 먼지, 그리고 우연한 사건들이 매번 영화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아트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된 것은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1971년 『옥스퍼드 사전』에 처음 이 용어가 수록되었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한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퍼포먼스아트를 여성 다수가 차지하는 건 페미니즘 전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아트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이 되기도 하는데, 요제프 보이스에게서 보듯 의식의 변화를 통해 행위자가 변화된 사회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포먼스아트의 중요성은 변형된 의식의 형식으로 지속되더라도 오로지 반복될 뿐이다.

퍼포먼스아트의 형태와 경향은 매우 다양한데, 정신분석이라는 문화 전통에 기반을 둔 빈 행위파는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 외설 취미에 탐닉했다. 빈 행위파는 1960년대에 함께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퍼포먼스아트 예술가들의 그룹에 붙여진 명칭으로 그들은 가장 비도덕적이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합성한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귄터 브루스는 1968년 <행위 30. 순수한 광기>에서 분위기가 잡히자 대중 앞에서 대소변을 보았다. 그는 피부에 면도칼로 상처를 내기도 했다. 브루스와 오토 뮐은 1968년 7월 7일 사회주의 학생회의 초대를 받아 빈대학에서 스캔들을 일으켰다. 뮐은 팸플릿을 읽었고, 피학대성음란증 환자 한 명에게 채찍을 후려쳤으며, 철학자 한 사람은 강연을 했다. 직접예술회 회원들은 ‘누가 더 멀리 오줌줄기를 뿜어 보일 것인가’라는 공개심사를 조직했다. 브루스는 옷을 벗은 뒤 자신의 옆구리를 베고 손으로 오줌을 받아 들이마시고 대변을 보고 온몸을 배설물로 친한 뒤 바닥에 누워 오스트리아 국가를 부르면서 자위행위를 했다. 브루스는 1969년 빈대학에서 <예술과 혁명> 이벤트를 선보였다가 6개월의 징역이 선고되자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달아났다가 1976년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뮐은 십대와 성관계를 가진 이유로 7년의 징역형이 내려졌고, 포르투갈의 작은 코뮌에 구금되었다가 7년 후에 풀려났다.

사람의 몸을 재료로 하는 바디아트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아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몸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몸을 사용한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에는 이벤트나 퍼포먼스아트에 가까웠으나,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과 퍼포먼스 속에 바디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독립적 장르로 부상한 바디아트는 개념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므로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 바디아트 작품은 예술가의 감정이나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아트만큼 비개성적이다. 윌러비 샤프가 『애벌런치 Avalanche』지에서 기술한 대로 바디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은 자전적인 미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미술이다.” 샤프는 바디아트가 포스트매체의postmedium 곤경과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바디아트의 포스트미니멀리즘적 보완물인 프로세스아트에서도 동일함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바디아트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있었던 퍼포먼스의 세 가지 모델을 정교하게 한 것이다.

첫째, 행위로서의 퍼포먼스로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발전해 해프닝, 플럭서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그룹들의 상호 예술적 활동에서 나타났다. 이른바 네오다다라 불린 이런 행위들은 미술의 전통 예법을 공격하지만, 동시에 남성으로 간주되는 예술가의 영웅적이고 때로는 스펙터클한 제스처를 지지했다.

둘째, 과제로서의 퍼포먼스로 저드슨무용단에서 발전한 이 모델에서는 반스펙터클한 기계적 몸놀림이 상징적인 무용 동작을 대체했다. 과제 퍼포먼스task performance는 행위 퍼포먼스action performance에 대한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에서 나왔으며, 사회적이면서 성적인 급진적 평등주의 속에서 저드슨무용단의 무용수들의 주도 아래 발전했다.

셋째, 제의ritual로서의 퍼포먼스는 요제프 보이스, 헤르만 니츄, 오토 뮐, 귄터 브루스 등의 해체 미술destruction art 실천가들이 제안한 퍼포먼스였다. 과제 퍼포먼스가 미술을 탈신비화하는 데 주력한 반면 제의 퍼포먼스는 미술을 재신비화하고 다시금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몇몇 바디아트 예술가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일부 미니멀아트 예술가들과 팝아티스트들이 추구한 일상의 진부함을 계승하여 신체의 평범한 기능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미술품으로 제시했다. 작품 제작과정을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하며, 길버트와 조지처럼 사전에 안무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관람자의 참여는 배제된다. 신체를 학대하는 예술가들도 종종 있다. 일부 예술가들은 손발이 불구가 되거나 팔 다리가 절단될 때까지 자해행위를 벌이기도 하는데, 이런 작품들이 지닌 철학은 분명하지 않다.

바디아트의 선구자는 니스 태생의 화가 이브 클랭이다. 클랭은 파란 물감을 바른 누드의 모델로 하여금 바닥에 펼쳐놓은 종이 위에서 뒹굴게 했다. 클랭은 그 방법을 세련되게 하고, 그의 해설자 피에르 레스타니는 그것을 <인체 측정>의 자취로 명명할 것을 시사했다. 그 자취는 1960년 3월 9일 파리의 시립근대미술관에서 기획한 공개 의식을 통해 미술의 무대에 등장했다. 조수 앞에서 클랭은 담배를 피우며 교향악단이 20분 동안의 침묵 끝에 한 가지 소리만 내는 20분 동안 「단조 교향곡 Monotone Symphony」을 연주하는 동안, 벽과 바닥에 설치된 바탕재 위로 몸에 칠한 파란 물감의 자취를 새기는 세 명의 여인을 지휘했다.

작품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의 임파스토 회화는 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유지해온 유화와 어두운 색조를 모두 포기하면서 1940년경에 확립한 것이다. 테이블에 수평으로 놓고 미리 파스텔로 얇게 덧칠한 캔버스에 작업한 그는 주걱으로 석고처럼 보이는 흰색 재료 덩어리를 넓게 발라 모호한 형태를 만들고 그 반죽이 굳기 전에 위에 다양한 색채의 파스텔 가루를 뿌리거나 붓으로 약간의 윤곽을 만들어 장식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이미지는 늘 캔버스 중앙에 몰려있고 거의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로, 얼룩진 배경 중심에서 부조처럼 형상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가 선호한 색은 분홍색, 자주색, 터키의 색, 값싼 인쇄물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사탕의 색이었으므로 키치의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었다. 앙드레 말로는 그의 회화에 대해 “동시대의 고통을 비극적인 표의문자가 될 때까지 해부하여 그것을 영원의 세계 속에 각인시키려고 한 첫 시도”라고 극찬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단순히 캔버스에 나타난 형상만이 아니라 포트리에의 기법에서 정액과 오물에 대한 암시였다. 전쟁을 겪으며 부상한 새로운 철학적 태도, 즉 실재란 본질적으로 무정형이며, 모순되고, 모호하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1901~85)는 회화에 자갈, 깨진 병조각 등이 섞인 회반죽, 아교, 퍼티, 아스팔트 등을 사용했으므로 표면에 긁힌 자국과 낙서가 오래된 벽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마티에르matière, 즉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긁어내거나 흙, 혹은 모래를 물감에 섞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회화를 오트 파트라고 명명했는데, 오트 파트Hautes Pâtes는 ‘두터운 물감’이란 뜻이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미술평론가 앙리 장송Henri Jeanson(1900~70)은 뒤뷔페의 전시회에 대해 풍자로 유명한 시사주간지 『르 카나르 앙셰네 Le Canard enchaîné』지에 풍자적인 논조로 “다다이즘 다음은 카카이즘cacaism이다”라고 적었다. 카카이즘이란 어린이 말로 똥, 더러운 것을 의미한다. 장송의 익살스런 평가가 뒤뷔페의 회화를 노골적으로 쓰레기라고 비난한 평론가들의 빈정거림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다다이즘을 언급한 것은 전후 파리의 독특한 상황과 관계가 있었다.

뒤뷔페는 그가 전시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여기서는 손으로, 저기서는 스푼으로” 작업했음을 강조했다. 그는 “무슨 명분으로 사람은 조개목걸이는 걸치고 거미줄은 걸치지 않는가?, 무슨 명분으로 여우 털은 괜찮고 여우 내장은 안 되는가? 무슨 명분인가? 나는 알고 싶다. 평생 사람의 벗인 더러운 것, 쓰레기, 오물은 사람에게 더 소중한 것이 될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것이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 언급을 평론가들은 고의적인 도발로 보았다.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4)는 환각제 메스칼린mescaline을 복용한 상태에서 소묘를 하기 시작했다. 환각상태에서 제작한 소묘작품에서는 달라진 기법과 정신상태의 변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기법은 펜을 이용한 소묘로서 세부는 정교하고 꼼꼼하게 묘사되었으며, 화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특정한 중심 없이 전체적으로 균일한 전체론적 양식을 보여주었다. 미쇼는 마약을 예술적인 목적으로 실험했다. 1960년대에도 메스칼린에 의한 환각상태에서 그리는 소묘를 완전히 그만두지 않았지만 과슈와 크레용, 인디언 잉크를 혼합한 재료로 작업하면서 앵포르멜 회화의 과격한 비정형성과는 반대로 보다 통일된 구성과 구상적인 암시를 보여주었다. 환각상태에서 제작하지 않은 작품에서도 메스칼린을 복용하고 작업한 경험이 구성의 근간을 이루었다.

독일 화가 에른스트 빌헬름 나이Ernst Wilhelm Nay(1902~68)는 1930년대 중반에는 풍경을 두터운 붓질과 야수주의적인 색을 사용하여 표현주의 양식으로 나타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신비하거나 신화적인 풍경이 색채 속에서 모습을 반쯤 드러내는 것처럼 처리하면서 색을 더욱 강조했으며, 1950년에 이르자 직선과 곡선, 타원 형태가 융화되어 장식적 조화를 이루는 거의 순수 추상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 후 색을 더욱 강조하여 1953년경 타시즘 구성 형식에 도달했다. “나는 다른 모든 조형 수단보다 색을 우선시하며 색을 통해 형태의 구성을 결정한다”고 했다.

독일계 프랑스 망명 화가 볼스Wols(1913~51)는 38세의 생애를 살았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알코올중독자로서의 삶, 자동주의 회화 제작과정, 회화에 나타나는 발작적인 제스처 같은 진실의 징후를 근거로 볼스를 “그 자신이 필연적으로 실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실험가”로 묘사했다. 환각을 드러낸 볼스의 회화는 뒤뷔페의 오트 파트(두터운 물감) 소동에 힘입어 별안간 성공을 거두었다. 볼스는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 유명해져 ‘앵포르멜의 원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타시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정신적으로 위축된’ 성격을 지닌 그의 수채화를 미셸 쇠포르는 “체계화된 정신착란”으로 묘사했다.

러시아계 프랑스 화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1914~55)의 회화는 추상 경향으로 나아갔으며, 에콜 드 파리의 타시즘 양식을 구사한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추상화 주제는 드러나지 않지만 대개 자연의 외양에서 온 것들이다. 그는 선명한 바탕색이 조금 드러나게 하면서 어두운 색의 물감으로 견고한 색면을 이루어나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물감을 나이프로 바름으로써 엄숙하면서도 감미로운 효과를 나타냈다. 1953년부터 사실주의 양식은 아니지만 다시 구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구상에 끌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소에 대한 느낌을 창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의도가 특히 1955년 자살하기 직전에 그린 마지막 작품들에 잘 나타나 있듯이, 관찰된 사실과 추상적 구성 사이에 동일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그의 회화는 형태와 색의 배열인 동시에 분위기 있는 풍경으로 보인다.

독일계 프랑스 화가 한스 아르퉁Hans Hartung(1904~89)은 전후에 비형식적인 추상화와 제스처 회화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겉으로 보기에 서체를 연상시키는 검정색의 두터운 선과 커다란 얼룩들로 화면을 채우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것은 심각하며 기하학에 가까운 몬드리안과 그 추종자들의 신조형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는 앵포르멜과 타시즘의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1923~)는 초기에 호앙 미로와 안토니 가우디의 영향을 받았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순수 유화를 포기하고 모래나 작은 돌을 섞은 기름이나 유액을 소재로 하여 그것을 캔버스 위에 펼치고 상현문자 같은 표시를 하거나 천에 찍어 흐려진 퇴색한 듯한 효과를 나타내는 독특한 기법을 선보였다. 그는 1954년에 콜라주, 오트-파트(두터운 물감), 가공되지 않은 일상용품, 낙서와 임의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양식을 완성했으며, 1952~53년 집중적 실험시기를 거쳐 아르테 포베라 양식으로 진전시켰다. 타피에스는 찢어진 캔버스, 종이, 지푸라기, 실, 헝겊, 쓰레기, 낡은 스타킹 등 일상적인 폐기물을 미술품에 사용했으며, 그 위에 물감을 칠하거나 흘려 전체적으로 낙서로 뒤덮어 긁히고 손상된 벽처럼 보이게 하는 그라타주(긁어내기) 기법을 사용했다. 타피에스는 앵포르멜 화가들과 공통점을 가진 반면 회화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알베르토 부리와 유사했다.

낡고 거친 삼베조각과 숯덩이, 찌그러지고 녹슨 금속 등을 이용한 개성적인 콜라주에 추상 기법을 결합시켜 낡고 폐기된 재료들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구성물로 만든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1915~95)의 회화는 낡아빠지고 버려진 폐품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환기시키는 힘을 이용한 최초의 작품에 속하며, 미국의 정크아트와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를 예고했다. 이렇게 작업한 것을 두고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거친 붕대를 감은 부상자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삼베를 염색하고 태운 뒤 검정색이나 발강색 바탕이 드러나도록 이어붙인 것으로 전쟁을 암시하며 야전병원에 근무했던 자신의 실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다.

부리는 말했다. “나의 회화에 관해 말할 때 단어는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회화는 다른 표현의 형식으로 전환되기를 거부하는 바꿀 수 없는 현존이다. 회화는 절박하고 행동적인 현존 모두이다. 회화는 의미하기 위해 존재하는, 또한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나의 회화는 진정으로 나의 부분이며 단어로는 나타낼 수 없는 실재이다.

그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녹슨 금속과 불에 탄 플라스틱처럼 쓸모없어진 산업재료들을 활용함으로서 그런 재료들이 지닌 진부한 성격을 드러냈는데, 이런 선례가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에서는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아직 없었을 때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언제나 부서지고 퇴색되며 찢겨지고 불타 버린 것으로 제시되는 이런 재료들에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으며, 아방가르드가 테크놀로지적인 생산양식을 받아들이며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약속이 결여되어 있었다.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194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조르주 마티외Georges Mathieu(1921~)는 볼스의 영향을 받아 앵포르멜 경향을 확립했다. 그의 회화는 또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도 유사했다. 그는 서체 같은 요소를 이용하여 사전 계획 없이 영감에 고취된 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그의 회화는 전후 상황에 대한 허무주의의 징표로서 제시된 것이지만 자기애의 표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빠른 시간 내에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그의 회화는 표현적 추상과 제스처 회화가 인기를 더함에 따라 널리 전시되었다.

마티외는 친구들 앞에서 대형화를 그리곤 했지만, 그의 첫 대중 앞에서의 작업 경험은 1956년 5월 28일 사라 베르나르 극장에서 기획된 ‘도시의 밤’으로 거의 2천 명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4-12미터에 달하는 그림을 30분 내에 그렸다. 그에게 회화는 정신적ㆍ도덕적 문제였다. 그는 즉흥적 연기에 관해 “이는 완전히 정신적 자세이다. 또한 도덕적 자세라고도 하겠다. 그 결과와 성취 그리고 발생에 따라 회화를 생각하는 우리의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 점점 더 타당한 것으로 확인됨으로써 즉흥에 대한 권리를 권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과 속도, 위험 개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내게 되었다”고 했다.

회화에서 속도의 문제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이 감히 “대중의 머리에 물감단지를 던져놓고는 2백 기니를 달라고” 요구한 싱거운 재담꾼이라며 미국 화가로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제임스 애보트 맥닐 휘슬러를 고발했을 때부터 근대 미술에서 제기되었다. 휘슬러가 <검정과 금빛의 야경: 떨어지는 로켓>(1874년경)을 이틀 만에 ‘발사’했다고 고백하자 “오, 그러세요, 이틀이라구요! 결국 200기니를 요구한 것이 이틀 만에 그린 작품이라구요”라며 검사가 놀라워했다. 휘슬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 쌓아온 지식의 대가로 그 돈을 요구한 것이지요”라고 응답했다. 휘슬러 재판 이후 그 전격성은 오랫동안 고심했던 생각을 드러내는 몸짓의 가치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909~92)은 르네상스 후 근대 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후예이다. 전후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있었고, 베이컨은 신경질적이고 광적인 이미지를 통해 사회의 잔인함과 폭력을 관람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화단에 첫 발을 디뎠다. 세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을 묶는 유일한 공통점은 끔찍한 비극의 느낌을 주는 어떤 사건의 희생자나 목격자가 겪는 분노, 고통, 공포 같은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지닌 인간적 요소와 동물적 요소는 왜곡된 형태로 인해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베이컨에게 회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장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요구에 의해 분출되는 독립적ㆍ인위적 행위의 표현인 것이다.

대전 직후에 그린 회화에 나타나는 억압은 <회화>에서 그 수위가 높아졌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1649~50)에 기초한 베이컨의 여러 인물들은 늘 자신이 위치한 공간에 짓눌려있다. 극도의 불안으로 인해 여태까지 볼 수 없던 그로테스크하고 비꼬인 블랙코미디풍의 풍자와 신랄하고 충격적 요소가 이 작품에 함께 등장한다. 외설적이고 끔찍해 보이는 이런 방식은 베이컨 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몇 가지 원칙 중 하나이다. 비유적인 몇몇 세부 요소들이 관람자에게 외설스러운 느낌을 제공한다. <회화>의 제작과정은 무수한 수정과 신비로운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회화의 성격이나 작업의 방향, 결과를 미리 구상한 뒤 그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려진다. <회화>에서 지나치게 많은 물감을 사용하여 공간을 강조하고, 붓자국과 인물 주위에서 순환하는 듯한 공간을 만들려고 왜곡된 원근법을 사용했다. 상궤를 벗어난 이런 배치로 인해 중앙의 인물이 거대해 보인다. 배경의 가죽을 벗긴 소 때문에 인물이 한층 더 크고 바깥쪽으로 튀어나오는 듯이 보인다. 인물의 입은 그에게 흥미를 제공한 입병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것이다.

베이컨은 자신의 회화를 설명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내게는 설명이 필요치 않은데, 회화나 시에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회화나 시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카소는 회화에 관해서 아주 말을 잘 했다. 그는 갖가지 지성적인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결코 설명하지 못했다. 설명은 불가피하게 부족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다. 음악을 예로 들면, 음악은 내게 매우 감동적이지만 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게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사람들이 설명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설명해줄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테지만 내게는 어색한 일로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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