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10

InformelㆍHappening, Performance artㆍBody art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볼스를 염두에 두고 1952년에 앵포르멜이란 용어를 창안해내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 앙리 미쇼, 장 폴 리오펠 등의 작품을 언급할 때도 이 용어를 적용했다. 타피에는 무정형의 미술이란 뜻을 지닌 앵포르멜의 자발적이고 조직화되지 않은 특성을 강조했다. 그는 칸딘스키의 견해를 좇아 비기하적인 표현적 추상은 실재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직관적인 자각을 끌어내어 전달해주는 수단으로 보았다. 앵포르멜이란 용어는 입체주의에서 나온 어느 정도 엄격한 추상 경향이나 몬드리안과 데 스테일 화가들이 보여준 것 같은 다양한 기하학적 추상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조르주 마티외가 창안해낸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해내는 ‘서정적 추상’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무의식적 서예 형태로서의 추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앵포르멜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며 정확히 구별되지 않은 채 혼용되기도 하는 것이 타시즘Tachism이다. 타시즘은 1954년 프랑스 평론가 샤를 에티엔Charles Estienne이 전후 유럽의 서정적ㆍ표현적 추상을 기하학적 추상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때’ ‘얼룩’ ‘자국’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타슈tache에서 파생되었다. 타시즘은 색채의 조화에 대한 의식적인 조직보다는 화가의 감정적 상태를 표현하는 기호와 제스처로서의 얼룩과 색면의 자발적인 상호작용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타시즘은 주제와 관계없이 색의 얼룩을 응용했지만, 극히 구성적이었고 입체주의 사상에 의존해 회화를 일종의 조화로운 총체로 여겼다.

장 포트리에의 생애는 앵포르멜의 배경을 설명해주기에 충분하다.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왕립 미술학교를 거쳐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선에서 중상을 입었다. 1920년에 파리로 돌아와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고, 대공황 때 회화를 포기하고 1935년부터 4년 동안 알프스산맥에서 스키 강사와 호텔 경영자로 생계를 꾸리다가 파리로 돌아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파리 근교 정신병원 소유지에서 과거 비둘기장이었던 곳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병원 주변의 나무들은 독일군에 의해 포로들을 고문하고 즉결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는 종종 희생자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총소리나 울부짖음 같은 청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공포를 제작한 것이 ‘인질 Otages’ 연작으로 작은 패널화들이다. 연작은 반쯤 뭉개진 사람의 얼굴 형상들이었다. 모호한 얼굴 형상은 시멘트와 석고가루와 물감을 뒤섞어 팔레트 나이프로 쌓아올리면서 형상화시킨 것이다. 크림처럼 두터운 물감이 감미로운 느낌을 주지만 그의 의도는 압박과 공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포트리에와 함께 앵포르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 뒤뷔페는 “나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유럽에 관해 무지하기를 원한다. 기존의 사실과 유행을 무시하고 원시적이 되고 싶다”고 했다. 뒤뷔페는 아이들의 드로잉, 슬럼가 벽의 낙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정신이상자의 회화 등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모든 종류의 개인적 경험의 즉각적인 기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그들의 회화를 수집하면서 그것들이야말로 인간의 창조성을 보여주는 진정한 실체임을 알았다. 그는 낙서에 나타난 본능과 정열, 공상과 폭력, 그리고 망언 등 야만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화려하게 치장되거나 점잔을 부리는 미술을 혐오한 그는 미숙한 것, 잘못 만들어진 것, 미완의 것, 뒤섞인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발성과 충동을 존중하고 본능적 필기와 자취를 선호했다.

뒤뷔페는 자신의 회화에 아르 브뤼Art Brut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프랑스어로 ‘조야한 미술’이란 뜻이다. 그는 아르 브뤼의 연구와 보존을 허용하게 될 컬렉션을 만들기로 하고 “우리는 여기서 예술적 교양이 없는 사람이 제작한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는 지성인의 작품에서 벌어지는 것과 반대로 모방정신은 거의 전무하거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따라서 예술가는 고전미술이나 유행하는 미술의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바탕으로부터 모든 것, 주제, 제작에 필요한 재료, 이동수단, 리듬, 글쓰기 수법 등을 끌어낸다. 우리는 여기서 온전히 순수하고 꾸밈없고, 오로지 예술가 자신만의 충동에 따른 모든 표현 양상의 전체성 속에서 재발명된 예술적 작용을 목격한다. 유일한 창의성만이 드러나는 교양적 미술에서 지속되는, 카멜레온과 원숭이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뒤뷔페는 1950년대 후반부터 전체론적 구성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 얇은 금속 조각,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버려진 모든 가치들을 새롭게 주목받도록 이끌어낸” 여러 경향들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예술가로 부각되었다. 그는 예술가를 사로잡는 것은 마구잡이 우연이 아니라 사용된 재료의 본질에 고유한 특수 우연이라면서 차라리 저항하는 재료를 앞에 두고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기분과 열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벗어난 해프닝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에 앨런 캐프로가 창안해낸 것이다. 해프닝은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그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해프닝은 공공연하게 자유를 강조하고 억압을 깨뜨리는 것에 관련되었더라도 매우 거만한 방식으로 행해졌는데, 곧잘 관람자들에게 명령했다. 덧없는 것, 변화, 자연스러운 것, 심지어 실수를 수용하는 해프닝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다. 해프닝의 개념은 미술에 있어서 영속성과 장인 정신에 대한 전통 원칙을 주도면밀하게 거부하는 캐프로의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연극적 퍼포먼스와 매우 유사하며 환경미술과 마찬가지로 갤러리나 어떤 장소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작곡가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갤러리와 미술관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해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스가 벌인 수많은 해프닝과 같이 정치적ㆍ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다.

해프닝의 개념을 가장 명확하게 해준 작품은 1952년 여름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존 케이지가 작곡한 3악장으로 이루어진 <4분 33초>이다. 튜더가 <4분 33초>를 공연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세 부분으로 된 피아노 소나타지만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는 것처럼 처음에 손을 한 번 들어올리고 4분 33초 동안 팔을 두 번 더 들어 올린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침묵에 잠긴 이 작품은 음악이 흐르지 않을 때 생겨나는 소음을 들려주었다. 청중이 모욕과 조롱이라고 느끼지만 않는다면 처음의 당황스런 순간이 지나고 멀리 있는 새소리와 자동차소리, 의자가 삐거덕거리는 소리 등을 들을 수 있다. 케이지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둘러싼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라고 항상 권유했다. 그는 “소리로 하여금 그 자체가 되게 하라”고 했는데, 모든 소음이 잠재적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에 네 가지 요소, 즉 음의 고저, 음색, 큰 소리, 지속이 있으나 정적이 오히려 유일한 지속이라고 주장했다. <4분 33초>는 단지 지속만을 강조한 음악이다.

케이지는 1957년에 자신의 음악 연주의 목적을 목적 없이 연주하는 것이라면서 “혼란된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창조행위 속에서 무엇인가를 향상시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일깨워주는, 즉 삶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일단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면 너무도 멋진 일인데, 사람들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한다”고 했다.

블랙마운틴 칼리지의 신화적 해프닝 이후 ‘이벤트’란 용어가 미술의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머스 커닝엄은 자신의 발레를 이벤트로 규정했다. 케이지가 모든 소음을 잠재적 음악으로 간주한 것과 마찬가지로 커닝엄도 신체의 모든 동작을 잠재적 발레로 간주했다. 커닝엄은 주요 무용수와 나머지 무용수들의 구별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무대 위에서의 집중방식도 계층 및 위계질서와 연관되는 기분 나쁜 것으로 보았다.

해프닝을 집단적으로 벌인 Fluxus
해프닝을 집단적으로 벌인 플럭서스 그룹은 다다의 정신을 되살리면서 예술 전통과 예술에 있어서 전문적 경향을 띠는 모든 것에 격렬히 대립했다. 독일에서 형성된 플럭서스는 196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활약했다. 플럭서스는 선언문에서 그룹의 목적을 “이 세계에서 부르주아적인 병과 ... 죽은 미술을 몰아내고 미술에서 혁명적인 조류를 촉진하며 살아 있는 예술과 반예술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제적인 활동을 벌인 플럭서스는 예술과 삶을 구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틀에 박힌 평범한 일상도 예술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럭서스의 창설자로 플럭서스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조지 마키우나스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전후 이민자로서 서독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마키우나스는 칼이나 손가락으로 사전을 찔러서 들춰보다가 라틴어 ‘fluere흐르다’에서 유래한 이 명칭을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다이스트들이 자신들의 명칭을 찾았던 것과 꼭 같은 방식이었다. 기원전 5세기 에페소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 모든 것은 흐른다”면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마키우나스는 이런 철학적 함의를 넘어서 플럭서스란 단어를 인체의 배변활동이라는 의학적 과정이나 분자의 변형 및 화학 결합과 같은 과학 작용에 노골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플럭서스의 목적을 명쾌하게 “반예술 형태는 우선 직업으로서의 예술을 공격하고 예술가와 대중의 인위적 분리를 공격하며, 예술가와 관람자, 혹은 삶과 예술의 인위적 분리를 공격한다. 그 형태는 인위적 형태, 예술 자체의 모범과 방법을 반대한다. 목적의 추구,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추구를 반대한다. 반예술은 삶이며 자연이고 실제 현실이다. 그것은 하나이자 전부이다”라는 말로 규정했다.

플럭서스 활동에서 단연 돋보이는 결과는 요제프 보이스가 명성을 얻은 것이다. 플럭서스는 1966년경 일련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40여 편의 단편 영화를 남겼다. 백남준의 <영화를 위한 선>(1962~64)은 플럭서스를 대표할 만한 영화로 뉴욕의 캐날 스트리트에 있는 마키우나스의 로프트에서 상연되었다. 이것은 거의 1천 피트 분량의 투명한 16mm 필름 리더를 현상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30여 분 동안 스크린에 영사한 것이다. 백남준의 영화는 아무런 이미지나 소리도 없는 관람자의 자유연상을 위한 백지상태가 되었다. 영화를 상영하면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스크래치, 먼지, 그리고 우연한 사건들이 매번 영화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아트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된 것은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1971년 『옥스퍼드 사전』에 처음 이 용어가 수록되었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한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퍼포먼스아트를 여성 다수가 차지하는 건 페미니즘 전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아트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이 되기도 하는데, 요제프 보이스에게서 보듯 의식의 변화를 통해 행위자가 변화된 사회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포먼스아트의 중요성은 변형된 의식의 형식으로 지속되더라도 오로지 반복될 뿐이다.

퍼포먼스아트의 형태와 경향은 매우 다양한데, 정신분석이라는 문화 전통에 기반을 둔 빈 행위파는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 외설 취미에 탐닉했다. 빈 행위파는 1960년대에 함께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퍼포먼스아트 예술가들의 그룹에 붙여진 명칭으로 그들은 가장 비도덕적이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합성한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귄터 브루스는 1968년 <행위 30. 순수한 광기>에서 분위기가 잡히자 대중 앞에서 대소변을 보았다. 그는 피부에 면도칼로 상처를 내기도 했다. 브루스와 오토 뮐은 1968년 7월 7일 사회주의 학생회의 초대를 받아 빈대학에서 스캔들을 일으켰다. 뮐은 팸플릿을 읽었고, 피학대성음란증 환자 한 명에게 채찍을 후려쳤으며, 철학자 한 사람은 강연을 했다. 직접예술회 회원들은 ‘누가 더 멀리 오줌줄기를 뿜어 보일 것인가’라는 공개심사를 조직했다. 브루스는 옷을 벗은 뒤 자신의 옆구리를 베고 손으로 오줌을 받아 들이마시고 대변을 보고 온몸을 배설물로 친한 뒤 바닥에 누워 오스트리아 국가를 부르면서 자위행위를 했다. 브루스는 1969년 빈대학에서 <예술과 혁명> 이벤트를 선보였다가 6개월의 징역이 선고되자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달아났다가 1976년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뮐은 십대와 성관계를 가진 이유로 7년의 징역형이 내려졌고, 포르투갈의 작은 코뮌에 구금되었다가 7년 후에 풀려났다.

사람의 몸을 재료로 하는 바디아트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아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몸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몸을 사용한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에는 이벤트나 퍼포먼스아트에 가까웠으나,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과 퍼포먼스 속에 바디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독립적 장르로 부상한 바디아트는 개념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므로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 바디아트 작품은 예술가의 감정이나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아트만큼 비개성적이다. 윌러비 샤프가 『애벌런치 Avalanche』지에서 기술한 대로 바디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은 자전적인 미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미술이다.” 샤프는 바디아트가 포스트매체의postmedium 곤경과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바디아트의 포스트미니멀리즘적 보완물인 프로세스아트에서도 동일함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바디아트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있었던 퍼포먼스의 세 가지 모델을 정교하게 한 것이다.

첫째, 행위로서의 퍼포먼스로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발전해 해프닝, 플럭서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그룹들의 상호 예술적 활동에서 나타났다. 이른바 네오다다라 불린 이런 행위들은 미술의 전통 예법을 공격하지만, 동시에 남성으로 간주되는 예술가의 영웅적이고 때로는 스펙터클한 제스처를 지지했다.

둘째, 과제로서의 퍼포먼스로 저드슨무용단에서 발전한 이 모델에서는 반스펙터클한 기계적 몸놀림이 상징적인 무용 동작을 대체했다. 과제 퍼포먼스task performance는 행위 퍼포먼스action performance에 대한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에서 나왔으며, 사회적이면서 성적인 급진적 평등주의 속에서 저드슨무용단의 무용수들의 주도 아래 발전했다.

셋째, 제의ritual로서의 퍼포먼스는 요제프 보이스, 헤르만 니츄, 오토 뮐, 귄터 브루스 등의 해체 미술destruction art 실천가들이 제안한 퍼포먼스였다. 과제 퍼포먼스가 미술을 탈신비화하는 데 주력한 반면 제의 퍼포먼스는 미술을 재신비화하고 다시금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몇몇 바디아트 예술가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일부 미니멀아트 예술가들과 팝아티스트들이 추구한 일상의 진부함을 계승하여 신체의 평범한 기능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미술품으로 제시했다. 작품 제작과정을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하며, 길버트와 조지처럼 사전에 안무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관람자의 참여는 배제된다. 신체를 학대하는 예술가들도 종종 있다. 일부 예술가들은 손발이 불구가 되거나 팔 다리가 절단될 때까지 자해행위를 벌이기도 하는데, 이런 작품들이 지닌 철학은 분명하지 않다.

바디아트의 선구자는 니스 태생의 화가 이브 클랭이다. 클랭은 파란 물감을 바른 누드의 모델로 하여금 바닥에 펼쳐놓은 종이 위에서 뒹굴게 했다. 클랭은 그 방법을 세련되게 하고, 그의 해설자 피에르 레스타니는 그것을 <인체 측정>의 자취로 명명할 것을 시사했다. 그 자취는 1960년 3월 9일 파리의 시립근대미술관에서 기획한 공개 의식을 통해 미술의 무대에 등장했다. 조수 앞에서 클랭은 담배를 피우며 교향악단이 20분 동안의 침묵 끝에 한 가지 소리만 내는 20분 동안 「단조 교향곡 Monotone Symphony」을 연주하는 동안, 벽과 바닥에 설치된 바탕재 위로 몸에 칠한 파란 물감의 자취를 새기는 세 명의 여인을 지휘했다.

작품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의 임파스토 회화는 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유지해온 유화와 어두운 색조를 모두 포기하면서 1940년경에 확립한 것이다. 테이블에 수평으로 놓고 미리 파스텔로 얇게 덧칠한 캔버스에 작업한 그는 주걱으로 석고처럼 보이는 흰색 재료 덩어리를 넓게 발라 모호한 형태를 만들고 그 반죽이 굳기 전에 위에 다양한 색채의 파스텔 가루를 뿌리거나 붓으로 약간의 윤곽을 만들어 장식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이미지는 늘 캔버스 중앙에 몰려있고 거의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로, 얼룩진 배경 중심에서 부조처럼 형상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가 선호한 색은 분홍색, 자주색, 터키의 색, 값싼 인쇄물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사탕의 색이었으므로 키치의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었다. 앙드레 말로는 그의 회화에 대해 “동시대의 고통을 비극적인 표의문자가 될 때까지 해부하여 그것을 영원의 세계 속에 각인시키려고 한 첫 시도”라고 극찬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단순히 캔버스에 나타난 형상만이 아니라 포트리에의 기법에서 정액과 오물에 대한 암시였다. 전쟁을 겪으며 부상한 새로운 철학적 태도, 즉 실재란 본질적으로 무정형이며, 모순되고, 모호하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1901~85)는 회화에 자갈, 깨진 병조각 등이 섞인 회반죽, 아교, 퍼티, 아스팔트 등을 사용했으므로 표면에 긁힌 자국과 낙서가 오래된 벽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마티에르matière, 즉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긁어내거나 흙, 혹은 모래를 물감에 섞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회화를 오트 파트라고 명명했는데, 오트 파트Hautes Pâtes는 ‘두터운 물감’이란 뜻이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미술평론가 앙리 장송Henri Jeanson(1900~70)은 뒤뷔페의 전시회에 대해 풍자로 유명한 시사주간지 『르 카나르 앙셰네 Le Canard enchaîné』지에 풍자적인 논조로 “다다이즘 다음은 카카이즘cacaism이다”라고 적었다. 카카이즘이란 어린이 말로 똥, 더러운 것을 의미한다. 장송의 익살스런 평가가 뒤뷔페의 회화를 노골적으로 쓰레기라고 비난한 평론가들의 빈정거림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다다이즘을 언급한 것은 전후 파리의 독특한 상황과 관계가 있었다.

뒤뷔페는 그가 전시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여기서는 손으로, 저기서는 스푼으로” 작업했음을 강조했다. 그는 “무슨 명분으로 사람은 조개목걸이는 걸치고 거미줄은 걸치지 않는가?, 무슨 명분으로 여우 털은 괜찮고 여우 내장은 안 되는가? 무슨 명분인가? 나는 알고 싶다. 평생 사람의 벗인 더러운 것, 쓰레기, 오물은 사람에게 더 소중한 것이 될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것이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 언급을 평론가들은 고의적인 도발로 보았다.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4)는 환각제 메스칼린mescaline을 복용한 상태에서 소묘를 하기 시작했다. 환각상태에서 제작한 소묘작품에서는 달라진 기법과 정신상태의 변화가 나타났다. 새로운 기법은 펜을 이용한 소묘로서 세부는 정교하고 꼼꼼하게 묘사되었으며, 화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특정한 중심 없이 전체적으로 균일한 전체론적 양식을 보여주었다. 미쇼는 마약을 예술적인 목적으로 실험했다. 1960년대에도 메스칼린에 의한 환각상태에서 그리는 소묘를 완전히 그만두지 않았지만 과슈와 크레용, 인디언 잉크를 혼합한 재료로 작업하면서 앵포르멜 회화의 과격한 비정형성과는 반대로 보다 통일된 구성과 구상적인 암시를 보여주었다. 환각상태에서 제작하지 않은 작품에서도 메스칼린을 복용하고 작업한 경험이 구성의 근간을 이루었다.

독일 화가 에른스트 빌헬름 나이Ernst Wilhelm Nay(1902~68)는 1930년대 중반에는 풍경을 두터운 붓질과 야수주의적인 색을 사용하여 표현주의 양식으로 나타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신비하거나 신화적인 풍경이 색채 속에서 모습을 반쯤 드러내는 것처럼 처리하면서 색을 더욱 강조했으며, 1950년에 이르자 직선과 곡선, 타원 형태가 융화되어 장식적 조화를 이루는 거의 순수 추상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 후 색을 더욱 강조하여 1953년경 타시즘 구성 형식에 도달했다. “나는 다른 모든 조형 수단보다 색을 우선시하며 색을 통해 형태의 구성을 결정한다”고 했다.

독일계 프랑스 망명 화가 볼스Wols(1913~51)는 38세의 생애를 살았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알코올중독자로서의 삶, 자동주의 회화 제작과정, 회화에 나타나는 발작적인 제스처 같은 진실의 징후를 근거로 볼스를 “그 자신이 필연적으로 실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실험가”로 묘사했다. 환각을 드러낸 볼스의 회화는 뒤뷔페의 오트 파트(두터운 물감) 소동에 힘입어 별안간 성공을 거두었다. 볼스는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 유명해져 ‘앵포르멜의 원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타시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정신적으로 위축된’ 성격을 지닌 그의 수채화를 미셸 쇠포르는 “체계화된 정신착란”으로 묘사했다.

러시아계 프랑스 화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1914~55)의 회화는 추상 경향으로 나아갔으며, 에콜 드 파리의 타시즘 양식을 구사한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추상화 주제는 드러나지 않지만 대개 자연의 외양에서 온 것들이다. 그는 선명한 바탕색이 조금 드러나게 하면서 어두운 색의 물감으로 견고한 색면을 이루어나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물감을 나이프로 바름으로써 엄숙하면서도 감미로운 효과를 나타냈다. 1953년부터 사실주의 양식은 아니지만 다시 구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구상에 끌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소에 대한 느낌을 창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의도가 특히 1955년 자살하기 직전에 그린 마지막 작품들에 잘 나타나 있듯이, 관찰된 사실과 추상적 구성 사이에 동일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그의 회화는 형태와 색의 배열인 동시에 분위기 있는 풍경으로 보인다.

독일계 프랑스 화가 한스 아르퉁Hans Hartung(1904~89)은 전후에 비형식적인 추상화와 제스처 회화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겉으로 보기에 서체를 연상시키는 검정색의 두터운 선과 커다란 얼룩들로 화면을 채우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것은 심각하며 기하학에 가까운 몬드리안과 그 추종자들의 신조형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는 앵포르멜과 타시즘의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1923~)는 초기에 호앙 미로와 안토니 가우디의 영향을 받았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순수 유화를 포기하고 모래나 작은 돌을 섞은 기름이나 유액을 소재로 하여 그것을 캔버스 위에 펼치고 상현문자 같은 표시를 하거나 천에 찍어 흐려진 퇴색한 듯한 효과를 나타내는 독특한 기법을 선보였다. 그는 1954년에 콜라주, 오트-파트(두터운 물감), 가공되지 않은 일상용품, 낙서와 임의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양식을 완성했으며, 1952~53년 집중적 실험시기를 거쳐 아르테 포베라 양식으로 진전시켰다. 타피에스는 찢어진 캔버스, 종이, 지푸라기, 실, 헝겊, 쓰레기, 낡은 스타킹 등 일상적인 폐기물을 미술품에 사용했으며, 그 위에 물감을 칠하거나 흘려 전체적으로 낙서로 뒤덮어 긁히고 손상된 벽처럼 보이게 하는 그라타주(긁어내기) 기법을 사용했다. 타피에스는 앵포르멜 화가들과 공통점을 가진 반면 회화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알베르토 부리와 유사했다.

낡고 거친 삼베조각과 숯덩이, 찌그러지고 녹슨 금속 등을 이용한 개성적인 콜라주에 추상 기법을 결합시켜 낡고 폐기된 재료들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구성물로 만든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1915~95)의 회화는 낡아빠지고 버려진 폐품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환기시키는 힘을 이용한 최초의 작품에 속하며, 미국의 정크아트와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를 예고했다. 이렇게 작업한 것을 두고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거친 붕대를 감은 부상자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삼베를 염색하고 태운 뒤 검정색이나 발강색 바탕이 드러나도록 이어붙인 것으로 전쟁을 암시하며 야전병원에 근무했던 자신의 실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다.

부리는 말했다. “나의 회화에 관해 말할 때 단어는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회화는 다른 표현의 형식으로 전환되기를 거부하는 바꿀 수 없는 현존이다. 회화는 절박하고 행동적인 현존 모두이다. 회화는 의미하기 위해 존재하는, 또한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나의 회화는 진정으로 나의 부분이며 단어로는 나타낼 수 없는 실재이다.

그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녹슨 금속과 불에 탄 플라스틱처럼 쓸모없어진 산업재료들을 활용함으로서 그런 재료들이 지닌 진부한 성격을 드러냈는데, 이런 선례가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에서는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아직 없었을 때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언제나 부서지고 퇴색되며 찢겨지고 불타 버린 것으로 제시되는 이런 재료들에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으며, 아방가르드가 테크놀로지적인 생산양식을 받아들이며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약속이 결여되어 있었다.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194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조르주 마티외Georges Mathieu(1921~)는 볼스의 영향을 받아 앵포르멜 경향을 확립했다. 그의 회화는 또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도 유사했다. 그는 서체 같은 요소를 이용하여 사전 계획 없이 영감에 고취된 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그의 회화는 전후 상황에 대한 허무주의의 징표로서 제시된 것이지만 자기애의 표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빠른 시간 내에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그의 회화는 표현적 추상과 제스처 회화가 인기를 더함에 따라 널리 전시되었다.

마티외는 친구들 앞에서 대형화를 그리곤 했지만, 그의 첫 대중 앞에서의 작업 경험은 1956년 5월 28일 사라 베르나르 극장에서 기획된 ‘도시의 밤’으로 거의 2천 명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4-12미터에 달하는 그림을 30분 내에 그렸다. 그에게 회화는 정신적ㆍ도덕적 문제였다. 그는 즉흥적 연기에 관해 “이는 완전히 정신적 자세이다. 또한 도덕적 자세라고도 하겠다. 그 결과와 성취 그리고 발생에 따라 회화를 생각하는 우리의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 점점 더 타당한 것으로 확인됨으로써 즉흥에 대한 권리를 권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과 속도, 위험 개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내게 되었다”고 했다.

회화에서 속도의 문제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이 감히 “대중의 머리에 물감단지를 던져놓고는 2백 기니를 달라고” 요구한 싱거운 재담꾼이라며 미국 화가로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제임스 애보트 맥닐 휘슬러를 고발했을 때부터 근대 미술에서 제기되었다. 휘슬러가 <검정과 금빛의 야경: 떨어지는 로켓>(1874년경)을 이틀 만에 ‘발사’했다고 고백하자 “오, 그러세요, 이틀이라구요! 결국 200기니를 요구한 것이 이틀 만에 그린 작품이라구요”라며 검사가 놀라워했다. 휘슬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 쌓아온 지식의 대가로 그 돈을 요구한 것이지요”라고 응답했다. 휘슬러 재판 이후 그 전격성은 오랫동안 고심했던 생각을 드러내는 몸짓의 가치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909~92)은 르네상스 후 근대 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후예이다. 전후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있었고, 베이컨은 신경질적이고 광적인 이미지를 통해 사회의 잔인함과 폭력을 관람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화단에 첫 발을 디뎠다. 세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을 묶는 유일한 공통점은 끔찍한 비극의 느낌을 주는 어떤 사건의 희생자나 목격자가 겪는 분노, 고통, 공포 같은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지닌 인간적 요소와 동물적 요소는 왜곡된 형태로 인해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베이컨에게 회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장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요구에 의해 분출되는 독립적ㆍ인위적 행위의 표현인 것이다.

대전 직후에 그린 회화에 나타나는 억압은 <회화>에서 그 수위가 높아졌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1649~50)에 기초한 베이컨의 여러 인물들은 늘 자신이 위치한 공간에 짓눌려있다. 극도의 불안으로 인해 여태까지 볼 수 없던 그로테스크하고 비꼬인 블랙코미디풍의 풍자와 신랄하고 충격적 요소가 이 작품에 함께 등장한다. 외설적이고 끔찍해 보이는 이런 방식은 베이컨 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몇 가지 원칙 중 하나이다. 비유적인 몇몇 세부 요소들이 관람자에게 외설스러운 느낌을 제공한다. <회화>의 제작과정은 무수한 수정과 신비로운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회화의 성격이나 작업의 방향, 결과를 미리 구상한 뒤 그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려진다. <회화>에서 지나치게 많은 물감을 사용하여 공간을 강조하고, 붓자국과 인물 주위에서 순환하는 듯한 공간을 만들려고 왜곡된 원근법을 사용했다. 상궤를 벗어난 이런 배치로 인해 중앙의 인물이 거대해 보인다. 배경의 가죽을 벗긴 소 때문에 인물이 한층 더 크고 바깥쪽으로 튀어나오는 듯이 보인다. 인물의 입은 그에게 흥미를 제공한 입병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것이다.

베이컨은 자신의 회화를 설명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내게는 설명이 필요치 않은데, 회화나 시에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회화나 시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카소는 회화에 관해서 아주 말을 잘 했다. 그는 갖가지 지성적인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결코 설명하지 못했다. 설명은 불가피하게 부족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다. 음악을 예로 들면, 음악은 내게 매우 감동적이지만 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게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사람들이 설명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설명해줄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테지만 내게는 어색한 일로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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