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13
후기회화적 추상ㆍ슈퍼리얼리즘ㆍ뉴이미지
실재성을 강조하는 후기회화적 추상: 색면 회화와 하드에지회화
1. 후기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새로운 후기회화적 추상 경향의 뛰어난 선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표현적 붓자국이나 특징적 화면 질감과 같은 회화적 특질을 거부하고 액션페인팅의 자발적이며 충동적 방법을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명료하게 규정하여 변화가 없는 색의 영역으로 대체했다. 그들은 촉감이나 기타 착각을 일으키는 특질을 제거하고 미술 재료의 실재성을 강조했으며, 그려진 이미지와 물리적 미술품을 동일시하고 일체의 부수적 연상효과를 배제함으로써 순수 시각적 색채 미술을 목표로 삼았다.
‘후기회화적 추상’이란 명칭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4년에 기획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서의 ‘후기회화적 추상’ 전시회 카탈로그에 처음 언급한 데서 비롯했다. 그린버그는 이 명칭을 추상표현주의와의 결별을 표방하면서도 구상화로 전환하지 않고 폭넓은 다양한 독자적 양식을 보여준 화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색면 회화와 하드에지회화였다. 하드에지는 말 그대로 ‘뚜렷한 테두리’를 뜻한다. 후기회화적 추상화가들은 촉감이나 기타 착시현상을 유발하는 성질을 제거하고 재료의 실재성을 강조했다.
색면 회화Color Field
색면 회화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방법에 의한 것으로 1951년 잭슨 폴록이 시작했고, 이를 헬렌 프랭컨탤러가 받아들였다. 단색 회화를 지칭하는 색면 회화는 특히 색채의 농도와 채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회화이다. 단색 회화를 지칭하는 색면 회화는 특히 색채의 농도와 채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회화이다. 색면 회화에서 색채는 형상과 드로잉으로부터 해방되어 고유한 실재, 순수하게 시각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회화적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색은 독립적이고 현실과 무관하며 비촉각적 실재성을 지니게 된다. 종종 색면 회화는 거대한 규모로 제작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시각 영역을 점유하고 크기의 효과를 창출한다. 색면 회화의 선구자로 일반적으로 이브 클랭이 꼽는다. 현대적 단색 회화는 1952~53년경 당시 파리에서 작업하고 있던 엘즈워스 켈리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고, 1952년 이후에는 애드 라인하르트, 1960년대에는 바넷 뉴먼 등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하드에지회화Hard Edge Painting
하드에지 회화는 평론가 쥘 랑스네르가 1958년에 ‘기하학적 추상’이란 기존의 낡은 명칭을 대신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명칭으로 로렌스 앨러웨이가 1966년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체계적 회화’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이 명칭의 채택 의도를 밝혔다. 그는 1959~60년경부터 단순한 형태와 풍부한 색의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뤄진 새로운 추상 미술 흐름을 과거의 기하학적 추상과 차별화하여 부르기 위해 하드에지란 용어를 이미 사용한 바 있다. 하드에지 회화라는 명칭은 다소 서술적이고 모호하지만 1960년 직전에 출현한 순수 색면을 강조하고 치밀한 계획에 의해 그려진 회화를 차별화하여 부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드에지 회화는 윤곽선이 분명한 넓은 색면으로 이뤄지며 자연발생적ㆍ충동적으로 제작되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와는 달리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해 그려진다.
색면 회화의 선구자 헬렌 프랭컨탤러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는 1951년에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고 그의 드립핑 회화dripping painting에 영향을 받아 1952년에 얼룩 회화stain painting를 시도했다.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을 직접 사용함으로써 얼룩이 생기거나 물감이 스며들도록 하는 이 기법은 화폭과 형상의 구분을 극복하여 완벽한 평면성에 도달하게 했다. 캔버스의 넓은 면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부분적으로 추상적 색만을 칠한 양식으로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받았다. 프랭컨탤러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회화적인 붓자국을 없애 추상표현주의에서 색면 회화로 연결되는 비약적 발전의 중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는 1962년경부터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므로 색이 더욱 강렬해지고 염색 기법을 고수하여 그려진 이미지와 캔버스의 표면을 완전히 일치되게 했다. 그녀의 회화는 1953년 그린버그의 눈에 띄면서 뉴욕 화단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린버그는 색으로만 이뤄진 그녀의 회화를 모더니즘 추상화의 과제로 제시한 평면성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았으며, 여기에 더해 시적 감수성과 여성 특유의 우아함,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그녀만의 독특한 회화 방식은 그린버그를 매료시켰다.
1965년 큐레이터 헨리 젤드자흘러Henry Geldzahler(1935~94)와의 인터뷰에서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계획을 세우거나 마음속에 미리 구상하느냐는 질문에 프랭컨탤러는 “어떤 때는 느낌만 가지고 그리기 시작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세 가지 다른 파란색과 다른 색 하나를 가지고 그리기 시작하다 도중에 다른 색의 필요를 느끼고 사용하기도 한다. 또는 캔버스를 채우고 또 채우는 방법으로 작업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작업이 많이 가해졌거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캔버스를 버린다”고 했다.
프랭컨탤러는 1958년 로버트 머더웰과 결혼하고, 1968년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일대학 캘훈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에 선정되었다.
색을 서정적으로 이용한 모리스 루이스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Bernstein(1912~62)는 1954년에 프랭컨탤러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산과 바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그녀의 기법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형상-바탕의 환영적인 대비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을 없애고 색을 순전히 시각적인 현상으로 서정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방문했을 때 프랭컨탤러는 물감이 천에 배어들게 하고 얼룩을 남기는 새로운 기법을 막 시도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루이스는 그녀의 아이디어를 진전시켜 묽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며, 두꺼운 면포에 초벌칠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부분적으로 풀을 먹이고 그 위에 물감을 부었다. 결과적으로 물감은 캔버스 위에 층을 이루는 대신 염색용 염료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캔버스 자체를 움직이거나 캔버스를 살짝 고정하고 있는 틀을 움직여 물감의 흐름을 조정했다.
평론가 마이클 프리드는 루이스가 윤리적 모범이 된다면서 그에게 “회화는 감각적으로 즐겁거나 매혹적인 오브제의 생산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다. 오히려 회화는 윤리적이고 지적인 열정에서 영감을 받지 않는 한 하찮은 것이 되고 말며, 윤리적이고 지적으로 비범한 식별력이 배어 있지 않는 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 운명의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색면의 색조 변화도 거부한 케니스 놀런드
파리에서 오시 자킨에게서 사사한 케니스 놀런드Kenneth Noland(1924~)는 귀국 후 루이스와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50년대 초반 놀런드는 루이스, 프랭컨탤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의 일원이었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정확하게 계산된 기하학적 형태를 더 선호했으며, 이런 이유로 그의 회화는 하드에지 회화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정사각형 캔버스 위에 동심원을 그렸으며 뒤이어 V 형태를 그렸는데 간혹 마름모꼴의 셰이프트 캔버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폭이 넓은 직사각형 캔버스 위에 수평 줄무늬를 그렸다. 표면상으로 단순한 모티프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색의 관계를 단순화하고 색면의 색조 변화도 거부했다. 그는 캔버스의 형태 및 크기와 회화의 이미지 사이의 명확한 관계를 설정하고자 노력한 화가 중 가장 뛰어났다. 특기할 점은 놀런드뿐만 아니라 조각가들도 점점 더 커지는 크기와 새로운 재료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반영이기도 했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추상표현주의가 실패한 이래 미술을 역사적 사명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갈 유일한 방법은 그가 1964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붙인 명칭인 후기회화적 추상이었다. 카탈로그에 실린 글에서 그는 추상표현주의가 자신이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퇴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프랭컨탤러, 루이스, 그리고 놀런드를 미술 발전의 투사들로 보았다.
색만으로 환영적 공간을 창조한 줄스 올리츠키
러시아계 미국 화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2007, 본명은 Jevel Demikovski)가 1960년대 초에 그린 이른바 ‘중심핵’ 회화는 놀런드의 동심원과 루이스의 ‘펼쳐짐’을 연상하게 하는 육중한 윤곽선을 결합한 것이다. 1964년에는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전체론적 구성회화를 시작했다. 윤곽선이 없어진 그의 회화는 1960년대 후반 단색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제작하는 색면 회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주로 이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작품에서 그는 형태나 물감의 물리적 영향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색감이 만드는 순수한 시각적 장을 창출하려고 했다. 또한 염색 기법과 그 이후의 스프레이 뿌리기 기법을 결합함으로써 유사한 톤의 색띠들이 이루는 미묘한 대비와 함께 신비롭게 떠다니는 색채 안개로 밝고 현란한 색채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형태나 원근법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색만으로 환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균일한 색면으로 회화를 제작한 엘즈워스 켈리
엘즈워스 켈리Ellsworth Kelly(1923~)는 파리에서 아르프, 브랑쿠시, 캘더, 피카비아, 미래주의에 동조한 이탈리아 화가 알베르토 메그넬리Alberto Magnelli(1888~1971), 신조형주의의 영향을 받은 조르주 반통걸루Georges Vantangerloo(1886~1965) 등과 교류하면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이때의 실험은 그의 독특한 추상화의 토대가 되었다. 커다란 색면과 칼로 자른 것 같은 날카로운 형태는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특히 색채에 있어서 인간의 감수성과 색채에서 배어나오는 신비감을 철저하게 배제한 점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선명한 색채와 윤곽선의 기하학적 형태는 오로지 강렬한 시각적 효과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당시 유럽 미술계는 통일적인 기하학 형태가 미래사회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메타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면서 균형 잡힌 구성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기하학적 구성 방식은 의식적으로 개인의 분노를 새겨 넣는 액션페인팅의 붓질과 거리가 멀었지만 여전히 표현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화가는 이성의 씨실과 날실로 세계를 직조하는 조물주였기 때문이다. 켈리는 이러한 구성의 정서에 저항했다.
켈리는 미국으로 돌아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양식과 가치관, 방법 그리고 특히 의미의 문제에 있어 정반대편의 입장에 섰다. 그는 내용의 관념이 시각적 측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들의 접근방식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회화에 시각성opticality이 지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환영과 속임수를 거부하고 명확한 경계선으로 분할되고 색조의 변화가 없는 균일한 색면으로 구성된 회화를 제작했다. 그의 회화는 하드에지 양식의 상징이 되었다. 켈리는 “내 회화의 형태가 곧 내용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직접 바라보아야 충격을 받게 되고, 실제 경험이 불가피하다.
하드에지 회화의 기하적인 형태를 사용한 앨 헬드
앨 헬드Al Held(1928~2005)는 1960년경 표현적 추상화를 포기하고 색면 회화, 하드에지 회화와 유사한 매우 개성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프랭컨탤러, 루이스와 달리 그는 애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를 엷게 염색하는 기법을 채택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육중한 질감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임파스토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는 알파벳 문자에 기초를 둔 단순한 하드에지 회화의 기하적인 형태를 사용했다. 1967년경 이런 기하적인 형태를 합치고 겹치게 해서 상자 모양과 입방체 모양의 복잡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회화가 거의 저부조의 입체성을 획득할 때까지 표면의 층을 겹으로 쌓았다.
회화 패턴의 평면성을 강조한 프랭크 스텔라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1936~)는 재스퍼 존스의 <국기> 회화를 보고 새로운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크고 간결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회화를 선보였다. 그것은 형태와 색의 관계에 의한 조형을 배척하고 연역적 방법에서 화면 윤곽을 화면 내부에 되풀이하는 검정 줄무늬 패턴의 그림이었다. 1959년 모마의 큐레이터 도로시 밀러Dorothy Canning Miller(1904~2003)가 기획한 전시회 ‘열여섯 명의 미국인 Sixteen Americans’을 통해 스물세 살에 데뷔한 스텔라는 존스 방식의 이미지-사물을 그는 미니멀리즘 오브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삼차원의 회화 이미지를 제거하고 회화 패턴의 평면성을 강조했지만, 존스식의 모호함을 달가워하지 않아 평면의 뒤로 깊이 후퇴하는 듯한 환영을 거부했는데, 그것을 즐겁게 다룰 수 있는 역설이 아니라 오히려 풀어야 할 딜레마로 생각했다. 형상과 배경의 관계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직선과 대각선이 캔버스의 형태를 따라 반복되는 그림이 구성되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회화를 이념으로 보는 데 반대하면서 스텔라는 “회화에서 과거의 가치, 즉 인본주의적 가치를 찾는 사람들과 논쟁하곤 한다. 여러분이 그런 가치를 명확히 규정한다 해도 캔버스 위에는 늘 물감 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가정으로 끝나게 된다. 내 회화는 거기에 보일 수 있는 것만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사물인 것이다. ... 여러분이 보는 것이 여러분이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2. 사진이나 인쇄물에 의존한 슈퍼리얼리즘
후기회화적 추상, 색면 회화, 하드에지 회화 예술가들에 의해 모더니즘은 시각성이란 개념을 둘러싼 정통성을 구축했다. 회화가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정제함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점차 눈에만 제공되는 허구fiction의 구성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예술가들은 실재를 더욱 자세히 바라보며 하나도 남김없이 재현하려고 했다.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 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슈퍼리얼리즘Superrealism에는 조각까지 포함된다. 극사실주의, 혹은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런 양식으로 작업한 예술가 중에는 사진, 질이 좋은 이미지 원색 인쇄물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한 사람도 있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슈퍼리얼리즘도 외부에 대한 직접적 관찰이 아니라 사진이나 인쇄물에 의존하는 구상 양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슈퍼리얼리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지만, 대부분의 슈퍼리얼리즘 회화에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슈퍼리얼리즘은 도시의 현실에 대한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거의 임상적인 시선이었다. 도시의 현실은 장식과 외양에 치중했으며, 그 속에서 세부에 천착하는 클로즈업을 통해 의미의 공허함이 강조되었다.
도시의 풍경만을 다룬 리처드 에스티스
도시의 풍경만을 다룬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 에스티스Richard Estes(1936~)는 초기에 인물에 초점을 맞추다가 1967년경부터 건물을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특별한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거리풍경 단편을 묘사했는데, 유일하게 잘 알려진 건물을 그린 작품으로는 주문을 받아 제작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을 그린 것이 있다. 그는 상점의 쇼윈도를 즐겨 그렸고, 그의 화면에 표현된 쇼윈도는 그것이 퍼뜨리는 투명함과 반사만으로 가득 차있다. 모든 환각적 기교는 차가운 이미지와 황량한 공간, 번쩍거리는 많은 사물들을 구성해내기 위해 한데 모아졌다. 이런 작품에 부여되는 타당성 중 하나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내려지는 그의 미적 판단이다. 카메라는 오직 기술적 변수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객관성을 갖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 화가라고 할지라도 카메라처럼 너그러운 평등주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카메라 특유의 모든 변형들을 복제한 척 클로스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슈퍼리얼리스트 척 클로스Chuck Close(1940~)는 1961년 워싱턴대학을 졸업한 뒤 1964년부터 예일대학에서 판화 조교로 재직하면서 초기에는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주로 흑백으로 그렸으나, 후에는 슈퍼리얼리즘 회화를 추구했다. 작품의 소재로 주로 주변 인물의 얼굴을 다뤘다. 1960년대 중반에 그는 거대한 여권사진처럼 얼굴 정면을 그린 초상화가로 유명해졌다. 작은 신분증 사진을 거대한 크기로 만들고, 사각형 틀에 맞춘 크기의 확장을 통해 초상화 미술의 판별 기준을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광각렌즈를 사용하여 두상의 크기가 개개의 초점대로 나누어지는 방식과 같은 카메라 특유의 모든 변형들을 복제해내는 데 전념했다. 처음에는 검정색과 흰색만 사용하여 그리고 1970년경부터 색을 도입했다.
스냅사진 같은 느낌을 낸 게르하르트 리히터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일찍이 광고디자인과 무대배경을 그리는 일을 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는 서독으로 이주한 뒤 계속해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그곳에서 그는 피셰 루엑, 지그마르 폴케 등과 교류하며 플럭서스 및 팝아트의 영향을 받고 소비에트와 서양의 열강 모두를 염두에 둔 채 상당히 반어적으로 자본주의 사실주의capitalist realism 운동을 전개했는데, 자본주의 사실주의란 동독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대응책으로 당시 미국에서 선풍을 일으킨 팝아트의 독일식 변형이었다. 이를 계기로 리히터는 독일의 팝아티스트로 불리었다.
리히터는 끊임없이 누보 레알리슴과 앤디 워홀의 작업을 주시하면서 독일 회화를 1960년대 초에 등장한 다른 모든 예술적 작업과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바젤리츠는 대중문화와 사진 모두를 거의 계획적으로 비난하고 부정했으며, 회화가 대항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이런 주장은 리히터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는 모든 시각적 작업을 결정하는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민감성과 국가 정체성 이후의 모델인 전 지구적 문화생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히터는 1966년에 10개의 수직 캔버스를 완성했는데, 가로 9.5m 세로 2.5m에 달하는 앙상블 작품이다. 그는 이 캔버스들에서 상업용 페인트 제조사의 색상표를 정확하게 복제했으며, 제작과정에서도 상업용 페인트가 사용되었다.
3. 특이한 이미지를 추구한 뉴이미지
뉴이미지New Image에 속한 화가들 가운데 일부가 신표현주의로 분류되는 이유는 만화 같은 이미지와 신표현주의의 특징인 거친 손놀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뉴이미지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일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보여준 눈에 거슬리는 구상 양식을 지칭한 모호한 용어로 1978년 뉴욕의 휘트니 미국 미술관에서 개최된 ‘뉴이미지 페인팅’ 전시회에서 유래했다.
뉴이미지 화가들의 공통점은 인식 가능하지만 매우 특이한 이미지를 비전통적이고 비환영적인 문맥 안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1930년대 연재만화의 원시적이며, 노골적이고 바보스러운 유머를 흉내 낸 듯한 눈에 거슬리는 그림을 그린 필립 거스턴은 이 분야의 선구자이다. 뉴이미지 화가로 불린 미국 화가들로는 낸시 그레이브스, 수잔 로선버그, 엘리자베스 머레, 제니퍼 바틀렛, 조나단 보로프스키, 닐 제니, 로버트 모스코비츠, 니콜라스 아프리카노Nicholas Africano(1948~), 린다 벵글리스Lynda Benglis(1941~) 등이 있다. 1966년 예일대학에서 조각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미국의 조각가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1942~)는 전 세계 여러 도시의 공공장소나 빌딩 앞에 초현실적이고 몽상적인 대형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광화문 흥국생명 앞에 높이 22m의 <망치질하는 남자 Hammering Man>가 있고, 과천 현대미술관 정원에는 <노래하는 남자 Singing Man>가 있다. <망치질하는 남자>는 1979년 뉴욕의 폴라 쿠퍼 갤러리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1966년부터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닐 제니Neil Jenney(1945~)의 회화는 1978년 평론가 Marcia Tucker로부터 ‘조악한 회화Bad Painting’란 말을 들었다. 제니는 자신의 양식을 사실주의라고 했다. 그는 미니멀아트와 수퍼리얼리즘에 반발했다.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로버트 모스코비츠Robert Moskowitz(1935~)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와 뉴이미지 추상 사이에 위치한다.
채색한 청동으로 추상조형물을 제작한 낸시 그레이브스
낸시 그레이브스Nancy Graves(1939~95)는 지방 뮤지엄에서 근무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연과 인류학에 관심이 많았다. 배서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그녀는 예일대학으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에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가서 1년 동안 회화를 수학했다. 1965년 말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여행했으며, 1965~66년에는 피렌체에 머물렀고, 이후 뉴욕에 거주했다. 피렌체에서 사실적으로 채색된 실물 크기의 쌍봉낙타를 연작으로 제작하여 유명해졌다. 그레이브스는 “나는 평면적이고 반환영적anti-illusionistic 회화를 추구하던 당시의 지배적인 미학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런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크고, 부드러우며, 무겁고, 강하며, 힘센 그런 형태들을 이용했다”고 훗날 말했다. 그녀는 채색한 청동을 사용하여 추상조형물을 제작했으며 추상화와 영화도 제작했다. 그레이브스는 리처드 세라와 결혼했다.
추상에 일치하는 재현적 형상을 그린 수잔 로선버그
낸시 그레이브스와 퍼포먼스 예술가 존앤 조너스Joan Jonas(1936~)의 조수로 일한 수잔 로선버그Susan Rothenberg(1945~)는 뉴욕 주의 버펄로에서 태어났고, 코넬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에 세 점의 커다란 말 그림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를 닮은 크고 단순화시킨 말 회화로 그녀는 곧 명성을 얻었다. 추상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재현적 형상을 그린 말 연작은 1973년과 1979년 사이에 그려졌다. 이런 회화는 겉보기에 거친 특성으로 인해 1980년대의 소위 ‘조악한 회화’ 운동에 연계되었다.
여러 개의 캔버스를 모아 하나의 미술품을 만든 엘리자베스 머레이
엘리자베스 머레이Elizabeth Murray(1940~2007)는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의 밀스 칼리지에서 미술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버펄로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판화 공방을 운영하다가 1967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1970년대 초 추상화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1976년부터 직접 제작한 셰이프트 캔버스를 사용했다. 그녀는 불규칙한 캔버스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개의 캔버스를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때때로 캔버스를 상하, 혹은 층층이 겹쳐 퍼즐을 맞추듯이 배열했다. 그녀는 이런 작품에 대해 “나는 패널이 벽으로 던져져 그곳에 박힌 것처럼 보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충동과 주관적 경향을 다룬 제니퍼 바틀렛
제니퍼 바틀렛Jennifer Bartlett(1941~)도 밀스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머레이와 우정을 나눴다. 1963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그녀는 예일대학으로 진학하여 1965년에 졸업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미니멀아트가 유행하고 있었다. 바틀렛의 회화도 머레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풍부함과 확신에 찬 외관을 특징으로 한다. 그녀는 1960년대에 점 그림을 그리면서 흰색과 검정색 및 원색들만 사용했다. 그 색깔들은 모델을 그리는 데 사용된 테스토어Testor 표 에나멜의 작은 병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훗날 전기 작가 캘빈 톰킨스에게 말했다. “원색들만 사용하는 것이 늘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오렌지색이나 보라색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초록색은 꼭 필요했다.” 초록색에 대한 필요성을 용인하는 것은 원색들이 지닌 신플라톤주의의 함축과 원추의 축이 함축하는 기하학적 의미를 부정하는 걸 의미한다. 이는 그녀가 충동과 주관적 경향을 다루고 싶다는 의지를 상징한다.
작품
헬렌 프랭컨탤러의 <산과 바다 Mountain and Sea>(1952)
모리스 루이스의 <테트 Tet>(1958)
모리스 루이스의 <베타 카파 Beta Kappa>(1960)
케니스 놀런드의 <가뭄 Drought>
줄스 올리츠키의 <순식간의 러브랜드 Instant Loveland>(1968)
엘즈워스 켈리의 <오렌지·진한 회색·초록색 Orange·Dark Gray·Green>
앨 헬드의 <만테냐의 가장자리 Mantegna's Edge>(1983)
프랭크 스텔라의 <재스퍼의 딜레마 Jasper's Dilemma>(1962~63)
프랭크 스텔라의 <하트라 II Hatra II>(1967)
필립 펄스타인의 <이젤 반대편의 두 모델 Two Models from the Other Side of the Easel>(1984)
척 클로스의 <커다란 자화상 Big Self-Portrait>(1968)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에마 (계단 위의 누드) Ema (Nude on Staircase)>(1966)
두에인 핸슨의 <관광객 The Tourists>(1970)
아프리카노의 <종이 가운 A Paper Gown>(1978)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폴라 쿠퍼 갤러리에서의 설치 Installation at Paula Cooper Gallery>(1983년 11월 5일부터 12월 3일까지)
닐 제니의 <소녀와 인형 Girl and Doll>(1969)
로버트 모스코비츠의 <생각하는 사람 Thinker>(1982)
낸시 그레이브스의 <방향 전환 Zag>(1983)
수잔 로선버그의 <문신 Tattoo>(1979)
엘리자베스 머레이의 <아트 파트 Art Part>(1981)
제니퍼 바틀렛의 <소년 Boy>(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