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12

Popular artㆍNeo-Realism(Nouveau Realisme)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팝아트
팝아트는 주관적·이상적 영감에 의존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며, 객관적·외향적·비개성적이었다. 팝아트는 대중 매체와 밀접하게 관련 있으며 미술과 일상의 간격을 없애려고 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미술의 풍토에 있었고, 대중 역시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되지 못하기란 마찬가지였다. 사실 팝아트는 만연하던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물결로부터 매우 느린 단계를 거쳐 진전되어왔으며,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데 쿠닝을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꼽았다. 미국의 팝아트의 출발은 1955년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재스퍼 존스가 두드러지게 대중적인 이미지를 주제로 삼았을 때였다. 그렇지만 팝아트는 인기 있는 미술이 아니었으며, 약 5년 동안 지하운동underground으로 존재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선정적 특징 때문이었다. 팝아트는 동시대의 상업광고미술, 만화, 인기 잡지, 대형 광고판의 떠들썩함으로부터 그 주제와 이미지들을 취했다.

1960년대: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
1960년대 초는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의 공민권을 주장하는 저항의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런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미국 팝아트의 특징은 표면상의 냉정함으로 묘사하는 주제에 대해 참여의식이 결여되어 보이는 점이다. 거기에는 다다의 기교와 다다의 수법이 재생된 듯 보이나 그 이면에서 다다의 정신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팝아티스트들은 반미술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새로운 미술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팝아트는 한 마디로 고도의 자의식 운동이었다.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양식이라는 개념이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워홀의 경우 미술품이 수공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다. 많은 그의 작품들이 형판 인쇄를 통해 캔버스에 직접 옮겨졌다.

미국 팝아트의 근원은 존 케이지를 거쳐 다다와 마르셀 뒤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평범한 것이나 흔해빠진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팝아트는 1930년대 미국 정경회화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 미술 개념을 풍자하고 동시대 일상문화의 평범함과 통속성을 미술의 재료로 끌어들여 격상시킨 것은 앞서 일어난 영국 팝아트와 공유하는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팝아트는 1960년대에 널리 퍼져있던 정신에 대한 진정한 표명이었으며, 1970년대의 가장 특징적인 여러 미술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술사의 관점에서 볼 때 팝아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특히 존스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서와 같이 통속성과 평범함이라는 외관 뒤에 숨겨져 있는 고도의 솜씨와 디자인이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97)은 팝아트가 처음 등장해 충격을 준 시기였던 1962년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상업미술, 만화 주인공, 광고, 풍선껌과 아이스크림소다 등의 포장에 등장하는 통속적이며 저급한 이미지들을 사용한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리히텐슈타인이 연재만화를 복제한 방식은 보기보다 복잡했으며 보이는 것만큼 기계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연재만화에서 한두 컷을 선택해 거기에서 한두 개의 모티프를 스케치하고, 실물 투영기로 스케치된 드로잉을 회화 평면에 맞춰 확대해 캔버스에 전사한 뒤 그 이미지를 스텐실 점, 원색 채색, 두터운 윤곽선 등으로 채웠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산업적으로 생산된 레디메이드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계복제, 수작업, 다시 기계복제, 다시 수작업이란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이런 반복을 통해 수작업과 기계작업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회화적인 것과 사진적인 것을 교묘하게 뒤섞은 예술가로 앤디 워홀, 리처드 해밀턴, 제임스 로젠퀴스트, 지그마르 폴케,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업은 전성기 팝아트의 핵심을 이뤘다.

손으로 그린 기계복제 이미지의 기호들이 가득한 리히텐슈타인의 회화는 손으로 만든 레디메이드였다. 특히 인쇄의 흔적을 다시 손으로 채색한 벤데이 점benday dots들은 이런 모순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벤데이 점은 1879년 벤자민 헨리 데이Benjamin Henry Day(1810~89)가 고안한 것으로 음영을 단계적으로 조절해 인쇄된 이미지를 점들의 체계로 만드는 기술이다. 워홀이 ‘캠벨’이나 ‘브릴로’ 같은 상품명을 그대로 사용한 데 반해 리히텐슈타인은 차용한 상품 이미지들에서 상품명을 제거했다. 그는 대상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서 만화의 이미지마저 자신의 이미지로 보이도록 했다. 예술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흔적과 그것을 감추는 기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이 그의 회화에서 분명 발견되지만, 그런 긴장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나는 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구성하기 위해 드로잉한다. 가능한 한 최소한의 변형만을 시도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나의 작품은 만화와 연관되는 만큼 입체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만화가들은 몰랐더라도 만화는 미로나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월트 디즈니의 초기 작품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다. 그는 피카소의 모호한 명암의 기호들, 마티스의 대담하지만 장식적인 윤곽선들, 몬드리안의 원색들, 레제의 만화에 가까운 형상들을 사용했다.

네오다라란 용어가 『아트 뉴스』지에 처음 등장했다. 이 잡지의 편집자 토머스 헤스와 로버트 로젠블럼 같은 평론가들이 제스퍼 존스에게 네오다다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존스의 초기 작품에서 뒤샹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미 만들어진, 관례적인, 탈개인화된, 실제의, 외부적인 요소들을 사용했다. 그는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상징적인 것과 지표적인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체계의 기호들을 가지고 조작했다. 또한 실제 사물들을 모호하게, 심지어는 알레고리를 지닌 것으로 작업하는 것을 즐겼다. 존스는 뒤샹이 “인상주의에서 수립된 망막적인 경계를 뚫고 언어, 사유, 시각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영역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1960년대 초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은 1987년 때 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미술과 광고, 패션, 언더그라운드 음악, 독립영화 제작, 게이문화, 고급문화, 대중문화 사이에서 중심적인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 영화를 제작했으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첫 번째 앨범을 제작했고, 『인터뷰』지를 창간했다.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미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워홀은 1949년에 뉴욕으로 이주하고 잡지 광고, 쇼윈도 디스플레이, 문구, 책 표지, 앨범 커버 분야에서 일찌감치 성공을 거뒀다. 그는 1950년대 후반에 재스퍼 존스, 프랭크 스텔라,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구입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워홀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당시 미국은 광고업자와 홍보활동가의 시대이자 눈에 띄는 소비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었다. 워홀이 선택한 것은 만화와 광고였다. 어린 시절의 영웅주의 인물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형물 등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와 광고의 모사본이 깨끗하고 명료한 선을 특징으로 한 데 반해 워홀은 의도적인 실수와 미디어의 이미지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 혹은 레디메이드들을 사용하여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는데, 조작한 레디메이드였다. 그는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들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들 트로이 도나휴와 워렌 비티를 다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전성기는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한 1962년부터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1968년까지였다. 워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이 시기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워홀은 철학자였다. 명백한 자아의식이나 억제 없이 그는 끊임없이 생산했다. 미술이 용이하기를 바랐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며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우며, 대중적이고, 그리고 숨김없는 행동의 영역이 되는 구성물을 만드는 걸 용이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워홀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다. 그는 그 자신의 사례, 제스처와 희극적 행동, 영웅적 삶을 남겼다.

평범한 일상문화를 격상시킨 영국의 팝아트
팝아트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그러나 각각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이뤄진 대중 매체에 대한 탐구는 팝아트가 부상하게 된 기반이었으며, 탐구의 원천은 미국이었다. 영국의 팝아트 이론은 런던의 컨템퍼러리아트협회의 분과 기구로서 모임을 갖던 인디펜던트 그룹에 의해 1952년과 1955년 사이에 수립되었다. 미술운동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스터디 그룹에 가까운 인디펜던트 그룹은 미술 기법에 관해 토론하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팝Pop이란 단어는 이런 일상문화와 이미지를 지칭하기 위해 얼마 전 런던으로부터 이주하여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의 큐레이터 직을 맡은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들어낸 것으로 전문지식을 갖지 않은 일반인과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앨러웨이는 1954년 매스컴 광고문화에 의해 창조된 ‘팝아트 popular art’를 가리키는 편리한 명칭으로 처음 사용했다. 1956년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이것이 내일이다’ 전시회는 팝아트를 예고한 첫 전시회였다.

영국에서 팝아트와 네오리얼리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리처드 해밀턴은 광고 및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묘사하면서 현대 문명과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경향을 비판적으로 들춰내 간파할 수 있도록 치밀하면서도 신중하게 작품을 구성했다. ‘이것이 내일이다’ 전시회의 기획에 공동으로 참여한 해밀턴은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1956)를 출품했는데, 영국 팝아트의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것은 비미술의 영역에서 가져온 많은 기성 소재들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서양 남성의 삶과 소망을 요약한 작품이다. 해밀턴의 이 작은 콜라주(25-26cm)는 미술품보다는 포스터나 카탈로그와 같은 것으로 의도되었다.

영국 미술의 신동으로 부각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1937~)는 처음에 포토콜라주photocollage로 작업했으며, 한 작품에 폴라로이드 스냅사진을 적게는 다섯 장에서 150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진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포토몽타주photomontage(합성사진)로 제작된 인물화나 풍경화는 입체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올빼미 모양의 안경을 쓰고, 금실로 짠 재킷을 입은 모습은 회화에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회화에는 해학이 깃들어 있으며, 빼어난 묘사와 능력이 관람자로 하여금 감탄하게 했다. 그는 매우 다채로운 양식을 구사하면서 구사적인 표현에 언어적인 암시와 기하학적 패턴을 결합하기도 하고 종종 유행을 회화의 주제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대부분의 팝아티스트들과는 달리 광고와 대중 매체를 주요 주제로 삼지 않았다.

팝아트와 동의어로 사용된 네오리얼리즘(누보 레알리슴)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1930~2003)는 1960년 10월 27일 파리 이브 클랭의 아파트에 모인 일군의 예술가들을 설득하여 하나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켰는데, 누보 레알리슴이다. 선언문은 단 한 문장으로 이뤄졌다. “누보 레알리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누보 레알리슴=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 운동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은 1970년 이후의 일이었다.

누보 레알리슴이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붕괴였다. 프랑스 군대는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 군대에게 기습적으로 포위당해 항복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통치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제국이 통합되었다는 프랑스 매체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알제리의 아랍인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하고 알제리와 아시아에서 혐의자들을 고문하고 즉결 처형했을 때 프랑스 문화는 그 독특한 문명적 힘을 결코 과시할 수 없었다. 누보 레알리슴은 네오아방가르드가 놓인 특수 조건을 가장 체계적으로 인식한 운동이었다. 그 조건이란 비판적 부정성을 의도적으로 취하는 일과 문화 사업이라는 의제를 긍정하는 일 사이에 놓인 네오아방가르드의 바꿀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을 말한다. 누보 레알리스트들은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1931~36년 시기의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재발견, 재생, 재분배했다. 아르망은 레디메이드에서, 클랭은 모노크롬에서, 탱글리는 키네틱 조형물에서, 뒤프렌, 앵스, 로텔라, 빌글레는 콜라주에서 패러다임을 바꿨으며, 이는 이후 광고업계가 아방가르드 문화를 조금씩 차용하여 간 방식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누보 레알리슴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대중 매체에서 평범하고 사실적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대량생산된 일상의 소비상품을 비롯한 실제 사물들을 아상블라주로 만들거나 화면에 부착한 경향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팝아트와 동의어로 혼동되어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이브 클랭은 1958년에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를 설득해 흰색으로 칠해진 텅 빈 갤러리를 보여준 <공허 Le Vide>(예일 200)로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같은 전시실에서 이전에 전시되었던 작품이 방사하는 광선을 소거해버리려고 벽을 흰색으로 칠했다. 그는 개막을 위해 문 밖에 공화당 경비대를 배치한 채 텅 빈 전시장으로 구성된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우리는 반항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휴가 중인 예술가이다”라는 그의 말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클랭은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신봉하는 장미십자회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에 체류하며 유도를 배워 유단자가 되면서 유도를 통해 선불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선불교가 그로 하여금 “미술 개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소망을 실현시키게 해주었다. 이런 사상을 통해 그는 1946년 캔버스를 한 가지 색으로 균일하게 칠한 비대상 회화인 모노크롬 작업을 시작했다. 모노크롬 회화는 부재 상태in absentia의 언어, 혹은 침묵의 회화를 말한다. ‘클랭의 국제 파란색 International Klein's Blue(IKB)’이라고 명명한 독특한 파란색을 사용하여 모노크롬 회화, 조각된 형상, 캔버스 위의 스펀지 부조를 제작한 ‘파란색 시기’를 맞이했다. 파란색은 하늘의 색, 혹은 정신적인 것의 색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색을 통해서 나는 우주와 완전히 동일해지는 느낌을 경험한다. 나는 정말 자유롭다”고 했다. 그의 회화의 목적은 비물질적인 것이었다.

클랭은 붓자국을 피하기 위해 캔버스에 분무기로 물감을 뿌리면서 파란색을 직사각형 패널에 칠했다. 그는 붓 대신에 가옥도장용 롤러를, 유화물감 대신에 회화적 흔적이 없는 메마른 표면을 산출하는 현대적 화학 용매를 사용했다. 그는 스펀지에 물감을 뿌려 화면에 붙였으며, 스펀지 자체를 조형물로 전시하기도 했다.

아르망(아르망 페르낭데즈)Arman(Armand Fernandez, 1928~2005)은 1967년 이브 클랭 및 영화배우이며 가수 장-클로드 파스칼Jean-Claude Pascal(1927~92)과 함께 유럽을 무전 여행하면서 세 사람 모두 가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망이란 이름은 1958년 카탈로그 표지에 식자공의 실수로 잘못 쓰인 걸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아르망의 오브제 미학은 아방가르드가 약속한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추구하거나 일상적 기능에서 해방된 초현실주의 오브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끝없이 확장되고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생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동일한 부류로 배열된 사물들은 인위적으로 분류될 수 없는 세계의 무수한 샘플로 보였다. 아르망은 조만간 조형물이 상품의 진열기법을 따르게 될 것이며, 미술관의 전시 관례도 백화점의 상품진열 방법에 동화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레스타니는 선언문에서 “누보 레알리슴=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고 밝혔지만, 아르망이 내놓은 작품은 소비사회를 어느 정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비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작품은 과잉생산과 낭비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작품
12-1 워홀 38: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1953)
래리 리버스는 1940년대 초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고 1944~45년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19세기 화가 에마뉴엘 로이체Emanuel Leutze(1816~68)의 대중적 아카데미즘 회화에 매료된 뒤로 대가들 작품을 주제로 삼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로이체가 1851년에 그린 애국적 주제의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리버스가 진부한 역사적 주제를 사용하든 동시대 삶의 평범한 오브제를 사용하든 그의 작품에는 통일성이 나타났으며 그는 액션페인팅의 회화적 기법을 통해 변형을 가할 수 있었다.

12-2 워홀 40: <나는 흑인 올랭피아가 좋다>(1970)
마네의 <올랭피아>(1863)를 복제한 것으로 한 세기 전의 주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리버스는 창녀 올랭피아 대신에 흑인 여인의 누드로 관람자에게 새삼 충격을 주려고 했다. 그의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팝아트라고 하기에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의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중간에 위치하지만 그의 개성은 팝에 더 가까웠다.

12-3 로이 5: <예술가의 작업실: 댄스>(1974)
리히텐슈타인은 또한 세잔, 피카소, 마티스, 레제, 미로, 몬드리안을 위시해 모더니즘 대가들의 회화와 그리스 신전, 일몰 광경, 풍경 등을 찍은 그림엽서, 1920년대의 변형된 아르데코 디자인을 풍자적으로 개작했으며, 키치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가 뛰어난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팝아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그는 모더니즘 양식은 물론 고대 그리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기와 그리기의 다양한 양태들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1963년 『아트 뉴스』지의 편집자이자 평론가 스웬선과의 인터뷰에서 “팝아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리히텐슈타인은 응답했다.

“나도 모른다. 상업미술을 회화의 주제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야비해서 아무도 벽에 걸려고 하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걸었다. 물감이 뚝뚝 떨어진 걸레를 벽에 거는 것도 거의 받아들여졌으며 이런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익숙해졌다. 모든 사람이 증오한 것 중 하나는 상업미술이었다. 그들이 충분히 증오하지도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기 Flag>(1954~55) 존스가 25살 때 그린 것으로 전설의 작품이 되었다. 성조기의 역사는 필라델피아의 재봉사 벳시 로스Betsy Ross(1752~1836)가 즉흥적으로 만든 수공예품에서 비롯되었다. 존스는 꿈속에서 커다란 국기를 그렸다면서 아이디어를 꿈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납화encaustic, 즉 뜨거운 왁스에 안료를 섞는 기법을 사용했다. 색띠와 별 그리고 푸른 바탕은 신문지 조각들을 모아서 각각 따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어디에서 콜라주가 끝나고 어디에서 회화가 시작되는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는 신문지 조각들을 해당 색의 왁스 속에 담가두었다가 알맞게 물이 들면 바닥의 얇은 바탕천 위에 굳혔다. 똑같은 과정의 반복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국기>에는 ‘공상pipe dream’이란 단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존스는 그림의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추구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붓놀림을 사용하면서 납화법을 통해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 이런 색조로 그린 미국 국기, 알파벳, 숫자, 과녁판 등은 그림이 사물 자체임을 입증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국기와 과녁판에서 상징적 이미지는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환상과 실제의 구분을 파괴한 후 그것들을 재정립하면서 창조과정 자체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최면술 같았으며 냉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음료수 애일 캔Ale can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하나는 다 마신 빈 깡통으로, 다른 하나는 음료수가 들어 있는 깡통으로 제작해 라우셴버그와 자신을 가볍고 무거운 관계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존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보는 것이 대조가 되게 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르네 마그리트가 담배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넣었듯이 그런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그리트는 “사물은 사물이 지닌 명칭이나 이미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회화에서 글자는 이미지와 같은 물질이다”라고 했는데, 존스가 회화에 사용한 글자는 마그리트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워홀은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가로세로로 반복하여 대량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인 요소로 사용했다.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 다르게 그렸다. 고르게 색칠한 병들은 반듯한 모습이지만, 어떤 병은 고의로 엷은 색조로 칠하고 어떤 것은 마시고 난 후의 빈 병이었다.

마릴린 먼로가 1962년8월 5일에 자살하자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했다. 즉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하고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그는 1950년대의 마릴린 사진이 수록된 책을 참조했다. 그녀의 목 아래 부분은 삭제하고 얼굴만 크게 실크스크린하거나 커다란 캔버스를 실크스크린 한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혹은 20개를 병렬하기도 했다. 마릴린의 초상도 수프깡통이나 우표, 혹은 코카콜라 병처럼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제작했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다가 나중에는 마릴린의 얼굴, 머리카락, 눈썹, 입술, 목덜미에 여러 가지 색을 칠했다. 캔버스에 먼저 색을 칠해놓고 색이 마르면 그 위에 그녀의 형상을 실크스크린 했는데, 사진의 이미지가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바탕의 밝은 색들과 어우러졌다. 실크스크린은 원래 상업용으로 활자 인쇄와 장식 인쇄에 사용되었고 포스터를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실크스크린이 순수 미술에 도입된 건 공황 때였다.

그는 <100개의 마릴린이 하나보다 낫다>에서는 많은 수로 반복했다. 반복에 나타난 연속주의serialism는 미술의 신비나 아우라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위계적 구성의 질서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졌다. 연속적인 이미지는 최면의 효과를 지닌 주문呪文으로 읽혀졌다.

근처에서 프랑스의 보잉 707기가 추락한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이다. 그는 죽음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듬해에 자동차 전복사고, 자살 현장사진, 사형수를 살해하는 전기의자 등을 제작했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실크스크린 뜨기가 빠르고 쉬웠다. 실크스크린 뜨기가 실재를 묘사하는 사진의 주장에 대한 효력을 약화시켰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들의 어리석은 리듬이 받아들인 진실을 이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단어들을 스텐실로 디자인 같은 형태로 제작하여 그림이라고 주장한 개념 미술의 선구자이다. 자동차 운전자에게 주의를 주는 표시판 같은 인디애나의 작품은 개념의 중요함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그는 단어를 초보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어릴 때 기차를 타고 가다가 거리에 걸려 있는 ‘식사’라는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려 제작한 <식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 기억 속의 많은 것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한 작품이다.

그가 ‘죽음’은 식이요법Dietary을 줄인 말이라고 했지만, 식이요법의 앞 글자 DIE는 ‘죽음’이란 뜻이므로 인디애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의 딱딱하고 단순한 형태의 글자와 숫자는 네온사인과도 같은 빛을 발했다. 그는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글자를 삼차원으로 제작한 뒤 색을 칠했다.

스톡홀름 태생으로 시카고에서 스웨덴 외교관의 아들로 성장한 클래스 올덴버그는 예일대학에서 영문학과 미술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라우셴버그의 작품처럼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거리에서 가져온 쓰레기 같은 것들을 멋들어지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콜라주했다. 그는 1961년 맨해튼 이스트 2번가에 107번지에 있는 상점을 빌려 작업장으로 사용하면서 ‘상점’이라고 부르고 채색된 회반죽으로 제작한 넥타이, 푸른 셔츠, 모자, 여성 내의, 모자, 손목시계, 구두, 코르셋, 바지, 알사탕, 도넛, 햄버거, 갈비, 소시지, 구운 감자, 케이크와 파이 등 100개가 넘는 오브제들을 팔았다. 그것들은 실재 사물로 착각하도록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거리는 저렴한 상품이나 중고 상품을 판매하는 싸구려 상점들이 즐비한 맨해튼의 한 구역이었다. 이 새로운 장소에서 대량 소비되는 식품이나 자잘한 물건들의 복제물들로 가득 채워진 올덴버그의 상점은 이웃한 상점들과 유사했다. 그의 오브제들 모두 악취미에서 나온 야한 색에, 급하게 흘러내리는 자국을 남기는 방식으로 채색되었으므로 역사적ㆍ사회적으로 연상될 만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상점은 소비문화가 상품을 팔기 위해 진열하는 방식을 모방한 일종의 환경으로 상업 활동에 대한 유머가 있는 패러디였다.

베네수엘라 부모로부터 파리에서 태어난 마리솔 에스코바르는 1953~54년에 ‘스페인 정복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미술’ 전시회를 보고 테라코타로 장난기 넘치고 에로틱한 소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1955년경부터 나무로 등신대의 인물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품의 주제로 가족, 사교계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를 다뤘다. 그녀의 인물은 상자 모양으로 된 나무 몸통에, 종종 에스코바르 자신의 얼굴이나 팔다리를 석고로 형을 떠서 제작한 얼굴이나 팔다리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또한 인물상에 목걸이, TV 수상기, 거울, 꽃병, 우산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여 거의 아상블라주와 유사하게 제작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은 유머와 사회 풍자, 캐리커처를 결합하는 독창적 방식을 보여주었지만 견고함과 강한 힘도 지니고 있다.

톰 웨설만은 고교시절에 스포츠와 만화를 좋아하여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 그는 앙리 마티스와 데 쿠닝의 영향을 받아 대형화를 그리면서 데 쿠닝의 야성적인 색의 사용과 마티스의 세련된 조화를 꾀했다. 그의 작품의 독특한 점은 원근법을 배제하는 가운데 콜라주 같은 방법, 즉 회화와 비중이 같은 오브제 등을 혼합매체mixed media로 사용한 것으로 마티스의 회화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였다.

포드Ford 사의 휘장 아래 대량생산된 상품들과 공장에서 제조한 전후 세대의 생활에 적합한 영화, 텔레비전, 깡통에 포장한 가공식품, 편리한 전기기구, 남성 육체미사진과 여성 누드사진이 있고, 거실 벽에는 「젊은이들의 사랑」이란 만화 표지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지배적인 요소는 근육과 젖가슴의 팽창 그리고 불가능한 길이로 연장된 진공청소기 호스의 팽창이다. 페니스인 양 투시팝 막대사탕을 든 보디빌더와 전등갓을 쓴 풍만한 몸매의 여성이 가정집 실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아도취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를 가리키는 팝-페니스와 장식된 가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대리물과 상품으로만 연결된다. 얼핏 가정을 통제하는 듯 보이는 여성 또한 상품이다. 심지어 보디빌더에 대한 환상을 품을 때조차도 그녀는 벽에 걸린 가장의 초상화와 신문이 놓인 안락의자가 암시하는 부재중인 집주인에 의해 감시당한다. 더욱이 외부세계는 철저하게 실내로 침투해 들어온다. 창문을 통해 흑인 얼굴로 분장한 러시아 스레드니케 태생의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가수이자 배우 알 졸슨Al Jolson(1886~1950)의 광고에 담긴 미국의 인종적 위선을 볼 수 있다. 최초의 유성영화로 1927년에 제작된 졸슨의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는 찰나적 쾌락으로 가득 찬 소비자의 매료시킨 영화였다. 평범한 것에서 미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리처드 해밀턴의 주장은 반전통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의 방법은 전통적이었다. 그의 회화는 오감으로 지각한 세계를 그린 르네상스 회화와 실내의 장면을 묘사한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와도 유사한 데가 있다.

팝아트의 선구자 에두아르도 파올로치는 1947년부터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병치하는 초현실주의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실재 사물과 기존 회화 재료를 결합하고 수정하는 원칙을 구체화한 콜라주를 제작했다. 그는 미국의 상품들이 가장 일상적인 것조차도 전복적인 마력을 갖고 있음을 알고 미국 잡지들을 수집한 후 그 잡지들을 활용해 엄청난 양의 콜라주 구성물을 생산했는데, 전후 재건이 시작된 초창기였다. 이 작품은 유럽인이 미국인에 대해 흔히 표현하는 경멸적인 태도, 즉 미국인은 위생에 대한 얄팍한 만족과 병적 집착을 갖고 있다고 보는 태도를 보여준다. 미국 내의 경제적, 인종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 작품은 틀린 것일 수 있으나 영국인의 맥락에서는 일정한 진실이 있는데, 특히 점잔을 빼고 속물적이며 모험을 삼가는 영국인 특유의 미술문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러했다. 이런 문화에 대한 항변이 팝아트를 낳았다. 그는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센트럴 미술디자인학교에서 직물디자인을 가르쳤고, 1955~58년에는 세인트마틴 미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60년에는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서, 1968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그리고 영국 왕립 미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1974년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했으며, 1979년에 런던의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89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의 회화에는 해학이 깃들어 있으며, 빼어난 묘사와 능력이 관람자로 하여금 감탄하게 했다. 그는 매우 다채로운 양식을 구사하면서 구사적인 표현에 언어적인 암시와 기하학적 패턴을 결합하기도 하고 종종 유행을 회화의 주제로 이용하기도 했다. 회화에 환영적인 실재를 표현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심오함과는 대조적으로 회화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를 반복적으로 결합하면서까지 최대한 쉽게 이해되도록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호크니는 키타이와 장 뒤뷔페의 영향을 인정했으며 대부분의 팝아티스트들과는 달리 광고와 대중 매체를 주요 주제로 삼지 않았다.

이브 클랭은 1960년 높은 데서 뛰어내렸는데, 말 그대로 허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증거로 남기기 위해 사진가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했는데, 사진은 위조된 것이다. 원래는 열두 명의 유도선수들이 그가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방수포를 붙들고 아래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위조된 사진은 클랭이 출판한 『일일신문 Journal d'un seul jour』에 실렸다. 『일일신문』은 가짜신문이었다.

아르망은 거리에서 발견한 쓰레기들을 화랑으로 가져와 가득 채웠다. 클랭의 ‘공허’ 전시회에 대한 정반대 의미로 의도된 것이었다.

대니얼  스포에리는 1960년에 처음으로 덫에 걸린 회화tableaux pieces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일상적인 물품들을 받침대에 고정시키고 그 전체를 벽에 걸도록 되어 있었다. 극도의 수정만을 가한 물건의 표면에 직접 풀을 먹인 ‘덫회화’는 스포에리가 시작한 것으로 이후 다른 누보 레알리슴 예술가들도 사용한 고안물이 되었다. 덫회화란 예를 들면 식사와 같은 실제 사건의 우연한 흔적인 접시, 병, 유리컵 등을 판자에 그대로 붙이고 이를 회화처럼 벽에 걸어놓은 것이다. 우연히 벌어진 상황에서 비롯된 덫회화는 ‘냉동된 기록’, 혹은 실제의 사건에 대한 지속된 기억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는 “덫회화가 미술품으로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차라리 일종의 정보이자 도발이며, 보통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에 눈길을 줍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미술이 무엇입니까? 일종의 삶의 형식 아니겠습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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