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11

AssemblageㆍJunk artSituation artPunk artVideo art
아상블라주
아상블라주와 정크아트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데, 정크아트 예술가들은 종종 정크 같은 것들을 조립하여 표현적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 목적을 위해 비미술의 재료를 조형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용어이므로 팝아트, 표현주의, 정크아트, 혹은 펑크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으며,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53년 장 뒤뷔페가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것으로 입체주의 콜라주보다 더 많은 물질을 부착하는 작품을 지칭했다. 콜라주는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풀로 붙여 제작한 작품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1954년에 아상블라주란 명칭을 풀 먹인 딱딱한 종이, 나무토막, 스펀지 등의 여러 파편으로 작은 형상을 만드는 기법에도 확대 적용하며 1956년 얇은 금속 조형물, 나뭇잎, 말린 꽃, 나비 날개 등이 결합된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작은 조형물들로 이뤄진 아상블라주 전시회를 열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윌리엄 자이츠William Seitz(1914~74)는 아상블라주를 “색을 칠하거나 드로잉하거나 깎거나 모방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조립하며,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이미 형태를 갖춘 물질이나 공장의 생산품 또는 미술적 재료가 아닌 것들을 미술품의 요소로 사용하는 구성 미술”로 규정했다.

정크아트
로렌스 앨러웨이Lawrence Alloway(1926~90)가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작품을 정크아트라고 부른 후 이 명칭이 금속 조형물, 망가진 기계부품, 쓰다 남은 목재 등으로 제작한 조형물에도 확대 적용되었다. 정크아트는 좋은 재료를 고집하는 전통에 반대하고 쓸모없는 재료, 폐품, 도시의 폐기물 등으로도 미술품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을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195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었으며, 미국의 정크아트는 안토니 타피에스를 비롯한 여러 스페인 예술가들의 작업과, 알베르토 부리, 그리고 아르테 포베라 그룹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작업과 유사했다.

미국에서 정크아트의 기원은 라우셴버그의 ‘콤바인combines’, 혹은 결합 회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우셴버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쿠르트 슈비터스의 콜라주 방식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다양한 목적을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콜라주 방식을 활용했으며, 그 후 타블로와 아상블라주로 이어졌다. 아상블라주와 정크아트를 구분하기 어려운 까닭은 재료의 측면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물질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정크아트로 구분하더라도 작품이 조립으로 구성된다면 그것은 또한 아상블라주가 되기 때문이다.

쿠르트 슈비터스와 조지프 코넬의 차이:
쿠르트 슈비터스는 1918년부터 버려진 버스표, 담배껍질, 우표, 극장표, 잡지, 못, 머리카락, 낡은 상품 카탈로그, 끈 등을 사용해 콜라주로 회화적 구성물로 구축했는데,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시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의 시에서 표현하려는 글의 의미와 시적 리듬이 세심하게 균형을 잡고 있듯이 그의 콜라주 작품에서는 우연히 찾아낸 재료들의 배치도 균형을 이루도록 주의 깊게 구성되었다. 비꼬는 듯한 낭만주의와 부조리의 재치 있는 결합을 보이면서도 탄탄한 통제를 보여준 그의 작품은 당시에 콜라주로 불리었더라도 아상블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슈비터스는 닥치는 대로 수집한 종이들을 콜라주로 구성한 후 ‘메르츠 회화’로 명명했다.

시적이고 향수적이며 서정적이기는 조지프 코넬의 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슈비터스와 달리 코넬은 폐기물이나 쓰레기가 아니라 한때 아름답고 소중했던 물건들의 파편에 매료되었다. 종종 두려운 낯설음의 것과 유행이 지난 것들을 초현실주의풍으로 불합리하게 병치시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오브제들이 서로 공통점이 없더라도 그는 기억이란 매개를 통해 주관성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어떤 상자에는 욕망이 순환하고, 어떤 상자에서는 욕망이 고독해 보이거나 자위하는 듯 때로는 죽어 있는 듯이 보였지만, 구성주의의 형식적 엄격함과 초현실주의의 생동감 있는 환상이 조화를 이뤘다. 상자 안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꿈이 갇혀 있는 그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추억과 꿈을 상기하게 했다. 그의 작업은 강박상태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러한 강박적 상상력에 의해 탐험된 풍요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으며, 그가 사용한 물질은 팝 물질이었으므로 그를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1950년대 중반 물질들을 콜라주한 라우셴버그와 존스는 코넬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침을 뱉듯이 토해내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미술”이라고 말한 쿠르트 슈비터스는 미술품을 예술가 개인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예술가와 대상의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런 관점에서 그의 결정은 최고의 권한을 갖는다. 대중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중요하지 않는데, 대중은 결국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부터 하노버에 있는 발트하우스슈트라 5번가의 자신의 집에 <메르츠바우 Merzbau>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석고와 나무로 만들어진 뼈대에 미로와도 같은 이 구성물은 그의 집안에 있는 한 방으로부터 시작해 천장에 난 구멍을 뚫고 마침내 위층의 다른 방들 쪽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삶과 관련된 오브제들의 축적으로 끊임없이 자라난 이 구성물은 허망한 것들로부터 미술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보여준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은 슈비터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메르츠바우>를 “관능적 허망의 대성당”으로 불렀다.

물체의 난입이 미술의 범주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미술이 순수 미술 체제의 종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해럴드 로젠버그는 이러한 위기의 규모와 중요성을 1972년에 “미술의 본질이 불확실해진다. 적어도 모호하다. 그 누구도 미술품이, 또한 더 중요하지만 미술품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회화에서처럼 어떤 예술적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 그것은 내가 바로 ‘불안한 대상’이라고 부른 그것이다. 즉 나는 그것이 걸작인지 실패작(폐물)인지 모른다. 슈비터스 콜라주의 경우처럼 그것은 문자 그대로 둘 다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슈비터스의 선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사회를 비판하려는 예술가들에게 폐물이 훌륭한 재료로 각광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정크아트를 탄생하게 했다.

아상블라주와 환경미술의 기수 루이즈 네벨슨은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들을 평편하게 조립하여 균일한 검정색, 후에는 흰색이나 황금색으로 채색했다.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을 제작하고 상자 안에 수백 개의 물질을 배열했다. 네벨슨은 1976년에 자신의 작품에 관해 “누구에게도 사용되지 않는 폐기되고 나동그라진 것을 아름다운 장소인 미술관, 도서관, 대학, 저택에 가져다두는 것으로 ... 이런 낡은 나무는 역사와 드라마를 지녔다고 생각되었으며, 이는 마치 빠뜨리고 보거나 미처 보지 못한 바워리가 빈민굴에서 수년 동안 지내온 사람을 그곳에서 꺼내오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가 1951년 여름 내내 제작한 <흰색 회화>에서 발견되는 긍정적 확신은 작곡가 존 케이지가 전개한 입장과 유사한데, 케이지는 행위의 인위성, 즉 작곡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에 대한 반대로서 무작위를 찬양했다. <흰색 회화>는 케이지와의 상호교류를 통해 탄생되었다. 하나에서 두 개로 다시 세 개, 네 개, 다섯 개, 일곱 개로 단순한 수열공정에 따라 제작된 <흰색 회화> 연작은 내러티브는 물론 지시대상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대신 그 형태는 주변의 떠도는 인상을 붙잡는 듯했으며, 그 방식은 케이지의 <4분 33초>가 청중의 숨소리나 기침소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과 동일했다. 실제로 케이지가 언급한 대로 <흰색 회화>는 먼지입자, 빛, 그림자가 착륙하는 활주로였고, 라우셴버그 또한 이 연작에 대해 “그림자를 포착하는 흰색 회화”라고 했다.

자동차 몸체를 찌그러트린 세자르
세자르는 기계적 압축의 결과물에서 본질적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금속의 새로운 상태를 보았다. 그는 1954년경부터 스스로 ‘혼합물’로 지칭한 종합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철, 스프링, 얇은 깡통 등을 철사로 조립해 곤충을 닮은 괴상한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자동차 몸체를 수압 프레스로 찌그러트려 만든 조형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통제된 압착compressions dirigées’으로 불리었다.

용접하여 금속조형물을 제작한 리처드 스탕키에비치
스탕키에비치는 1951년 어느 날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화실 뒷마당을 파다가 벽돌과 녹슨 쇠파이프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용접하여 조형물의 부분으로 사용했는데, 아상블라주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사실주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런 아상블라주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명의 찌꺼기이다. 그는 1951~52년에 피카소와 훌리오 곤잘레스의 전례를 좇아 미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와 함께 녹슨 쇳조각들을 용접했으며, 이런 경험으로 버려진 쇳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후의 작품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구성으로 변했고, 1960년대에는 점차 밝고 서정적으로 진전되었다. 1970년대에는 다시 양식적 변화를 맞아 망치로 두들긴 원과 사각형의 강철들이 서로 맞물리는 추상 구성으로 전환했다.

추상표현주의와 조형주의의 원리를 이용한 마크 디 수베로
상하이에서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마크 디 수베로는 쇠막대기, 자동차 타이어, 쇠 끈, 의자, 그리고 건축재료 등과 쓰레기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들을 혼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환경 아상블라주 조형물을 제작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웅대한 에너지와 조형주의의 공학적 원리를 반기하적인 균형으로 나타냈다. 디 수베로는 1960년대에 철거된 건물이나 쓰레기장에서 가져온 갖가지 물질들로 기념비적인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면서 정크아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장소와 위치로서 규정되는 상황 미술
상황 미술은 영국 예술가들의 그룹 명칭으로 1960년 런던의 R.B.A. 갤러리에서 열린 ‘상황: 영국 추상화’ 전시회에서 명칭이 비롯되었다. 예술가들이 기획한 전시회의 조건 중 하나는 추상화이어야 하며 크기가 최소한 9.1평방미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시회에 참가한 18명의 화가들 대부분 미국 색면 회화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나 모노크롬은 시각의 전 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에 관람자를 하나의 사건, 혹은 상황 속으로 개입시킨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관람자는 단순한 외부 관찰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람자를 참여자로 포함시키는 상황의 개념은 곧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현대인의 정신적 고립과 소외감을 표현한 조지 시걸
조지 시걸은 석고로 인물상을 실물에서 떠낸 뒤 실물과 똑같이 제작한 상황 속에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인물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령처럼 보이는 인물상의 흰색이 사실주의의 환영을 없앴다. 1950년대 말 조형물로 관심을 옮겨 철사그물과 올이 굵은 삼베 위에 석고를 바르는 실험적 작업을 했다. 그의 조형물의 특징은 하나의 인물상, 혹은 군상으로 특정한 상황 속에 놓였다. 그가 제작한 실제 크기의 고독한 익명의 석고 인물들은 진부한 일상에서 따온 몇몇 실제 사물이 있는 상황 속에 자리 잡았다.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다루는 펑크아트
펑크와 ‘냄새나는’, 혹은 ‘더러운’이란 뜻의 펑키라는 용어는 재즈 용어에서 온 것으로 모순되고 이상야릇한 것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펑크아트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예술가 그룹이 시작한 것으로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의도적으로 불쾌하게 다룬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시크아트Sick art로 불리기도 하는데, 불쾌감을 유발하고자 하는 욕구와 병적인 자아현시욕을 다다, 팝아트와 결합시킨 것이다. 펑크아트의 특징은 감정이 배제된 비인간적인 순수성에 반발해 혼합물, 병적인 것, 싸구려, 기이한 것, 모조품, 사악한 것,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성적인 점을 선호한 것이다.

도덕적 분개를 표현한 에드워드 키엔홀츠
키엔홀츠는 1963년부터 그가 ‘개념회화concept tableaux’라고 명명한 것을 만들었으며, 구매자는 제목을 적은 판자와 함께 그의 개념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작품에 대한 드로잉을 주문하고 마음에 들면 돈을 더 지불하고 작품을 제작하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주립 병원>(1966)과 <포터블 전쟁기념물>(1968)을 포함한 네 점의 개념회화를 제작했지만, 대부분은 단지 개념들로만 남게 되었다. 그의 개념회화는 종종 최초의 개념미술 미술품으로 언급되지만, 임시방편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키엔홀츠의 1964년 작 <38년형 닷지 자동차 뒷좌석>은 전시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만신창이로 낡은 차의 문을 열어둔 채 사지가 잘린 두 여인의 오싹한 성교장면을 까발린 것이다. 그는 이 조형물이 아이다호의 작은 마을에서 그가 보낸 청소년기에 대한 기억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시회는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다가 15분 간격으로 차문을 열어 호기심에 찬 관람자에게 잠깐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이 났다.

키엔홀츠에 의해 펑크아트는 도덕적 분개의 차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활의 기이하고 하찮은 단편을 이용하며, 실제 오브제로 구성되는 환경 속에 인간의 육체, 혹은 시체를 설치하여 혐오스럽고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한 상황을 만들었다. 살인, 섹스, 출산, 죽음, 부패와 같은 잔혹한 이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를 막기도 한다.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하는 비디오아트
1953년경 미국 가구의 삼분의 이가 텔레비전을 구비했고, 1960년 즈음에는 소유 가구 비율이 90퍼센트로 증가했다. 미국인은 매일 7시간까지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세계가 점차 텔레비전을 위시한 미디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관점이 고려되고 기술적 혁신의 욕망과 결합된 미술품을 실현하려는 여망에 따라 텔레비전은 미술계로 편입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찍이 미래주의자들은 사용 가능한 모든 표현수단을 투입하고, 또 일반화한 장벽을 제거하려는 열망을 드러냈다.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의 유용성은 1970년대의 시각예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술계로 난입한 비디오카메라는 조립품 속으로 텔레비전 수상기가 침입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매체 자체와 그 영상을 동일한 몸짓으로 전용하는 대신 비디오를 사용하는 예술가들은 직접 영상을 제작하거나 그것을 보여줄 장치를 구상한다. 비디오카메라가 상용화된 것은 해프닝, 퍼포먼스 등이 요란했던 무렵이었다. 이러한 예술적 시위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어 이야기와 사진만으로 그 기억을 되살릴 수밖에 없지만, 비디오는 예술가들이 직접 작업에 착수하는 수첩으로 사용되었다. 비디오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는데, 영화와 달리 어떤 전시공간에서도 수상기를 설치하여 영상을 볼 수 있다.

프랭크 포퍼Frank Popper(1918~)는 비디오아트를 반문화, 특히 1960년대 초 일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업 중에 생겨난 해악적 상업 TV에 반대하는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파리 8대학의 미학과 과학예술의 명예교수인 포퍼는 비디오아트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첫째, 새로운 시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그는 ‘게릴라 비디오’라 명명했다.

넷째, 비디오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 설치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낸 백남준
백남준은 1956년 동경대학에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독일로 가서 1958년 다름슈타트의 하기 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존 케이지를 만났다. 다름슈타트 근교에는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주변의 음악가들이 몰려 있었으므로 백남준은 슈토크하우젠과 그 밖의 음악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 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출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선보였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1964년 뉴욕에 정착한 백남준은 처음에 텔레비전의 동기 신호를 조작한 뒤 자석으로 그 이미지를 단순하게 왜곡시켰다. 1965년에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하고 즉시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그 날 저녁 예술가 클럽 카페 고고에서 선보였다. 케이지의 조합한 피아노에서 감동을 받은 그는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 방영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렸다.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그는 종종 첼리스트 샤롯 무어만과 공동으로 작업했다. 1965년에 소개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제1번>은 에로틱한 작품이었다. 무어만은 <첼로 조곡>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교대로 계속했다.

샤롯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었다. 백남준은 신체와 테크놀로지의 매개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했고, 테크놀로지를 인간화, 심지어는 성애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불화를 중재하려는 그의 노력은 오히려 그 불화를 악화시켰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어만을 희생시켰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는 테크놀로지를 성애화했다기보다는 여성을 대상화한 것이다.

시간에 대한 탐구를 강화한 비디오 설치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비디오 설치는 반예술에 뿌리를 두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주요 거점이 미술관과 갤러리였다. 퍼포먼스아트의 조각적 공간이란 확장된 관념과 미술에 좀더 많은 관람자가 참여하기를 바라는 경향에 뿌리를 둔 설치는 미술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일상생활의 모든 재료와 양상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또 다른 진전을 이뤘다. 조각과 연관된 덕분에 미술관과 갤러리는 쉽게 설치를 받아들였다. 설치가 비디오아트 예술가들의 핵심적인 개념인 시간에 대한 탐구를 강화한다는 점도 그만큼 중요한 측면이다. 여러 대의 모니터나 프로젝션 화면, 종종 여러 개의 테이프를 활용하는 비디오 설치는 이미지의 총량을 방대하게 증가시킴으로써 시간의 조작 가능성을 극적으로 확대시킨다.

1990년대 중반 일반인도 쉽게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게 되어 비디오의 ‘시네마화’라 간주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디지털, 비선형 시스템 아비드Avid와 같은 정교한 편집장비들 덕분에 비디오 설치는 시네마와 더욱 가까운 연결고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매튜 바니 및 많은 예술가들은 설치에 통상적으로 사용하던 멀티모니터, 혹은 멀티오브제 환경과 대조적으로, 본질상 싱글채널 비디오를 벽 전체나 스크린에 영사하고 이를 설치로 부름으로써 시네마 관람 경험을 흉내 내는 경향을 반영한다.

감시카메라 형식을 사용한 브루스 나우먼
1970년대 많은 예술가들이 비디오에 대한 활용방법을 발전시켰다. 비디오 감시 장치는 관람자 촬영용으로 선회되어 모든 자율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련의 작품의 주역이 되었다. 브루스 나우먼은 <비디오 복도>(1968)에서 터널처럼 생긴 두 벽을 설치하고 밀실공포증을 느끼게 하는 좁은 복도 양쪽 끝에 모니터를 장착했다. 비디오를 보기 위해 복도로 걸어 들어온 관람자는 자신의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찍힌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이 작업이 주는 충격은 벽 구조가 만들어내는 전치의 맥락, 심지어 공포의 맥락에서 기인한다. 그는 양쪽 끝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설치한 좁은 통로를 만들었다.

작품
쿠르트 슈비터스는 1918년부터 버려진 버스표, 담배껍질, 우표, 극장표, 잡지, 못, 머리카락, 낡은 상품 카탈로그, 끈 등을 사용해 콜라주로 회화적 구성물로 구축했는데,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시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의 콜라주 작품에서는 우연히 찾아낸 재료들의 배치도 균형을 이루도록 주의 깊게 구성되었다. 비꼬는 듯한 낭만주의와 부조리의 재치 있는 결합을 보이면서도 탄탄한 통제를 보여준 그의 작품은 당시에 콜라주로 불리었더라도 아상블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슈비터스는 1919년에 <메르츠 Merz>를 창조했는데,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상업편지에 적힌 상업민영은행Kommerz und Privatsbank(코메르츠 운트 프리바트방크)에서 ‘상업’이란 뜻의 콤메르츠Kommerz의 앞 글자 메르츠merz만 따서 제목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닥치는 대로 수집한 종이들을 콜라주로 구성한 후 ‘메르츠 회화’로 명명했다. 이 작품은 <메르츠> 연작 중 하나다. 그는 메르츠에 관해 말했다. “본질적으로 메르츠란 단어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료의 예술적 목적에 따른 조립을 의미한다. 또한 원칙적으로 기법의 측면에서 재료 각각의 평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르츠 회화는 색과 화폭, 붓과 팔레트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재료와 유용한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도구를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사용되는 재료가 원래 다른 목적으로 구상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린이 장난감 차바퀴, 철망, 실과 솜도 색과 똑같이 가치 있는 요소이다. 예술가는 선택과 배치, 그리고 재료의 왜곡을 통해 창조한다.

슈비터스는 1923년부터 자신의 집에 <메르츠바우>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석고와 나무로 만들어진 뼈대에 미로와도 같은 이 구성물은 그의 집안에 있는 한 방으로부터 시작해 천장에 난 구멍을 뚫고 마침내 위층의 다른 방들 쪽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삶과 관련된 오브제들의 축적으로 끊임없이 자라난 이 구성물은 허망한 것들로부터 미술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보여준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은 슈비터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메르츠바우>를 “관능적 허망의 대성당”으로 불렀다. 그는 시인친구가 쓰다 버린 연필도 <메르츠바우>의 장식에 사용했고, 거기에는 도시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온갖 잡동사니, 구두끈자락, 손톱부스러기, 재떨이, 연필, 담배꽁초, 종이바구니, 머리카락 심지어 장 아르프의 아내 소피가 사용한 브래지어도 있었다.

조지프 코넬은 버려진 물질을 개인적인 상자 안에 배열하는 방법으로 물질에서 시와 노래, 그리고 향수를 찾아냈다. 골동품 상점을 뒤지면서 그렇게 얻은 것들을 우연성과 결합시킨 그의 방식은 슈비터스의 축적물에 가까웠지만, 슈비터스와 달리 폐기물이나 쓰레기가 아니라 한때 아름답고 소중했던 물건들의 파편에 매료된 그는 1930년대 후반에 상자를 이용한 표현방식을 발견했으며, 우표나 광고, 새와 나비의 삽화가 담긴 책, 그리고 십이궁도와 별자리 그림 같은 대중문화 재료들로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래된 비둘기 집이나 자동판매기 등을 모델로 한 상자들에 그는 종종 두려운 낯설음의 것과 유행이 지난 것들을 초현실주의풍으로 불합리하게 병치시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오브제들이 서로 공통점이 없더라도 그는 기억이란 매개를 통해 주관성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상자 안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꿈이 갇혀 있는 그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추억과 꿈을 상기하게 했다. 그의 작업은 강박상태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러한 강박적 상상력에 의해 탐험된 풍요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으며, 그가 사용한 물질은 팝 물질이었으므로 그를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1950년대 중반 물질들을 콜라주한 라우셴버그와 존스는 코넬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루이즈 네벨슨은 1950년대 말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조각의 벽’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는데, 많은 상자와 칸막이들로 이루어진 벽 형태의 부조로, 상자와 칸막이들은 의자다리, 금속조각, 난간조각, 꼭대기 장식과 같은 일상의 사물, ‘발견된 오브제’들이 모여 추상적 형태를 이뤘다. 그녀는 주위에 널려 있는 각종 작은 물질들을 배열하고 그것을 모두 동일한 색으로 칠해 입체적 구성의 느낌을 모두 제거했다.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을 제작하고 상자 안에 수백 개의 물질을 배열했는데, 이런 작품들로 아상블라주와 환경미술의 기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는 그가 존경한 데 쿠닝을 찾아가 미술품을 역逆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의 회화를 지워 없애는 것을 의미했다. 데 쿠닝이 그에게 회화 한 점을 주었고, 라우셴버그가 그것을 지우는 데 6주일이 걸렸다. 그것이 <지워진 데 쿠닝의 드로잉>이다. 그가 파괴를 통해 창조를 이룩한 것이다. 데 쿠닝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 1953년 그의 드로잉을 파괴했다는 발상은 그 자체 하나의 스캔들이었고, 라우셴버그는 허무주의, 혹은 다다의 재연으로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미술계를 장악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정크아트의 기원은 라우셴버그의 ‘콤바인combines’, 혹은 결합 회화이다. 라우셴버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쿠르트 슈비터스의 콜라주 방식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아상블라주와 정크아트를 구분하기 어려운 까닭은 재료의 측면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물질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정크아트로 구분하더라도 작품이 조립으로 구성된다면 그것은 또한 아상블라주가 되기 때문이다.

<샤를렌>은 콤바인 회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작품을 그는 한동안 제작했으며, 그가 오브제를 작품의 구성요소로 사용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에서까지 계속 유지되어온 환영의 공간을 부수고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작업에 관한 질문에 그는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도, 예술에 반하는 예술도 아니다. 나는 예술을 지지하지만 예술을 지지한다는 것은 예술과는 전혀 무관하다. 예술은 삶의 모든 면에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예술 자체와는 별 볼일이 없다”고 했다.

예술의 인상을 바꿔놓기 위해 라우셴버그는 삶을 예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작곡가 케이지로부터 직접 받은 영향이며, 동시적ㆍ다원적 암시성을 지닌 이미지로 관람자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을 원했던 점에서도 케이지와 공통적이다. 그는 신문지, 인쇄된 복제물, 낙서, 전구, 박제된 새와 동물, 의자, 문, 창문, 침대, 베개, 가방, 군화, 괘종시계, 걸레, 자동차바퀴, 스프링 등 삶의 도구들을 작품에 혼용했다.

1955년 5월 어느 날 라우셴버그가 아침잠에서 깨어나 문득 무엇인가 그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러나 재료와 캔버스를 구입할 돈이 없어 그는 침대 아래 있던 이불을 사용했으며, 그것은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이불에 그림을 그린 뒤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아 베개를 첨부했다. 그렇게 하자 이불의 개성이 지나치게 강하게 보이지 않았고, 베개가 멋진 백색 공간을 만들어주어 그 위에 색을 칠할 수 있었다. <침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세자르는 기계적 압축의 결과물에서 본질적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금속의 새로운 상태를 보았다. 그는 1954년경부터 스스로 ‘혼합물’로 지칭한 종합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철, 스프링, 얇은 깡통 등을 철사로 조립해 곤충을 닮은 괴상한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자동차 몸체를 수압 프레스로 찌그러트려 만든 조형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통제된 압착compressions dirigées’으로 불리었다.

스탕키에비치는 1951~52년에 피카소와 훌리오 곤잘레스의 전례를 좇아 미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와 함께 녹슨 쇳조각들을 용접했으며, 이런 경험으로 버려진 쇳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후의 작품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구성으로 변했고, 1960년대에는 점차 밝고 서정적으로 진전되었다. 1970년대에는 다시 양식적 변화를 맞아 망치로 두들긴 원과 사각형의 강철들이 서로 맞물리는 추상 구성으로 전환했다. 1997년 4월과 5월 맨해튼에 있는 상업갤러리 자브리스키에서 스탕키에비치 회고전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가 아상블라주의 선구자였음을 새삼 인식했다.

세자르와 달리 존 체임벌린은 조형물의 채색에 관심이 많아 선명하게 채색된 부분을 작품의 액센트로 활용하고 폐품으로 제작한 작품에 추상적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는 1950년대 말 버려진 자동차의 금속 부품을 구부리고 용접한 조형물을 제작해 정크아트에 속하는 예술가로 분류되었다. 그가 이런 재료를 사용한 의도는 사회적 논평보다는 완성된 조형물의 형식적 특성과 관련되었지만, 재료의 원래 출처가 조형물 속에 남아 있어서 전체적인 인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조형물의 표현적 에너지는 액션페인팅과 비교되었다. 그는 자동차 자체의 레디메이드 표면을 이용하고 소모성 폐품에 지나지 않는 일그러진 고철 뭉치를 회생시켰다. 그는 원색 에나멜을 칠한 자동차 몸체를 일그러뜨려 추상 아상블라주 조형물이 되게 했다. 일그러진 자동차 몸체는 얼어붙은 동력주의를 보여주었다. 체임벌린의 조형물은 회화에서 데 쿠닝의 충돌하는 붓질 같았으며 불안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정연함을 통해 에너지가 분출하도록 했다. 그는 1990년 11월 20일부터 1991년 2월 20일 한국에서 열린 서울 국제미술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마크 디 수베로는 커다란 나무막대들과 거칠고 두꺼운 판자 주위로 불안하게 비대칭적으로 자리 잡은 구성물에 종종 간이의자를 집어넣어 관람자를 조형물의 공간과 긴장 상태 안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1971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발해 베네치아로 이주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개최했다.

루카스 사마라스는 1959~62년에 컬럼비아대학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공부했다. 그는 초기에 회화, 조형물, 퍼포먼스아트에서 활동했고, 나중에는 사진으로 작업했다. 그는 자신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환경미술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예일대학과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사마라스는 평범하지 않은 어지러운 쓰레기를 나무상자 안에 조립하여 고전주의 감각에 일치하는 형태들로 제작했다. 어려서부터 금지된 물질과 에로틱한 물질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상자 안에 물질을 채워 넣기를 즐겨했으며, 그의 상자들은 변태성욕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다다의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는 1960년대에 수천 개의 핀, 털실, 못 등의 혼합매체를 사용한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무제>는 뜨개실과 핀을 사용한 조형물이다.

조지 시걸은 석고로 인물상을 실물에서 떠낸 뒤 실물과 똑같이 제작한 상황 속에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인물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판에 박힌 제스처 속에 고정되어 버린 유령 같은 인물들은 몰개성적 사회 속에서 영혼이 없는 육체들이다. 그의 인물상과 군상은 금세기의 어떤 예술가의 조형물보다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 주제인 현대인의 정신적 고립과 소외감을 잘 포착했다. 마크 로스코는 “시걸이 드나들 수 있는 호퍼 풍의 조형물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시걸의 조형물은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선언적 특질을 지녔고, 거기에 사용된 수단은 대담하고 간소하다.

에드워드 키엔홀츠가 1961년에 매음굴의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첫 펑크아트 작품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매음굴을 사실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평범한 장식의 침실 패러디에서 라디오는 멋없는 음악을 뱉어내고 거울은 성교를 준비하는 한 쌍의 사실적 이미지를 반영한다. 남자와 여자의 머리가 이불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미국 민속의 일면을 취해 부패하고 심리적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미국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실현된 ‘개념회화concept tableaux’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앞서 제작한 <주립 병원 The State Hospital>(1966)이다. 그는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기도 했는데, 군사 선전의 도상을 왜곡하여 그 기괴함을 드러낸 것이 <포터블 전쟁기념물>이다. 태평양 전쟁 때 이오지마 섬에 있는 170m 높이의 가장 높은 수리바치 산Mt. Suribach에 미국 국기를 꽂고 있는 일군의 병사를 표현한 이 조형물은 반군국주의적 응수로서 그의 표현에 의하면, ‘회화’인 이 조형물은 전원 서민극, 그리고 성사극의 상연을 위해 대성당 앞에 설치하던 무대의 전통을 되살린 것이다. 이 작품이 다룬 문제는 미국의 정치적 정신이 안이해지면서 왜곡되는 기억, 특히 2차 세계대전 동안 키워진 애국적 단결의 강력한 그러나 왜곡된 기억이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Galerie Parnass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ㆍ무작위적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샤롯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었다. 백남준은 신체와 테크놀로지의 매개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했고, 테크놀로지를 인간화, 심지어는 성애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불화를 중재하려는 그의 노력은 오히려 그 불화를 악화시켰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어만을 희생시켰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는 테크놀로지를 성애화했다기보다는 여성을 대상화한 것이다.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예술가 빌 비올라는 늘 첨단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고 종교적 경건함까지 느끼게 한다. 빛과 어둠, 운동과 정지, 물질과 정신 등의 대립적인 요소와 이미지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작품은 고도의 촬영과 편집기술을 동원한 것으로 웅장한 소리와 함께 관람자를 그의 세계로 몰입시킨다. 시러큐스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동양의 종교에 탐닉한 비올라는 현대 물리학, 지각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여러 종교를 연구하고 깨달은 바는 동양과 서양의 정신을 관통하는 건 인간의 기본 성향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탄생, 죽음, 존재 등이 나타나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동양 신비주의의 근본 개념인 자아와 비자아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으며, 오늘날까지 이런 요소가 그의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 부분으로 이뤄진 설치작품 <불, 물, 숨결 Fire, Water, Breath>(1996)의 한 부분 <전령 The Messenger>에는 벌거벗은 한 남자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와 깊은 숨을 내쉬고는 다시 물속에 잠긴다. <교차>에서는 한 남자가 점차 불길에 타버리며,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남자가 천천히 차오르는 물방울에 빠져 죽는다. 이런 이미지들이 다소 섬뜩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비올라는 언제나 어떻게든 회복될 것이라는 느낌도 제공한다. 슬로우 모션, 귀를 찌르는 것 같은 커다란 음향, 풍부한 색의 배열 그리고 거대한 규모 등의 요소들이 자연 속에 잠겨있는 인간을 영화 같이 경험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