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14
미니멀아트ㆍ프로세스아트ㆍ개념미술
작업 수단을 최소화한 미니멀아트
미니멀아트Minimal art란 명칭은 미술사학자이면서 평론가 바버라 로즈Barbara Rose(1938~)가 1965년 『아트 인 아메리카 Art in America』지 10, 11월호에 기고한 논문 「ABC 아트」에서 사용되었다. 미술평론가 어빙 샌들러Irving Sandler(1925~)는 1965년에 시리얼아트의 한 유형으로 쿨아트Cool art란 말을 사용했는데, 그 유형 내에서 작품이 추상이든 팝아트이든 상관하지 않고 이 용어를 적용했다. 그는 쿨아트의 특징을 계산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유용하지 않고 지루하다고 규정하면서 표현주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로즈는 이 용어를 미니멀아트, 혹은 ABC 아트의 동의어로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간결한 작품에 대해 쿨아트와 ABC 아트 외에도 거부미술, 기초의 구조, 즉물주의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댄스, 음악, 문학, 회화, 조각 등에서 생겨난 유사한 경향을 설명하는 미니멀리즘이란 용어와는 달리 미니멀아트는 시각예술에만 국한되었다. 미니멀아트의 특징이 입체 영역 안에서 추상에 대한 논란이었으므로 회화는 선구적인 역할을 넘겨주게 되었다. 입체 영역에서의 주도적인 미니멀 예술가는 도널드 저드, 솔 르윗, 칼 안드레, 댄 플레이빈, 로버트 모리스였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저드와 모리스였다. 저드, 르윗, 플레이빈 등은 1963년경 회화에 등을 돌리고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미니멀 예술가로 불리는 데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평론가들에 의해 규정된 미니멀아트는 절제된 조형언어, 연속성, 비관계적인 구성, 새롭고 산업적으로 가공된 재료의 사용 그리고 공업적 제작과정 등이다.
미니멀아트 중에서도 최소한의 내적 차별성을 지닌 한 부류에만 주목한 로즈는 1950년대에 일어난 새로운 감수성으로의 전환에 대해 언급하며 “공허하고 중립적이며 기계적인 비인격성을 지녀 앞서 등장한 낭만적이고 자전적인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격심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관람자가 감정과 내용의 명백한 부재를 목격하고서 얼어붙도록 만드는” 미술에 대해 서술했다. 로즈는 새로운 종류의 미술이 독창성, 감상적이거나 표현적 내용, 복잡성과 같은 전통 필요조건들을 의도적으로 폐기 처분했음을 지적했다. 미니멀아트에는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이 된다.
미니멀아트의 선구자 토니 스미스
미국 조각가 토니 스미스Tony Smith(1912~80)는 “내 조형물은 의식적인 계산의 산물이 아니라 수수께끼와 무의식의 격정에서 유발된 것이며, 내 모든 조형물은 꿈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1960년대 그의 작업은 추상표현주의의 정신과 1960년대 새롭게 전개된 미니멀아트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그는 주제에 관한 한 추상표현주의의 신념을 유지했지만, 르윗, 저드, 모리스 같은 미니멀 예술가들에게 규범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56년에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의 첫 개인전은 1964년에 열렸다. 주로 입방체와 사면체의 매우 단순한 형태의 그의 조형물은 미니멀아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단일한 완전한 미니멀 형태의 조형물이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그의 조형물은 규모가 크고, 강철 또는 채색한 강철로 제작된 단순 기하학적 형태들이다.
단색조의 부조를 제작한 도널드 저드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94)(뉴욕 60)는 1946~47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다. 1953년 컬럼비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1904~96)의 지도를 받아 미술사를 공부하여 1962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드는 1959~65년 『아트 뉴스』, 『아트 인터내셔널』, 『아트 매거진』 등에 고정적으로 실린 그의 비평은 공격적 산문체로 유명했다. 그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학계의 모더니스트들이 늘어놓는 휘황찬란한 말재간에 대해서는 모리스만큼이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 공간이 평편한 표면 위의 물감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력하고 특수하다”고 주장하면서 나중에 자신의 작업에서 이러한 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그의 목표는 환영주의를 격퇴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전체 형태에 의해서 직접 결정되지 않은 부분들 사이의 내적 관계를 모두 환영주의로 보았다.
저드는 미술에서 각 부분들 간의 상관적 관계를 피하고 주관적 결정을 제거하는 논리적 체계를 고안하려고 했다. 평론가나 대중은 저드의 이런 반합리주의적 태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저드와 스텔라가 자신들의 작품을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피트 몬드리안이 창시한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유럽 전통의 맥락에서 보는 것에 대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이라는 지리적인 이분법을 내세운 그들의 관점은 근거가 빈약했으며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상이거나 추상이거나 조형작품은 명백하게 눈에 호소하기 마련이다. 저드는 “미술이란 우리가 주시하는 그 무엇”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작품에 대칭을 사용한 데 대해서 “구성의 효과를 모조리 없애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중 칸막이 구조물을 제작한 솔 르윗
솔 르윗Sol LeWitt(1928~2007)은 시라큐스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일본과 한국에서 군복무를 했다. 1950년대 말에 르윗은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60년 모마에 근무할 때 그곳에서 일하던 플레이빈, 로버트 맨골드, 로버트 라이먼, 그리고 평론가 루시 리퍼드Lucy R. Lippard(1937~)를 만났다. 그의 작품은 눈에 띄는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르윗은 1961년에 간결한 기하학적 단색조의 벽 구조물wall structure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무에 채색하여 회화와 부조 사이의 영역을 차지하는 낯선 작품이었다. 동시에 그는 글과 그림문자를 통합한 회화를 제작했는데, 장식적 색은 팝아트가 수용한 장식적 양식과 조금이나마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일 년 뒤 그의 작품은 벽으로부터 뚜렷하게 자유로워져서 단순하게 만들어진 사물로 된 입체를 향해 나아갔다. 1964년부터 그는 단색의 물감을 칠한 많은 나무 입체작품을 제작하면서 그것들을 벽에 고정하거나 좌대 없이 바닥에 설치했다. 간결한 단순함을 지닌 그의 작품은 절제된 미니멀리즘 조형언어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작품의 변형은 예정된 변수에 기초한 기하학과 수학 체계에 대한 표현이며, 알루미늄, 강철, 콘크리트 벽돌과 같은 일반 산업재료로 제작되었다. 르윗은 작품을 구성하는 계획과 제작과정도 작품으로 간주했으므로 재료 가공이 필수적이지 않으며 그의 설명을 좇아 누구라도 실현할 수 있다.
오브제들을 일렬로 배열한 칼 안드레
칼 안드레Carl Andre(1935~)는 1951~53년에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패트릭 모간Patrick Morgan으로부터 수학했다. 졸업 후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신석기시대 유적지와 브랑쿠시의 조형물에 관심이 많아졌다. 1956년 뉴욕에 이주하고 1969년까지 시인, 단편소설가, 도안가,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가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프랭크 스텔라를 만난 후였다. 그는 한때 웨스트 브로드웨이에 있던 스텔라의 작업실을 함께 사용했다.
1966년 뉴욕의 유대인 미술관에서 열린 ‘기초의 구조’ 전시회에 선보인 안드레의 <레버 Lever>는 121.92m에 걸쳐 139개의 내화벽돌을 일렬로 배열해놓은 것으로 미니멀아트로 분류되며, 또한 시리얼아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조형물은 구성이란 생각을 극단적으로 드러냄으로서 저드가 말한 대로 “단지 하나 다음에 또 하나”에 불과한 구조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안드레는 스티로폼이나 벽돌, 시멘트 블록, 자성체 등 동일한 형태의 공업재료를 부착하거나 접합시키는 과정 없이 수학적 일정한 체계에 따라 쌓아올려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해체되었다. 그는 1967년부터 거의 정사각형인 얇은 철판을 단순한 수학적 원리를 좇아 큰 정사각형이나 선형으로 배열했다. 1967년 유럽에서의 첫 전시회 ‘존재론적 조형’에서 그는 뒤셀도르프의 콘라트 피셔 갤러리 바닥 전체를 강철판으로 덮었다. 관람자들은 갤러리에 들어서서 작품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전시 장소는 그에 의해 재정의되었다.
색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건축적 공간을 창조한 댄 플레이빈
댄 플레이빈Dan Flavin(1933~96)은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56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가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부터였다. 그의 작품은 벽에 고정된 상자들로 단색으로 칠해졌고, 한쪽 면에 다양한 종류의 전구와 형광등을 고정시킨 것이었다. 그는 형광등 불빛과 네온 빛을 사용하여 정적 환경을 창조했다. 그가 사용한 소재는 단순한 선과 직사각형의 구성으로 배열한 네온튜브였다. 이런 구성은 말레비치, 타틀린, 몬드리안과 같은 단순화를 지향한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다.
플레이빈은 1961년부터 간결하고 빛나는 공간적 효과를 표현하면서 팝아트에 대응해 형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려는 미니멀아트의 금욕주의적 의지를 보여주었다. 1963년 5월 23일에 플레이빈은 그의 유명한 예술적 전환점을 실험했는데, 2m 40cm 길이의 형광등 하나를 작업실 벽에 대각선으로 고정시켰다. 그는 1964년 그린 갤러리에서 <유명론의 셋(오컴의 윌리엄에게) The Nominal Three(to William of Ockham)>(1963)을 선보였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흰색 형광등을 연속적으로 배열한 작품으로 배열이 대수학의 진행 1+(1+1)+(1+1+1)이라는 무한한 계산의 단순한 공식이 연속성을 나타내는 최소의 수인 셋에서 임의적으로 멈춘 것이다. 공식이 중요한 이유는 수학적 구조 때문이 아니라 인접한 단위의 연속적 존재 때문이다. 이 작품은 조직적으로 선택된 체계를 작품에 도입한 저드와 르윗 같은 다른 미니멀 예술가들과 공유한 특징 진행과 연속적 과정 때문에 중요하다.
화면이 망막에 반응을 일으키게 한 애그니스 마틴
캐나다 태생의 미국 화가 애그니스 마틴Agnes Martin(1912~2004)은 45세가 될 때까지 북미의 서부 지역에서 학교 교사라는 여성에게 주어진 기회에 의존했고, 대도시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자연 속에서 객관적인 대응물을 결코 찾을 수 없는 주관적 사유와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는 추상으로 관심을 돌려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마틴은 1963년부터 연필로 세밀한 선을 그리는 그녀만의 작업 방식을 발전시켰다. 그녀의 회화는 자유롭게 그려진 유기적 추상에서 단조로운 회색이나 흰색 안료가 펼쳐지는 전면적 격자로 빠르게 변화했다. 라인하르트가 그의 마지막 <검은 회화> 연작을 진행하던 1960~64년에 마틴은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결합하여 라인하르트와 같은 형태의 모순적 조건을 보여주는 작업을 했다. 캔버스 전체에 격자 눈금 패턴이 있는 그녀의 작품은 1960년대 미술 경향에 일치했으며, 1964년경 정사각형의 모노크롬 캔버스를 수평 수직의 명확한 격자로 나누는 그녀만의 형식에 도달했다. 그녀가 단색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 칠한 바탕에 연필로 그린 가느다란 선들은 첫눈에 알아보기 어려우며 관람자가 그것에 주목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것들을 보는 데 겪는 어려움이 곧 그 작품이 제작된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인식으로서 화면이 망막에 일으키는 반응이다. 손으로 줄을 긋는 행위는 마틴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기하학은 비개성적인 것이지만, 흑연이 자국은 남기는 과정에서 미세한 사고를 거의 무한정으로 일으키게 한다. 이런 회화는 주장하는 바가 별로 없는 겸손한 것인 동시에 관람자의 시간과 집중력을 극도로 요구한다. 마틴은 작품에 바람 속의 잎, 우유 강, 오렌지 숲 같이 자연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드로 처리된 화면은 형용할 수 없는 빛이나 광채를 내뿜는 듯한 것이 자연을 그린 것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회화의 내적 고갈을 표현한 로버트 라이먼
애그니스 마틴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결합하여 라인하르트와 같은 형태의 무순적 조건을 보여준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1930~)은 고향 내슈빌의 테네시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에 입학하고 다음해에 조지 피바디 교육대학에서 음악을 공부(1949~52)했다. 원래 재즈 색소폰 연주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회화를 접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52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독특한 멜로디와 즉흥연주, 화성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재즈 피아니스트 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1919~78)와 함께 연주했다.
라이먼은 모마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으며, 모마에서 플레이빈, 르윗, 맨골드, 그리고 미래에 아내가 될 평론가 루시 리퍼드를 만났다. 그는 1954년에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회화의 기초에 대한 실험적 연구를 마쳤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는가 하는 데 있었다. 온통 하얀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물감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각기 다른 화면에 반응하는 방식의 효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초기에 주로 잡아당기고 밑칠을 하는 등의 가공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두터운 붓자국을 남기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1966년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체계적 회화’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처음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차세대 모노크롬 화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라이먼은 물감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각기 다른 화면에 반응하는 미묘한 차이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틀에 팽팽하게 고정시킨 캔버스뿐만 아니라 고정시키지 않은 캔버스를 비롯하여 넝마 펄프로 제작된 수제 종이, 플라스틱, 강철에 입힌 무광 안료, 칠보 등과 같이 매우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관람자가 작품을 잘 감상하려면 작품 자체를 가리키는 자기지시적 성립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재료가 거쳐야 하는 제작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포함된다. 관람자는 회화의 대상이 바로 회화 자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라이먼은 1971년에 작업과정을 알고자 하는 관심이 있다면, 작업을 주시하면서 단순히 그것을 보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면서 “회화의 시적 감흥은 감정의 세계에 속한다. 이는 일종의 폭로이자 신성한 경험인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즐겁고 흐뭇한 인상을 거두게 된다. ... 우리는 강해지고, 이는 여러 날 이상 지속된다. 이는 행복”이라고 했다.
소멸하는 재료를 사용한 프로세스아트
작품에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다양한 유형의 비자연주의 미술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프로세스아트Process Art이다. ‘진행 미술’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프로세스아트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작품의 형식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와 관련된 과정과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강조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한 경향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이와 같은 일시성에 대한 강조는 미니멀아트의 비개성성, 형식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의 한 측면이다. 포스트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미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지배적 경향이던 미니멀아트의 뒤를 이은 경향들을 지칭하기 위해 미국 평론가 로버트 핑커스 위튼Robert Pincus-Witten(1935~)이 1971년에 만든 명칭으로 핑커스 위튼이 기고한 1971년 11월호 『아트포럼』지에 「에바 헤세: 숭고함으로의 포스트-미니멀리즘 Eva Hesse: Post-Minimalism into Sublime」이란 제목의 글에서 처음 이 용어가 등장했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의 가치들에 대한 반동을 함축하지만 종종 보다 적극적인 반감을 제시하는 데 사용되던 반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극도의 지적 단순화를 추구한 로버트 모리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1931~)는 1961년 헌터 칼리지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1966년 콘스탄틴 브랑쿠시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니멀아트 주창자 가운데 뛰어나며 자신의 의도를 명료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로 꼽힌다. 그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관계적non-relational’, 혹은 ‘전체론적holistic’ 미학을 표방했다. 1961년에 플럭서스 운동의 맥락 안에서 처음 절제된 구성물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두 개의 기둥 Two Columns>(1961)은 최초의 미니멀아트 작품으로 꼽힌다.
모리스는 <세 개의 L자형 빔 Untitled(Three L-Beams)>(1965~66)에서 거대한 L자형 구성물이 하나는 옆으로 바닥에 뉘이고, 다른 하나는 똑바로 앉아 있게 하고, 세 번째의 빔은 양 끝으로 아치형을 이루며 서 있도록 했다. 중력의 당김이나 빛의 방출에 대한 감각이 각각의 실제 두께와 무게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세 형태들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간의 효과로 인해 각각의 형태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거기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인 작품을 보여주면서 형태를 파악하기 쉽고 관람자에게 그 본질의 자명성을 전해줄 수 있는 ‘단일 형태unitary forms’를 사용하라고 권했다. 그가 단일 형태라고 명명한 기초적 구조이론은 1966년 『아트포럼』지 2월호와 10월호를 통해 알려졌다.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부분적으로 하나 이상의 감각을 동시에 지각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순수한 감각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다. 즉 색을 지각하게 되면 차원도 감지하게 되고, 평면을 느끼게 되면 질감도 인지하게 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나 색 대 질감, 크기 대 부피 등 여러 상대적 감각은 남아 있더라도 개별 부분들로 분리할 수 없는 형태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들은 강한 게슈탈트 감각을 낳는 더욱 단순한 형태이며, 그 부분들은 개별적으로 지각되지 않도록 최대한 결합되어 있다. 입체와 조각에 적용할 수 있는 형태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게슈탈트는 더욱 단순화된 다면체이다."
공간을 중요하게 여긴 리처드 세라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1939~)는 샌터바버라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1957~61)한 뒤 1961년 생계를 위해 미국 서부의 제철소에서 일했다. 1964년 예일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유럽을 여행하며 2년을 보냈고, 1966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회화와 조각에 존재하는 관례적인 형상-배경 관계를 공격하기 위해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정 재료의 본래의 모습이나 균형을 잃어버리게 하는 변형, 왜곡 등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7~68년에 ‘구르기’ ‘구기기’ ‘접기’ ‘던지기’ ‘건축하기’ ‘튀기기’ ‘던지기’ 등 동사목록을 작성하고 거기에 따른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8년에 납에 열을 가한 뒤 던져서 창조적 행위의 물질성을 연구했으며, 금속이 고체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납의 형태는 그의 행위의 물리적 증거이자 조각적 대리물로 나타났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사용하는 코르텐cor-ten 강철 등 평범하고 귀중하지 않은 재료에 관심을 기울였다. <던지기 Casting>(1969)는 과정이 제작물이 된다는 점에서 프로세스아트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재료, 행위, 장소의 통합은 그의 장소 특정적 조형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세라에게 과정은 “서로 분리된 사물을 시간을 통해 경험되는 조형물의 장 속으로 용해” 시킴으로써 장 효과field effects로 나아가게 했다. 그의 장소 특정성은 과거 예술가들이 거의 개입하지 않았던 변경된 장소를 의미하며,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이다. 장소 특정성은, 미술을 소비될 수 있는 실체를 지닌 대상으로 보는 관념에 여전히 의존하는 미니멀리즘을 비판했지만, 한편으로는 미니멀리즘의 감각을 확장한 것이다. 장소 특정적 작업은 표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제거하고 산업적 건축 재료를 사용했으며, 대상보다는 공간의 형태에 관한 것이더라도 기하학적 형태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의 몇몇 원칙들을 확장시켰다.
세라는 실외, 도시 공간에서의 조각가로 작업을 계속하는 가운데 시각성의 종류를 추구했으므로 그의 조형물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곳에 놓여졌다. 그는 조형물 자체와 그 작업 구조에 주어진 성격 사이의 연계를 찾는 탐색을 난감하게 만들려고 했다. 조형물과 그것의 설치 장소 사이의 어떤 연관도 배제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확하고 심적으로 긴장된 비관계non-relation를 이뤘는데, 이것이야말로 조형물이 하나의 의미 있는 활동으로 구제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사고에서 조형물은 조형물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종속되고, 처하며, 채택되고, 예속되며, 요구되고, 유용되는” 참을 수 없는 위치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의 야망은 각 공공조형물 때문에 주위 공간이 “원초적인 조형물의 기능으로서 이해되는” 그러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것이지, 반대로 주변 공간이 조형물을 그런 식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그의 조형물이 갤러리 공간 안에서 작용하는 것과 비교해 어떤 변화도 갖지 않았다.
심리적 암시에 관심을 기울인 에바 헤세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유대인의 딸로 태어난 에바 헤세Eva Hesse(1936~70)의 가족은 1938년 이민을 떠나 1939년 뉴욕에 정착했다. 헤세는 1954년 쿠퍼 유니언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54~57년 추상표현주의의 그림을 그렸고, 1957년 예일대학의 미술건축대학에서 요제프 알베르스의 지도를 받았다. 헤세는 1964년부터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조형물을 시작했기 때문에 뇌종양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할 때까지 활동한 기간은 6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기이한 추상’의 대표적인 조각가로 명성을 얻었다. ‘기이한 추상’은 헤세의 친구이며 미술평론가 루시 리퍼드가 1966년 뉴욕의 피시바흐 갤러리에서 기획한 전시회 명칭으로 헤세의 작품도 포함되었다. 헤세는 형태를 뒤섞어서 관람자가 대립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을 즐겼다. 이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작품과 함께 그녀가 취하는 장난스런 포즈로도 알 수 있다.
모리스와 세라가 관람자로 하여금 사물을 현상학적으로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형태의 순수성이나 안정성을 동요시킨 데 반해 헤세는 그 동요가 심리학적으로 일어나게 만들었다. 미술에서 도덕적 요소는 배제될 수 없으며, 그녀의 작품에서는 자아성찰이 아닌 우의적 표현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환상이나 욕망, 충동에 의해 관람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브제들은 특별히 여성적인데, 이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자궁이나 부르주아의 작품에서 보듯 상처 같은 개념을 통해 여성 본질을 구체화하는 방식을 개척하려는 시도와 유사했다.
헤세는 1964년부터 타계할 때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 당시의 지배적인 미술운동인 팝아트와 미니멀아트의 패러다임인 연속주의serialism, 래스터 패턴raster patterns, 반복, 입방체, 산업재료의 사용과 제작과정을 언급하고 재해석한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유약함과 유기적으로 보이는 특성은 미니멀리즘 조형물의 차가운 엄격함에 인간성을 부여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부분-대상을 닮은 오브제를 통해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영역을 붕괴시켰다.
신체를 해부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키키 스미스
키키 스미스Kiki Smith(1954~)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아버지는 미니멀 아트의 선구자 토니 스미스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미술에 입문한 스미스는 기하학적 추상 조형물로 명성을 얻은 아버지와는 달리 구상 조각가로서 자신의 성장 배경인 가톨릭과 신화, 설화에서 소재를 찾았다. 그녀는 1979년부터 인간, 특히 여성의 신체를 주제로 삼았다. 1980년대 초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언더그라운드 비주류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1988년에 파부쉬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90년에 모마의 ‘프로젝트 Projects’ 전시회를 기점으로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적인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신체를 심미적 대상이 아닌 해부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며 응급의학기술 훈련을 통해 획득한 의학지식으로 늑골, 자궁, 신경, 근육, 난자, 정자 등 비가시적인 신체부위를 재현했다. 1982년 아버지의 죽음과 1988년 에이즈로 죽은 언니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질병과 죽음의 이미지가 결부된 파편화된 신체 조형물에 치중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미술계의 주된 담론으로 등장한 섹슈얼리티와 동성애, 그리고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신체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사상이나 개념을 본질로 간주한 개념미술
1965년경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은 곧 개념미술 예술가들로 불리게 될 예술가들과 뉴욕의 막스의 캔자스시티 주점에서 종종 만나 토론했다. 대학을 막 졸업한 그들은 그린버그에 의해서 주도되어온 형식주의를 해체하고자 했으므로 그들의 토론은 매우 이론적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토론했으며, 미술에서의 개념의 성격이 열띤 논쟁과 토론이 되었다. 미술은 침대나 의자처럼 명확하게 한정된 사물의 물리적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뉴욕에서 로버트 스미스슨이 매주 개최한 야외 모임에서, 늦은 밤 주점에서, 갤러리에서, 혹은 대규모 그룹전에서 미술에 관한 논쟁과 토론이 늘 있었다. 미술학교도 중요한 토론의 장이었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과 연관된 많은 예술가들이 학교에서 가르쳤고 그들은 이를 창조적 작업으로 여겼다. 그들 중 몇몇은 미술에 관해 글을 써온 사람들이었다. 도널드 저드는 1959년부터 써왔고, 멜 보크너와 댄 그레이엄은 이론가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1961년 반예술을 표방한 미국 퍼포먼스 예술가 헨리 플린트Henry Flynt(1940~)가 ‘개념미술’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1963년에 반예술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지만, 개념미술이란 용어가 이론을 갖추고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 Paragraphs on Conceptual Art」이 『아트포럼』지에 발표된 후부터였다.
“어떤 예술가가 개념 형식의 미술을 사용할 때 이는 계획과 결정에 관한 모든 것이 미리 예상되고 그 실행은 무시해도 좋을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가 미술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된다. 이런 장르의 미술은 이론적이거나 이론의 예증이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여러 종류의 정신적 방법에 참여하며, 목적이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장인적 자질에 의존하지 않는다. 개념미술에 가담하는 예술가의 목표는 관람자에게 정신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을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일반적 규칙이거니와 그는 이러한 미술이 감정적으로 건조해지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개념미술은 1980년대 중반에 네오지오Neo-Geo의 대표적인 작품 등을 통해 개념미술에 대한 흥미가 실질적으로 되살아날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1980년대 중반의 새로운 관심에 대해 ‘신개념적Neo-Conceptual’이란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좀 더 쾌락적이고 대중적이 된 신개념주의는 한편으로 팝문화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오브제의 상태, 장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반향을 나타내는 개념미술의 회복으로 등장했다.
특유의 말장난으로 작품을 규정한 마르셀 뒤샹
개념미술의 선구자는 특유의 말장난을 즐긴 마르셀 뒤샹이었다. 해학은 그에게 중요했는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 Sad Young Man in a Train>(1911)를 예로 들면 그렇게 제목을 붙인 이유로 그는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하고 과거의 작품들을 집대성한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1915~23)는 특유의 말장난이었다. 이 작품을 간략하게 <큰 유리 The Large Glass>라고 한다. 뒤샹은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해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회화와 무관하다. ... 좀 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고 했다.
뒤샹의 말장난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 The Passage from Virgin to Bride>,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 The King and Queen Surrounded by Swift Nudes>에서도 나타났으며, 이런 식의 유머는 평생 지속되었다. 그것들 모두 입체주의 양식으로 기계운동을 묘사한 회화이다.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을 말한 솔 르윗
정식 교육을 받은 건축가 솔 르윗은 1967년에 “개념미술은 개념이 훌륭할 때만 훌륭하다”고 했다. 우리가 개념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주는가, 그리고 우리가 개념 일반에 관해 얼마나 수용적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렸다. 개념미술 예술가들은 미술에 대한 보다 넓은 개념을 형성하는 데 공헌했으며, 여기에 르윗의 공헌의 정도가 매우 높다.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 조지프 코수스
개념미술의 선구자로서 개념주의의 제반 원리에 대한 영향력 있는 옹호자로서 전면에 부각된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필명은 아서 R. 로즈Arthur R. Rose, 1945~)는 논문 「철학 이후의 미술 Art After Philosophy」(1969)에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외관’에서 ‘개념’으로 이행하는 혁명을 이룬 것으로, 결국 “근대 미술의 출발이자 개념미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미술 행위란 미술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 즉 수학적 공식이 자체적으로 증명되듯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동어반복으로 보고 <하나이면서 세 의자>로 예증했다. 그는 레디메이드를 사물, 언어, 사진 복제물 등 세 개의 연관된 부분으로 나눔으로서 확장시켰다. 순수하게 개념적인 이 작품은 하나의 의자와 실물대의 사진 그리고 ‘의자’라는 단어의 사전 속의 정의를 복제한 복사물 한 점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언어가 시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한 합법적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물과 관련된 모든 미학적 형식주의를 근절하고 또 하나의 반성적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코수스는 미술품과 그것의 기록을 구분하면서 “어느 누구도 내가 미술품으로 이 사진 복사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 사진 복사된 개념은 그것이 폐기되어도 상관없다. 부적절한 과정의 일부로서 다시 제작한 것은 그것의 재형형태와 연관된 것이지 미술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사진 복사를 가짜회화로 보기 시작하자 그 작업을 중단했다.
코수스는 “개념미술에 대한 ‘가장 순수한’ 정의는 그것이 의미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미술’이라는 개념의 기초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뒤샹 이후 예술가들의 특별한 가치는 그들이 얼마나 미술의 본성을 질문해보는가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또한 ‘그들이 미술의 개념에 덧붙인 것’에 관해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는데, 그에게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동어반복tautology이었다.
작품
토니 스미스의 <아마릴리스 Amryllis>, 1962~68, 강철, 340-273.4-367cm.
도널드 저드의 <무제 Untitled>, 1967, 22.9-101.6-78.7cm 각각의 간격은 22.9cm.
솔 르윗의 <Three x Four x Three>, 1984, 알루미늄에 흰색 에나멜, 429.3-430.5-429.9cm. Walker Art Center
칼 안드레의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Aluminum and Magnesium Plain>, 1969, 1-183-183cm. The Nasher Collection
댄 플레이빈의 <무제 6 Untitled(to Donna) 6>, 1971, 노랑, 핑크, 파란 형광등, 코너까지 243.8cm.
애그니스 마틴의 <무제 No. 7 Untitled No. 7>, 1977, 캔버스에 인디아 잉크, 흑연, 제소, 182.9-182.9cm. Walker Art Center
로버트 라이먼의 <쌍둥이 Twin>, 1966, 면에 유채, 192.4-192.6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조반니 안셀모의 <비틀림 Torsion>, 1967~68, 시멘트, 가죽, 나무, 입방체, 100-100-100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로버트 모리스의 <Untitled (L beams)>, 1965 and 1967, 세 개의 채색한 합판, 243.8-243.8-61cm. 원래의 것은 사라짐.
로버트 모리스의 <무제 Untitled>, 1968, 펠트, 덧테쇠, 365.8-289.6cm, Walker Art Center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아크 Tilted Arc>, 1918, Corten steel, 30.5-305cm. 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 Fereral Plaza, New York
에바 헤세의 <무제(일곱 개의 막대기) Untitled(Seven Poles)>, 1970.
애셔의 클레어 코플리 갤러리 전시 장면, 1974, 로스앤젤레스
조지프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세 의자 One and Three Chairs>, 1965.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