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에디는 워홀의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워홀은 곧이어 〈자살〉(1965)을 비롯한 많은 미공개 영화를 제작했다.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여동생 후아니타의 글을 참작해 〈후아니타 카스트로의 인생〉(1965)도 제작했다.
후아니타가 오빠의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글이 1964년 8월 28일자 《라이프》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70분짜리 흑백영화 〈비닐〉(그림 119, 120)은 안토니 버게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말랑가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비닐〉에서 말랑가는 가죽 자켓을 입고 빅터(Victor)라는 불량배로 출연했는데 그의 대사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선생님. 당신 손에 책이 들려 있군요.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아주 오랫만이예요, 선생님.”

말랑가는 잘 알려진 노래 〈달려갈 곳이 없는 Nowhere to Run〉에 맞추어 혼자 열광적으로 춤을 추었고 대사가 없는 엑스트라 역을 맡은 에디는 연신 담배를 피우면서 팔을 들어 허공을 저으며 말랑가의 춤에 응했다.
말랑가가 춤을 추는 뒤에서는 두 사내가 옷이 찢긴 신문배달 소년을 의자에 묶어놓고 고문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음악이 끝나자 빅터(말랑가)가 경찰관에게 “야, 시팔놈아!”라고 소리치면서 침을 뱉었다.
경찰관이 그를 체포하자 빅터는 “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경찰관 나리”라고 말했으며 경찰관은 “넌 그렇게 되지 못할 거야. 넌 쓸모없는 놈이지만 우리가 널 착한 놈으로 만들 수 있지”라고 했다.
워홀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모든 영화는 조작이다.
어디서 조작이 끝나고 어디서부터 실제가 시작되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만도 한 것이 인간의 가장 평범한 행위를 영화에 담았더라도 연출에 의한 재현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조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워홀은 계속 영화에 집착하며 반드시 헐리우드 영화에 버금가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워홀의 영화에 자주 출연한 에디 시즈윅(그림 121)은 영리해 보이는 예쁜 얼굴에 유머가 있었으며 섹시한 허스키 보이스를 가졌다.
특히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을 때는 일품이었다.
1965년에 스물두 살이었던 에디는 165cm의 키에 45kg이 조금 넘는 비교적 가냘픈 몸으로 꼭 끼는 옷을 입어 매끈한 몸매를 과시했다.
에디가 거리를 활보하면 사내들이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면서 추근댔다.
에디는 그런 사내들에게 씩 웃어주면서 자신의 의상연출이 효험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가는 다리의 곡선이 아름다워 미니스커트를 입었을 때 더욱 귀여워 보였다.
예쁘고 성적 매력이 있는 에디가 워홀 옆에 붙어있을 때면 워홀이 한결 돋보였다.

에디는 십대에 아버지로부터 성적 위협을 받은 뒤로 정신질환이 생겨 자주 병원에 드나들었다.
스무 살 때 하버드 대학 출신의 남자를 만나 섹스를 하고나서 임신한 것을 알고 과거 정신질환 기록 카드를 들고 병원으로 가서 자신은 정신질환이 있으니 낙태를 법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캠브리지에 있을 때 환각제 LSD를 복용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생활을 하면서 동성애 남자들과의 섹스를 즐겼다.
이 무렵 두 오빠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았다. 오빠 민티(Minty)는 알콜 중독자면서 동성애자로 에디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는데 1964년 3월, 26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그해 12월 31일 큰 오빠 바비(Bobby)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바비는 헬멧도 쓰지 않은 채 모터사이클을 타고 번화한 맨해튼 5번가를 달리다가 버스의 옆구리를 들이받았고, 그 사고 이후 12일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31세의 나이로 동생의 뒤를 따랐다.
에디는 워홀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에디는 워홀의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종종 조연을 맡더니 나중에는 주연을 맡게 되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가련한 부잣집 딸〉(1965)은 70분짜리 흑백영화였다.
미국 귀족의 딸처럼 고상한 모습으로 사립학교에 재학하면서 불행한 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역할이었다.
에디는 워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어디를 가나 동행했다.
워홀과 에디가 파티에 나타나면 한 쌍의 최고의 감독과 여배우같이 그럴싸했다.
두 사람은 영화제작자와 배우의 관계처럼 행세했지만 친구들은 두 사람이 동거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
1965년 4월 워홀과 에디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린 ‘미국회화 3세기 Three Centuries of American Painting’전을 관람하러 갔다.
워홀은 노란 색안경을 끼고 물감이 묻은 작업복 검정바지 위에 정장 윗도리를 입었고 에디는 부시시한 머리를 하고 몸에 꼭 끼는 옷 위에 라일락색 파자마를 입었다.
사진기자들은 팝 아트 예술가와 그의 애인을 사진에 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존슨 대통령의 부인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영부인과 사진을 찍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 후로도 영부인과 사진 찍을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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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

 
스토익주의에서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세 사람의 위상은 매우 중요한데 순서대로 세네카Seneca(기원전 3~65년)를 먼저 소개하고 나머지 두 사람을 소개하기로 한다.

세네카는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는 로마에 거주했다.
세네카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기원후 41년에 코르시카Corsica로 추방당하기 전까지는 순풍에 돛을 단 정치가였으며, 황후 메살리나Messalina의 미움을 받은 후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에 의해 추방당했다.
황제의 두 번째 아내 아그리피나Agrippina는 48년에 그를 불러들여 그녀의 11살난 아들의 가정교사로 채용했고 그녀의 아들이 나중에 황제로 즉위했는데 그가 네로Nero였다.

세네카는 익히 알려진 부자로서 그의 재산은 3억 세스테르세스Sesterces라고 했는데 이 돈을 호나산할 경우 럿셀이 1944년에 쓴 <서양 철학사>에 기술한 대로 약 1천 2백만 달러에 해당했으니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 값어치는 더욱 배가 될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많은 돈을 번 것은 영국에 돈을 꾸어주고 받은 고리가 증식되어 돈 놓고 돈 먹기의 효과였다.
디오Dio의 말로는 당시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가 고리를 받고 돈을 꿔주어도 영국인은 돈을 빌려 쓸 수밖에 없었다.
정치라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줄당기기 게임과도 같아서 네로의 힘이 강성해지자 세네카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의로운 동기에서였는지 아니면 불의한 동기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네카가 네로를 살해하고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키려고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더러 소문은 세네카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자 세네카는 반정부인사로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로는 스승을 차마 살해할 수 없어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65년에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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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클럽2

취향의 문제
집단의 취향 good taste and bad taste, bad painting, Punk art
Vitaly Komar비탈리 코마르 and Alexander Melamid알렉산더 멜라미드, <America's Most Wanted 미국이 가장 원하는>(1994), 워싱턴과 사슴 한 쌍, Least
Arthur C. Danto(1924-): After the End of Art(1995),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1981)

미술품에 대한 정의는 각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다. 각 시대의 미적 판단은 그 시대 사람들의 취미와 미에 대한 관념에 근거하고 취미와 미에 대한 관념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고급미술이냐 저급미술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혹은 전시장에서 “저것은 미술이 아니야!”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이 미술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고급미술high art이 아니고 저급미술low art임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미술품이 반드시 고상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미술은 고상한 미적 판단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때 모더니즘 이론가들은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이란 말로 미술품들을 구별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미술품이 왜 고급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에는 미적 등급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미적 판단의 척도가 있을 따름이다.

이전에는 양식들이 미술품의 공통성을 묶는 범주 또는 정체성으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양식이 동일하게 취급하며 단순한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양식은 형식과 같은 말로서 양식의 차이는 미술품 내용의 차이와는 무관하고 다만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형식만이 다를 뿐이다. 반드시 취해야 할 양식도 가장 우량한 양식도 없는 이유는 형식이란 동등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워홀의 상자와 모리스 그리고 세라의 펠트와 고무조각들 모두가 일상의 오브제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분류되지 않고 고상한 예술의 오브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한 오브제들이 그것들이 지닌 일상성 말고 그 밖의 무엇에 관한 것인가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오브제들에 관한 것과는 다른 예술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 이를 규명하는, 즉 미술품과 비미술품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로서 이는 또한 미술품을 규정할 철학적 근거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작품
1-뉴욕 61 도널드 저드, <무제 Untitled>, 1984, 알루미늄에 색을 입힘, 150×900×150cm. Collection of the artist
미니멀아트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 도널드 저드는 작품에 대칭을 사용한 데 대해서 “구성의 효과를 모조리 없애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드는 미술에서 각 부분들 간의 상관적 관계를 피하고 주관적인 결정을 제거하는 논리적 체계를 고안하려고 했다. 1964년과 1968년 사이에 그는 여러 가지 요소로 된 작품과 더불어서 단일 요소의 벽 부조도 계속 제작했다. 구성요소 사이의 간격은 수학적 원칙에 따라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했다. 이는 시리얼아트Serial Art의 일례이기도 한데, 시리얼아트는 체계적인 미술의 한 분파로 미니멀아트라는 넓은 범주에 속하며, 벽돌, 시멘트 블록, 자기 자석 등 단순하며 획일적인 공업 재료들이 구성요소로서 엄격한 치수 체계에 따라 조립된다.
2-타센 1102 솔 르윗, <모듈러, 스텝스 Modular Piece, Steps>, 1971, 나무에 흰색을 입힘, 61.6×61.6×61.6cm.
도널드 저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군복무를 한 솔 르윗은 1964년부터 단색의 물감을 칠한 많은 나무 입체작품을 제작하면서 그것들을 벽에 고정하거나 좌대 없이 바닥에 설치했다. 르윗은 작품의 개념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고 미술품은 이러해야 한다는 어떠한 기존 관념과도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개념적 질서가 시각적 혼란으로 빠지는 특이한 지각의 와해 현상에 도달했다. 그는 “개념은 작품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고 했다. 그는 1968년부터 벽에 직접 드로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실행한 것이 아니라 제도공들을 고용해 지침을 주고 완성하게 했다. 
3-예일 10 칼 안드레, <Steel Magnesium Plain>, 1969, 36개의 정사각형 판, 각 정사각형 판은 30.5×30.5cm, 전체는 182.9×182.9cm.
칼 안드레의 작품은 미니멀아트로 분류되며, 또한 시리얼아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는 스티로폼이나 벽돌, 시멘트 블록, 자성체 등 동일한 형태의 공업재료를 부착하거나 접합시키는 과정 없이 수학적 일정한 체계에 따라 쌓아올려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해체되었다. 이 작품은 36개의 정사각형 알루미늄판과 마그네슘판이 모여 정사각형을 이루며 바닥에 설치된 것이다. 알루미늄판과 마그네슘판을 번갈아 배열하여 장기판 무늬가 되게 했다. 관람자는 작품 위를 걸어 다님으로써 좀더 능동적으로 작품과 관계를 맺도록 도전받는다. 그의 작품에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고정된 방향이나 좌대도 없고, 판 전체의 두께 외에는 어떤 깊이도 없다. 각 판은 똑같은 비중으로 모여 바닥 자체처럼 만질 수 있는 사물로, 어디든 밟을 수 있도록 존재한다. 안드레는 판들을 배열함으로써 시각의 영역을 규정한다. 그러나 관람자는 자신의 시각과 촉각 그리고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스텔라는 “보이는 것이 여러분이 보는 것 그 자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36개의 정사각형 알루미늄판과 마그네슘판이 그러하다. 스텔라와 안드레는 유사한 태도로 작업에 임했다. 안드레는 “나는 분명 어떤 종류의 개념미술 예술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 작품의 물리적 실존이 그것의 개념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런 미술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미술 욕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가 원한 것은 순수한 내용으로 미술로서의 미술이었다.
4-타센 1103 댄 플레이빈, <무제 6 Untitled(to Donna) 6>, 1971, 노랑, 핑크, 파란 현광등, 코너까지 243.8cm.
댄 플레이빈의 작품은 벽에 고정된 상자들로 단색으로 칠해졌고, 한쪽 면에 다양한 종류의 전구와 형광등을 고정시킨 것이었다. 그는 형광등 불빛과 네온 빛을 사용하여 정적 환경을 창조했다. 그가 사용한 소재는 단순한 선과 직사각형의 구성으로 배열한 네온튜브였다. 이런 구성은 말레비치, 타틀린, 몬드리안과 같은 단순화를 지향한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다. 그는 러시아 구성주의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결합시켰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사용된 네온튜브를 현대의 테크놀로지적인 물신으로 간주했다.
5-마틴 3 애그니스 마틴, <무제 No. 7 Untitled No. 7>, 1977, 캔버스에 인디아 잉크, 흑연, 제소, 182.9-182.9cm. Walker Art Center
애그니스 마틴은 1964년경 정사각형의 모노크롬 캔버스를 수평 수직의 명확한 격자로 나누는 그녀만의 형식에 도달했다. 그녀가 단색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 칠한 바탕에 연필로 그린 가느다란 선들은 첫눈에 알아보기 어려우며 관람자가 그것에 주목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것들을 보는 데 겪는 어려움이 곧 그 작품이 제작된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인식으로서 화면이 망막에 일으키는 반응이다. 손으로 줄을 긋는 행위는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기하학은 비개성적인 것이지만, 흑연이 자국은 남기는 과정에서 미세한 사고를 거의 무한정으로 일으키게 한다. 이런 회화는 주장하는 바가 별로 없는 겸손한 것인 동시에 관람자의 시간과 집중력을 극도로 요구한다. 마틴은 “나의 캔버스는 정사각형이다. 그러나 그 위의 격자는 결코 정사각형이 아니다. ... 내가 정사각형의 격자형 표면을 직사각형들로 덮을 때 그것은 정사각형의 무게를 경감시키며 그 힘을 파괴한다”고 했다.
6-모마 421 로버트 라이먼, <쌍둥이 Twin>, 1966, 면에 유채, 192.4-192.6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애그니스 마틴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결합하여 무순적 조건을 보여준 로버트 라이먼은 프로세스아트 예술가로 간주되었는데, 그의 작품에는 재료를 처리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흰색>로 불린 일군의 작품에서 라이먼은 흰색 유화물감을 듬뿍 묻힌 5cm 두께의 붓으로 캔버스를 수평으로 가로질러 한 번에 20-25cm 정도 칠하다가 물감이 떨어지면 다시 물감을 묻혀서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물감이 옅어지는 곳과 물감을 다시 묻혀 붓질을 새로 시작했기 때문에 물감이 도톰하게 올라온 곳 사이에는 역간의 끊김이 보인다. 라이먼은 회화란 무엇을 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만이 오로지 중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온통 하얀 모노크롬회화를 통해 물감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각기 다른 화면에 반응하는 방식의 효과에 관심을 기울였다. 포착하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틀에 팽팽하게 고정시킨 캔버스뿐만 아니라 고정시키지 않은 캔버스를 비롯하여 넝마 펄프로 제작된 수제 종이, 플라스틱, 강철에 입힌 무광 안료, 칠보 등과 같이 매우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관람자는 회화의 대상이 바로 회화 그 자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라이먼은 자신의 회화에서 수평이나 수직의 방향을 강조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중립적인 정사각 형태를 선호했다. 그는 재현적인 어떤 가치도 배제된 물질성을 표현하는 회화와 입체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회화를 보면 흰색 표면이 모두 비슷해 보인다. 라이먼의 작품에 대한 패널토론회가 1993년 늦게 뉴욕의 모마에서 열렸을 때 그의 회고전을 기획하고 패널토론회의 사회를 본 로버트 스토어는 토론회 제목을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로 정했다. 스토어의 입장은 회화는 죽었으며 라이먼의 전형적인 흰색 사각형과 같은 작품은 회화의 내적 고갈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7-모리스 5 모리스의 <Untitled (L beams)>, 1965 and 1967, 세 개의 채색한 합판, 243.8-243.8-61cm. 원래의 것은 사라짐.
로버트 모리스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관계적’, 혹은 ‘전체론적’ 미학을 표방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거대한 L자형 구성물이 하나는 옆으로 바닥에 뉘이고, 다른 하나는 똑바로 앉아 있게 하고, 세 번째의 빔은 양 끝으로 아치형을 이루며 서 있도록 했다. 중력의 당김이나 빛의 방출에 대한 감각이 각각의 실제 두께와 무게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세 형태들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간의 효과로 인해 각각의 형태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모리스는 1963년 가을부터 거대한 널판, 기둥, 현관 형태의 구성물과 같은 합판 다각형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제작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상자>을 텅 빈 정육면체로 제작했다. 이 상자는 한 면이 약 25cm인 보통 경목 조각을 못질로 조립한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녹음기에서는 이 물건을 만들 때에 들어간 작업, 즉 톱질, 페이퍼질, 망치질 등의 소리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흘러나왔다. 이 작품은 자기지시적인 것으로 동의 반복적이며 재귀적인 성질을 띠었다. 모리스는 그의 작품이 단순히 방 안에 있는 다른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방 안에 있는 다른 것들과 다를 바가 없기를 바랐다.
8-예일 12 로버트 모리스, <무제 Untitled>, 1968, 펠트, 덧테쇠, 365.8-289.6cm, Walker Art Center
모리스는 1967년 여름에 흩어지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는데, 훗날 프로세스아트, 혹은 포스트미니멀리즘으로 불리었다. 그는 1968년 여러 필의 펠트를 벽에 걸어 펠트 자체의 무게로 형태가 형성되는 조형물 <매달린 펠트>를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 전시했는데, 폴록의 회화를 삼차원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반형태」이란 제목의 글을 『아트포럼』지에 기고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조형물 경향을 폴록의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려 그리는 회화와 관련시켰다. 모리스는 또한 「반형태」에서 미니멀리즘 작품의 자의적 배열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니멀리즘의 틀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단위체들을 배열하는 모든 방식이 부과된 것이라는 점이다”면서 이 방식은 “단위체들의 물리성과는 하등의 내적인 관계도 없다”고 했다.
9-세라 2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The Tilted Arc>, 1981, 강철, 3.66-36.6m. 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 Federal Plaza, New York
리처드 세라는 1964년 예일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유럽을 여행하며 2년을 보냈다. 그는 1966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던지기>(1969)는 과정이 제작물이 된다는 점에서 프로세스아트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는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 창고에서 투구를 쓴 전사의 모습으로 가스마스크를 쓰고 투석기 같은 걸 사용해 전시장 공간 구석구석에 녹은 납을 던졌다. 재료, 행위, 장소의 통합은 그의 장소 특정적 조형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기하학적 형태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그는 미니멀리즘의 몇몇 원칙들을 확장시켰다. 공공 조형물 <기울어진 호>는 세라의 첫 번째 뛰어난 작품이다. 이것은 길이 120피트, 높이 12피트의 유연하게 휘어진 코르텐 강철판이다. 이 판은 거리를 향해 오목한 구조로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플라자의 법원과 사무실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과 방문객들은 그들의 일상적 통로가 엄청난 규모에 의해 막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화당의 보수적 관료 두 명이 세라의 조형물 철거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은 세라의 작품을 평범한 개인의 필요에 무감각한, 배타적이며 자아중심적 소수문화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그것을 다른 곳에 옮겨야만 광장이 가졌던 야외 공공장소와 보행자 통로로서의 순조로운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라는 정당하게 모든 자료를 동원해 그들의 공격에 저항했다. 그의 조형물은 1989년에 마침내 해체되었다. 세라의 조형물은 비록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형물이 갖는 전통적 형태인 영원성과 기념비성을 거부함으로써 그 맥락을 조성하고 이를 명백히 한 셈이다.

개념미술
10-뒤샹 201 마르셀 뒤샹,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1915~23, 유채, 납, 납줄, 먼지, 상하 두 장의 유리, 알루미늄, 나무와 스틸 프레임.
이것은 그의 가장 유명하고 과거의 작품들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특유의 말장난이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옷을 벗은 신부를 향한 아홉 명의 유니폼을 입은 독신남자들의 해결되지 못한 열정이다. 독신남자들은 외관상 기계의 모습을 띠며, 그들의 독신기계와 함께 작품 아래에 위치해 있다. 신부는 윗부분에 매혹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정교한 기술은 인간의 열정의 하찮음을 기계화된 형태로 구체화시키려는 뒤샹의 복잡한 개념과 부합되었다. 뒤샹은 예술가가 지식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불쾌해했다. ‘화가처럼 멍청하다’는 프랑스 속담을 언급하면서 그는 사람들이 화가는 사교계의 신사보다 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그가 망막적 회화를 비난한 것은 화가의 수공적 예속에 반대하고 지적 입장을 취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회화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오로지 시각적이거나 망막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미술이 개념적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1-모마 443 조지프 코수스, <하나이면서 세 의자 One and Three Chairs>, 1965.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조지프 코수스는 논문 「철학 이후의 미술」(1969)에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외관’에서 ‘개념’으로 이행하는 혁명을 이룬 것으로, 결국 “현대 미술의 출발이자 개념미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미술 행위란 미술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 즉 수학적 공식이 자체적으로 증명되듯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동어 반복으로 보고 <하나이면서 세 의자>로 예증했다. 그는 레디메이드를 사물, 언어, 사진 복제물 등 세 개의 연관된 부분으로 나눔으로서 확장시켰다. 순수하게 개념적인 이 작품은 하나의 의자와 실물대의 사진 그리고 ‘의자’라는 단어의 사전 속의 정의를 복제한 복사물 한 점으로 구성되었다. 라인하르트가 “예술은 예술로서의 예술이다”라고 했듯이 코수스는 “예술이 예술인 것이 곧 예술이다”를 동어반복으로 설명한 것처럼 의자가 의자인 것이 곧 의자임은 일종의 동어반복이었다. 이와 반대로 형식주의는 “나의 회화가 다른 회화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는 모더니즘의 모토이기도 하다. 형식주의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을 미리 설정하기 때문에 예형론적이므로 코수스는 회화 결코 미술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보았다. 코수스는 196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로 “미술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을 꼽았다. 코수스는 미술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지닌 몇 안 되는 개념미술 예술가 중 하나였다. 코수스는 미술품이 어떤 사물로 구성된다면 “왜 그것은 미술품인가?”하는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이 물음은 곧 모더니즘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린버그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은 형태, 표면, 물감 등과 같이 회화를 그 순수성 속에서 규정해주는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인 모더니즘이 너무 국지적이며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12-개념 141 한스 하케,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A Bunch of Asparagus>(1880)>, 1974.
한스 하케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1974년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이 소장되어 온 경로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 정물화는 1968년 독일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Konard Adenauer(1876~1967)를 기념하여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Wallraf-Richartz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74세의 나이에 총리가 되어 88세까지 총리를 지냈다. 하케는 마네의 작품이 그려진 때부터 그것이 쾰른의 그 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의 경로를 추적했다. 첫 번째 소유주로 미술사학자이자 콜렉터인 유대계 프랑스인 샤를 에프뤼시Charles Ephrussi(1849~1905)를 거쳐, 독일인 출판가이자 화상 파울 카시러Paul Cassirer(1871~1926)와 유대계 독일인 화가 막스 리베르만으로 이어졌다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리베르만의 손녀에게서 작품을 구입한 미술관의 후원회장이자 은행가 헤르만 압스Herman Josef Abs(1901~94)로 귀착되었다.
하케는 한 개인이 문화적 후원자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얼마나 쉽게 세탁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패널은 그 소유 역사의 결론으로 압스가 걸어온 길을 분석해놓았는데, 압스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 제3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재정 고문으로 일했으며, 종전 후 1949년 아데나워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복직되었고, 그 밖에도 50여 개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나치에 협조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압스도 종전 후 죄를 사면받기 위해 영국 감옥에서 6주일을 보냈다. 그는 1960년대를 거쳐 미술관에 이 정물화를 기증하게 된 시기까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 자리에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케는 압스가 <아스파라거스 다발>를 구입하기 이전에 그 작품을 소장했던 수집가와 화상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업과 정치적 활동에 관해 세세한 것까지도 밝혔다. 하케의 작업은 큐레이터의 동의를 얻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방으로 간주되었으며, 미술관 경영진은 민주적 투표를 실시하여 그의 작품을 거부했다. 미술관 관장은 하케의 작품이 나치정권과 미술관의 주요 후원자인 압스와의 관계에 시선을 쏠리게 한다는 이유로 전시를 취소했다. 하케는 항의의 제스처로 파울 마엔츠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아스파라거스 다발>의 복제품을 사용했다.
13-예일 98 대니얼  뷔렝, <두 고원 The Two Plateaux>, 1986, Palais Royale, Paris.
프랑스 개념미술 예술가 대니얼  뷔렝은 예술가에게 작업실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정은 우연의 소산이기는 하나 그의 작업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순수미술의 체계와 단절하려는 그의 의지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는 1965년부터 작품에 흰색과 다른 한 가지 색을 번갈아 사용하여 제작했는데, 갑판의자 같은 수직 줄무늬가 늘 특징을 이루었다. 폭이 항상 8.7cm(2mm의 오차가 있다)인 이런 줄무늬는 시각적 도구로 광고판이나 갤러리의 설비 등에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단기적인 작업이었다. 줄무늬를 “실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미술품”이라고 강조한 뷔렝은 특히 전시공간과 미술품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관습적으로 갤러리 안에 전시된 작품들이 철거하게 되고 그 공간은 늘 비슷한 것으로 남게 되는 데 반발하여 뷔렝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직 컬러 줄무늬를 갤러리만이 아니라 건물 외부와 광고게시판, 잡지 등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연출했다. 그의 목적은 형식적 흥미와 미적 호소, 그리고 정감적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미술품에 집중된 주의력을 작품을 둘러싼 장소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정치화한 개념미술과 제도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 중심이 된 초기의 사례였다. 뷔렝은 1970년 『아트 매거진』지에 기고한 글 「비가 온다, 눈이 온다, 그린다」에서 프랑스 소설가, 평론가 모리스 블랑쇼의 글을 인용했다. “미술은 정확하고 엄격한 탐구이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작품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다.
미국 미술사학자 더글라스 크림프는 『미술관의 멸망에 관하여』(1993)에서 150년 전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쉬가 사진에 의해서 이미지를 만드는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회화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더라도 라인하르트를 비롯하여 몇몇 예술가들에 의해 회화가 설 자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뷔렝의 띠무늬가 회화를 대신하는 순간 “회화의 종말이 최종적으로” 확증되었음을 주장했다.

아르테 포베라
14-샘 헌터 620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그와 그녀의 대화 He and She Talk>, 1964, 매끈한 스테인리스스틸에 사진 콜라주, 120-224cm. Collection the artist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1962년에 시작한 ‘거울회화’로 유명하다. 이는 광택이 나는 강철판 표면 위에 채색된 형상과 반사된 관람자의 모습을 대치시킨 것이다. 대체로 정지 동작의 실물 크기 인물 사진을 얇은 반투명지에 베낀 뒤 윤곽선을 따라 인물을 오려내어 광택을 낸 얇은 강철판에 붙이고, 어두운 색조로 마무리하며, 형상 주변 관람자의 모습이 비칠 수 있는 곳에 철판을 놓은 것이다. 그의 회화 속에는 누드 여인이 서 있거나 정치적 시위를 하는 사람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사진 이미지에 움직이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회화 속에 관람자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작품에서 현실감을 주는 착시현상이 극단화되고 단색조의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지닌 비현실성도 또한 극단화된다. 관람자가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피스톨레토는 지각의 두 단계, 즉 금속 표면에 비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와 회화 속의 정적인 인물을 다루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15-예일 204 야니스 쿠넬리스, <무제 Untitled>, 1969, Galleria L'Attico, Rome.
야니스 쿠넬리스는 1969년 신선한 커피를 일련의 열두 개의 접시 위에 올려놓고 줄을 달아 수직으로 매달았다. 미술관에 커피 냄새가 진동하여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했다. 큐레이터는 그의 지침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신선한 커피를 보충했다. 커피는 인체의 감각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한 기억도 상기시켰다. 뒤샹이 레디메이드에 늘 냉정했던 반면 그는 살아 있고 변덕스러우며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뒤샹 식의 레디메이드를 시적으로 작업한 것은 단순히 이탈리아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기본적인 재료와 형태로 작업하면서 그것을 낯설게 만들었다. 쿠넬리스의 특징적인 작품은 여러 가지 재료 외에도 살아 있는 동물을 이용한 레디메이드 설치였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보다 더욱 연극적인 제스처로 이해된다. 1969년 1월 말 열두 마리를 로마의 라티코 갤러리에 전시하면서 제목을 <무제>라고 했다. 이 설치는 말들을 조형물이나 회화인양 전시실 벽에 열두 마리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매어놓은 것이었다. 12는 상징적인 숫자로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1년의 열두 달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신비한 연상과 관계된 숫자이다. 거기에는 전시실이라는 환경 안에 놓인 말들의 실제 출현뿐만 아니라 말들의 존재가, 그것들의 땀 냄새, 분뇨, 말들이 말발굽을 이동하면서 내는 소음, 폐쇄공포의 감각, 말과 연상되는 마구간, 영웅의 조각상, 악몽 등과 같은 것들이 합해져서 합법적으로 미술품으로 분류되어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해낸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제도적 틀 안에 자연의 대상을 들여온 이 설치는 문화 공간에 자연을 재등장시켜 충격을 가함으로써 아르테 포베라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이는 조각적 오브제를 외부와 분리된 하나의 형태라든지 테크놀로지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담론적 구조로 간주하는 비테크놀로지적, 비과학적, 비현상학적인 예술적 관습뿐만 아니라 언어 이전의 경험을 강조했다. 이 설치는 1976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도 계속되었다.
16-마스터 306 피에로 만초니, <아크롬 Achrome>, 1958, 캔버스에 고령토와 천을 부착, 80-100cm.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피에로 만초니는 고령토에 캔버스를 적셔 만든 흰색 모노크롬회화 <아크롬>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캔버스 위에 플라스터를 발랐지만 나중에는 헝겊에 흰 고령토를 흡수시켜 캔버스에 부착했다. 또한 유리솜과 폴리스트롤 같은 재료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의 의도는 클랭의 것과 같아 보였다. 그는 순수 재료가 순수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체가 흰색인 <아크롬>은 만초니가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연작의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대단히 짧은 기간에 극적으로 발전했다. 만초니의 작품에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허무주의 경향은 루초 폰타나의 영향이다. 만초니는 1959년에 종이에 선을 그은 뒤 돌돌 말아서 그것들을 상자에 넣고 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상자 위에는 선의 길이와 날짜 그리고 자신의 서명을 적었다. 그것은 비물질적이며 비가시적 작품이 되었는데, 상자가 부서지면 그것은 미술품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관람자는 상자 속에 선이 들어 있다고 믿고 그것을 가져가야 한다. 그것은 예술가에 대한 신뢰의 행동이다. 그의 상자는 30달러에 팔렸다.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깡통에 서명하고 표시해놓은 <예술가의 똥> 연작은 현대 미술의 개성 예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깡통에는 ‘예술가의 똥, 내용물, 30g, 신선하게 보존됨, 1961년 5월에 생산되고 저장됨’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클랭과 마찬가지로 만초니는 다다에서 취한 개개의 개념들을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저한 미학적 허무주의도 소생시켰다.

대지미술
17-드 마리아 5 월터 드 마리아, <번개 치는 들판 The Lightning Field>, 1977, 스테인레스 스틸 막대들로 평균 높이 6.29m, 전체 면적은 1,609.34-1,005.84m. Quemado 근처, New Mexico
월터 드 마리아는 미니멀아트, 개념미술, 대지미술의 경계를 오갔다. <의미 없는 작품을 위한 상자>(1961) 같은 초기작에서는 다다적인 아이러니도 보였다. 상자들의 좌대에는 관람자를 위한 그의 설명이 새겨져 있었는데, ‘계속해서 한 상자에서 다음 상자로 물건을 옮길 것. 여러분이 하는 그 행위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었다. 드 마리아는 1960년 3월 「의미 없는 작품」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의미 없는 작품은 오늘날 분명히 가장 중요하고 중요한 미술 형태이다. 의미 없는 작품이 주는 미적 느낌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이유는 개별적 작업에 따라서 다양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작품은 솔직하다. 지성인들은 의미 없는 작품을 이해하더라도 증오한다. 의미 없는 작품은 미술 갤러리에서 팔리지 않으며 미술관의 상을 수상하지도 못한다. 의미 없는 작품은 오늘날 잠재적으로 가장 추상적이며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어리석고 불확정적이며 확실히 결정적이고 다양하며 사람들이 착수할 수 있는 중요한 미술-행위-경험이다.” 드 마리아는 대지미술의 본질을 고립으로 보았다. 그는 1971년부터 구상한 <번개 치는 들판>을 1974~77년에 번개가 빈번히 치기로 유명한 뉴멕시코 주 웨스트 센트럴에 설치했다. 가로 세로 1.6km 1km의 면적에 높이 7m의 거대한 피뢰침 400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했다. 방문객은 작은 오두막에서 번개 치는 걸 바라볼 수 있었다. 물리적·시각적 효력을 지닌 이 기하학적 설치는 광란적인 번개를 뛰어오르게 만들 태세를 갖추었다.
18-개념 82 로버트 스미스슨, <산호가 있는 코너거울 Corner Mirror with Coral>, 1969, 91.5-91.5-91.5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로버트 스미스슨은 반사작용과 거울이미지를 실험하면서 이 작품에서 보듯 채석장에 놓은 거울들을 연속적으로 찍은 사진들과 함께 지도를 병렬시킨 것이다. 그는 뒤셀도르프에서의 ‘전망 69’ 전시회에 7점의 흑백사진 이미지를 소개하며 카탈로그에 “나는 거울을 사용한다. 어떤 의미에서 거울은 실제이면서 반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념과 추상으로서의 거울이며, 개념적 거울이라는 의미로서의 거울이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복잡한 그의 진술의 의미는 거울이 인간의 의식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19-예일 16 로버트 스미스슨, <나선형 방파제 Spiral Jetty>, 1970
로버트 스미스슨의 가장 잘 알려진 구성물은 유타 주의 그레이트솔트 호Great Salt Lake 연안에 나선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나선형 방파제>로서 물의 흐름에 따라 침식되도록 만들어졌다. 진흙과 돌, 소금 결정으로 만들어진 너비 5m, 길이 500m의 인공 방파제였다.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염수호의 독특한 분홍색 빛깔을 포착해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제작한 것이다. 1972년 갑작스레 물이 불어나 <나선형 방파제>는 사라졌다. 그것은 호수 표면 속에서 수면이 낮아질 때까지 또 거품에 덮여 다시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만 감지되는 희미한 이미지 상태로 표현된 채 하늘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작품이 사라지기 이전과 진행과정 그리고 소멸 이후의 영화와 사진, 혹은 그 사건의 줄거리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작품은 따라서 복잡한 장치이자 시간에 따라 포착된 물체, 이미지 그리고 읽을거리의 공동 작업인 것이다. 스미스슨은 이런 새로운 개념을 충분히 발전시키기도 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20-타센 1125 크리스토, <연속 울타리 Running Fence>, 1972~76, 스틸 막대, 스틸 케이블, 나일론, 높이 5.49m, 전체의 길이 3.92km. Sonoma and Marin countries, California
스물두 살 때 조국을 떠난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이며 실험예술가 크리스토는 때때로 대지미술 예술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품은 사실 분류가 불가능하다. 크리스토는 프랑스인 아내 잔-클로드의 도움을 받아 1960년대에 건물들을 포장했다. 이런 작품의 이면에 내재하는 논리는 대상물의 부분적 은폐가 역설적으로 그것의 근본적 형태에 주의를 집중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1968년에 스위스 베른 미술관을 합성섬유와 366m의 로프로 포장했다. 옥외 프로젝트는 엄청난 크기로 인해 기념비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며 연극적인 현장감마저 감돈다. <연속 울타리>는 24.5마일 길이의 미술품으로 캘리포니아 주 북쪽 마린과 소노마 지역을 가로질렀다. 18피드 높이의 흰색 직물 울타리는 동서로 뻗은 축들을 따라서 굽이쳤다. 165,000야드의 직물, 312,000개의 스틸 고리, 2,050개의 막대기, 13,000개의 스틸 닻, 스무 대 이상의 자동차, 60명이 고용되어 1976년 4월부터 9월까지 주 40~60시간씩 일했다. 첫 열흘 동안은 260명이 고용되어 직물 패널을 고정시키는 일을 했다. 울타리가 설치된 후에도 80명의 노동자가 두 주간의 점검기간에 일했다. 긴급 상황을 대비해 50개의 패널을 준비해두었다. 크리스토는 3백2십5만 달러를 지불했다. 프로젝트는 그의 연구, 준비 드로잉, 콜라주, 스케일 모델, 초기 작품과 석판화 원판을 팔아서 충당되었다. 크리스토는 어떤 종류의 후원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21-개념 81 리처드 롱, <도보에 의해 만들어진 선, 영국 A Line Made by Walking, England>, 1967, 런던. 앤터니 도페이 갤러리
리처드 롱의 첫 번째 작업 <도보에 의해 만들어진 선, 영국>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초원의 풀밭에서 그의 왕복보행은 직선의 자취를 새겨놓았다. 그는 그가 왕복한 흔적을 사진으로 남겼는데, 그 사진이 전시되고 팔릴 수 있다고 해도 미술품을 구성한 것은 그의 걷는 행위였다. 그에게 미술품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을 걷는다고 해서 모두가 예술가인 것은 아니다. 롱이 자연을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음으로 해서 자연 속의 존재의 가능성을 제기했으므로 그는 고도의 정치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을 하나의 제안으로 제시하면서 “여러분이 보는 것이 여러분이 만든 그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1967년 이후의 롱의 작업은 영국의 자연에서 출발하여 1969년부터 국외로 확대되어 때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사막이나 적대국에서까지 행해졌다. 그는 걸어가면서 수집한 돌과 잔가지 같은 것을 갤러리로 가져와 원형이나 단순한 기하 형태로 배열 전시했다. 또한 갤러리가 아니라 재료들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며, 산책로를 찍은 사진, 걸어가며 본 것이나 자신의 심리 상태를 쓴 글, 지도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내가 선택한 것, 그것은 걸으면서, 그리고 선과 원, 돌과 햇빛을 이용하면서 미술을 하는 것이다. 내게 사물과 행위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1981년부터 고향을 가로지르는 에이본 강에서 채취한 진흙을 손으로 벽에 바르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롱은 “이것이 가장 적절한 색이다”라고 했다. 롱은 진흙을 물에 섞어 드로잉 했다. 똑같은 것을 갤러리에서도 했는데, 1984년 런던의 앤터니 도파이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때 열다섯 동이의 진흙 섞인 물을 한 동이씩 갤러리 벽에 뿌렸다. 열다섯 개의 커다란 진흙 이미지가 벽에서 흘러내렸다. 진흙이 영구적인 이미지를 벽에 얼룩지게 만든 것이다. 그의 첫 진흙 작품은 1971년 튜린의 지안 엔조 스페로네 갤러리에서 소개되었는데, 바닥에 놓인 작품으로 손으로 물에 섞은 진흙을 사용해 바닥에 패턴이 생기게 한 것이다. 앤토니 도파이 갤러리에서는 바닥이 아니라 벽에 한 것이 달랐을 뿐이다. 물을 지구의 혈관으로 본 롱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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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
1.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시기에 태동한 미국의 팝아트Popular art
1960년대 초는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Bob Dylan(1941~)의 저항적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런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으며,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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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은 미술품이 수공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다. 많은 그의 작품이 형판 인쇄를 통해 캔버스에 직접 옮겨졌다.

3. 이민 2세의 성공 신화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미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워홀은 1949년에 뉴욕으로 이주하고 잡지 광고, 쇼윈도 디스플레이, 문구, 책 표지, 앨범 커버 분야에서 일찌감치 성공을 거뒀다. 그는 1950년대 후반에 재스퍼 존스, 프랭크 스텔라,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구입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워홀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당시 미국은 광고업자와 홍보활동가의 시대이자 눈에 띄는 소비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만화와 광고였다. 그는 의도적인 실수와 미디어의 이미지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 혹은 레디메이드를 사용하여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는데, 조작한 레디메이드였다. 그의 전성기는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한 1962년부터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1968년까지였다. 워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이 시기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1926~62, 본명 Norma Jean Mortensen)가 치명적으로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바로 다음날 워홀은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그가 입자가 세밀한 먼로의 컬러사진을 일차원적 단색으로 환원하자 생동감이 빠져나가버렸다. 가장 기본적인 흔적만 온전하고 굴절 없이 남았다. 현존과 부재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그가 배열하고 끝없는 반복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흔적이었다. 그는 <100개의 마릴린이 하나보다 낫다 A Hundred Marilyns are Better than One>에서는 많은 수로 반복했다. 반복에 나타난 연속주의serialism는 미술의 신비나 아우라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위계적 구성의 질서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졌다. 연속적인 이미지는 최면의 효과를 지닌 주문呪文으로 읽히고 미니멀 음악에 대한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강조는 사라진다. 회화의 초점이 없으며 오히려 초점이 모든 곳에 산재하게 된다. 100번 반복한 워홀의 마릴린 먼로는 기호가 되고 현존성을 상실했으나 복제에 대한 내재성을 가졌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워홀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 밖에도 캠벨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모나 리자, 엘비스 프레슬리, 재키 케네디 등을 스텐실에 기초하는 판화 기법인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워홀은 1962년 6월 4일 『뉴욕 미러 New York Mirror』의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 129 Die in Jet>이란 주요 제목이 있는 표지를 대참사의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죽음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듬해에 자동차 전복사고, 자살 현장사진, 사형수를 살해하는 전기의자 등을 제작했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실크스크린 뜨기가 빠르고 쉬웠다. 실크스크린 뜨기가 실재를 묘사하는 사진의 주장에 대한 효력을 약화시켰다.

워홀이 1963년에 그린 사형수를 처형하는 전기의자 회화는 꽉 참과 텅 빔을 섬뜩하게 병치하면서 폭력적 죽음이라는 잔인한 사실이 당대의 정치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지점을 표시했다. 1960년대 초에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격렬한 운동이 전에 없는 강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이미지들에 <재난 Disasters>이란 집단적 제목을 붙였다.

워홀은 하나의 정치적 주제를 무고한 사람들의 떼죽음, 그가 다른 작업에서 추모한 고속도로나 비행기, 슈퍼마켓 등지의 사고로 인해 일어나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과 연결했다. 남부에서 일어난 민권운동 시위에서 가장 폭력적인 국면을 다룬 연작 1963년의 인종폭동 회화에서 그는 실제 장면을 악몽 같은 색으로 칠하고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도 이런 색이 흠뻑 배었다.

4. 앤디 워홀의 작품을 읽는 방벙 

워홀의 가장 유명한 모토는 “나는 기계이기를 원한다”였다. 이는 그가 대량생산된 상품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또 “지루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며, “몇 번이고 계속해서 정확히 똑같은 것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파피즘 POPism』(1980)에서 워홀은 지루함과 반복, 지배에 대한 이 같은 포용에 대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확하게 똑같은 것이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의미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고, 기분은 점점 더 좋아지고 멍해지기 때문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가 원한 것은 대상을 탈상징화하는 것, 즉 이미지를 심오한 의미로부터 해방시켜 허상적인 표면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작품에 어떤 의미도 어떤 의도도 배제하는 것이었다.

워홀의 작품에 나타나는 반복은 의미를 빠져나가게 하는 것인 동시에 어떤 감정이 생겨나게 하는 것에 대한 방어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이 초기부터 워홀을 지배해왔다. 그는 “계속해서 몇 번이고 끔찍한 회화를 보게 되면 그 회화는 실제로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1963년에 “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기를 원한다. 러시아는 이를 정부의 힘으로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1967년에 “나는 미술이 오로지 선택받은 몇 명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술은 미국인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 미국인이라는 대중을 재현할 수 있을까? 대중의 주체성을 재현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그 대리물들, 즉 소비의 대상들, 그리고 취향의 대상들을 통해서 성취되는데, 워홀은 소비의 대상들로 1962년부터 캠벨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브릴로 상자 등을 생산하고 취향의 대상들로 1964년부터 키치풍의 꽃 회화와 민속적인 소 벽지를 생산했다.

5. 사업가로서의 앤디 워홀
워홀의 작업 시기를 1950년대와 1960년대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레코드와 책 표지 그리고 광고는 돈을 위해서이고 팝 그림과 영화는 훌륭한 예술가라는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가 팝 시기인 1960년대에 상업적 작업을 비밀에 붙여 계속했기 때문이며, 1968년 이후 그가 “비지니스 아트”라고 명명한 위임받은 프로젝트들을 돈을 위해 노골적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초상화를 스크린으로 떠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한 점에 5천 달러를 받았다. 그는 한 해에 50점에서 100점을 위임받아 제작했으며, 많은 초상화들이 개인적으로 소장되었고, 그것들이 시리즈로 전시된 적은 없었다. 초상화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리즈, 마릴린, 혹은 재키의 이미지들로 표현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많은 초상화가 유명한 개인들일지라도 더 많은 것들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즉 부유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의 딸, 아들, 아내, 남편을 묘사한 것들이다.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은 노동집약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약 50개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뒤 그것들 가운데 이상적인 이미지를 선택해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때로는 그가 오래 전에 폐기한 표현주의적인 예술적인 체하는 패러디로 손으로 색을 칠해 과장된 몸짓에 보탰지만 회화적 표현을 압도하는 있는 그대로의 초상을 늘 모색했다.

워홀의 초상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위임받아 제작한 것이 아닌 1972년에 시작한 모택동의 이미지이다. 그는 1974년에 모택동 벽지 위에 모택동을 걸었다. 모택동들의 흔적을 좇아 1976년에는 소련의 국기를 상징하는 망치와 낫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워홀은 철물상에서 구입한 실제 망치와 낫이 있는 사진으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지미 카터와 믹 재거, 그리고 뉴욕시의 술집과 부두로부터 흑인과 라틴 화려한 의상의 여왕들도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보석과 포도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그는 두개골을 실크스크린으로 떴고 자화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6. 앤디 워홀의 생애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1928년 워홀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안드레이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소재한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 줄리아는 얇은 깡통을 가위로 잘라 꽃 모양으로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25센트에 팔았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예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워홀은 여덟 살 때인 1938년 가을에 무도병 증세를 나타냈는데, 류머티즘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추체외로계 질환의 하나로 그 보행이 마치 댄스를 하는 것 같아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St. Vitus' Dance로 불리기도 한다. 무도병으로 학교를 장기 결석한 그는 부엌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서 한 달 동안 어머니의 간호를 받았다. 이 병의 증세에는 피부부스럼과 조절할 수 없는 흔들림이 포함되었고, 흔들림에 대한 느낌과 피부병학적 외관의 손상은 미래에 반향을 일으켜 성숙한 미술품에서 그는 이런 체험을 굴절시켰으며, 회화·영화·퍼포먼스에서 증상이 반향하게 했다. 그가 유명해졌을 무렵인 1960년대 초반에 피부부스럼은 사라졌으나 청춘기와 초기 성인기에서 얼굴에 흔적을 남겼으며, 온 생애에 걸쳐 나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1949년 6월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대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으므로 1953년에 처음 가발을 구입했는데 스물다섯 살 때였다. 1973년 이후 그에게 담낭수술이 요구되었지만 병원을 두려워했으므로 수술을 미루었다. 결국 1987년 2월 20일 금요일 오십팔 세에 뉴욕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환자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걸 모르는 간호사는 아드레날린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동요로 인한 심장박동의 정지로 환자가 괴로워하는 걸 알았다. 그녀는 다른 직원을 불렀으며 그들이 그를 소생시키려고 한 시간을 소비한 뒤 워홀은 6시 31분에 사망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장례식은 1987년 2월 26일 피츠버그에서 거행되었고 세례자 성 요한 비잔틴 묘지 부모 옆에 묻혔다. 워홀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가 열린 무덤에 향수병(에스티 로더)과 워홀이 창간한 『인터뷰』 한 권을 던졌다. 위령제는 뉴욕시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4월 만우절 날에 열렸으며 한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Magic Flute>를 연주했다.

워홀의 소장품에 대한 경매가 1988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소더비에서 열렸고 $25,333,368이 걷혔다. 생애에 그를 무시한 모마Museum of Modern Art(MoMA)가 1989년에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앤디 워홀 뮤지엄은 1994년에 개관했다.

1960년대 초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앤디 워홀은 1987년 때 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미술과 광고, 패션, 언더그라운드 음악, 독립영화 제작, 게이문화, 고급문화, 대중문화 사이에서 중심적인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 영화를 제작했으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첫 번째 앨범을 제작했고, 『인터뷰 Interview』지를 창간했다.

작품
1 워홀6 <샘이란 이름의 고양이 25마리와 푸른 야옹이 한 마리 25 Cats Name Sam and One Blue Pussy>, 1955, 옵셋 인쇄에 수채, 15-9cm.
워홀은 6마리의 고양이를 길렀는데, 그것들 모두를 샘이라고 불렀다.
2 워홀7 <영화배우 자자 가보Zaza Gabo의 구두>, 1956, 콜라주, 28-28cm.
워홀은 여배우의 구두를 굽이 높고 장식적이며 환상적인 형태로 디자인했다. 선의 유용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는 순수미술에서 느끼는 고상한 감각을 상업미술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957년에도 디렉터 상을 수상했고, 권위 있는 아트 디렉터 클럽으로부터 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5백만 독자를 가진 잡지 『라이프』가 드로잉을 소개했으므로 그의 이름은 더욱 알려졌다.
3 워홀29 로버트 라우센버그 <인터뷰>, 1955, 혼합재료, 125-185cm.
이 작품은 커다란 나무상자를 둘로 나눈 후 콜라주하고 채색한 것이다. 그림이라기보다는 벽에 부착한 조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회화와 조각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이미 팝아트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4 워홀44 재스퍼 존스 <바보의 집 Fool's House>, 1962, 캔버스에 오브제, 유채, 91-183cm.
여기서 빗자루는 물감을 칠하는 붓을 상징한다.
5 워홀67 <딕 트레이시>, 1960, 캔버스에 아크릴, 114-201cm.
당시 인기 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이고 옆에 있는 샘 케첨은 딕 트레이시의 단짝이며 조수이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조수의 턱을 둥글게 했다. 만화와 달리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부분을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리게 했다. 풍선 속의 문자도 대부분 생략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기법으로 물감이 흘러내리게 했다.
6 워홀75 <찢어진 큰 캠벨 수프 캔>, 1962, 린넨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137-183cm.
이 작품은 1970년 뉴욕의 경매장에서 6만 달러에 팔렸다. 당시 생존하는 예술가의 판화로서는 가장 고액이었다. 6만 달러를 지불한 사람은 미술품 중개상 브루노 비쇼프버거였고, 현재 이 작품은 취리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7 워홀66 <200개의 캠벨 수프 캔>, 1962, 캔버스에 아크릴 254-183cm.
1962년 7월 9일부터 8월 4일까지 로스앤젤레스 페러스 화랑에서 처음으로 워홀의 개인전이 열렸다. 세 벽에 32점의 캠벨 수프 그림이 걸렸다. 페러스의 라이벌 화랑은 진열장에 80-90개의 실제 캠벨 수프 캔을 쌓아놓고 ‘이곳에서 수프 캔을 사십시오. 1달러에 5개 드립니다’라고 선전하여 워홀의 전시회를 망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전시회를 널리 알리는 역효과를 초래하여 사람들은 워홀의 수프 캔 회화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전시회를 기획한 블럼이 32점을 모두 사겠다고 하자 워홀은 한 점에 50달러씩 쳐서 모두 1,500달러를 요구했고, 블럼은 1,000달러에 사겠다고 했다. 블럼은 매달 100달러씩 10개월 도안 송금했다.
워홀은 수프 캔을 1개, 2개, 50개, 100개, 200개를 반복해서 그렸다.  

8 워홀70 <전과 후 3 Before and After 3>, 1962, 아크릴, 253-183cm.
워홀은 비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러한 회화방법은 평생 답습되었다. 모두 세 점을 그린 <전과 후>의 주제는 성형수술 광고로 왼쪽의 여인은 매부리코의 못생긴 모습이고 오른쪽은 코를 교정하여 매력적인 여인의 코로 달라진 모습이다.
9 워홀80 <129명 비행기 사고로 사망>,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83-255cm.
파리 근처에서 프랑스의 보잉 707기가 추락한 사건을 다룬 표지기사이다. 이것은 그가 표지기사를 그린 세 번째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0 워홀84 <불타는 푸른 자동차, 아홉 번>, 1963,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203-229cm.
참혹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워홀은 신문과 잡지를 자주 뒤적거리면서 워홀은 “지독한 장면을 보고 또 보다보니 아무런 느낌도 생기지 않더라”고 했다. 이 작품은 자동차가 전복된 채 불타는 장면을 푸른색으로 아홉 번 실크스크린하여 캔버스에 부착한 것이다. 그는 자동차 타이어에 신발이 낀 장면만을 크게 확대하여 추상화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워홀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난 친절하게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만든다”고 했다. 
11 워홀107 <라벤더빛 재난(전기의자)>, 1963,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208-269cm.
여러 점을 제작한 <전기의자>는 사형집행 또한 부주의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시사한다. 사람을 살해하는 정기의자는 두려운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붉은색을 사용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관람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12 워홀 86 <푸른 코카콜라 병들>,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45-209cm.
워홀은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사로세로로 반복하여 대량생산품의 기계적인 이미지를 조형적 요소로 사용했다. 그는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 반복이지만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반복인 것이다.
13 워홀87 <마를린 먼로>, 1962, 캔버스에 아크릴, 41-51cm.
1962년 마를린 먼로가 자살하자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삐져나가도록 했다. 즉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일부러 더 크게 칠했고,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14 워홀88 <클레오파트라로 분장한 파란 리즈>
리즈 테일러가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주연으로 분장한 모습이다. 흥행에 성공한 이 영화의 영향으로 많은 여자들이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모습이 되고자 했다. 거리에는 온통 머리카락으로 앞이마를 덮고 짙은 눈화장을 한 클레오파트라 투성이였다. 대중적인 아이돌의 영향을 즉시 거리에서 나타났다.
15 워홀89 <엘비스 I, II>, 1964,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잉크와 알루미늄 물감, 각각 208-208cm.
마를린이 여성적인 성의 유상이었다면, 남성적인 성의 우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워홀은 대중적인 수퍼스타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16 워홀108 워홀의 새 작업실 ‘공장’
워홀은 1963년 초 렉싱턴 애비뉴 근처 이스트 87번가에 2층 벽돌 건물을 세얻어 조수 리니크로 하여금 알류미늄 포일과 은색 스프레이 캔을 사용하여 온통 은색으로 내부를 장식하게 했다. 과거 소방서였던 이 건물 내부에는 소방수들이 빨리 출동하기 위해 설치한 위아래층을 연결하는 쇠기둥이 있어 쇠기둥에 몸을 감고 미끄러지듯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워홀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7 워홀110 워홀의 첫 영화 <잠>, 1963
시간만 나면 잠을 자고 매일 12시간씩이나 잠을 자던 지오르노는 월스트리트에서 주식중개상으로 근무하면서 시를 썼다. 지오르노는 술을 마신 후 잠을 잤고, 워홀은 촬영했다. 이것은 6시간짜리 영화이다. 사람은 누구나 매일 6시간 또는 그 이상 잠을 자지만 자신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워홀은 지오르노의 잠을 통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잠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1963년 그해 9월 맨해튼에서 에릭 새티의 곡 <원통함 Vexations>의 연주회가 있었는데, 80초짜리 피아노곡을 840번 반복하여 연주하는 것으로 존 케이지를 비롯하여 15명의 연주자들이 릴레이로 돌아가면서 평균 20분씩 연주했다. 워홀의 <잠>은 에릭 새티의 <원통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잠>을 관람한 영화평론가 아처 윈스턴은 『뉴욕 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에는 오직 6명만이 관람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사람들이 <잠>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로스앤젤레스의 시네마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는 약 500명이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45분이 지난 후 약 200명가량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극장 측에 돈을 물려달라고 소동을 피웠다. 끝까지 영화를 관람한 사람은 약 50명 정도였다.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에 별처럼 떠오른 워홀은 영화에 집념을 보였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능을 인정받아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키스>를 제작했는데, <잠>과 마찬가지로 긴 시간을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이발> 또한 독특한 영화로 디자이너 존 다드의 머리 깎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워홀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선택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행위를 조명했다.

<식사>는 1964년 2월 2일 일요일 아침 맨해튼 남쪽에 있는 예술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업실에서 찍은 것으로 인디애나에 의하면 워홀이 그에게 준 지침은 단 한 마디 “이 버섯을 먹어라”였다. 3분짜리 필름 9통을 찍었으니 인디애나는 27분 동안 버섯을 먹었던 것이다. 워홀의 작품 대부분은 사람의 기본적인 동작을 필름에 담은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워홀은 섹스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제목부터가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입으로 빨다>(1964)였다.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빨 때 남자의 얼굴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로 여자의 행위는 화면에 나타나지 않고 30분 동안 붉은 벽돌담에 기댄 젊은 남자의 흥분된 모습만 볼 수 있다. 남자는 30분이 지나자 절정에 달해 정액을 발사하는 흥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4년 한 해 동안 그는 꽤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사람들의 동작은 극히 제한되었고, 클로즈업된 얼굴은 오랫동안 무표정하게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미동이 없는 장면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어쩌다 배우가 눈이라도 깜빡할라치면 클라이맥스에 이른 것처럼 부각되었다. 워홀은 10분 동안 눈을 세 번밖에 깜빡거리지 않은 배우를 가리켜 최고의 배우라고 칭찬했다. 워홀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전체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워홀은 1964년 6월 어느 토요일 밤 마냥 긴 무성영화 <엠파이어>를 촬영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북쪽으로 16블럭 떨어진 타임라이프 빌딩 40층에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8시간 촬영했다. 오후 6시부터 촬영을 시작했는데 365m 높이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전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빌딩은 전등으로 조금씩 밝아졌으며 얼마 후 환해졌다. 새벽 1시경이 되자 사무실의 등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해서 곧 빌딩 전체가 어두워졌으며, 1시 30분경 워홀은 촬영을 끝냈다. 이 영화는 이듬해 3월 시청극장에서 상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워홀은 1964년 9월에 열린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잠>, <키스>, <이발>, <식사> 네 편을 출품했다. 그해 12월 7일 브로드웨이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수상 파티가 열렸는데, 워홀의 영화 5편이 선정되었다. 선정된 영화는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한 4편과 <엠파이어>였다. 워홀은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에 떠오르는 별이었다.

워홀의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1964년에 <매춘부>를 찍었는데, 두 사람의 역할에 대사가 없었다. 그는 성능 좋은 녹음기를 사서 소리를 따로 녹음한 뒤 편집과정에서 사운드 트랙으로 옮겼다. 그는 촬영현장의 대사와ㅣ 소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엉뚱한 소리를 영상에 접목시키기를 좋아하여 영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매춘부> 역시 워홀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동작 없이 70분 동안 계속된 흑백영화이다.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한 장면뿐으로 그나마 따로 삽입한 것이다. 마리오가 흰 바지에 긴 장갑을 끼고 금발 가발을 쓴 매력적인 여인으로 분했다. 캐롤 코신스키는 흰 고양이를 안고 마리오와 함께 소파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고양이를 놓아주었다. 마리오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바나나를 아주 요염한 모습으로 먹었다. 여인으로 변장한 그는 바나나 껍질을 천천히 벗긴 후 입속에 넣고 천천히 먹었다. 바나나를 다 먹은 마리오는 껍질를 바닥에 던지고 핸드백에서 다시 바나나를 꺼내 껍질을 벗겼으며, 말랑가와 키스하기도 했다. 워홀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말했다. “나의 모든 영화는 조작이다. 어디서 조작이 끝나고 어디서부터 실제가 시작되는지 나도 모른다.”  
18 워홀104 팝아트의 주요 예술가들  

워홀의 작업실 ‘공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1964년 4월 21일에도 예술가들이 그곳을 방문했는데, 왼쪽부터 탐 베젤먼,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등이다.
19 워홀114 1964년 9월 5일 ‘공장’에서의 앤디 워홀
20 워홀123 1964년 4월 21일 뉴욕 스테이블 화랑에서의 개인전.
화랑은 식품창고처럼 보였다.
21 워홀124 <브릴리, 델몬트, 하인즈>, 1964
워홀의 브릴로 상자들은 캐나다 토론토에서의 전시를 위해 미술품 중개상 제럴드 모리스에게 보내지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낳았다. 캐나다 법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미술품에는 관세를 적용하지 않는데, 세관원이 브릴로 상자들을 식료품으로 취급하여 상자당 250달러의 값을 매긴 것이다. 그럴 경우 그 값의 20%를 세금으로 물어야 하므로 워홀의 브릴로 상자 80개의 경우 4,000달러나 되었다. 모리스가 상품이 아니라 조각품이라며 면세를 요구하자 세관원은 캐나다 국립화랑의 책임자 찰스 컴포트 박사를 불러 문제해결을 요청했다. 해결사로 나선 컴포트는 브릴로 상자를 보고는 “내 눈에는 조각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화가 난 모리스는 캐나다 정부를 기소하면서 정부가 미술계의 조소거리가 되게 했다.
22 워홀125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의 꽃 전시회.
1964년 11월에 난데없이 꽃잔치가 벌어졌다. 워홀은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1964년 11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꽃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여 화랑 벽을 채웠다. 워홀에게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준 꽃은 단순한 계기로 제작된 것이다. 1964년 6월호 『모던 포토그래피』를 뒤적이던 워홀은 이 잡지의 편집장 패트리시아 콜필드가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코닥필름의 색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워홀은 그의 사진을 정사각형으로 확대하여 캔버스에 실크스크린하고 “난 정사각형으로 제작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크고 작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꽃그림들은 1964년 6월과 7월에 제작한 것들로 하루에 80장을 제작할 때도 있었다. 워홀은 말했다. “친구들이 작업실에 와서 날 도왔는데, 어떤 때는 열다섯 명이나 와서 색을 칠하거나 캔버스를 잡아당기는 일을 했다.” 그들은 워홀을 도와 꽃회화를 크게 또는 작게 모두 900점 이상을 제작했다. 사람들은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꽃회화를 좋아했고,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된 꽃회화는 모두 팔렸다.

당시 500달러 팔린 꽃회화는 1997년에 약 3만2천 달러에서 3만5천 달러로 껑충 뛰었다.
23 워홀160 <꽃회화>, 1970, 실크스크린, 각각 92-92cm.
워홀은 1970년에 250점을 한정 제작하여 꽃회화를 3천 달러에 팔았는데, 당시 마를린의 초상화보다 여섯 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그는 진한 빨강, 오렌지, 노란색을 주로 사용하여 꽃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워홀이 1974년 10개의 이미지들을 병렬하여 250장 한정판으로 제작한 <손으로 채색한 꽃>은 경매에서 한 점에 13만5천 달러에 팔렸다. 1975년 가을 워홀이 자신의 예술과 돈 그리고 명예에 대한 견해를 적은 『앤디 워홀의 철학: A부터 B까지 그리고 다시 A로』가 출간되었다. 부와 성공에 대한 집념을 솔직하게 고백한 그의 저서는 많이 팔렸다. 그는 말했다. “예술의 다음 단계는 비즈니스아트이다. 난 상업예술가로 출발했으며 비즈니스 아티스트로 마치기를 바란다. 사업을 잘 하는 건 매혹적인 예술이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24 워홀143 1966년 4월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된 <은빛 구름>
워홀은 1966년 레오 카스텔리 화랑 안에 베개 모양의 은빛 구름을 띄웠다. 풍선이 적당한 높이로 뜨도록 수소의 양을 조절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소를 가득 채우면 풍선이 천정에 닿고 너무 적게 넣으면 바닥에 가라앉는다. 구름은 한 점에 50달러에 팔았다. 구름을 산 사람에게 향후 10년 동안 A/S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자 카스텔리는 조그만 수소통을 끼워 50달러에 팔았다.
25 워홀154 1968년 6월 3일 저격당한 워홀을 구급원들이 컬럼버스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구급차에 싣고 있다.
26 워홀 155 1968년 6월 4일자 뉴욕 포스트지에 실린 워홀의 저격기사, ‘생명이 위독한 앤디 워홀’
1968년 6월 3일 월요일 오후, 워홀의 영화 <나는 남자>(1968)에 출연했던 발레리 솔라니스는 두 시간 동안 워홀의 작업실 길목에 서서 워홀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4시 15분경 택시를 타고 워홀이 작업실 앞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솔라니스는 워홀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6층에 당도하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작업실 안에는 몇 사람이 워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사람이 워홀에게 “비바로부터 온 전화야” 하고 소리쳤고, 워홀이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워홀이 몸을 돌려 바라보니 솔라니스가 권총을 들고 서 있는데 총일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아냐! 발레, 쏘면 안 돼!” 하고 워홀이 소리쳤지만, 그녀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바닥에 넘어진 워홀이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려고 하자 솔라니스가 그를 향해 다시 총을 쏘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심한 통증을 느낀 워홀은 고함소리와 함께 또 한 발의 총성을 들었다. 워홀과 통화를 하고 있던 비바는 수화기를 통해 총소리를 들었다. 솔라니스는 엘리베이터로 가서 그것을 타고 내려갔다.

한 시간 후 라디오를 통해 워홀의 저격사건이 보도되었다. 워홀은 수술실로 옮겨져 총탄제거 수술을 받았다.

오후 7시경 솔라니스는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워홀을 쏜 32구경 권총과 다른 주머니에 있던 22구경 리볼버 권총을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녀는 포즈를 취하면서 “워홀이 내 인생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9시 35분 컬럼버스 병원의 책임자 마시모 바지니 박사는 32구경 총알이 워홀의 왼쪽 복부에 박혔으며 워홀이 소생할 확률은 50%라고 발표했다. 이튿날 『뉴욕 데일리 뉴스』는 ‘여배우가 앤디 워홀을 쏘다’란 제목으로, 『뉴욕 포스트』는 ‘소생하기를 바란다, 앤디 워홀’이란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6월 4일 법정에 선 솔라니스는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소리쳤으며, 다음날 다시 법정에 섰을 때도 변호사는 필요 없다면서 “워홀이 그렇게 된 건 그의 책임이다. 그놈은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다. 그놈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솔라니스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라고 지시했다.

1936년 5월 뉴저지 주 애틀랜틱시티에서 태어난 솔라니스는 어려서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메릴랜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으며, 남녀의 구별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에 불과한데 남성은 여성을 깔보는 못된 전통이 있다고 분노했다. 그녀는 남성을 혐오하는 그룹 스컴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멤버로 스컴의 선언문을 그리니치빌리지 커피숍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워홀의 저격기사는 또 다른 저격기사에 가려 단 하루 만에 신문에서 사라졌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뉴욕 주 상원의원이면서 검찰총장인 42세의 로버트는 6월 4일 민주당 캘리포니아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는데, 앰배서더 호텔에서 요르단인에 의해 저격당한 후 26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워홀과 케네디의 저격은 뉴욕 미술계의 암울한 뉴스거리였다. 화가 프랭크 스텔라는 평론가인 아내 바바로 로즈에게 “바비(로버트의 애칭)는 죽고 워홀은 살아나다니. 세상은 그런 거다”라고 말해 바바라가 “당신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 하고 쏘아붙였다. 『라이프』 잡지사에서는 워홀과 케네디의 기사를 어떤 비중으로 다룰 것인가에 관해 편집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는데, 어느 편집자는 “미국 사회에 미친 짓을 소개한 예술가가 정치적 영웅을 밀어낸다”고 투덜거렸다.

워홀이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솔라니스는 퀸즈의 정신병원에 있었다. 6월 28일 그녀는 다시 법정에 섰지만, 판사는 그녀가 도저히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고 정신병원에 재차 수감시켰다.
워홀은 두 달 가까이 입원했다가 7월 28일에야 퇴원했다.
27 워홀156 앨리스 닐, <앤디 워홀>, 1970, 캔버스에 유채, 101-152cm.
사실주의 화가 앨리스 닐은 워홀을 문병 갔다가 수술 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워홀은 의사의 지시대로 코르셋을 하고 작업실에 출근했다.
28 워홀158 워홀이 발간한 월간 영화잡지 『인터뷰』
1969년 가을 워홀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월간지 『인터뷰』를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창간호가 1969년 9월에 발간되었다.
29 워홀161 1972년 6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가 뉴욕을 방문했다. 워홀은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냈다.
30 워홀202 <자화상>, 1986, 컴퓨터 합성사진
31 워홀205 <자화상>, 1986,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203-203cm.
이 작품은 1986년 8월 런던 앤소니 도파이 화랑에서 소개되었다. 워홀의 실크스크린만 상품이었던 것이 아니라 워홀 자신도 하나의 상품이었다. 워홀의 자화상은 한 점에 3만 달러에 팔렸고, 두 점 이상 구입하면 각각 2만 달러였다. 워홀의 작품은 늘 상승세였다. 1962년에 그린 우표회화가 1985년에 16만5천 달러에 팔렸는데, 다음해 11월의 경매에서는 세 배의 가격에 팔렸다. 1달러 지폐를 200번 반복해 그린 그림은 소더비 경매에서 38만5천 달러에 팔렸으며, 캔 오프너가 달린 캠벨 수프 캔은 26만4천 달러에 팔렸고, <세 개의 엘비스>는 20만3천5백 달러에 팔렸다.
워홀이 발간한 잡지 『인터뷰』는 창간 당시 35센트였지만 1986년 2달러50센트였으며, 발행부수는 약 170만부로 늘었으므로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1986년 4월호와 9월호는 306페이지였으며 패션 광고가 많았다. 워홀은 잡지 전체를 광고로만 가득 채우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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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강의15  
 

개념미술, 아르테 포베라, 대지미술         
1. 개념미술
환경에 전적으로 반응하는 물체를 창조한 한스 하케
쾰른에서 태어나 1960년 카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1970년에 뉴욕으로 진출한 한스 하케Hans Haacke(1936~)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1974년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A Bunch of Asparagus>(1880)이 소장되어 온 경로를 규명하는 열 개의 패널을 그의 고향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Wallraf-Richartz 미술관의 창립 150주년 기념전시회 ‘프로젝트 74 PROJEKT 74’에 출품하려고 한 것이다. 이 정물화는 1968년 이 미술관 후원회가 독일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Konard Adenauer(1876~1967)를 기념하여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74세의 나이에 총리가 되어 88세까지 총리를 지냈다. 하케는 마네의 작품이 그려진 때부터 그것이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의 경로를 추적했다. 열 개의 패널은 첫 번째 소유주로 미술사학자이자 콜렉터인 유대계 프랑스인 샤를 에프뤼시Charles Ephrussi(1849~1905)를 거쳐, 독일인 출판가이자 화상 파울 카시러Paul Cassirer(1871~1926)와 유대계 독일인 화가 막스 리베르만으로 이어졌다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리베르만의 손녀에게서 작품을 구입한 미술관의 후원회장이자 은행가 헤르만 압스Herman Josef Abs(1901~94)로 귀착되었다.

하케는 한 개인이 문화적 후원자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얼마나 쉽게 세탁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패널은 그 소유 역사의 결론으로 압스가 걸어온 길을 분석해놓았는데, 압스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 제3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재정 고문으로 일했으며, 종전 후 1949년 아데나워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복직되었고, 그 밖에도 50여 개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나치에 협조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압스도 종전 후 죄를 사면받기 위해 영국 감옥에서 6주일을 보냈다. 그는 1960년대를 거쳐 미술관에 이 정물화를 기증하게 된 시기까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 자리에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케는 압스가 <아스파라거스 다발>를 구입하기 이전에 그 작품을 소장했던 수집가와 화상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업과 정치적 활동에 관해 세세한 것까지도 밝혔다. 그의 작업은 큐레이터의 동의를 얻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방으로 간주되었으며, 미술관 경영진은 민주적 투표를 실시하여 그의 작품을 거부했다. 미술관 관장은 하케의 작품이 나치정권과 미술관의 주요 후원자인 압스와의 관계에 시선을 쏠리게 한다는 이유로 전시를 취소했다. 하케는 항의의 제스처로 파울 마엔츠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아스파라거스 다발>의 복제품을 사용했다.

이 사건을 통해 하케의 작업이 지닌 특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억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실천을 사회적ㆍ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와 연결하고, 문화란 이름의 위장을 장소 특정적이고 제도 비판적인 작업의 초점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기획은 제도 자체가 재통합하거나 재중립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1970년대 주요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진과 문자를 사용하여 작업한 존 밸드서리
주로 사진과 문자를 사용하여 작업한 존 밸드서리John Baldessari(1931~)는 “언어에 모든 종류의 문학적 장치들이 있으며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지적했듯이 중립적인 형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1970년 9월 뉴욕의 유대인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소프트웨어 Software’의 일부로 ‘화장 프로젝트Cremation Project’를 소개했다. 그는 작업실에 쌓인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팔리지 않은 모든 작품을 소각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는 물질적 구현을 본질로 삼아온 기존 미술의 종말을 선언한 개념미술의 선언적 의미였다. 그림을 태운 재를 유골함에 넣고 표면에 ‘1953년 8월부터 1966년 3월까지의 밸드서리의 회화’라고 써서 보관하는 것으로 회화 장례식을 치렀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디에 속한 것이냐는 물음을 제기되는데, 재를 담은 6개의 유골함 속에 미술이 있는 것일까,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 속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행동을 기록한 청동판에 있는 것일까 하고 물을 수 있다. 퍼포먼스를 통해 밸드서리는 개념미술 예술가로 거듭나면서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자신이 맡은 과목도 칼 안드레의 말대로 ‘포스트 스튜디오 아트’로 바꾸었다. 그는 캔버스에 그리는 행위를 중단하고 삶에서의 사고과정을 작업의 출발로 삼아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밸드서리의 작품에서 색은 상징적 의미를 띠는데, 빨간색은 분노와 위험, 노란색은 욕망과 광기, 푸른색과 녹색은 평화와 희망을 의미한다. 1987년에 제작한 작품 <피의 선데 Bloody Sundae>는 1972년 13명의 영국 군인이 북아일랜드의 ‘피의 선데이Bloody Sunday’를 상징하면서도 중산층의 지루한 주말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아이스크림 선데의 형상으로 구성된 작품이 이런 점을 말해준다. 얼굴을 가린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원반들은 각각의 인물 동작과 연관시켜 성과 폭력, 집착과 음모, 그리고 그것들을 초월하려는 욕구의 의미로 읽혀진다.

밸드서리는 1980년대 이후에 사진만으로 구성된 복합사진composite photo-work을 통해 형상만으로도 문자와 같은 서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잡지, 신문, 광고 등에서 오려낸 사진들을 재료로 이를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원색의 기하학적 형상을 사용했는데, 사진의 일부를 가리거나 특정 형상을 단색의 평면으로 지움으로써 비현실성을 강조했다. 또한 인물의 얼굴 위에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 동그라미를 그려 익명성을 부여했다. 특히 그는 인공과 자연, 군중과 개인, 남성과 여성, 혼란과 질서, 과거와 현재, 사랑과 미움 등을 대비시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예술가를 개인적 인격으로 강조하지 않은 로버트 배리
1960년대 후반부터 언어에 근거한 작품을 제작한 로버트 배리는 언어가 관람자에게 직접 말하기 때문이라면서 언어가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거리에 다리를 놓아준다고 했다.

나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언어가 관람자에게 직접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와 연관될 수 있다. 언어는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갭에 다리를 놓아준다. 내가 단어를 읽거나 책을 읽을 때 이는 저자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페이지는 그 자체는 내게 읽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69년 암스테르담의 아트 앤드 프로젝트Art&Project 갤러리에서 열린 배리의 전시회는 모든 비물질화한 전시회 중 가장 유명했다. 그는 갤러리 현관문에 ‘전시기간 중에 갤러리 문을 닫습니다’라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볼 만한 작품도 없었거니와 볼 수 있는 전시실조차 없었다. 볼 만한 작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모든 것은 전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했다. 이는 예술가의 정신이 그곳에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배리는 예술가를 개인적 인격으로 강조하지 않은 것이 특기할 만하다. 그의 관심은 관람자의 경험에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을 “시간과 공간으로 가까이 있지만 아직 잘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배리의 설치 <무제>는 전시장 전체 벽을 한 가지 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희망HOPE’ ‘열망ANXIOUS’ ‘상기REMIND’ ‘용인ACCEPT’ ‘전체WHOLE’ ‘허락ALLOW’ ‘느낌FEELING’ ‘설명EXPLAIN’ 등의 단어를 커다란 글자로 대각선으로 수직으로, 혹은 뒤집어진 형태로 썼다. 따라서 단어들은 공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단어들이 천장이나 벽 가장자리에서 잘려나갔다. 『플래시 아트 Flash Art』지와의 인터뷰에서 배리는 말했다. “나는 언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물론 무엇인가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한 모든 의미들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모든 회화적 행위를 회피한 에드워드 루샤
에드워드 키엔홀츠가 주도한 퍼러스 갤러리 그룹에 뒤늦게 합류한 에드워드 루샤Edward Ruscha(1937~)는 로버트 어윈, 에드워드 모제스Edward Moses, 켄 프라이스Ken Price, 키엔홀츠와 함께 퍼러스 갤러리 그룹에서 활동했다. 그는 광고 기법을 차용해 매우 섬세한 글씨로 모사한 상업기호와 상표를 그리면서 이따금 배경에 제품의 이미지를 작게 그려 넣거나, 그가 살던 로스앤젤레스와 그가 성장한 오클라호마시티 사이에 있는 <26 개의 주유소 Twenty-six Gasoline Stations>(1963) 연작에서 보듯 정교하지도 않고 이야기도 없는 사진들로 무관심하고 일상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엔지니어의 투영도를 흉내 내서 그린 것이다. 인쇄된 책의 기법과 형식이 완벽하게 어울리며, 각각의 경우 글이 첨가되지 않은 사진은 예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러한 특징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사진과 거기에 담긴 주제는 특별히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26 개의 주유소>에서 루샤가 담아낸 것은 제목이 알려주는 것 그 자체이다. 그는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여행하는 동안 마주쳤던 모든 주유소를 길 건너편에서 무미건조하게 사진으로 찍었다. 이와 동일한 동어반복적이고 총망라하는 충동은 <선셋 대로의 모든 건물 Every Building on the Sunset Strip>(1966)에서도 나타났다. 이 파노라마 사진은 선셋 대로라는 잘 알려진 구역을 따라 늘어서 있는 모든 건물, 그리고 모든 교차로와 비어있는 모든 주차장의 목록을 작성한 것이다. 황량함이란 특색을 강조하기 위해 정오에 촬영된 선셋 대로는 모조품처럼, 즉 할리우드의 영화 세트처럼 보였다. 훗날 루샤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서부의 한 마을처럼 보인다. 그 마을의 상점 정면은 종이일 뿐이고, 그 뒤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루샤의 열 권이 넘는 사진집들은 계속해서 동일하게 개성 없는 무nothingness를 기록하지만, 그것들은 20세기 말의 삶의 공허함을 단순히 그대로 설명해놓은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동질성에 대한 실천적인 안내서로서 차이가 사라진 세계이며, 따라서 의미가 사라진 세계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전시공간과 미술품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한 다니엘 뷔랑
프랑스의 개념미술 예술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1938~)은 파리 외곽의 블론뉴 빌랑쿠르에서 태어났고, 미술직업학교와 파리의 국립학교를 마치고 1958년부터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술가에게 작업실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정은 우연의 소산이기는 하나 그의 작업의 본질에 충실히 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순수 미술의 체계와 단절하려는 그의 의지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는 1965년부터 작품에 흰색과 다른 한 가지 색을 번갈아 사용하여 제작했는데, 갑판의자 같은 수직 줄무늬가 늘 특징을 이루었다. 폭이 항상 8.7cm(2mm의 오차가 있다)인 이런 줄무늬는 시각적 도구로 광고판이나 갤러리의 설비 등에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단기적인 작업이었다. 줄무늬를 “실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미술품”이라고 강조한 그는 특히 전시공간과 미술품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관습적으로 갤러리 안에 전시된 작품들이 철거하게 되고 그 공간은 늘 비슷한 것으로 남게 되는 데 반발해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직 컬러 줄무늬를 갤러리만이 아니라 건물 외부와 광고게시판, 잡지 등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연출했다. 그의 목적은 형식적 흥미와 미적 호소, 그리고 정감적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미술품에 집중된 주의력을 작품을 둘러싼 장소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정치화한 개념미술과 제도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 중심이 된 초기의 사례였다.

뷔랑은 1967년 1월 3일 스위스 예술가들 올리비에 모세Olivier Mosset(1944~)와 니엘 토로니Niele Toroni(1937~), 프랑스 예술가 미셸 파르망티에Michel Parmentier(1938~2000)와 함께 파리의 장식미술관에서 ‘청년회화전 Salon de la Jeune Peinture’에서 시위를 벌였다. 네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위했는데, 뷔랑은 빨강과 흰색 세로줄로, 모세는 흰색 바탕에 검은 원으로, 파르망티에는 회색과 흰색의 가로줄 무늬로, 토로니는 30m 간격으로 50이라는 숫자의 붓자국을 주사위의 점으로 작업했다. 그들이 작업하는 동안 확성기에서는 ‘뷔랑, 모세, 파르망티, 토로니는 여러분이 지성인이 되기를 충고합니다’라는 말을 외쳐댔다. 한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은 당혹해하는 관람자들에게 종이를 나눠주며 ‘확실히 이것은 뷔랑, 모세, 토로니, 파르망티에의 회화를 바라보는 문제일 뿐입니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뒤샹은 “정말 실망스러운 해프닝이다. 누구도 이보다 더 하지 못할 걸!”이라고 말했다. 뒤샹이 사용한 해프닝이란 말은 사실 개입이란 뜻이다. 회화는 오로지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회화가 어딘가에 놓임으로써 그것은 제도적이든 문화적이든 그 문맥에 대한 관심을 결정적으로 끌어낸다. 이런 점에서 회화는 정치적 의미까지도 갖게 되는 것이다. 야간 집회가 끝난 뒤 그들은 작품을 치우고 대신 ‘뷔랑, 모세, 파르망티에, 토로니는 전시를 하지 않는다’라고 쓴 슬로건을 남겨 두었다. 배포한 인쇄물에서 그들은 구성에 관한 전통적인 가정들, 오브제의 재현, 정신적 보상, 그리고 에로티시즘, 일상 환경, 정신분석, 베트남전을 포함한 광범위한 요소들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회화 방식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화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물질의 특성과 변화과정을 중시한 브루스 나우먼
인디애나의 포트웨인에서 뉴욕으로 온 브루스 나우먼은 다소 이렇다 할 목적 없이 대학을 다닌 끝에 느지막이 미술을 발견했으며, 1960년대 중엽 캘리포니아 주로 가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가 훗날 회상한 바에 의하면 그의 결정적인 순간은 1966년, 그가 갓 취득한 대학원 학위를 들고,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할 일 없이 보낼 때 찾아왔다. 그는 루샤의 사례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환경의 특정 측면을 레디메이드 미술품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간단한 언어공식에 눈을 돌렸다. 간단한 언어적 정의는 특정한 존재자들을 가지고 견고한 조형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존재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실재하면서도 그것들을 산출해낸 생각 이전에는 전혀 존재가 없던 것들이었다.

나우먼은 1965년에 작업실을 빌린 후 사물 사이의 공간 생김새, 예를 들면 <내 의자 밑 공간 생김새 A Cast of the Space under My Chair>(1965~68), <바닥 위에 놓인 두 개의 정육각형 상자 사이의 공간으로 만들어진 플랫폼>(1966) 같은 것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품들은 모든 의미가 제거되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란 의미만이 남아 있는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 속에서 시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의미의 사라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이 무엇의 주형물인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나우먼은 정체성 중심, 혹은 자아 중심의 개념을 거부했는데, 거울의 반사작용이 이미지를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그의 작업의 실체를 이루는 조형물들에서, 그는 가장 손쉽고 값이 싼 점성의 재료들인 석고, 라텍스, 파이버글라스, 시멘트 등을 사용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면서 하나의 단순한 절차로 그의 언어적 요구사항들에 실체를 제공하고, 끝마무리는 대개 우연에 맡겨두었다. 파이버글라스 긴 원통형의 관을 반으로 자른 형태를 벽과 바닥에 기대놓는 등 재료의 물질적인 특징과 실제 공간을 강조한 그의 작품은 전형적인 미니멀리즘의 유형이었다. 물질의 특성과 변화과정을 중시한 점에서 그의 작품은 저드와 안드레의 미니멀아트 작품과는 구분이 된다. 그는 석고 틀을 이용하여 파이버글라스를 뜨면서 달라붙은 석고나 표면의 울퉁불퉁한 질감이나 얼룩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작품이 제작과는 과정을 작품의 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나우먼은 1966년에 <장미에는 이빨이 없다 Rose has No Teeth>를 소개했다. 그것은 나무에 부착한 납판에 ‘장미에는 이빨이 없다’라는 명제를 새긴 것이다. 이 명제는 언어의 오용으로 생기는 문제를 비판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1953)에서 인용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불합리한 논제의 가정을 언어로 분석한 데 반해 나우먼은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는데, 납판 위에 글을 새기고 그것을 정원의 나무에 못질하여 붙였다. 나우먼은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진실인가?’, ‘그것이 참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은유적으로 사실성을 지니는가?’ 등의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진실과 말하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자신의 작품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은 나우먼은 몇 년 뒤 나무가 자라서 자신의 작품을 능가하고 그 작품은 없어져버릴 것임을 지적했다. 그는 납판을 폴리에스테르로 여러 개 주조해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나우먼은 1960년대 중반에 네온튜브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1965년경 일부 작가들이 네온튜브를 사용하고 있었고 댄 플래빈의 작업이 두드러졌다. 그의 작업은 팝아티스트들이 즐겨 사용한 현대 문명의 도상이나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한 대량생산된 사물의 외관의 차용과는 달리 예술가의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매체 사이의 이질감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창사인 혹은 벽사인 Window or Wall Sign>(1967)은 ‘진정한 예술가는 신비적인 진실을 밝힘으로써 세상을 돕는다 The true artist helps the world by revealing mystic truths’라는 문구를 달팽이 모양의 네온튜브로 만든 것이다.

격언이나 간곡한 권고조의 진술을 지은 제니 홀처
문자만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제니 홀처Jenny Holzer(1950~)는 오하이오주의 갤리폴리스Gallipolis에서 태어났고, 1972년에 오하이오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에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 후 1977년에는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인디펜던트 스터디 프로그램 과정을 거쳤다. 그녀는 회화와 판화를 주로 제작한 추상 예술가였지만, 뉴욕으로 이주한 뒤 언어와 공공 미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명확한 의사전달의 도구인 텍스트를 자신의 작업 재료로 선택한 그녀는 사회적·문화적 현상으로부터 개인적 일상의 삶에 이르는 다양한 격언이나 간곡한 권고조의 언어적 진술을 짓고 이를 포스터로 인쇄하거나 T셔츠와 모자에 새기고, 1977년에 ‘정보와 선전 사이에는 미묘한 선이 존재한다’와 같은 문구를 인쇄한 커다란 판지를 건물이나 벽에 부착한 <진부한 문구 The Truisms>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개인이 경험한 사실이 유용하다는 걸 보여주기 원했으며, 또한 하나의 ‘진부한 문구’를 다른 것과 병렬했을 때 생기는 불합리한 효과를 보여주려고 했다. 이는 T셔츠, 스티커, 금속판, 전광판 같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다른 연작으로 이어졌다. 특히 전광판은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타임스스퀘어와 같은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그녀 특유의 형식으로 널리 알려졌다.

홀처의 작품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1979년에 시작한 <선동적인 에세이 Inflammatory Essays> 연작은 100여 개의 단어들로 이뤄졌다. 그녀는 “그것들은 사람들이 30초 동안 쳐다보는 전광판에 띄우기에는 너무 길다. 오히려 길거리나 으슥한 뒷골목에 어울릴 성싶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 주체하지 못하므로 내 글을 읽고 화를 내야 할지 생각해볼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작품이 더욱 웅장해지고 고도의 기술을 지닐수록 사람들은 언어보다는 작품의 시각적 특징에 더 많이 주목했다. 199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예외적으로 큰 예산을 들여 제작한 섬광 때문에 홀처의 작품은 디스코테크처럼 보였다. 빛의 율동이 언어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그녀의 전시공간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뉴욕 시내,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 호텔,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 야구장 같은 대중적인 장소로 확대되었다.

2. 재료와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참여를 중시한 아르테 포베라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작품은 자의적으로 보잘것없고 진부한 재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개 환경미술의 성격을 띠고 종종 강하게 극적인 요소를 지녔다. 아르테 포베라의 첫 전시회가 1967년 9월에 열렸으며, 참여한 예술가는 이탈리아 북부 산업 중심지인 도시 투린 태생의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1940~94), 투린 태생으로 1959년에 밀란으로 이주한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abro(1936~2007), 토리노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조바니 안셀모Giovanni Anselmo(1934~), 조각가 피에르 파올로 칼초라리Pier Paolo Calzolari(1943~), 체험과 지각의 본질, 그리고 실재와 재생산의 관계를 탐구한 에밀리오 프리니Emilio Prini(1943~), 야니스 쿠넬리스, 줄리오 파올리니, 마리오 메르츠, 피노 파스칼리 등이었다. 아르테 포베라에 관한 많은 글을 남긴 미술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1940~)는 1967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일상적인 것이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 물리적 현존성과 행동이 미술이 되었다. 도구로서의 언어의 근원들이 새로운 언어학적 분석에 종속되었다. 그것들이 새로 태어났고, 그 속에서 새로운 휴머니즘이 발생했다”고 적었다.

포베라는 이탈리아어로 ‘가난한’이란 뜻이다. 보에티는 1967년 후반에 「선언문 Manifesto」을 발표했는데, 노란색, 장밋빛색, 초록색, 흰색 등을 칠한 포스터였다. 그는 포스터를 800점 제작하여 동료 예술가들과 이탈리아의 미술계 인물들에게 발송했다. 이탈리아어로 선언문manifesto이란 명사는 포스터나 게시판이란 의미이다. 열두 명으로 구성된 아르테 포베라가 1960년대 말 유럽에서 진행된 일련의 예술적 개입방식 중 가장 진정성이 있고 독립적인 것을 창출했다. 미국 미술의 헤게모니, 특히 미니멀아트에 맞서 겨룬 아르테 포베라는 세계대전 이전의 이탈리아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그것이 지닌 모든 내적 모순과 함께 전후의 맥락 안에 복원시켰다.

아르테 포베라를 가장 명확하게 규정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마리오 메르츠, 야니스 쿠넬리스, 피노 파스칼 리가 제작한 일련의 작품이다. 아르테 포베라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그들은 특이한 유형의 아상블라주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테크놀로지는 물론 레디메이드나 오브제 트루베object trouvé(발견된 오브제)의 패러다임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구성물은 그런 전략들을 연속적으로 서로 관련지음으로써 테크놀로지적 요소를 진부하게 만들고, 장인적 측면에 다시금 정화의 의미를 부여했다.

글의 형상과 의미를 작품의 일부가 되게 한 마리오 메르츠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밀라노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성장한 마리오 메르츠Mario Merz(1925~2003)는 대학에서 2년 동안 의학을 공부하고, 2차 세계대전 때는 파시즘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부터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고 1954년에 토리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1966년까지 신문지, 병, 우산, 레인코트, 튜브 등 일상 소재를 사용하여 소비주의 미술에 반기를 든 전위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1967년에 아르테 포베라 운동에 참여했다.

메르츠는 1979년에 적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르테 포베라는 대량생산 상업 물질로부터 나와 기술적으로 예술적 아이디어를 나타내기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아르테 포베라가 넓은 의미에서 숙명적 가치를 떠받치는 것으로 되돌려주는 예술적 표면의 몇 가지를 파괴했거나 불명료하게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아르테 포베라가 가장 복잡한 표면의 정체, 필드의 정체, 혹은 벽돌, 돌, 혹은 시멘트로 쌓은 벽의 수직적 정체 등은 물론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가치를 수여하기 위해서 캔버스를 표면처럼 제거했다는 것이다. 아르테 포베라는 서까래에 밀착하고 나무에 밀착한다.

이런 대안의 숙명-표면surface-destinies이 고정시킨 프로그램의 억압으로부터 미술을 자유롭게 하는데 새로운 도상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상반된 실재들 가운데서 작동하는 장치를 전통을 지탱하는 데 있어 미술을 포함시키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상이나 도상들과의 관계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오히려 미술을 자유롭게 해준다. 사람들은 표현주의, 고야, 라파엘전파의 도상들, 혹은 야수주의의 도상들 가운데서 관계에 관해 말할 수 없다.

이런 새로움의 감각이 미술을 보호하지 못하며 미술로 하여금 종종 실재, 오브제, 그리고 그 밖의 가치를 위한 숙명적인 언어, 그 밖의 읽을거리 사이에서 작동하는 도구가 되게 만든다. 예를 들면 개념미술은 인쇄된 단어들, 명료한 글쓰기, 그리고 황급하게 신경질적이며 본능적인 필치로 휘갈겨 쓴 편지 사이에서 작동하는 도구이다.

‘거울 회화’로 유명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비엘라 태생으로 토리노에서 공부한 후 1957년까지 미술품 복원가인 아버지의 조수로 일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1933~)는 1956년 자화상 연작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60년대 초에 스테인리스 스틸 작업을 거쳐 거울을 사용하여 환영과 실재를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1962년에 시작한 ‘거울회화’는 광택이 나는 강철판 표면 위에 채색된 형상과 반사된 관람자의 모습을 대치시킨 것이다. 대체로 정지 동작의 실물 크기 인물 사진을 얇은 반투명지에 베낀 뒤 윤곽선을 따라 인물을 오려내어 광택을 낸 얇은 강철판에 붙이고, 어두운 색조로 마무리하며, 형상 주변 관람자의 모습이 비칠 수 있는 곳에 철판을 놓은 것이다.(샘 헌터 620) 그의 회화 속에는 누드 여인이 서 있거나 정치적 시위를 하는 사람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사진 이미지에 움직이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회화 속에 관람자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작품에서 현실감을 주는 착시현상이 극단화되고 단색조의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지닌 비현실성도 또한 극단화된다. 관람자가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피스톨레토는 지각의 두 단계, 즉 금속 표면에 비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와 회화 속의 정적인 인물을 다루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피스톨레토는 1964년 「마이너스 예술가 A Minus Artist」란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작업에 관해 적었다.

캔버스에 관한 나의 첫 의문은 나 자신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으로 미술은 단지 이차적 실재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의 작업은 두 이미지, 즉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내가 제안한 자신의 모습을 아주 닮게 하는 직관적인 방법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거울 이미지 위에 그림을 겹쳐놓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런 행위로 탄생한 구상적 오브제가 나로 하여금 삶 내에서처럼 회화 내에서 주어진 두 실재가 상징적으로 관련되었다는 걸 탐구하게 했다. 나는 정말이지 거울에 의해서 구멍이 뚫린(물론 물리적인 의미가 아닌) 벽을 넘어서 회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물리적으로 회화 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바라보고 있는 유리(거울)를 넘어서’ 자신의 존재와도 같은 허구를 창조했다.

반형식주의 미술에 속한 피노 파스칼리
야니스 쿠넬리스의 작품에 나타난 지역적 특수성의 신화에 대한 강조와 자연적이고 비형식적이며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경험에 대한 강조는 피노 파스칼리Pino Pascali(1935~68)의 1960년대 중반의 작품들과 비교된다. 바리에서 태어나 1955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회화를 배운 파스칼리의 작업에서도 연극성, 서사, 재현의 관습이 회화와 조형물 제작에 다시 도입되었다. 이것은 1960년대 내내 미국의 조형물 제작을 지배한 현상학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접근의 개념들과 명백히 모순되었다. 이런 사례로 1964년부터 진행된 혼합작업 <소극장 Teatrino>(1964)이 있다. 여기서 회화는 해체되고 조각은 연극 무대의 혼성 상태로 변형되었다. 이런 형식을 통해 파스칼리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어디까지 서사를 금지시켰으며, 자아규정의 기획 하에서 언어와 퍼포먼스를 삭제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와 쿠넬리스의 작업이 보여주듯이 예술적 매체, 혹은 미적 범주나 장르가 지닌 것으로 가정되는 순수성은 부정되어 이미 재고의 여지없이 혼성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혼성의 증명이 아르테 포베라 미학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비유로 점철된 작품을 소개한 야니스 쿠넬리스
그리스의 피레우스에서 태어나 1956년 로마에 정착한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1936~)는 아카데미아 디 벨르 아르티Accademia di Belle Arti에서 회화를 공부하면서 이 시기에 알베르토 부리와 루초 폰타나 등 이탈리아 앵포르멜 화가들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1958년 도식적 기호와 숫자, 문자 등을 종이에 스텔실로 찍어 대형화를 제작했다. 그는 1960년에 이런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작품과 함께 그림에 포함된 악보를 좇아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1966년에 설치와 퍼포먼스 형태로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삼베자루를 꿰매어 붙인 뒤 벽부터 바닥까지 걸어놓은 <무제 Untitled>는 회화와 결별하고 삶이 개입되는 예술을 지향하려는 그의 미학적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1967년에 아르테 포베라 운동에 가담한 쿠넬리스는 불과 석탄, 솜, 회수용 폐목재, 파괴된 돌, 커피나 곡물로 가득 채운 황마자루, 심지어는 부서진 석고까지도 즐겨 사용했으며, 1967년에 강철로 제작한 꽃 한가운데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게 했다. 그는 분젠 버너를 수차례 사용했는데, 관습에 불을 붙이는 상징적 행위였다. 그는 1969년 신선한 커피를 일련의 열두 개의 접시 위에 올려놓고 줄을 달아 수직으로 매달았다. 미술관에 커피 냄새가 진동하여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했다. 큐레이터는 그의 지침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신선한 커피를 보충했다. 커피는 인체의 감각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한 기억도 상기시켰다. 뒤샹이 레디메이드에 늘 냉정했던 반면 그는 살아 있고 변덕스러우며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뒤샹 식의 레디메이드를 시적으로 작업한 것은 단순히 이탈리아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기본적인 재료와 형태로 작업하면서 그것을 낯설게 만들었다.

비가시적 작품을 제작한 피에로 만초니
손치니에서 태어나 문과 계통의 학교를 중퇴하고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아카데미에서 잠시 공부한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1933~63)는 다다이즘, 특히 마르셀 뒤샹의 영향을 받았다. 1955년까지 전통 양식의 풍경화를 그리다가 가위, 압핀 등 주변에서 쉽게 발견하는 사물들을 회화에 이용하거나 타르에 묻혀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에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허무주의 경향은 루초 폰타나의 영향이었다.

1957년은 만초니가 폰타나의 비호를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해로 그가 도약할 수 있었던 데는 그해 1월 밀라노에서 열린 이브 클랭의 모노크롬 전시회의 영향이 컸다. 여기에 또 다른 스승 알베르토 부리의 빈궁의 미학도 도움이 되었다. 삼베자루 아상블라주 작업을 하던 부리는 곧 불에 탄 플라스틱 조형물로 넘어갔는데, 이는 1952~53년 이탈리아에 체류하던 라우셴버그를 매료시켰다. 만초니는 고령토에 캔버스를 적셔 만든 흰색 모노크롬 회화 <아크롬 Achrome>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캔버스 위에 플라스터를 발랐지만 나중에는 헝겊에 흰 고령토를 흡수시켜 캔버스에 부착했다. 또한 유리솜과 폴리스트롤 같은 재료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의 의도는 클랭의 것과 같아 보였다. 그는 순수 재료가 순수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체가 흰색인 <아크롬>은 만초니가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연작의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대단히 짧은 기간에 극적으로 발전했다.

만초니의 연속된 흰색 작품들은 곧 클랭의 적수였던 마르셀 뒤샹을 좇게 되고 그때부터 그는 폰타나에게로 되돌아가 그가 보여준 부정의 가르침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개입을 최소화하여 콜라주도 없고 회칠도 없는 손대지 않은 흰색 재료들의 파편을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스티로폼이나 유리섬유 같은 재료는 회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전후 이탈리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산업 생산물의 유독성과 공사장의 위험성을 연상시켰다. 종종 붉은 벨벳 상자 속에 놓여 있어 역한 느낌과 에로틱한 느낌이 맞닿은 물신처럼 보이는 유리섬유 작품 <구름 Clouds>(1962)은 키치에 대한 폰타나의 열광의 본질을 명확히 드러냈다.

3. 땅에서 비롯된 대지미술
대지미술Land art(Earth art, 혹은 Earth works)은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예술가마다 사용한 기법과 내세운 의도가 현저히 다를 뿐만 아니라 작품도 매우 다양하다. 건물을 반쯤 허물기, 바윗덩어리와 수 톤에 이르는 흙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구덩이, 전망대,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경사로 만들기, 단층을 파헤치기, 산허리를 절단하기, 화산을 구획하기, 사막의 바닥에 드로잉하기, 눈 위에 자취 새기기, 돌개바람 추적하기, 염분이 높은 호수 위에 번개 부르기, 공공쓰레기장에 아스팔트 붓기, 커튼으로 계곡 막기 등 다양하다. 이러한 작업은 비용이 많이 들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월터 드 마리아는 대지미술을 고립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고립을 타파해야 하고 사진은 이런 시도에서 주요한 매체였다. 대지미술의 대부분 예술가들이 의식적으로 사진매체의 가능성을 활용했다. 그들은 공간감과 거대한 크기를 복구시키려고 화면 구성을 연구했다. 이러한 사진은 책과 잡지로 유포되는 단순한 기록, 작품과 그 과정을 이해시키려는 교육적 몽타주의 요소, 전시 대용품, 혹은 상시적이거나 지속 가능한 설치일 경우 그 현장을 방문하도록 자극하는 것 등 다양한 기능을 띤다. 대지미술품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마이클 하이저는 “여러분은 지구의 반대편, 이집트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러갈 수 없다고 불평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가세오, 가서 보면 될 것 아닙니까”라고 대꾸했다.

작품
1 마리오 메르츠의 <지압의 이글루 Igloo of Giap>, 1968, 쇠, 철사줄, 네온튜브, 흙을 넣은 부대, 120×200×200cm. Collection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2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그와 그녀의 대화 He and She Talk>, 1964, 매끈한 스테인리스스틸에 사진 콜라주, 120×224cm. Collection the artist
3 야니스 쿠넬리스의 <무제 Untitled>, 1969, Galleria L'Attico, Rome.
4 피에로 만초니의 <아크롬 Achrome>, 1958, 캔버스에 고령토와 천을 부착, 80×100cm.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5 월터 드 마리아의 <번개 치는 들판 The Lightning Field>, 1977, 스테인레스 스틸 막대들로 평균 높이 6.29m, 전체 면적은 1,609.34×1,005.84m. Quemado 근처, New Mexico
6 로버트 스미스슨의 <산호가 있는 코너거울 Corner Mirror with Coral>, 1969, 91.5×91.5×91.5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7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 방파제 Spiral Jetty>, 1970, Great Salt Lake, Utah, black 개처, salt crystals, earth, red water (algae), 1.06×4.57×457m. James Cohan Gallery, New York
8 마이클 하이저의 <이중 부정 Double Negative>, 1969~70, 1969~70, 240,000톤의 흙을 재배치, 457.2×15.24×9.14m. Mormon Mesa, Overton, Nevada.
9 크리스토의 <연속 울타리 Running Fence>, 1972~76, 스틸 막대, 스틸 케이블, 나일론, 높이 5.49m, 전체의 길이 3.92km. Sonoma and Marin countries, California
10 크리스토의 <라이크스타그 포장 Wrapped Reichstag>, 1971~95.
11 리처드 롱의 <도보에 의해 만들어진 선, 영국 A Line Made by Walking, England>, 1967, 런던. 앤터니 도페이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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