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강의15  
 

개념미술, 아르테 포베라, 대지미술         
1. 개념미술
환경에 전적으로 반응하는 물체를 창조한 한스 하케
쾰른에서 태어나 1960년 카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1970년에 뉴욕으로 진출한 한스 하케Hans Haacke(1936~)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1974년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A Bunch of Asparagus>(1880)이 소장되어 온 경로를 규명하는 열 개의 패널을 그의 고향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Wallraf-Richartz 미술관의 창립 150주년 기념전시회 ‘프로젝트 74 PROJEKT 74’에 출품하려고 한 것이다. 이 정물화는 1968년 이 미술관 후원회가 독일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Konard Adenauer(1876~1967)를 기념하여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74세의 나이에 총리가 되어 88세까지 총리를 지냈다. 하케는 마네의 작품이 그려진 때부터 그것이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의 경로를 추적했다. 열 개의 패널은 첫 번째 소유주로 미술사학자이자 콜렉터인 유대계 프랑스인 샤를 에프뤼시Charles Ephrussi(1849~1905)를 거쳐, 독일인 출판가이자 화상 파울 카시러Paul Cassirer(1871~1926)와 유대계 독일인 화가 막스 리베르만으로 이어졌다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리베르만의 손녀에게서 작품을 구입한 미술관의 후원회장이자 은행가 헤르만 압스Herman Josef Abs(1901~94)로 귀착되었다.

하케는 한 개인이 문화적 후원자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얼마나 쉽게 세탁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패널은 그 소유 역사의 결론으로 압스가 걸어온 길을 분석해놓았는데, 압스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 제3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재정 고문으로 일했으며, 종전 후 1949년 아데나워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복직되었고, 그 밖에도 50여 개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나치에 협조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압스도 종전 후 죄를 사면받기 위해 영국 감옥에서 6주일을 보냈다. 그는 1960년대를 거쳐 미술관에 이 정물화를 기증하게 된 시기까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 자리에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케는 압스가 <아스파라거스 다발>를 구입하기 이전에 그 작품을 소장했던 수집가와 화상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업과 정치적 활동에 관해 세세한 것까지도 밝혔다. 그의 작업은 큐레이터의 동의를 얻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방으로 간주되었으며, 미술관 경영진은 민주적 투표를 실시하여 그의 작품을 거부했다. 미술관 관장은 하케의 작품이 나치정권과 미술관의 주요 후원자인 압스와의 관계에 시선을 쏠리게 한다는 이유로 전시를 취소했다. 하케는 항의의 제스처로 파울 마엔츠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아스파라거스 다발>의 복제품을 사용했다.

이 사건을 통해 하케의 작업이 지닌 특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억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실천을 사회적ㆍ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와 연결하고, 문화란 이름의 위장을 장소 특정적이고 제도 비판적인 작업의 초점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기획은 제도 자체가 재통합하거나 재중립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1970년대 주요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진과 문자를 사용하여 작업한 존 밸드서리
주로 사진과 문자를 사용하여 작업한 존 밸드서리John Baldessari(1931~)는 “언어에 모든 종류의 문학적 장치들이 있으며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지적했듯이 중립적인 형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1970년 9월 뉴욕의 유대인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소프트웨어 Software’의 일부로 ‘화장 프로젝트Cremation Project’를 소개했다. 그는 작업실에 쌓인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팔리지 않은 모든 작품을 소각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는 물질적 구현을 본질로 삼아온 기존 미술의 종말을 선언한 개념미술의 선언적 의미였다. 그림을 태운 재를 유골함에 넣고 표면에 ‘1953년 8월부터 1966년 3월까지의 밸드서리의 회화’라고 써서 보관하는 것으로 회화 장례식을 치렀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디에 속한 것이냐는 물음을 제기되는데, 재를 담은 6개의 유골함 속에 미술이 있는 것일까,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 속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행동을 기록한 청동판에 있는 것일까 하고 물을 수 있다. 퍼포먼스를 통해 밸드서리는 개념미술 예술가로 거듭나면서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자신이 맡은 과목도 칼 안드레의 말대로 ‘포스트 스튜디오 아트’로 바꾸었다. 그는 캔버스에 그리는 행위를 중단하고 삶에서의 사고과정을 작업의 출발로 삼아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밸드서리의 작품에서 색은 상징적 의미를 띠는데, 빨간색은 분노와 위험, 노란색은 욕망과 광기, 푸른색과 녹색은 평화와 희망을 의미한다. 1987년에 제작한 작품 <피의 선데 Bloody Sundae>는 1972년 13명의 영국 군인이 북아일랜드의 ‘피의 선데이Bloody Sunday’를 상징하면서도 중산층의 지루한 주말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아이스크림 선데의 형상으로 구성된 작품이 이런 점을 말해준다. 얼굴을 가린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원반들은 각각의 인물 동작과 연관시켜 성과 폭력, 집착과 음모, 그리고 그것들을 초월하려는 욕구의 의미로 읽혀진다.

밸드서리는 1980년대 이후에 사진만으로 구성된 복합사진composite photo-work을 통해 형상만으로도 문자와 같은 서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잡지, 신문, 광고 등에서 오려낸 사진들을 재료로 이를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원색의 기하학적 형상을 사용했는데, 사진의 일부를 가리거나 특정 형상을 단색의 평면으로 지움으로써 비현실성을 강조했다. 또한 인물의 얼굴 위에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 동그라미를 그려 익명성을 부여했다. 특히 그는 인공과 자연, 군중과 개인, 남성과 여성, 혼란과 질서, 과거와 현재, 사랑과 미움 등을 대비시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예술가를 개인적 인격으로 강조하지 않은 로버트 배리
1960년대 후반부터 언어에 근거한 작품을 제작한 로버트 배리는 언어가 관람자에게 직접 말하기 때문이라면서 언어가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거리에 다리를 놓아준다고 했다.

나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언어가 관람자에게 직접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와 연관될 수 있다. 언어는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갭에 다리를 놓아준다. 내가 단어를 읽거나 책을 읽을 때 이는 저자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페이지는 그 자체는 내게 읽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69년 암스테르담의 아트 앤드 프로젝트Art&Project 갤러리에서 열린 배리의 전시회는 모든 비물질화한 전시회 중 가장 유명했다. 그는 갤러리 현관문에 ‘전시기간 중에 갤러리 문을 닫습니다’라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볼 만한 작품도 없었거니와 볼 수 있는 전시실조차 없었다. 볼 만한 작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모든 것은 전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했다. 이는 예술가의 정신이 그곳에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배리는 예술가를 개인적 인격으로 강조하지 않은 것이 특기할 만하다. 그의 관심은 관람자의 경험에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을 “시간과 공간으로 가까이 있지만 아직 잘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배리의 설치 <무제>는 전시장 전체 벽을 한 가지 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희망HOPE’ ‘열망ANXIOUS’ ‘상기REMIND’ ‘용인ACCEPT’ ‘전체WHOLE’ ‘허락ALLOW’ ‘느낌FEELING’ ‘설명EXPLAIN’ 등의 단어를 커다란 글자로 대각선으로 수직으로, 혹은 뒤집어진 형태로 썼다. 따라서 단어들은 공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단어들이 천장이나 벽 가장자리에서 잘려나갔다. 『플래시 아트 Flash Art』지와의 인터뷰에서 배리는 말했다. “나는 언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물론 무엇인가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한 모든 의미들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모든 회화적 행위를 회피한 에드워드 루샤
에드워드 키엔홀츠가 주도한 퍼러스 갤러리 그룹에 뒤늦게 합류한 에드워드 루샤Edward Ruscha(1937~)는 로버트 어윈, 에드워드 모제스Edward Moses, 켄 프라이스Ken Price, 키엔홀츠와 함께 퍼러스 갤러리 그룹에서 활동했다. 그는 광고 기법을 차용해 매우 섬세한 글씨로 모사한 상업기호와 상표를 그리면서 이따금 배경에 제품의 이미지를 작게 그려 넣거나, 그가 살던 로스앤젤레스와 그가 성장한 오클라호마시티 사이에 있는 <26 개의 주유소 Twenty-six Gasoline Stations>(1963) 연작에서 보듯 정교하지도 않고 이야기도 없는 사진들로 무관심하고 일상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엔지니어의 투영도를 흉내 내서 그린 것이다. 인쇄된 책의 기법과 형식이 완벽하게 어울리며, 각각의 경우 글이 첨가되지 않은 사진은 예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러한 특징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사진과 거기에 담긴 주제는 특별히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26 개의 주유소>에서 루샤가 담아낸 것은 제목이 알려주는 것 그 자체이다. 그는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여행하는 동안 마주쳤던 모든 주유소를 길 건너편에서 무미건조하게 사진으로 찍었다. 이와 동일한 동어반복적이고 총망라하는 충동은 <선셋 대로의 모든 건물 Every Building on the Sunset Strip>(1966)에서도 나타났다. 이 파노라마 사진은 선셋 대로라는 잘 알려진 구역을 따라 늘어서 있는 모든 건물, 그리고 모든 교차로와 비어있는 모든 주차장의 목록을 작성한 것이다. 황량함이란 특색을 강조하기 위해 정오에 촬영된 선셋 대로는 모조품처럼, 즉 할리우드의 영화 세트처럼 보였다. 훗날 루샤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서부의 한 마을처럼 보인다. 그 마을의 상점 정면은 종이일 뿐이고, 그 뒤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루샤의 열 권이 넘는 사진집들은 계속해서 동일하게 개성 없는 무nothingness를 기록하지만, 그것들은 20세기 말의 삶의 공허함을 단순히 그대로 설명해놓은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동질성에 대한 실천적인 안내서로서 차이가 사라진 세계이며, 따라서 의미가 사라진 세계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전시공간과 미술품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한 다니엘 뷔랑
프랑스의 개념미술 예술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1938~)은 파리 외곽의 블론뉴 빌랑쿠르에서 태어났고, 미술직업학교와 파리의 국립학교를 마치고 1958년부터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술가에게 작업실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정은 우연의 소산이기는 하나 그의 작업의 본질에 충실히 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순수 미술의 체계와 단절하려는 그의 의지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는 1965년부터 작품에 흰색과 다른 한 가지 색을 번갈아 사용하여 제작했는데, 갑판의자 같은 수직 줄무늬가 늘 특징을 이루었다. 폭이 항상 8.7cm(2mm의 오차가 있다)인 이런 줄무늬는 시각적 도구로 광고판이나 갤러리의 설비 등에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단기적인 작업이었다. 줄무늬를 “실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미술품”이라고 강조한 그는 특히 전시공간과 미술품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관습적으로 갤러리 안에 전시된 작품들이 철거하게 되고 그 공간은 늘 비슷한 것으로 남게 되는 데 반발해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직 컬러 줄무늬를 갤러리만이 아니라 건물 외부와 광고게시판, 잡지 등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연출했다. 그의 목적은 형식적 흥미와 미적 호소, 그리고 정감적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미술품에 집중된 주의력을 작품을 둘러싼 장소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정치화한 개념미술과 제도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 중심이 된 초기의 사례였다.

뷔랑은 1967년 1월 3일 스위스 예술가들 올리비에 모세Olivier Mosset(1944~)와 니엘 토로니Niele Toroni(1937~), 프랑스 예술가 미셸 파르망티에Michel Parmentier(1938~2000)와 함께 파리의 장식미술관에서 ‘청년회화전 Salon de la Jeune Peinture’에서 시위를 벌였다. 네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위했는데, 뷔랑은 빨강과 흰색 세로줄로, 모세는 흰색 바탕에 검은 원으로, 파르망티에는 회색과 흰색의 가로줄 무늬로, 토로니는 30m 간격으로 50이라는 숫자의 붓자국을 주사위의 점으로 작업했다. 그들이 작업하는 동안 확성기에서는 ‘뷔랑, 모세, 파르망티, 토로니는 여러분이 지성인이 되기를 충고합니다’라는 말을 외쳐댔다. 한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은 당혹해하는 관람자들에게 종이를 나눠주며 ‘확실히 이것은 뷔랑, 모세, 토로니, 파르망티에의 회화를 바라보는 문제일 뿐입니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뒤샹은 “정말 실망스러운 해프닝이다. 누구도 이보다 더 하지 못할 걸!”이라고 말했다. 뒤샹이 사용한 해프닝이란 말은 사실 개입이란 뜻이다. 회화는 오로지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회화가 어딘가에 놓임으로써 그것은 제도적이든 문화적이든 그 문맥에 대한 관심을 결정적으로 끌어낸다. 이런 점에서 회화는 정치적 의미까지도 갖게 되는 것이다. 야간 집회가 끝난 뒤 그들은 작품을 치우고 대신 ‘뷔랑, 모세, 파르망티에, 토로니는 전시를 하지 않는다’라고 쓴 슬로건을 남겨 두었다. 배포한 인쇄물에서 그들은 구성에 관한 전통적인 가정들, 오브제의 재현, 정신적 보상, 그리고 에로티시즘, 일상 환경, 정신분석, 베트남전을 포함한 광범위한 요소들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회화 방식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화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물질의 특성과 변화과정을 중시한 브루스 나우먼
인디애나의 포트웨인에서 뉴욕으로 온 브루스 나우먼은 다소 이렇다 할 목적 없이 대학을 다닌 끝에 느지막이 미술을 발견했으며, 1960년대 중엽 캘리포니아 주로 가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가 훗날 회상한 바에 의하면 그의 결정적인 순간은 1966년, 그가 갓 취득한 대학원 학위를 들고,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할 일 없이 보낼 때 찾아왔다. 그는 루샤의 사례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환경의 특정 측면을 레디메이드 미술품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간단한 언어공식에 눈을 돌렸다. 간단한 언어적 정의는 특정한 존재자들을 가지고 견고한 조형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존재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실재하면서도 그것들을 산출해낸 생각 이전에는 전혀 존재가 없던 것들이었다.

나우먼은 1965년에 작업실을 빌린 후 사물 사이의 공간 생김새, 예를 들면 <내 의자 밑 공간 생김새 A Cast of the Space under My Chair>(1965~68), <바닥 위에 놓인 두 개의 정육각형 상자 사이의 공간으로 만들어진 플랫폼>(1966) 같은 것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품들은 모든 의미가 제거되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란 의미만이 남아 있는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 속에서 시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의미의 사라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이 무엇의 주형물인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나우먼은 정체성 중심, 혹은 자아 중심의 개념을 거부했는데, 거울의 반사작용이 이미지를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그의 작업의 실체를 이루는 조형물들에서, 그는 가장 손쉽고 값이 싼 점성의 재료들인 석고, 라텍스, 파이버글라스, 시멘트 등을 사용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면서 하나의 단순한 절차로 그의 언어적 요구사항들에 실체를 제공하고, 끝마무리는 대개 우연에 맡겨두었다. 파이버글라스 긴 원통형의 관을 반으로 자른 형태를 벽과 바닥에 기대놓는 등 재료의 물질적인 특징과 실제 공간을 강조한 그의 작품은 전형적인 미니멀리즘의 유형이었다. 물질의 특성과 변화과정을 중시한 점에서 그의 작품은 저드와 안드레의 미니멀아트 작품과는 구분이 된다. 그는 석고 틀을 이용하여 파이버글라스를 뜨면서 달라붙은 석고나 표면의 울퉁불퉁한 질감이나 얼룩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작품이 제작과는 과정을 작품의 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나우먼은 1966년에 <장미에는 이빨이 없다 Rose has No Teeth>를 소개했다. 그것은 나무에 부착한 납판에 ‘장미에는 이빨이 없다’라는 명제를 새긴 것이다. 이 명제는 언어의 오용으로 생기는 문제를 비판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1953)에서 인용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불합리한 논제의 가정을 언어로 분석한 데 반해 나우먼은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는데, 납판 위에 글을 새기고 그것을 정원의 나무에 못질하여 붙였다. 나우먼은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진실인가?’, ‘그것이 참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은유적으로 사실성을 지니는가?’ 등의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진실과 말하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자신의 작품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은 나우먼은 몇 년 뒤 나무가 자라서 자신의 작품을 능가하고 그 작품은 없어져버릴 것임을 지적했다. 그는 납판을 폴리에스테르로 여러 개 주조해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나우먼은 1960년대 중반에 네온튜브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1965년경 일부 작가들이 네온튜브를 사용하고 있었고 댄 플래빈의 작업이 두드러졌다. 그의 작업은 팝아티스트들이 즐겨 사용한 현대 문명의 도상이나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한 대량생산된 사물의 외관의 차용과는 달리 예술가의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매체 사이의 이질감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창사인 혹은 벽사인 Window or Wall Sign>(1967)은 ‘진정한 예술가는 신비적인 진실을 밝힘으로써 세상을 돕는다 The true artist helps the world by revealing mystic truths’라는 문구를 달팽이 모양의 네온튜브로 만든 것이다.

격언이나 간곡한 권고조의 진술을 지은 제니 홀처
문자만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제니 홀처Jenny Holzer(1950~)는 오하이오주의 갤리폴리스Gallipolis에서 태어났고, 1972년에 오하이오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에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 후 1977년에는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인디펜던트 스터디 프로그램 과정을 거쳤다. 그녀는 회화와 판화를 주로 제작한 추상 예술가였지만, 뉴욕으로 이주한 뒤 언어와 공공 미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명확한 의사전달의 도구인 텍스트를 자신의 작업 재료로 선택한 그녀는 사회적·문화적 현상으로부터 개인적 일상의 삶에 이르는 다양한 격언이나 간곡한 권고조의 언어적 진술을 짓고 이를 포스터로 인쇄하거나 T셔츠와 모자에 새기고, 1977년에 ‘정보와 선전 사이에는 미묘한 선이 존재한다’와 같은 문구를 인쇄한 커다란 판지를 건물이나 벽에 부착한 <진부한 문구 The Truisms>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개인이 경험한 사실이 유용하다는 걸 보여주기 원했으며, 또한 하나의 ‘진부한 문구’를 다른 것과 병렬했을 때 생기는 불합리한 효과를 보여주려고 했다. 이는 T셔츠, 스티커, 금속판, 전광판 같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다른 연작으로 이어졌다. 특히 전광판은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타임스스퀘어와 같은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그녀 특유의 형식으로 널리 알려졌다.

홀처의 작품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1979년에 시작한 <선동적인 에세이 Inflammatory Essays> 연작은 100여 개의 단어들로 이뤄졌다. 그녀는 “그것들은 사람들이 30초 동안 쳐다보는 전광판에 띄우기에는 너무 길다. 오히려 길거리나 으슥한 뒷골목에 어울릴 성싶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 주체하지 못하므로 내 글을 읽고 화를 내야 할지 생각해볼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작품이 더욱 웅장해지고 고도의 기술을 지닐수록 사람들은 언어보다는 작품의 시각적 특징에 더 많이 주목했다. 199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예외적으로 큰 예산을 들여 제작한 섬광 때문에 홀처의 작품은 디스코테크처럼 보였다. 빛의 율동이 언어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그녀의 전시공간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뉴욕 시내,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 호텔,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 야구장 같은 대중적인 장소로 확대되었다.

2. 재료와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참여를 중시한 아르테 포베라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작품은 자의적으로 보잘것없고 진부한 재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개 환경미술의 성격을 띠고 종종 강하게 극적인 요소를 지녔다. 아르테 포베라의 첫 전시회가 1967년 9월에 열렸으며, 참여한 예술가는 이탈리아 북부 산업 중심지인 도시 투린 태생의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1940~94), 투린 태생으로 1959년에 밀란으로 이주한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abro(1936~2007), 토리노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조바니 안셀모Giovanni Anselmo(1934~), 조각가 피에르 파올로 칼초라리Pier Paolo Calzolari(1943~), 체험과 지각의 본질, 그리고 실재와 재생산의 관계를 탐구한 에밀리오 프리니Emilio Prini(1943~), 야니스 쿠넬리스, 줄리오 파올리니, 마리오 메르츠, 피노 파스칼리 등이었다. 아르테 포베라에 관한 많은 글을 남긴 미술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1940~)는 1967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일상적인 것이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 물리적 현존성과 행동이 미술이 되었다. 도구로서의 언어의 근원들이 새로운 언어학적 분석에 종속되었다. 그것들이 새로 태어났고, 그 속에서 새로운 휴머니즘이 발생했다”고 적었다.

포베라는 이탈리아어로 ‘가난한’이란 뜻이다. 보에티는 1967년 후반에 「선언문 Manifesto」을 발표했는데, 노란색, 장밋빛색, 초록색, 흰색 등을 칠한 포스터였다. 그는 포스터를 800점 제작하여 동료 예술가들과 이탈리아의 미술계 인물들에게 발송했다. 이탈리아어로 선언문manifesto이란 명사는 포스터나 게시판이란 의미이다. 열두 명으로 구성된 아르테 포베라가 1960년대 말 유럽에서 진행된 일련의 예술적 개입방식 중 가장 진정성이 있고 독립적인 것을 창출했다. 미국 미술의 헤게모니, 특히 미니멀아트에 맞서 겨룬 아르테 포베라는 세계대전 이전의 이탈리아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그것이 지닌 모든 내적 모순과 함께 전후의 맥락 안에 복원시켰다.

아르테 포베라를 가장 명확하게 규정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마리오 메르츠, 야니스 쿠넬리스, 피노 파스칼 리가 제작한 일련의 작품이다. 아르테 포베라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그들은 특이한 유형의 아상블라주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테크놀로지는 물론 레디메이드나 오브제 트루베object trouvé(발견된 오브제)의 패러다임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구성물은 그런 전략들을 연속적으로 서로 관련지음으로써 테크놀로지적 요소를 진부하게 만들고, 장인적 측면에 다시금 정화의 의미를 부여했다.

글의 형상과 의미를 작품의 일부가 되게 한 마리오 메르츠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밀라노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성장한 마리오 메르츠Mario Merz(1925~2003)는 대학에서 2년 동안 의학을 공부하고, 2차 세계대전 때는 파시즘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부터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고 1954년에 토리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1966년까지 신문지, 병, 우산, 레인코트, 튜브 등 일상 소재를 사용하여 소비주의 미술에 반기를 든 전위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1967년에 아르테 포베라 운동에 참여했다.

메르츠는 1979년에 적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르테 포베라는 대량생산 상업 물질로부터 나와 기술적으로 예술적 아이디어를 나타내기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아르테 포베라가 넓은 의미에서 숙명적 가치를 떠받치는 것으로 되돌려주는 예술적 표면의 몇 가지를 파괴했거나 불명료하게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아르테 포베라가 가장 복잡한 표면의 정체, 필드의 정체, 혹은 벽돌, 돌, 혹은 시멘트로 쌓은 벽의 수직적 정체 등은 물론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가치를 수여하기 위해서 캔버스를 표면처럼 제거했다는 것이다. 아르테 포베라는 서까래에 밀착하고 나무에 밀착한다.

이런 대안의 숙명-표면surface-destinies이 고정시킨 프로그램의 억압으로부터 미술을 자유롭게 하는데 새로운 도상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상반된 실재들 가운데서 작동하는 장치를 전통을 지탱하는 데 있어 미술을 포함시키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상이나 도상들과의 관계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오히려 미술을 자유롭게 해준다. 사람들은 표현주의, 고야, 라파엘전파의 도상들, 혹은 야수주의의 도상들 가운데서 관계에 관해 말할 수 없다.

이런 새로움의 감각이 미술을 보호하지 못하며 미술로 하여금 종종 실재, 오브제, 그리고 그 밖의 가치를 위한 숙명적인 언어, 그 밖의 읽을거리 사이에서 작동하는 도구가 되게 만든다. 예를 들면 개념미술은 인쇄된 단어들, 명료한 글쓰기, 그리고 황급하게 신경질적이며 본능적인 필치로 휘갈겨 쓴 편지 사이에서 작동하는 도구이다.

‘거울 회화’로 유명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비엘라 태생으로 토리노에서 공부한 후 1957년까지 미술품 복원가인 아버지의 조수로 일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1933~)는 1956년 자화상 연작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60년대 초에 스테인리스 스틸 작업을 거쳐 거울을 사용하여 환영과 실재를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1962년에 시작한 ‘거울회화’는 광택이 나는 강철판 표면 위에 채색된 형상과 반사된 관람자의 모습을 대치시킨 것이다. 대체로 정지 동작의 실물 크기 인물 사진을 얇은 반투명지에 베낀 뒤 윤곽선을 따라 인물을 오려내어 광택을 낸 얇은 강철판에 붙이고, 어두운 색조로 마무리하며, 형상 주변 관람자의 모습이 비칠 수 있는 곳에 철판을 놓은 것이다.(샘 헌터 620) 그의 회화 속에는 누드 여인이 서 있거나 정치적 시위를 하는 사람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사진 이미지에 움직이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회화 속에 관람자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작품에서 현실감을 주는 착시현상이 극단화되고 단색조의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지닌 비현실성도 또한 극단화된다. 관람자가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피스톨레토는 지각의 두 단계, 즉 금속 표면에 비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와 회화 속의 정적인 인물을 다루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피스톨레토는 1964년 「마이너스 예술가 A Minus Artist」란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작업에 관해 적었다.

캔버스에 관한 나의 첫 의문은 나 자신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으로 미술은 단지 이차적 실재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의 작업은 두 이미지, 즉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내가 제안한 자신의 모습을 아주 닮게 하는 직관적인 방법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거울 이미지 위에 그림을 겹쳐놓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런 행위로 탄생한 구상적 오브제가 나로 하여금 삶 내에서처럼 회화 내에서 주어진 두 실재가 상징적으로 관련되었다는 걸 탐구하게 했다. 나는 정말이지 거울에 의해서 구멍이 뚫린(물론 물리적인 의미가 아닌) 벽을 넘어서 회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물리적으로 회화 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바라보고 있는 유리(거울)를 넘어서’ 자신의 존재와도 같은 허구를 창조했다.

반형식주의 미술에 속한 피노 파스칼리
야니스 쿠넬리스의 작품에 나타난 지역적 특수성의 신화에 대한 강조와 자연적이고 비형식적이며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경험에 대한 강조는 피노 파스칼리Pino Pascali(1935~68)의 1960년대 중반의 작품들과 비교된다. 바리에서 태어나 1955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회화를 배운 파스칼리의 작업에서도 연극성, 서사, 재현의 관습이 회화와 조형물 제작에 다시 도입되었다. 이것은 1960년대 내내 미국의 조형물 제작을 지배한 현상학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접근의 개념들과 명백히 모순되었다. 이런 사례로 1964년부터 진행된 혼합작업 <소극장 Teatrino>(1964)이 있다. 여기서 회화는 해체되고 조각은 연극 무대의 혼성 상태로 변형되었다. 이런 형식을 통해 파스칼리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어디까지 서사를 금지시켰으며, 자아규정의 기획 하에서 언어와 퍼포먼스를 삭제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와 쿠넬리스의 작업이 보여주듯이 예술적 매체, 혹은 미적 범주나 장르가 지닌 것으로 가정되는 순수성은 부정되어 이미 재고의 여지없이 혼성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혼성의 증명이 아르테 포베라 미학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비유로 점철된 작품을 소개한 야니스 쿠넬리스
그리스의 피레우스에서 태어나 1956년 로마에 정착한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1936~)는 아카데미아 디 벨르 아르티Accademia di Belle Arti에서 회화를 공부하면서 이 시기에 알베르토 부리와 루초 폰타나 등 이탈리아 앵포르멜 화가들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1958년 도식적 기호와 숫자, 문자 등을 종이에 스텔실로 찍어 대형화를 제작했다. 그는 1960년에 이런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작품과 함께 그림에 포함된 악보를 좇아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1966년에 설치와 퍼포먼스 형태로 입체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삼베자루를 꿰매어 붙인 뒤 벽부터 바닥까지 걸어놓은 <무제 Untitled>는 회화와 결별하고 삶이 개입되는 예술을 지향하려는 그의 미학적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1967년에 아르테 포베라 운동에 가담한 쿠넬리스는 불과 석탄, 솜, 회수용 폐목재, 파괴된 돌, 커피나 곡물로 가득 채운 황마자루, 심지어는 부서진 석고까지도 즐겨 사용했으며, 1967년에 강철로 제작한 꽃 한가운데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게 했다. 그는 분젠 버너를 수차례 사용했는데, 관습에 불을 붙이는 상징적 행위였다. 그는 1969년 신선한 커피를 일련의 열두 개의 접시 위에 올려놓고 줄을 달아 수직으로 매달았다. 미술관에 커피 냄새가 진동하여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했다. 큐레이터는 그의 지침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신선한 커피를 보충했다. 커피는 인체의 감각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한 기억도 상기시켰다. 뒤샹이 레디메이드에 늘 냉정했던 반면 그는 살아 있고 변덕스러우며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뒤샹 식의 레디메이드를 시적으로 작업한 것은 단순히 이탈리아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기본적인 재료와 형태로 작업하면서 그것을 낯설게 만들었다.

비가시적 작품을 제작한 피에로 만초니
손치니에서 태어나 문과 계통의 학교를 중퇴하고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아카데미에서 잠시 공부한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1933~63)는 다다이즘, 특히 마르셀 뒤샹의 영향을 받았다. 1955년까지 전통 양식의 풍경화를 그리다가 가위, 압핀 등 주변에서 쉽게 발견하는 사물들을 회화에 이용하거나 타르에 묻혀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에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허무주의 경향은 루초 폰타나의 영향이었다.

1957년은 만초니가 폰타나의 비호를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해로 그가 도약할 수 있었던 데는 그해 1월 밀라노에서 열린 이브 클랭의 모노크롬 전시회의 영향이 컸다. 여기에 또 다른 스승 알베르토 부리의 빈궁의 미학도 도움이 되었다. 삼베자루 아상블라주 작업을 하던 부리는 곧 불에 탄 플라스틱 조형물로 넘어갔는데, 이는 1952~53년 이탈리아에 체류하던 라우셴버그를 매료시켰다. 만초니는 고령토에 캔버스를 적셔 만든 흰색 모노크롬 회화 <아크롬 Achrome>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캔버스 위에 플라스터를 발랐지만 나중에는 헝겊에 흰 고령토를 흡수시켜 캔버스에 부착했다. 또한 유리솜과 폴리스트롤 같은 재료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의 의도는 클랭의 것과 같아 보였다. 그는 순수 재료가 순수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체가 흰색인 <아크롬>은 만초니가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연작의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대단히 짧은 기간에 극적으로 발전했다.

만초니의 연속된 흰색 작품들은 곧 클랭의 적수였던 마르셀 뒤샹을 좇게 되고 그때부터 그는 폰타나에게로 되돌아가 그가 보여준 부정의 가르침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개입을 최소화하여 콜라주도 없고 회칠도 없는 손대지 않은 흰색 재료들의 파편을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스티로폼이나 유리섬유 같은 재료는 회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전후 이탈리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산업 생산물의 유독성과 공사장의 위험성을 연상시켰다. 종종 붉은 벨벳 상자 속에 놓여 있어 역한 느낌과 에로틱한 느낌이 맞닿은 물신처럼 보이는 유리섬유 작품 <구름 Clouds>(1962)은 키치에 대한 폰타나의 열광의 본질을 명확히 드러냈다.

3. 땅에서 비롯된 대지미술
대지미술Land art(Earth art, 혹은 Earth works)은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예술가마다 사용한 기법과 내세운 의도가 현저히 다를 뿐만 아니라 작품도 매우 다양하다. 건물을 반쯤 허물기, 바윗덩어리와 수 톤에 이르는 흙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구덩이, 전망대,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경사로 만들기, 단층을 파헤치기, 산허리를 절단하기, 화산을 구획하기, 사막의 바닥에 드로잉하기, 눈 위에 자취 새기기, 돌개바람 추적하기, 염분이 높은 호수 위에 번개 부르기, 공공쓰레기장에 아스팔트 붓기, 커튼으로 계곡 막기 등 다양하다. 이러한 작업은 비용이 많이 들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월터 드 마리아는 대지미술을 고립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고립을 타파해야 하고 사진은 이런 시도에서 주요한 매체였다. 대지미술의 대부분 예술가들이 의식적으로 사진매체의 가능성을 활용했다. 그들은 공간감과 거대한 크기를 복구시키려고 화면 구성을 연구했다. 이러한 사진은 책과 잡지로 유포되는 단순한 기록, 작품과 그 과정을 이해시키려는 교육적 몽타주의 요소, 전시 대용품, 혹은 상시적이거나 지속 가능한 설치일 경우 그 현장을 방문하도록 자극하는 것 등 다양한 기능을 띤다. 대지미술품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마이클 하이저는 “여러분은 지구의 반대편, 이집트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러갈 수 없다고 불평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가세오, 가서 보면 될 것 아닙니까”라고 대꾸했다.

작품
1 마리오 메르츠의 <지압의 이글루 Igloo of Giap>, 1968, 쇠, 철사줄, 네온튜브, 흙을 넣은 부대, 120×200×200cm. Collection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2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그와 그녀의 대화 He and She Talk>, 1964, 매끈한 스테인리스스틸에 사진 콜라주, 120×224cm. Collection the artist
3 야니스 쿠넬리스의 <무제 Untitled>, 1969, Galleria L'Attico, Rome.
4 피에로 만초니의 <아크롬 Achrome>, 1958, 캔버스에 고령토와 천을 부착, 80×100cm.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5 월터 드 마리아의 <번개 치는 들판 The Lightning Field>, 1977, 스테인레스 스틸 막대들로 평균 높이 6.29m, 전체 면적은 1,609.34×1,005.84m. Quemado 근처, New Mexico
6 로버트 스미스슨의 <산호가 있는 코너거울 Corner Mirror with Coral>, 1969, 91.5×91.5×91.5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7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 방파제 Spiral Jetty>, 1970, Great Salt Lake, Utah, black 개처, salt crystals, earth, red water (algae), 1.06×4.57×457m. James Cohan Gallery, New York
8 마이클 하이저의 <이중 부정 Double Negative>, 1969~70, 1969~70, 240,000톤의 흙을 재배치, 457.2×15.24×9.14m. Mormon Mesa, Overton, Nevada.
9 크리스토의 <연속 울타리 Running Fence>, 1972~76, 스틸 막대, 스틸 케이블, 나일론, 높이 5.49m, 전체의 길이 3.92km. Sonoma and Marin countries, California
10 크리스토의 <라이크스타그 포장 Wrapped Reichstag>, 1971~95.
11 리처드 롱의 <도보에 의해 만들어진 선, 영국 A Line Made by Walking, England>, 1967, 런던. 앤터니 도페이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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