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클럽2
취향의 문제
집단의 취향 good taste and bad taste, bad painting, Punk art
Vitaly Komar비탈리 코마르 and Alexander Melamid알렉산더 멜라미드, <America's Most Wanted 미국이 가장 원하는>(1994), 워싱턴과 사슴 한 쌍, Least
Arthur C. Danto(1924-): After the End of Art(1995),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1981)
미술품에 대한 정의는 각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다. 각 시대의 미적 판단은 그 시대 사람들의 취미와 미에 대한 관념에 근거하고 취미와 미에 대한 관념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고급미술이냐 저급미술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혹은 전시장에서 “저것은 미술이 아니야!”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이 미술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고급미술high art이 아니고 저급미술low art임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미술품이 반드시 고상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미술은 고상한 미적 판단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때 모더니즘 이론가들은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이란 말로 미술품들을 구별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미술품이 왜 고급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에는 미적 등급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미적 판단의 척도가 있을 따름이다.
이전에는 양식들이 미술품의 공통성을 묶는 범주 또는 정체성으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양식이 동일하게 취급하며 단순한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양식은 형식과 같은 말로서 양식의 차이는 미술품 내용의 차이와는 무관하고 다만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형식만이 다를 뿐이다. 반드시 취해야 할 양식도 가장 우량한 양식도 없는 이유는 형식이란 동등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워홀의 상자와 모리스 그리고 세라의 펠트와 고무조각들 모두가 일상의 오브제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분류되지 않고 고상한 예술의 오브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한 오브제들이 그것들이 지닌 일상성 말고 그 밖의 무엇에 관한 것인가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오브제들에 관한 것과는 다른 예술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 이를 규명하는, 즉 미술품과 비미술품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로서 이는 또한 미술품을 규정할 철학적 근거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작품
1-뉴욕 61 도널드 저드, <무제 Untitled>, 1984, 알루미늄에 색을 입힘, 150×900×150cm. Collection of the artist
미니멀아트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 도널드 저드는 작품에 대칭을 사용한 데 대해서 “구성의 효과를 모조리 없애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드는 미술에서 각 부분들 간의 상관적 관계를 피하고 주관적인 결정을 제거하는 논리적 체계를 고안하려고 했다. 1964년과 1968년 사이에 그는 여러 가지 요소로 된 작품과 더불어서 단일 요소의 벽 부조도 계속 제작했다. 구성요소 사이의 간격은 수학적 원칙에 따라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했다. 이는 시리얼아트Serial Art의 일례이기도 한데, 시리얼아트는 체계적인 미술의 한 분파로 미니멀아트라는 넓은 범주에 속하며, 벽돌, 시멘트 블록, 자기 자석 등 단순하며 획일적인 공업 재료들이 구성요소로서 엄격한 치수 체계에 따라 조립된다.
2-타센 1102 솔 르윗, <모듈러, 스텝스 Modular Piece, Steps>, 1971, 나무에 흰색을 입힘, 61.6×61.6×61.6cm.
도널드 저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군복무를 한 솔 르윗은 1964년부터 단색의 물감을 칠한 많은 나무 입체작품을 제작하면서 그것들을 벽에 고정하거나 좌대 없이 바닥에 설치했다. 르윗은 작품의 개념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고 미술품은 이러해야 한다는 어떠한 기존 관념과도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개념적 질서가 시각적 혼란으로 빠지는 특이한 지각의 와해 현상에 도달했다. 그는 “개념은 작품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고 했다. 그는 1968년부터 벽에 직접 드로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실행한 것이 아니라 제도공들을 고용해 지침을 주고 완성하게 했다.
3-예일 10 칼 안드레, <Steel Magnesium Plain>, 1969, 36개의 정사각형 판, 각 정사각형 판은 30.5×30.5cm, 전체는 182.9×182.9cm.
칼 안드레의 작품은 미니멀아트로 분류되며, 또한 시리얼아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는 스티로폼이나 벽돌, 시멘트 블록, 자성체 등 동일한 형태의 공업재료를 부착하거나 접합시키는 과정 없이 수학적 일정한 체계에 따라 쌓아올려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해체되었다. 이 작품은 36개의 정사각형 알루미늄판과 마그네슘판이 모여 정사각형을 이루며 바닥에 설치된 것이다. 알루미늄판과 마그네슘판을 번갈아 배열하여 장기판 무늬가 되게 했다. 관람자는 작품 위를 걸어 다님으로써 좀더 능동적으로 작품과 관계를 맺도록 도전받는다. 그의 작품에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고정된 방향이나 좌대도 없고, 판 전체의 두께 외에는 어떤 깊이도 없다. 각 판은 똑같은 비중으로 모여 바닥 자체처럼 만질 수 있는 사물로, 어디든 밟을 수 있도록 존재한다. 안드레는 판들을 배열함으로써 시각의 영역을 규정한다. 그러나 관람자는 자신의 시각과 촉각 그리고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스텔라는 “보이는 것이 여러분이 보는 것 그 자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36개의 정사각형 알루미늄판과 마그네슘판이 그러하다. 스텔라와 안드레는 유사한 태도로 작업에 임했다. 안드레는 “나는 분명 어떤 종류의 개념미술 예술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 작품의 물리적 실존이 그것의 개념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런 미술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미술 욕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가 원한 것은 순수한 내용으로 미술로서의 미술이었다.
4-타센 1103 댄 플레이빈, <무제 6 Untitled(to Donna) 6>, 1971, 노랑, 핑크, 파란 현광등, 코너까지 243.8cm.
댄 플레이빈의 작품은 벽에 고정된 상자들로 단색으로 칠해졌고, 한쪽 면에 다양한 종류의 전구와 형광등을 고정시킨 것이었다. 그는 형광등 불빛과 네온 빛을 사용하여 정적 환경을 창조했다. 그가 사용한 소재는 단순한 선과 직사각형의 구성으로 배열한 네온튜브였다. 이런 구성은 말레비치, 타틀린, 몬드리안과 같은 단순화를 지향한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다. 그는 러시아 구성주의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결합시켰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사용된 네온튜브를 현대의 테크놀로지적인 물신으로 간주했다.
5-마틴 3 애그니스 마틴, <무제 No. 7 Untitled No. 7>, 1977, 캔버스에 인디아 잉크, 흑연, 제소, 182.9-182.9cm. Walker Art Center
애그니스 마틴은 1964년경 정사각형의 모노크롬 캔버스를 수평 수직의 명확한 격자로 나누는 그녀만의 형식에 도달했다. 그녀가 단색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 칠한 바탕에 연필로 그린 가느다란 선들은 첫눈에 알아보기 어려우며 관람자가 그것에 주목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것들을 보는 데 겪는 어려움이 곧 그 작품이 제작된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인식으로서 화면이 망막에 일으키는 반응이다. 손으로 줄을 긋는 행위는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기하학은 비개성적인 것이지만, 흑연이 자국은 남기는 과정에서 미세한 사고를 거의 무한정으로 일으키게 한다. 이런 회화는 주장하는 바가 별로 없는 겸손한 것인 동시에 관람자의 시간과 집중력을 극도로 요구한다. 마틴은 “나의 캔버스는 정사각형이다. 그러나 그 위의 격자는 결코 정사각형이 아니다. ... 내가 정사각형의 격자형 표면을 직사각형들로 덮을 때 그것은 정사각형의 무게를 경감시키며 그 힘을 파괴한다”고 했다.
6-모마 421 로버트 라이먼, <쌍둥이 Twin>, 1966, 면에 유채, 192.4-192.6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애그니스 마틴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결합하여 무순적 조건을 보여준 로버트 라이먼은 프로세스아트 예술가로 간주되었는데, 그의 작품에는 재료를 처리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흰색>로 불린 일군의 작품에서 라이먼은 흰색 유화물감을 듬뿍 묻힌 5cm 두께의 붓으로 캔버스를 수평으로 가로질러 한 번에 20-25cm 정도 칠하다가 물감이 떨어지면 다시 물감을 묻혀서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물감이 옅어지는 곳과 물감을 다시 묻혀 붓질을 새로 시작했기 때문에 물감이 도톰하게 올라온 곳 사이에는 역간의 끊김이 보인다. 라이먼은 회화란 무엇을 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만이 오로지 중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온통 하얀 모노크롬회화를 통해 물감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각기 다른 화면에 반응하는 방식의 효과에 관심을 기울였다. 포착하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틀에 팽팽하게 고정시킨 캔버스뿐만 아니라 고정시키지 않은 캔버스를 비롯하여 넝마 펄프로 제작된 수제 종이, 플라스틱, 강철에 입힌 무광 안료, 칠보 등과 같이 매우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관람자는 회화의 대상이 바로 회화 그 자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라이먼은 자신의 회화에서 수평이나 수직의 방향을 강조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중립적인 정사각 형태를 선호했다. 그는 재현적인 어떤 가치도 배제된 물질성을 표현하는 회화와 입체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회화를 보면 흰색 표면이 모두 비슷해 보인다. 라이먼의 작품에 대한 패널토론회가 1993년 늦게 뉴욕의 모마에서 열렸을 때 그의 회고전을 기획하고 패널토론회의 사회를 본 로버트 스토어는 토론회 제목을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로 정했다. 스토어의 입장은 회화는 죽었으며 라이먼의 전형적인 흰색 사각형과 같은 작품은 회화의 내적 고갈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7-모리스 5 모리스의 <Untitled (L beams)>, 1965 and 1967, 세 개의 채색한 합판, 243.8-243.8-61cm. 원래의 것은 사라짐.
로버트 모리스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관계적’, 혹은 ‘전체론적’ 미학을 표방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거대한 L자형 구성물이 하나는 옆으로 바닥에 뉘이고, 다른 하나는 똑바로 앉아 있게 하고, 세 번째의 빔은 양 끝으로 아치형을 이루며 서 있도록 했다. 중력의 당김이나 빛의 방출에 대한 감각이 각각의 실제 두께와 무게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세 형태들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간의 효과로 인해 각각의 형태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모리스는 1963년 가을부터 거대한 널판, 기둥, 현관 형태의 구성물과 같은 합판 다각형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제작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상자>을 텅 빈 정육면체로 제작했다. 이 상자는 한 면이 약 25cm인 보통 경목 조각을 못질로 조립한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녹음기에서는 이 물건을 만들 때에 들어간 작업, 즉 톱질, 페이퍼질, 망치질 등의 소리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흘러나왔다. 이 작품은 자기지시적인 것으로 동의 반복적이며 재귀적인 성질을 띠었다. 모리스는 그의 작품이 단순히 방 안에 있는 다른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방 안에 있는 다른 것들과 다를 바가 없기를 바랐다.
8-예일 12 로버트 모리스, <무제 Untitled>, 1968, 펠트, 덧테쇠, 365.8-289.6cm, Walker Art Center
모리스는 1967년 여름에 흩어지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는데, 훗날 프로세스아트, 혹은 포스트미니멀리즘으로 불리었다. 그는 1968년 여러 필의 펠트를 벽에 걸어 펠트 자체의 무게로 형태가 형성되는 조형물 <매달린 펠트>를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 전시했는데, 폴록의 회화를 삼차원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반형태」이란 제목의 글을 『아트포럼』지에 기고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조형물 경향을 폴록의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려 그리는 회화와 관련시켰다. 모리스는 또한 「반형태」에서 미니멀리즘 작품의 자의적 배열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니멀리즘의 틀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단위체들을 배열하는 모든 방식이 부과된 것이라는 점이다”면서 이 방식은 “단위체들의 물리성과는 하등의 내적인 관계도 없다”고 했다.
9-세라 2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The Tilted Arc>, 1981, 강철, 3.66-36.6m. 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 Federal Plaza, New York
리처드 세라는 1964년 예일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유럽을 여행하며 2년을 보냈다. 그는 1966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던지기>(1969)는 과정이 제작물이 된다는 점에서 프로세스아트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는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 창고에서 투구를 쓴 전사의 모습으로 가스마스크를 쓰고 투석기 같은 걸 사용해 전시장 공간 구석구석에 녹은 납을 던졌다. 재료, 행위, 장소의 통합은 그의 장소 특정적 조형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기하학적 형태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그는 미니멀리즘의 몇몇 원칙들을 확장시켰다. 공공 조형물 <기울어진 호>는 세라의 첫 번째 뛰어난 작품이다. 이것은 길이 120피트, 높이 12피트의 유연하게 휘어진 코르텐 강철판이다. 이 판은 거리를 향해 오목한 구조로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플라자의 법원과 사무실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과 방문객들은 그들의 일상적 통로가 엄청난 규모에 의해 막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화당의 보수적 관료 두 명이 세라의 조형물 철거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은 세라의 작품을 평범한 개인의 필요에 무감각한, 배타적이며 자아중심적 소수문화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그것을 다른 곳에 옮겨야만 광장이 가졌던 야외 공공장소와 보행자 통로로서의 순조로운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라는 정당하게 모든 자료를 동원해 그들의 공격에 저항했다. 그의 조형물은 1989년에 마침내 해체되었다. 세라의 조형물은 비록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형물이 갖는 전통적 형태인 영원성과 기념비성을 거부함으로써 그 맥락을 조성하고 이를 명백히 한 셈이다.
개념미술
10-뒤샹 201 마르셀 뒤샹,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1915~23, 유채, 납, 납줄, 먼지, 상하 두 장의 유리, 알루미늄, 나무와 스틸 프레임.
이것은 그의 가장 유명하고 과거의 작품들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특유의 말장난이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옷을 벗은 신부를 향한 아홉 명의 유니폼을 입은 독신남자들의 해결되지 못한 열정이다. 독신남자들은 외관상 기계의 모습을 띠며, 그들의 독신기계와 함께 작품 아래에 위치해 있다. 신부는 윗부분에 매혹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정교한 기술은 인간의 열정의 하찮음을 기계화된 형태로 구체화시키려는 뒤샹의 복잡한 개념과 부합되었다. 뒤샹은 예술가가 지식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불쾌해했다. ‘화가처럼 멍청하다’는 프랑스 속담을 언급하면서 그는 사람들이 화가는 사교계의 신사보다 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그가 망막적 회화를 비난한 것은 화가의 수공적 예속에 반대하고 지적 입장을 취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회화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오로지 시각적이거나 망막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미술이 개념적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1-모마 443 조지프 코수스, <하나이면서 세 의자 One and Three Chairs>, 1965.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조지프 코수스는 논문 「철학 이후의 미술」(1969)에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외관’에서 ‘개념’으로 이행하는 혁명을 이룬 것으로, 결국 “현대 미술의 출발이자 개념미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미술 행위란 미술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 즉 수학적 공식이 자체적으로 증명되듯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동어 반복으로 보고 <하나이면서 세 의자>로 예증했다. 그는 레디메이드를 사물, 언어, 사진 복제물 등 세 개의 연관된 부분으로 나눔으로서 확장시켰다. 순수하게 개념적인 이 작품은 하나의 의자와 실물대의 사진 그리고 ‘의자’라는 단어의 사전 속의 정의를 복제한 복사물 한 점으로 구성되었다. 라인하르트가 “예술은 예술로서의 예술이다”라고 했듯이 코수스는 “예술이 예술인 것이 곧 예술이다”를 동어반복으로 설명한 것처럼 의자가 의자인 것이 곧 의자임은 일종의 동어반복이었다. 이와 반대로 형식주의는 “나의 회화가 다른 회화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는 모더니즘의 모토이기도 하다. 형식주의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을 미리 설정하기 때문에 예형론적이므로 코수스는 회화 결코 미술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보았다. 코수스는 196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로 “미술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을 꼽았다. 코수스는 미술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지닌 몇 안 되는 개념미술 예술가 중 하나였다. 코수스는 미술품이 어떤 사물로 구성된다면 “왜 그것은 미술품인가?”하는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이 물음은 곧 모더니즘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린버그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은 형태, 표면, 물감 등과 같이 회화를 그 순수성 속에서 규정해주는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인 모더니즘이 너무 국지적이며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12-개념 141 한스 하케,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A Bunch of Asparagus>(1880)>, 1974.
한스 하케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1974년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이 소장되어 온 경로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 정물화는 1968년 독일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Konard Adenauer(1876~1967)를 기념하여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Wallraf-Richartz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74세의 나이에 총리가 되어 88세까지 총리를 지냈다. 하케는 마네의 작품이 그려진 때부터 그것이 쾰른의 그 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의 경로를 추적했다. 첫 번째 소유주로 미술사학자이자 콜렉터인 유대계 프랑스인 샤를 에프뤼시Charles Ephrussi(1849~1905)를 거쳐, 독일인 출판가이자 화상 파울 카시러Paul Cassirer(1871~1926)와 유대계 독일인 화가 막스 리베르만으로 이어졌다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리베르만의 손녀에게서 작품을 구입한 미술관의 후원회장이자 은행가 헤르만 압스Herman Josef Abs(1901~94)로 귀착되었다.
하케는 한 개인이 문화적 후원자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얼마나 쉽게 세탁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패널은 그 소유 역사의 결론으로 압스가 걸어온 길을 분석해놓았는데, 압스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 제3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재정 고문으로 일했으며, 종전 후 1949년 아데나워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복직되었고, 그 밖에도 50여 개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나치에 협조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압스도 종전 후 죄를 사면받기 위해 영국 감옥에서 6주일을 보냈다. 그는 1960년대를 거쳐 미술관에 이 정물화를 기증하게 된 시기까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 자리에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케는 압스가 <아스파라거스 다발>를 구입하기 이전에 그 작품을 소장했던 수집가와 화상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업과 정치적 활동에 관해 세세한 것까지도 밝혔다. 하케의 작업은 큐레이터의 동의를 얻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방으로 간주되었으며, 미술관 경영진은 민주적 투표를 실시하여 그의 작품을 거부했다. 미술관 관장은 하케의 작품이 나치정권과 미술관의 주요 후원자인 압스와의 관계에 시선을 쏠리게 한다는 이유로 전시를 취소했다. 하케는 항의의 제스처로 파울 마엔츠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아스파라거스 다발>의 복제품을 사용했다.
13-예일 98 대니얼 뷔렝, <두 고원 The Two Plateaux>, 1986, Palais Royale, Paris.
프랑스 개념미술 예술가 대니얼 뷔렝은 예술가에게 작업실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정은 우연의 소산이기는 하나 그의 작업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순수미술의 체계와 단절하려는 그의 의지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는 1965년부터 작품에 흰색과 다른 한 가지 색을 번갈아 사용하여 제작했는데, 갑판의자 같은 수직 줄무늬가 늘 특징을 이루었다. 폭이 항상 8.7cm(2mm의 오차가 있다)인 이런 줄무늬는 시각적 도구로 광고판이나 갤러리의 설비 등에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단기적인 작업이었다. 줄무늬를 “실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미술품”이라고 강조한 뷔렝은 특히 전시공간과 미술품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관습적으로 갤러리 안에 전시된 작품들이 철거하게 되고 그 공간은 늘 비슷한 것으로 남게 되는 데 반발하여 뷔렝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직 컬러 줄무늬를 갤러리만이 아니라 건물 외부와 광고게시판, 잡지 등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연출했다. 그의 목적은 형식적 흥미와 미적 호소, 그리고 정감적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미술품에 집중된 주의력을 작품을 둘러싼 장소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정치화한 개념미술과 제도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 중심이 된 초기의 사례였다. 뷔렝은 1970년 『아트 매거진』지에 기고한 글 「비가 온다, 눈이 온다, 그린다」에서 프랑스 소설가, 평론가 모리스 블랑쇼의 글을 인용했다. “미술은 정확하고 엄격한 탐구이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작품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다.”
미국 미술사학자 더글라스 크림프는 『미술관의 멸망에 관하여』(1993)에서 150년 전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쉬가 사진에 의해서 이미지를 만드는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회화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더라도 라인하르트를 비롯하여 몇몇 예술가들에 의해 회화가 설 자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뷔렝의 띠무늬가 회화를 대신하는 순간 “회화의 종말이 최종적으로” 확증되었음을 주장했다.
아르테 포베라
14-샘 헌터 620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그와 그녀의 대화 He and She Talk>, 1964, 매끈한 스테인리스스틸에 사진 콜라주, 120-224cm. Collection the artist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1962년에 시작한 ‘거울회화’로 유명하다. 이는 광택이 나는 강철판 표면 위에 채색된 형상과 반사된 관람자의 모습을 대치시킨 것이다. 대체로 정지 동작의 실물 크기 인물 사진을 얇은 반투명지에 베낀 뒤 윤곽선을 따라 인물을 오려내어 광택을 낸 얇은 강철판에 붙이고, 어두운 색조로 마무리하며, 형상 주변 관람자의 모습이 비칠 수 있는 곳에 철판을 놓은 것이다. 그의 회화 속에는 누드 여인이 서 있거나 정치적 시위를 하는 사람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사진 이미지에 움직이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회화 속에 관람자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작품에서 현실감을 주는 착시현상이 극단화되고 단색조의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지닌 비현실성도 또한 극단화된다. 관람자가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피스톨레토는 지각의 두 단계, 즉 금속 표면에 비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와 회화 속의 정적인 인물을 다루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15-예일 204 야니스 쿠넬리스, <무제 Untitled>, 1969, Galleria L'Attico, Rome.
야니스 쿠넬리스는 1969년 신선한 커피를 일련의 열두 개의 접시 위에 올려놓고 줄을 달아 수직으로 매달았다. 미술관에 커피 냄새가 진동하여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했다. 큐레이터는 그의 지침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신선한 커피를 보충했다. 커피는 인체의 감각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한 기억도 상기시켰다. 뒤샹이 레디메이드에 늘 냉정했던 반면 그는 살아 있고 변덕스러우며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뒤샹 식의 레디메이드를 시적으로 작업한 것은 단순히 이탈리아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기본적인 재료와 형태로 작업하면서 그것을 낯설게 만들었다. 쿠넬리스의 특징적인 작품은 여러 가지 재료 외에도 살아 있는 동물을 이용한 레디메이드 설치였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보다 더욱 연극적인 제스처로 이해된다. 1969년 1월 말 열두 마리를 로마의 라티코 갤러리에 전시하면서 제목을 <무제>라고 했다. 이 설치는 말들을 조형물이나 회화인양 전시실 벽에 열두 마리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매어놓은 것이었다. 12는 상징적인 숫자로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1년의 열두 달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신비한 연상과 관계된 숫자이다. 거기에는 전시실이라는 환경 안에 놓인 말들의 실제 출현뿐만 아니라 말들의 존재가, 그것들의 땀 냄새, 분뇨, 말들이 말발굽을 이동하면서 내는 소음, 폐쇄공포의 감각, 말과 연상되는 마구간, 영웅의 조각상, 악몽 등과 같은 것들이 합해져서 합법적으로 미술품으로 분류되어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해낸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제도적 틀 안에 자연의 대상을 들여온 이 설치는 문화 공간에 자연을 재등장시켜 충격을 가함으로써 아르테 포베라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이는 조각적 오브제를 외부와 분리된 하나의 형태라든지 테크놀로지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담론적 구조로 간주하는 비테크놀로지적, 비과학적, 비현상학적인 예술적 관습뿐만 아니라 언어 이전의 경험을 강조했다. 이 설치는 1976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도 계속되었다.
16-마스터 306 피에로 만초니, <아크롬 Achrome>, 1958, 캔버스에 고령토와 천을 부착, 80-100cm.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피에로 만초니는 고령토에 캔버스를 적셔 만든 흰색 모노크롬회화 <아크롬>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캔버스 위에 플라스터를 발랐지만 나중에는 헝겊에 흰 고령토를 흡수시켜 캔버스에 부착했다. 또한 유리솜과 폴리스트롤 같은 재료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의 의도는 클랭의 것과 같아 보였다. 그는 순수 재료가 순수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체가 흰색인 <아크롬>은 만초니가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연작의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대단히 짧은 기간에 극적으로 발전했다. 만초니의 작품에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허무주의 경향은 루초 폰타나의 영향이다. 만초니는 1959년에 종이에 선을 그은 뒤 돌돌 말아서 그것들을 상자에 넣고 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상자 위에는 선의 길이와 날짜 그리고 자신의 서명을 적었다. 그것은 비물질적이며 비가시적 작품이 되었는데, 상자가 부서지면 그것은 미술품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관람자는 상자 속에 선이 들어 있다고 믿고 그것을 가져가야 한다. 그것은 예술가에 대한 신뢰의 행동이다. 그의 상자는 30달러에 팔렸다.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깡통에 서명하고 표시해놓은 <예술가의 똥> 연작은 현대 미술의 개성 예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깡통에는 ‘예술가의 똥, 내용물, 30g, 신선하게 보존됨, 1961년 5월에 생산되고 저장됨’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클랭과 마찬가지로 만초니는 다다에서 취한 개개의 개념들을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저한 미학적 허무주의도 소생시켰다.
대지미술
17-드 마리아 5 월터 드 마리아, <번개 치는 들판 The Lightning Field>, 1977, 스테인레스 스틸 막대들로 평균 높이 6.29m, 전체 면적은 1,609.34-1,005.84m. Quemado 근처, New Mexico
월터 드 마리아는 미니멀아트, 개념미술, 대지미술의 경계를 오갔다. <의미 없는 작품을 위한 상자>(1961) 같은 초기작에서는 다다적인 아이러니도 보였다. 상자들의 좌대에는 관람자를 위한 그의 설명이 새겨져 있었는데, ‘계속해서 한 상자에서 다음 상자로 물건을 옮길 것. 여러분이 하는 그 행위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었다. 드 마리아는 1960년 3월 「의미 없는 작품」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의미 없는 작품은 오늘날 분명히 가장 중요하고 중요한 미술 형태이다. 의미 없는 작품이 주는 미적 느낌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이유는 개별적 작업에 따라서 다양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작품은 솔직하다. 지성인들은 의미 없는 작품을 이해하더라도 증오한다. 의미 없는 작품은 미술 갤러리에서 팔리지 않으며 미술관의 상을 수상하지도 못한다. 의미 없는 작품은 오늘날 잠재적으로 가장 추상적이며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어리석고 불확정적이며 확실히 결정적이고 다양하며 사람들이 착수할 수 있는 중요한 미술-행위-경험이다.” 드 마리아는 대지미술의 본질을 고립으로 보았다. 그는 1971년부터 구상한 <번개 치는 들판>을 1974~77년에 번개가 빈번히 치기로 유명한 뉴멕시코 주 웨스트 센트럴에 설치했다. 가로 세로 1.6km 1km의 면적에 높이 7m의 거대한 피뢰침 400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했다. 방문객은 작은 오두막에서 번개 치는 걸 바라볼 수 있었다. 물리적·시각적 효력을 지닌 이 기하학적 설치는 광란적인 번개를 뛰어오르게 만들 태세를 갖추었다.
18-개념 82 로버트 스미스슨, <산호가 있는 코너거울 Corner Mirror with Coral>, 1969, 91.5-91.5-91.5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로버트 스미스슨은 반사작용과 거울이미지를 실험하면서 이 작품에서 보듯 채석장에 놓은 거울들을 연속적으로 찍은 사진들과 함께 지도를 병렬시킨 것이다. 그는 뒤셀도르프에서의 ‘전망 69’ 전시회에 7점의 흑백사진 이미지를 소개하며 카탈로그에 “나는 거울을 사용한다. 어떤 의미에서 거울은 실제이면서 반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념과 추상으로서의 거울이며, 개념적 거울이라는 의미로서의 거울이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복잡한 그의 진술의 의미는 거울이 인간의 의식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19-예일 16 로버트 스미스슨, <나선형 방파제 Spiral Jetty>, 1970
로버트 스미스슨의 가장 잘 알려진 구성물은 유타 주의 그레이트솔트 호Great Salt Lake 연안에 나선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나선형 방파제>로서 물의 흐름에 따라 침식되도록 만들어졌다. 진흙과 돌, 소금 결정으로 만들어진 너비 5m, 길이 500m의 인공 방파제였다.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염수호의 독특한 분홍색 빛깔을 포착해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제작한 것이다. 1972년 갑작스레 물이 불어나 <나선형 방파제>는 사라졌다. 그것은 호수 표면 속에서 수면이 낮아질 때까지 또 거품에 덮여 다시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만 감지되는 희미한 이미지 상태로 표현된 채 하늘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작품이 사라지기 이전과 진행과정 그리고 소멸 이후의 영화와 사진, 혹은 그 사건의 줄거리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작품은 따라서 복잡한 장치이자 시간에 따라 포착된 물체, 이미지 그리고 읽을거리의 공동 작업인 것이다. 스미스슨은 이런 새로운 개념을 충분히 발전시키기도 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20-타센 1125 크리스토, <연속 울타리 Running Fence>, 1972~76, 스틸 막대, 스틸 케이블, 나일론, 높이 5.49m, 전체의 길이 3.92km. Sonoma and Marin countries, California
스물두 살 때 조국을 떠난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이며 실험예술가 크리스토는 때때로 대지미술 예술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품은 사실 분류가 불가능하다. 크리스토는 프랑스인 아내 잔-클로드의 도움을 받아 1960년대에 건물들을 포장했다. 이런 작품의 이면에 내재하는 논리는 대상물의 부분적 은폐가 역설적으로 그것의 근본적 형태에 주의를 집중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1968년에 스위스 베른 미술관을 합성섬유와 366m의 로프로 포장했다. 옥외 프로젝트는 엄청난 크기로 인해 기념비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며 연극적인 현장감마저 감돈다. <연속 울타리>는 24.5마일 길이의 미술품으로 캘리포니아 주 북쪽 마린과 소노마 지역을 가로질렀다. 18피드 높이의 흰색 직물 울타리는 동서로 뻗은 축들을 따라서 굽이쳤다. 165,000야드의 직물, 312,000개의 스틸 고리, 2,050개의 막대기, 13,000개의 스틸 닻, 스무 대 이상의 자동차, 60명이 고용되어 1976년 4월부터 9월까지 주 40~60시간씩 일했다. 첫 열흘 동안은 260명이 고용되어 직물 패널을 고정시키는 일을 했다. 울타리가 설치된 후에도 80명의 노동자가 두 주간의 점검기간에 일했다. 긴급 상황을 대비해 50개의 패널을 준비해두었다. 크리스토는 3백2십5만 달러를 지불했다. 프로젝트는 그의 연구, 준비 드로잉, 콜라주, 스케일 모델, 초기 작품과 석판화 원판을 팔아서 충당되었다. 크리스토는 어떤 종류의 후원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21-개념 81 리처드 롱, <도보에 의해 만들어진 선, 영국 A Line Made by Walking, England>, 1967, 런던. 앤터니 도페이 갤러리
리처드 롱의 첫 번째 작업 <도보에 의해 만들어진 선, 영국>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초원의 풀밭에서 그의 왕복보행은 직선의 자취를 새겨놓았다. 그는 그가 왕복한 흔적을 사진으로 남겼는데, 그 사진이 전시되고 팔릴 수 있다고 해도 미술품을 구성한 것은 그의 걷는 행위였다. 그에게 미술품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을 걷는다고 해서 모두가 예술가인 것은 아니다. 롱이 자연을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음으로 해서 자연 속의 존재의 가능성을 제기했으므로 그는 고도의 정치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을 하나의 제안으로 제시하면서 “여러분이 보는 것이 여러분이 만든 그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1967년 이후의 롱의 작업은 영국의 자연에서 출발하여 1969년부터 국외로 확대되어 때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사막이나 적대국에서까지 행해졌다. 그는 걸어가면서 수집한 돌과 잔가지 같은 것을 갤러리로 가져와 원형이나 단순한 기하 형태로 배열 전시했다. 또한 갤러리가 아니라 재료들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며, 산책로를 찍은 사진, 걸어가며 본 것이나 자신의 심리 상태를 쓴 글, 지도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내가 선택한 것, 그것은 걸으면서, 그리고 선과 원, 돌과 햇빛을 이용하면서 미술을 하는 것이다. 내게 사물과 행위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1981년부터 고향을 가로지르는 에이본 강에서 채취한 진흙을 손으로 벽에 바르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롱은 “이것이 가장 적절한 색이다”라고 했다. 롱은 진흙을 물에 섞어 드로잉 했다. 똑같은 것을 갤러리에서도 했는데, 1984년 런던의 앤터니 도파이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때 열다섯 동이의 진흙 섞인 물을 한 동이씩 갤러리 벽에 뿌렸다. 열다섯 개의 커다란 진흙 이미지가 벽에서 흘러내렸다. 진흙이 영구적인 이미지를 벽에 얼룩지게 만든 것이다. 그의 첫 진흙 작품은 1971년 튜린의 지안 엔조 스페로네 갤러리에서 소개되었는데, 바닥에 놓인 작품으로 손으로 물에 섞은 진흙을 사용해 바닥에 패턴이 생기게 한 것이다. 앤토니 도파이 갤러리에서는 바닥이 아니라 벽에 한 것이 달랐을 뿐이다. 물을 지구의 혈관으로 본 롱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