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클럽 강의1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
1.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시기에 태동한 미국의 팝아트Popular art
1960년대 초는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Bob Dylan(1941~)의 저항적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런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으며,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2. 미술품이 수공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한 앤디 워홀Andy(Andrew) Warhol(1928~87)
앤디 워홀은 작품의 소재를 만화와 광고에서 가져왔다. 어린 시절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 토마토주스, 켈로그 콘푸로스트 등이었다. 그는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를 시작으로 영화배우 트로이 도나휴와 워렌 비티를 다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8월 5일 섹스 심벌인 마릴린 먼로가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다음날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 밖에도 캠벨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모나리자, 엘비스 프레슬리, 재키 케네디 등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오브제나 개체들은 미술품 내에서의 반복되고 그리고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한다. 반복과 복제는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키는 걸 의미한다.
워홀은 미술품이 수공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다. 많은 그의 작품이 형판 인쇄를 통해 캔버스에 직접 옮겨졌다.
3. 이민 2세의 성공 신화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미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워홀은 1949년에 뉴욕으로 이주하고 잡지 광고, 쇼윈도 디스플레이, 문구, 책 표지, 앨범 커버 분야에서 일찌감치 성공을 거뒀다. 그는 1950년대 후반에 재스퍼 존스, 프랭크 스텔라,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구입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워홀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당시 미국은 광고업자와 홍보활동가의 시대이자 눈에 띄는 소비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만화와 광고였다. 그는 의도적인 실수와 미디어의 이미지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 혹은 레디메이드를 사용하여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는데, 조작한 레디메이드였다. 그의 전성기는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한 1962년부터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1968년까지였다. 워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이 시기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1926~62, 본명 Norma Jean Mortensen)가 치명적으로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바로 다음날 워홀은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그가 입자가 세밀한 먼로의 컬러사진을 일차원적 단색으로 환원하자 생동감이 빠져나가버렸다. 가장 기본적인 흔적만 온전하고 굴절 없이 남았다. 현존과 부재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그가 배열하고 끝없는 반복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흔적이었다. 그는 <100개의 마릴린이 하나보다 낫다 A Hundred Marilyns are Better than One>에서는 많은 수로 반복했다. 반복에 나타난 연속주의serialism는 미술의 신비나 아우라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위계적 구성의 질서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졌다. 연속적인 이미지는 최면의 효과를 지닌 주문呪文으로 읽히고 미니멀 음악에 대한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강조는 사라진다. 회화의 초점이 없으며 오히려 초점이 모든 곳에 산재하게 된다. 100번 반복한 워홀의 마릴린 먼로는 기호가 되고 현존성을 상실했으나 복제에 대한 내재성을 가졌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워홀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 밖에도 캠벨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모나 리자, 엘비스 프레슬리, 재키 케네디 등을 스텐실에 기초하는 판화 기법인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워홀은 1962년 6월 4일 『뉴욕 미러 New York Mirror』의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 129 Die in Jet>이란 주요 제목이 있는 표지를 대참사의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죽음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듬해에 자동차 전복사고, 자살 현장사진, 사형수를 살해하는 전기의자 등을 제작했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실크스크린 뜨기가 빠르고 쉬웠다. 실크스크린 뜨기가 실재를 묘사하는 사진의 주장에 대한 효력을 약화시켰다.
워홀이 1963년에 그린 사형수를 처형하는 전기의자 회화는 꽉 참과 텅 빔을 섬뜩하게 병치하면서 폭력적 죽음이라는 잔인한 사실이 당대의 정치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지점을 표시했다. 1960년대 초에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격렬한 운동이 전에 없는 강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이미지들에 <재난 Disasters>이란 집단적 제목을 붙였다.
워홀은 하나의 정치적 주제를 무고한 사람들의 떼죽음, 그가 다른 작업에서 추모한 고속도로나 비행기, 슈퍼마켓 등지의 사고로 인해 일어나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과 연결했다. 남부에서 일어난 민권운동 시위에서 가장 폭력적인 국면을 다룬 연작 1963년의 인종폭동 회화에서 그는 실제 장면을 악몽 같은 색으로 칠하고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도 이런 색이 흠뻑 배었다.
4. 앤디 워홀의 작품을 읽는 방벙
워홀의 가장 유명한 모토는 “나는 기계이기를 원한다”였다. 이는 그가 대량생산된 상품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또 “지루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며, “몇 번이고 계속해서 정확히 똑같은 것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파피즘 POPism』(1980)에서 워홀은 지루함과 반복, 지배에 대한 이 같은 포용에 대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확하게 똑같은 것이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의미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고, 기분은 점점 더 좋아지고 멍해지기 때문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가 원한 것은 대상을 탈상징화하는 것, 즉 이미지를 심오한 의미로부터 해방시켜 허상적인 표면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작품에 어떤 의미도 어떤 의도도 배제하는 것이었다.
워홀의 작품에 나타나는 반복은 의미를 빠져나가게 하는 것인 동시에 어떤 감정이 생겨나게 하는 것에 대한 방어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이 초기부터 워홀을 지배해왔다. 그는 “계속해서 몇 번이고 끔찍한 회화를 보게 되면 그 회화는 실제로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1963년에 “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기를 원한다. 러시아는 이를 정부의 힘으로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1967년에 “나는 미술이 오로지 선택받은 몇 명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술은 미국인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 미국인이라는 대중을 재현할 수 있을까? 대중의 주체성을 재현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그 대리물들, 즉 소비의 대상들, 그리고 취향의 대상들을 통해서 성취되는데, 워홀은 소비의 대상들로 1962년부터 캠벨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브릴로 상자 등을 생산하고 취향의 대상들로 1964년부터 키치풍의 꽃 회화와 민속적인 소 벽지를 생산했다.
5. 사업가로서의 앤디 워홀
워홀의 작업 시기를 1950년대와 1960년대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레코드와 책 표지 그리고 광고는 돈을 위해서이고 팝 그림과 영화는 훌륭한 예술가라는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가 팝 시기인 1960년대에 상업적 작업을 비밀에 붙여 계속했기 때문이며, 1968년 이후 그가 “비지니스 아트”라고 명명한 위임받은 프로젝트들을 돈을 위해 노골적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초상화를 스크린으로 떠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한 점에 5천 달러를 받았다. 그는 한 해에 50점에서 100점을 위임받아 제작했으며, 많은 초상화들이 개인적으로 소장되었고, 그것들이 시리즈로 전시된 적은 없었다. 초상화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리즈, 마릴린, 혹은 재키의 이미지들로 표현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많은 초상화가 유명한 개인들일지라도 더 많은 것들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즉 부유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의 딸, 아들, 아내, 남편을 묘사한 것들이다.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은 노동집약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약 50개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뒤 그것들 가운데 이상적인 이미지를 선택해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때로는 그가 오래 전에 폐기한 표현주의적인 예술적인 체하는 패러디로 손으로 색을 칠해 과장된 몸짓에 보탰지만 회화적 표현을 압도하는 있는 그대로의 초상을 늘 모색했다.
워홀의 초상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위임받아 제작한 것이 아닌 1972년에 시작한 모택동의 이미지이다. 그는 1974년에 모택동 벽지 위에 모택동을 걸었다. 모택동들의 흔적을 좇아 1976년에는 소련의 국기를 상징하는 망치와 낫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워홀은 철물상에서 구입한 실제 망치와 낫이 있는 사진으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지미 카터와 믹 재거, 그리고 뉴욕시의 술집과 부두로부터 흑인과 라틴 화려한 의상의 여왕들도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보석과 포도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그는 두개골을 실크스크린으로 떴고 자화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6. 앤디 워홀의 생애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1928년 워홀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안드레이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소재한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 줄리아는 얇은 깡통을 가위로 잘라 꽃 모양으로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25센트에 팔았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예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워홀은 여덟 살 때인 1938년 가을에 무도병 증세를 나타냈는데, 류머티즘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추체외로계 질환의 하나로 그 보행이 마치 댄스를 하는 것 같아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St. Vitus' Dance로 불리기도 한다. 무도병으로 학교를 장기 결석한 그는 부엌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서 한 달 동안 어머니의 간호를 받았다. 이 병의 증세에는 피부부스럼과 조절할 수 없는 흔들림이 포함되었고, 흔들림에 대한 느낌과 피부병학적 외관의 손상은 미래에 반향을 일으켜 성숙한 미술품에서 그는 이런 체험을 굴절시켰으며, 회화·영화·퍼포먼스에서 증상이 반향하게 했다. 그가 유명해졌을 무렵인 1960년대 초반에 피부부스럼은 사라졌으나 청춘기와 초기 성인기에서 얼굴에 흔적을 남겼으며, 온 생애에 걸쳐 나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1949년 6월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대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으므로 1953년에 처음 가발을 구입했는데 스물다섯 살 때였다. 1973년 이후 그에게 담낭수술이 요구되었지만 병원을 두려워했으므로 수술을 미루었다. 결국 1987년 2월 20일 금요일 오십팔 세에 뉴욕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환자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걸 모르는 간호사는 아드레날린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동요로 인한 심장박동의 정지로 환자가 괴로워하는 걸 알았다. 그녀는 다른 직원을 불렀으며 그들이 그를 소생시키려고 한 시간을 소비한 뒤 워홀은 6시 31분에 사망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장례식은 1987년 2월 26일 피츠버그에서 거행되었고 세례자 성 요한 비잔틴 묘지 부모 옆에 묻혔다. 워홀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가 열린 무덤에 향수병(에스티 로더)과 워홀이 창간한 『인터뷰』 한 권을 던졌다. 위령제는 뉴욕시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4월 만우절 날에 열렸으며 한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Magic Flute>를 연주했다.
워홀의 소장품에 대한 경매가 1988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소더비에서 열렸고 $25,333,368이 걷혔다. 생애에 그를 무시한 모마Museum of Modern Art(MoMA)가 1989년에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앤디 워홀 뮤지엄은 1994년에 개관했다.
1960년대 초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앤디 워홀은 1987년 때 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미술과 광고, 패션, 언더그라운드 음악, 독립영화 제작, 게이문화, 고급문화, 대중문화 사이에서 중심적인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 영화를 제작했으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첫 번째 앨범을 제작했고, 『인터뷰 Interview』지를 창간했다.
작품
1 워홀6 <샘이란 이름의 고양이 25마리와 푸른 야옹이 한 마리 25 Cats Name Sam and One Blue Pussy>, 1955, 옵셋 인쇄에 수채, 15-9cm.
워홀은 6마리의 고양이를 길렀는데, 그것들 모두를 샘이라고 불렀다.
2 워홀7 <영화배우 자자 가보Zaza Gabo의 구두>, 1956, 콜라주, 28-28cm.
워홀은 여배우의 구두를 굽이 높고 장식적이며 환상적인 형태로 디자인했다. 선의 유용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는 순수미술에서 느끼는 고상한 감각을 상업미술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957년에도 디렉터 상을 수상했고, 권위 있는 아트 디렉터 클럽으로부터 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5백만 독자를 가진 잡지 『라이프』가 드로잉을 소개했으므로 그의 이름은 더욱 알려졌다.
3 워홀29 로버트 라우센버그 <인터뷰>, 1955, 혼합재료, 125-185cm.
이 작품은 커다란 나무상자를 둘로 나눈 후 콜라주하고 채색한 것이다. 그림이라기보다는 벽에 부착한 조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회화와 조각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이미 팝아트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4 워홀44 재스퍼 존스 <바보의 집 Fool's House>, 1962, 캔버스에 오브제, 유채, 91-183cm.
여기서 빗자루는 물감을 칠하는 붓을 상징한다.
5 워홀67 <딕 트레이시>, 1960, 캔버스에 아크릴, 114-201cm.
당시 인기 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이고 옆에 있는 샘 케첨은 딕 트레이시의 단짝이며 조수이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조수의 턱을 둥글게 했다. 만화와 달리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부분을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리게 했다. 풍선 속의 문자도 대부분 생략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기법으로 물감이 흘러내리게 했다.
6 워홀75 <찢어진 큰 캠벨 수프 캔>, 1962, 린넨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137-183cm.
이 작품은 1970년 뉴욕의 경매장에서 6만 달러에 팔렸다. 당시 생존하는 예술가의 판화로서는 가장 고액이었다. 6만 달러를 지불한 사람은 미술품 중개상 브루노 비쇼프버거였고, 현재 이 작품은 취리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7 워홀66 <200개의 캠벨 수프 캔>, 1962, 캔버스에 아크릴 254-183cm.
1962년 7월 9일부터 8월 4일까지 로스앤젤레스 페러스 화랑에서 처음으로 워홀의 개인전이 열렸다. 세 벽에 32점의 캠벨 수프 그림이 걸렸다. 페러스의 라이벌 화랑은 진열장에 80-90개의 실제 캠벨 수프 캔을 쌓아놓고 ‘이곳에서 수프 캔을 사십시오. 1달러에 5개 드립니다’라고 선전하여 워홀의 전시회를 망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전시회를 널리 알리는 역효과를 초래하여 사람들은 워홀의 수프 캔 회화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전시회를 기획한 블럼이 32점을 모두 사겠다고 하자 워홀은 한 점에 50달러씩 쳐서 모두 1,500달러를 요구했고, 블럼은 1,000달러에 사겠다고 했다. 블럼은 매달 100달러씩 10개월 도안 송금했다.
워홀은 수프 캔을 1개, 2개, 50개, 100개, 200개를 반복해서 그렸다.
8 워홀70 <전과 후 3 Before and After 3>, 1962, 아크릴, 253-183cm.
워홀은 비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러한 회화방법은 평생 답습되었다. 모두 세 점을 그린 <전과 후>의 주제는 성형수술 광고로 왼쪽의 여인은 매부리코의 못생긴 모습이고 오른쪽은 코를 교정하여 매력적인 여인의 코로 달라진 모습이다.
9 워홀80 <129명 비행기 사고로 사망>,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83-255cm.
파리 근처에서 프랑스의 보잉 707기가 추락한 사건을 다룬 표지기사이다. 이것은 그가 표지기사를 그린 세 번째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0 워홀84 <불타는 푸른 자동차, 아홉 번>, 1963,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203-229cm.
참혹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워홀은 신문과 잡지를 자주 뒤적거리면서 워홀은 “지독한 장면을 보고 또 보다보니 아무런 느낌도 생기지 않더라”고 했다. 이 작품은 자동차가 전복된 채 불타는 장면을 푸른색으로 아홉 번 실크스크린하여 캔버스에 부착한 것이다. 그는 자동차 타이어에 신발이 낀 장면만을 크게 확대하여 추상화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워홀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난 친절하게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만든다”고 했다.
11 워홀107 <라벤더빛 재난(전기의자)>, 1963,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208-269cm.
여러 점을 제작한 <전기의자>는 사형집행 또한 부주의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시사한다. 사람을 살해하는 정기의자는 두려운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붉은색을 사용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관람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12 워홀 86 <푸른 코카콜라 병들>,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45-209cm.
워홀은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사로세로로 반복하여 대량생산품의 기계적인 이미지를 조형적 요소로 사용했다. 그는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 반복이지만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반복인 것이다.
13 워홀87 <마를린 먼로>, 1962, 캔버스에 아크릴, 41-51cm.
1962년 마를린 먼로가 자살하자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삐져나가도록 했다. 즉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일부러 더 크게 칠했고,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14 워홀88 <클레오파트라로 분장한 파란 리즈>
리즈 테일러가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주연으로 분장한 모습이다. 흥행에 성공한 이 영화의 영향으로 많은 여자들이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모습이 되고자 했다. 거리에는 온통 머리카락으로 앞이마를 덮고 짙은 눈화장을 한 클레오파트라 투성이였다. 대중적인 아이돌의 영향을 즉시 거리에서 나타났다.
15 워홀89 <엘비스 I, II>, 1964,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잉크와 알루미늄 물감, 각각 208-208cm.
마를린이 여성적인 성의 유상이었다면, 남성적인 성의 우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워홀은 대중적인 수퍼스타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16 워홀108 워홀의 새 작업실 ‘공장’
워홀은 1963년 초 렉싱턴 애비뉴 근처 이스트 87번가에 2층 벽돌 건물을 세얻어 조수 리니크로 하여금 알류미늄 포일과 은색 스프레이 캔을 사용하여 온통 은색으로 내부를 장식하게 했다. 과거 소방서였던 이 건물 내부에는 소방수들이 빨리 출동하기 위해 설치한 위아래층을 연결하는 쇠기둥이 있어 쇠기둥에 몸을 감고 미끄러지듯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워홀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7 워홀110 워홀의 첫 영화 <잠>, 1963
시간만 나면 잠을 자고 매일 12시간씩이나 잠을 자던 지오르노는 월스트리트에서 주식중개상으로 근무하면서 시를 썼다. 지오르노는 술을 마신 후 잠을 잤고, 워홀은 촬영했다. 이것은 6시간짜리 영화이다. 사람은 누구나 매일 6시간 또는 그 이상 잠을 자지만 자신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워홀은 지오르노의 잠을 통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잠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1963년 그해 9월 맨해튼에서 에릭 새티의 곡 <원통함 Vexations>의 연주회가 있었는데, 80초짜리 피아노곡을 840번 반복하여 연주하는 것으로 존 케이지를 비롯하여 15명의 연주자들이 릴레이로 돌아가면서 평균 20분씩 연주했다. 워홀의 <잠>은 에릭 새티의 <원통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잠>을 관람한 영화평론가 아처 윈스턴은 『뉴욕 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에는 오직 6명만이 관람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사람들이 <잠>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로스앤젤레스의 시네마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는 약 500명이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45분이 지난 후 약 200명가량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극장 측에 돈을 물려달라고 소동을 피웠다. 끝까지 영화를 관람한 사람은 약 50명 정도였다.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에 별처럼 떠오른 워홀은 영화에 집념을 보였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능을 인정받아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키스>를 제작했는데, <잠>과 마찬가지로 긴 시간을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이발> 또한 독특한 영화로 디자이너 존 다드의 머리 깎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워홀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선택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행위를 조명했다.
<식사>는 1964년 2월 2일 일요일 아침 맨해튼 남쪽에 있는 예술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업실에서 찍은 것으로 인디애나에 의하면 워홀이 그에게 준 지침은 단 한 마디 “이 버섯을 먹어라”였다. 3분짜리 필름 9통을 찍었으니 인디애나는 27분 동안 버섯을 먹었던 것이다. 워홀의 작품 대부분은 사람의 기본적인 동작을 필름에 담은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워홀은 섹스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제목부터가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입으로 빨다>(1964)였다.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빨 때 남자의 얼굴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로 여자의 행위는 화면에 나타나지 않고 30분 동안 붉은 벽돌담에 기댄 젊은 남자의 흥분된 모습만 볼 수 있다. 남자는 30분이 지나자 절정에 달해 정액을 발사하는 흥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4년 한 해 동안 그는 꽤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사람들의 동작은 극히 제한되었고, 클로즈업된 얼굴은 오랫동안 무표정하게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미동이 없는 장면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어쩌다 배우가 눈이라도 깜빡할라치면 클라이맥스에 이른 것처럼 부각되었다. 워홀은 10분 동안 눈을 세 번밖에 깜빡거리지 않은 배우를 가리켜 최고의 배우라고 칭찬했다. 워홀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전체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워홀은 1964년 6월 어느 토요일 밤 마냥 긴 무성영화 <엠파이어>를 촬영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북쪽으로 16블럭 떨어진 타임라이프 빌딩 40층에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8시간 촬영했다. 오후 6시부터 촬영을 시작했는데 365m 높이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전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빌딩은 전등으로 조금씩 밝아졌으며 얼마 후 환해졌다. 새벽 1시경이 되자 사무실의 등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해서 곧 빌딩 전체가 어두워졌으며, 1시 30분경 워홀은 촬영을 끝냈다. 이 영화는 이듬해 3월 시청극장에서 상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워홀은 1964년 9월에 열린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잠>, <키스>, <이발>, <식사> 네 편을 출품했다. 그해 12월 7일 브로드웨이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수상 파티가 열렸는데, 워홀의 영화 5편이 선정되었다. 선정된 영화는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한 4편과 <엠파이어>였다. 워홀은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에 떠오르는 별이었다.
워홀의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1964년에 <매춘부>를 찍었는데, 두 사람의 역할에 대사가 없었다. 그는 성능 좋은 녹음기를 사서 소리를 따로 녹음한 뒤 편집과정에서 사운드 트랙으로 옮겼다. 그는 촬영현장의 대사와ㅣ 소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엉뚱한 소리를 영상에 접목시키기를 좋아하여 영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매춘부> 역시 워홀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동작 없이 70분 동안 계속된 흑백영화이다.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한 장면뿐으로 그나마 따로 삽입한 것이다. 마리오가 흰 바지에 긴 장갑을 끼고 금발 가발을 쓴 매력적인 여인으로 분했다. 캐롤 코신스키는 흰 고양이를 안고 마리오와 함께 소파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고양이를 놓아주었다. 마리오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바나나를 아주 요염한 모습으로 먹었다. 여인으로 변장한 그는 바나나 껍질을 천천히 벗긴 후 입속에 넣고 천천히 먹었다. 바나나를 다 먹은 마리오는 껍질를 바닥에 던지고 핸드백에서 다시 바나나를 꺼내 껍질을 벗겼으며, 말랑가와 키스하기도 했다. 워홀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말했다. “나의 모든 영화는 조작이다. 어디서 조작이 끝나고 어디서부터 실제가 시작되는지 나도 모른다.”
18 워홀104 팝아트의 주요 예술가들
워홀의 작업실 ‘공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1964년 4월 21일에도 예술가들이 그곳을 방문했는데, 왼쪽부터 탐 베젤먼,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등이다.
19 워홀114 1964년 9월 5일 ‘공장’에서의 앤디 워홀
20 워홀123 1964년 4월 21일 뉴욕 스테이블 화랑에서의 개인전.
화랑은 식품창고처럼 보였다.
21 워홀124 <브릴리, 델몬트, 하인즈>, 1964
워홀의 브릴로 상자들은 캐나다 토론토에서의 전시를 위해 미술품 중개상 제럴드 모리스에게 보내지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낳았다. 캐나다 법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미술품에는 관세를 적용하지 않는데, 세관원이 브릴로 상자들을 식료품으로 취급하여 상자당 250달러의 값을 매긴 것이다. 그럴 경우 그 값의 20%를 세금으로 물어야 하므로 워홀의 브릴로 상자 80개의 경우 4,000달러나 되었다. 모리스가 상품이 아니라 조각품이라며 면세를 요구하자 세관원은 캐나다 국립화랑의 책임자 찰스 컴포트 박사를 불러 문제해결을 요청했다. 해결사로 나선 컴포트는 브릴로 상자를 보고는 “내 눈에는 조각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화가 난 모리스는 캐나다 정부를 기소하면서 정부가 미술계의 조소거리가 되게 했다.
22 워홀125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의 꽃 전시회.
1964년 11월에 난데없이 꽃잔치가 벌어졌다. 워홀은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1964년 11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꽃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여 화랑 벽을 채웠다. 워홀에게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준 꽃은 단순한 계기로 제작된 것이다. 1964년 6월호 『모던 포토그래피』를 뒤적이던 워홀은 이 잡지의 편집장 패트리시아 콜필드가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코닥필름의 색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워홀은 그의 사진을 정사각형으로 확대하여 캔버스에 실크스크린하고 “난 정사각형으로 제작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크고 작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꽃그림들은 1964년 6월과 7월에 제작한 것들로 하루에 80장을 제작할 때도 있었다. 워홀은 말했다. “친구들이 작업실에 와서 날 도왔는데, 어떤 때는 열다섯 명이나 와서 색을 칠하거나 캔버스를 잡아당기는 일을 했다.” 그들은 워홀을 도와 꽃회화를 크게 또는 작게 모두 900점 이상을 제작했다. 사람들은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꽃회화를 좋아했고,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된 꽃회화는 모두 팔렸다.
당시 500달러 팔린 꽃회화는 1997년에 약 3만2천 달러에서 3만5천 달러로 껑충 뛰었다.
23 워홀160 <꽃회화>, 1970, 실크스크린, 각각 92-92cm.
워홀은 1970년에 250점을 한정 제작하여 꽃회화를 3천 달러에 팔았는데, 당시 마를린의 초상화보다 여섯 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그는 진한 빨강, 오렌지, 노란색을 주로 사용하여 꽃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워홀이 1974년 10개의 이미지들을 병렬하여 250장 한정판으로 제작한 <손으로 채색한 꽃>은 경매에서 한 점에 13만5천 달러에 팔렸다. 1975년 가을 워홀이 자신의 예술과 돈 그리고 명예에 대한 견해를 적은 『앤디 워홀의 철학: A부터 B까지 그리고 다시 A로』가 출간되었다. 부와 성공에 대한 집념을 솔직하게 고백한 그의 저서는 많이 팔렸다. 그는 말했다. “예술의 다음 단계는 비즈니스아트이다. 난 상업예술가로 출발했으며 비즈니스 아티스트로 마치기를 바란다. 사업을 잘 하는 건 매혹적인 예술이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24 워홀143 1966년 4월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된 <은빛 구름>
워홀은 1966년 레오 카스텔리 화랑 안에 베개 모양의 은빛 구름을 띄웠다. 풍선이 적당한 높이로 뜨도록 수소의 양을 조절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소를 가득 채우면 풍선이 천정에 닿고 너무 적게 넣으면 바닥에 가라앉는다. 구름은 한 점에 50달러에 팔았다. 구름을 산 사람에게 향후 10년 동안 A/S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자 카스텔리는 조그만 수소통을 끼워 50달러에 팔았다.
25 워홀154 1968년 6월 3일 저격당한 워홀을 구급원들이 컬럼버스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구급차에 싣고 있다.
26 워홀 155 1968년 6월 4일자 뉴욕 포스트지에 실린 워홀의 저격기사, ‘생명이 위독한 앤디 워홀’
1968년 6월 3일 월요일 오후, 워홀의 영화 <나는 남자>(1968)에 출연했던 발레리 솔라니스는 두 시간 동안 워홀의 작업실 길목에 서서 워홀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4시 15분경 택시를 타고 워홀이 작업실 앞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솔라니스는 워홀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6층에 당도하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작업실 안에는 몇 사람이 워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사람이 워홀에게 “비바로부터 온 전화야” 하고 소리쳤고, 워홀이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워홀이 몸을 돌려 바라보니 솔라니스가 권총을 들고 서 있는데 총일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아냐! 발레, 쏘면 안 돼!” 하고 워홀이 소리쳤지만, 그녀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바닥에 넘어진 워홀이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려고 하자 솔라니스가 그를 향해 다시 총을 쏘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심한 통증을 느낀 워홀은 고함소리와 함께 또 한 발의 총성을 들었다. 워홀과 통화를 하고 있던 비바는 수화기를 통해 총소리를 들었다. 솔라니스는 엘리베이터로 가서 그것을 타고 내려갔다.
한 시간 후 라디오를 통해 워홀의 저격사건이 보도되었다. 워홀은 수술실로 옮겨져 총탄제거 수술을 받았다.
오후 7시경 솔라니스는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워홀을 쏜 32구경 권총과 다른 주머니에 있던 22구경 리볼버 권총을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녀는 포즈를 취하면서 “워홀이 내 인생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9시 35분 컬럼버스 병원의 책임자 마시모 바지니 박사는 32구경 총알이 워홀의 왼쪽 복부에 박혔으며 워홀이 소생할 확률은 50%라고 발표했다. 이튿날 『뉴욕 데일리 뉴스』는 ‘여배우가 앤디 워홀을 쏘다’란 제목으로, 『뉴욕 포스트』는 ‘소생하기를 바란다, 앤디 워홀’이란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6월 4일 법정에 선 솔라니스는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소리쳤으며, 다음날 다시 법정에 섰을 때도 변호사는 필요 없다면서 “워홀이 그렇게 된 건 그의 책임이다. 그놈은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다. 그놈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솔라니스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라고 지시했다.
1936년 5월 뉴저지 주 애틀랜틱시티에서 태어난 솔라니스는 어려서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메릴랜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으며, 남녀의 구별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에 불과한데 남성은 여성을 깔보는 못된 전통이 있다고 분노했다. 그녀는 남성을 혐오하는 그룹 스컴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멤버로 스컴의 선언문을 그리니치빌리지 커피숍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워홀의 저격기사는 또 다른 저격기사에 가려 단 하루 만에 신문에서 사라졌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뉴욕 주 상원의원이면서 검찰총장인 42세의 로버트는 6월 4일 민주당 캘리포니아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는데, 앰배서더 호텔에서 요르단인에 의해 저격당한 후 26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워홀과 케네디의 저격은 뉴욕 미술계의 암울한 뉴스거리였다. 화가 프랭크 스텔라는 평론가인 아내 바바로 로즈에게 “바비(로버트의 애칭)는 죽고 워홀은 살아나다니. 세상은 그런 거다”라고 말해 바바라가 “당신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 하고 쏘아붙였다. 『라이프』 잡지사에서는 워홀과 케네디의 기사를 어떤 비중으로 다룰 것인가에 관해 편집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는데, 어느 편집자는 “미국 사회에 미친 짓을 소개한 예술가가 정치적 영웅을 밀어낸다”고 투덜거렸다.
워홀이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솔라니스는 퀸즈의 정신병원에 있었다. 6월 28일 그녀는 다시 법정에 섰지만, 판사는 그녀가 도저히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고 정신병원에 재차 수감시켰다.
워홀은 두 달 가까이 입원했다가 7월 28일에야 퇴원했다.
27 워홀156 앨리스 닐, <앤디 워홀>, 1970, 캔버스에 유채, 101-152cm.
사실주의 화가 앨리스 닐은 워홀을 문병 갔다가 수술 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워홀은 의사의 지시대로 코르셋을 하고 작업실에 출근했다.
28 워홀158 워홀이 발간한 월간 영화잡지 『인터뷰』
1969년 가을 워홀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월간지 『인터뷰』를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창간호가 1969년 9월에 발간되었다.
29 워홀161 1972년 6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가 뉴욕을 방문했다. 워홀은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냈다.
30 워홀202 <자화상>, 1986, 컴퓨터 합성사진
31 워홀205 <자화상>, 1986,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203-203cm.
이 작품은 1986년 8월 런던 앤소니 도파이 화랑에서 소개되었다. 워홀의 실크스크린만 상품이었던 것이 아니라 워홀 자신도 하나의 상품이었다. 워홀의 자화상은 한 점에 3만 달러에 팔렸고, 두 점 이상 구입하면 각각 2만 달러였다. 워홀의 작품은 늘 상승세였다. 1962년에 그린 우표회화가 1985년에 16만5천 달러에 팔렸는데, 다음해 11월의 경매에서는 세 배의 가격에 팔렸다. 1달러 지폐를 200번 반복해 그린 그림은 소더비 경매에서 38만5천 달러에 팔렸으며, 캔 오프너가 달린 캠벨 수프 캔은 26만4천 달러에 팔렸고, <세 개의 엘비스>는 20만3천5백 달러에 팔렸다.
워홀이 발간한 잡지 『인터뷰』는 창간 당시 35센트였지만 1986년 2달러50센트였으며, 발행부수는 약 170만부로 늘었으므로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1986년 4월호와 9월호는 306페이지였으며 패션 광고가 많았다. 워홀은 잡지 전체를 광고로만 가득 채우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