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의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보스의 종교관은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한계 상황과 운명이 순환적 이미지들로 나열되어 있다.
순환적 이미지들을 병렬하는 것은 중세에 있었던 일로 신앙수양, 도덕적·과학적 내용을 설명과 더불어 소개했으며 계절, 노동, 생일 관련 별자리를 표시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에 출간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De civitate Dei(City of God)』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곱 가지 미덕’과 이에 반하는 ‘일곱 가지 죽을 죄’가 그림으로 묘사되어 바퀴 형태로 병렬되어 있으며 이해를 돕는 글이 아래 적혀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독일 판화에는 도상적 형판이 있는데, 보스 작품과 유사하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원형 중앙에 ‘하나님의 눈’이 있고 동공에는 석관에서 모습을 일으키고 드러낸 부활한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 때 창에 찔린 상처를 관람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석관 아래에는 반원형으로 글이 적혀 있다.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일곱 가지 죽을 죄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죄명이 라틴어로 그림 하단에 각각 적혀 있다.
안주인이 식탁으로 나른 많은 음식물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남자는 ‘폭음폭식 Gula’의 죄를 묘사한 것이고 난로 앞에서 졸고 있는 비대한 몸집의 남자는 ‘나태 Acedia‘를 의인화한 것이다.
나태한 자의 종교적 의무에 대한 불이행은 왼편으로부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의 로자리오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텐트 속 몇 쌍의 연인들은 ‘색욕 Luxuria’을 의인화한 것이다.
화려한 보닛을 쓴 악마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허영에 찬 여자가 새 모자를 쓰고 좋아하는 장면은 ‘자만 Superbia’을 묘사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분노 Ira’는 술집 앞에서 다투는 두 남자로, ‘탐욕 Avaricia’은 뇌물을 받는 판사로, ‘시기 Invidia’는 거절당한 구혼자가 노려보는 것으로 각각 묘사되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이런 장면들은 네덜란드 전원이나 구체적인 가정용품들이 있는 실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죽을 죄의 순서는 6세기 교황 대 그레고리가 정한 것으로 그 후 전통이 되었으며 보스가 전통을 좇아 시각화했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에는 미숙한 부분이 보여 보스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후대 학자들이 작품에 나타난 의상을 관찰한 결과 1490년경 이전에는 유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져 1500년을 전후 한 중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간주한다.
일부 학자는 인물들이 땅딸막하고 서투르며 평편하고 외곽선이 경직되어 있는 데다 색채가 너무 밝아 보스의 다른 작품들과는 크게 차이를 보여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독창적 디자인은 보스가 고안했더라도 작업장에서 조수들이 완성시킨 것 같으며 ‘탐욕’과 ‘시기’에서의 수준 높은 인물 묘사만큼은 보스 자신이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세월이 오백 년이나 지났으므로 부분적으로 부식되었고 누군가에 의해서 덧칠된 데다 반복해서 복구했으므로 원래 솜씨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보스의 솜씨가 어디서 어디까지이고 어느 부분을 조수들이 그렸는지 확연히 구별할 수는 없더라도 이 작품에는 역동적 요소와 인간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구성에 있어서는 시계 방향으로 병렬시키는 건 전통 양식이었다.
14세기 영국 프레스코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원형이 발견된다.
죄의 장면들을 원형으로 병렬하는 건 세상에 만연하는 일반 죄에 대한 분류이지만 보스는 중앙에 ‘하나님의 눈’을 삽입하여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죄로 변형시켰으며 죄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모티프를 강조했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위 띠 안에는 라틴어로 구약성서의 구절이 적혀 있다.
"이 생각없는 민족, 철없는 것들, 조금이라도 셈이 슬기로왔더라면 알아 차렸을 터인데!(신명기 32:28~29)"
"그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결국 어찌 되는가 두고 보리라.(신명기 32:20)"

신을 거울에 비유하는 건 중세 문학에서 흔히 발견된다.
독일 인문학자 야곱 빔펠링은 에르푸르트Erfurt 교회에 적혀 있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라는 말이 젊은 자신에게 감동을 주어 좀더 경건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보스가 그림 중앙에 ‘하나님의 눈’을 그려넣은 건 이 같은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네 귀퉁이에는 원형의 작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으며 죽음, 최후의 심판, 천국, 지옥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네 종말은 인과응보로서 보스 당시 네덜란드인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네 종말은 네덜란드 수도원에서 말년을 보낸 카르토지오 수도회의 수사 드니의 저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저서는 북유럽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1477년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1500년 이전에 이미 46차례에 걸쳐 재판되었으며 네덜란드어로 재판된 것만도 무려 13차례나 되었다.
네 원형화에는 미숙한 부분이 많아 보스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조수들이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곱 가지 죽을 죄를 범한 자들이 각각 처벌을 받는 지옥의 장면은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묵시록적 환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노래, 춤, 영화의 마당 돔

워홀은 로큰롤 그룹과 연계하면서 무대예술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 시기에 비디오 아트가 독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부분적으로 실험되었는데 그 전에 무대장면에 슬라이드를 활용한 시도가 있었다.
무대와 관련된 영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술가들 가운데 올덴버그, 라우센버그, 백남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비디오와 무대를 연결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기계문명을 찬양했으며 최신 예술로 받아들여졌다.
백남준은 곧 언론과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비디오 아트가 시각예술에서 엄연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굳히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비디오 아트의 교황’이라고 불렀다.

이 무렵 워홀의 공장에 가수나 연주자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으며 에디는 가수 믹 재거와 밥 딜런을 공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1966년 워홀은 로큰롤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연계하여 그들의 무대를 장식했다(그림 141).
노래를 통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벨벳 그룹 가수들은 냉소적이었다.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들의 노래가사는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니코의 노래솜씨는 독특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했으며 무대에서의 그녀의 몸짓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1966)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니코는 곧 스타가 되었다.
니코가 스타로 부상하자 에디는 불안했다.
질투를 느낀 에디는 1966년 2월 워홀에게 그녀를 영화에 출연시켜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마침내 워홀은 에디와 헤어지고 “도저히 에디와 함께 지낼 수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해 3월 워홀은 럿거스 주립대학에서 개최된 영화제에 초대받았으며 얼마 후에는 니코를 포함한 로큰롤 그룹이 미시간 대학의 초청을 받아 그룹 멤버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났다.
미시간 대학에서 돌아온 워홀은 흥겨운 사업을 벌였다.
맨해튼 2애비뉴와 3애비뉴 사이 23번가에 있는 2층 건물 마크 플레이스(Mark’s Place)가 비어있다는 정보를 얻고 그곳으로 가보니 무대와 많은 객석이 있고 무대 건너편에는 발코니가 있어 새 사업을 시작하기에 아주 훌륭했다.
그날로 그곳을 세낸 워홀은 내부수리에 들어갔다.
워홀의 부대 대원들이 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벽을 흰색으로 칠하고 조명도구들을 달았으며 천정에는 거울 조각들로 둥글게 모자이크한 조명을 달아 빛이 사방으로 현란하게 펴져나가게 했다.
그들은 그곳을 돔(Dom)이라고 불렀다(그림 139).

워홀은 1966년 4월 7일자 《빌리지 보이스》에 “니코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함께 춤추며 신나게 놀고 싶지 않으세요?”라는 광고를 내고 그 외에도 몇 군데에 광고를 냈다.
첫 날 여배우 매리 워로노브가 무대에서 춤을 추기로 했다.
4월 한 달 동안 노래와 영화 잔치가 벌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왔다.
여인들의 옷차림은 당시의 유행을 따라 미니스커트가 단연 우세했고 꼭 끼는 웃옷에 무늬 있는 스타킹, 하얀 부츠를 신은 여자들도 많았고 긴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은 전통적인 차림도 있었다.
남자들은 청바지를 가장 많이 입었으며 타이를 맨 사람들도 적잖았다.
그곳에서는 섹스와 마약이 허용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얀 성전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에는 각 도시를 상징하고 보호하는 신들이 따로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두 도시국가가 싸워서 한 국가가 승리하면 그 국가의 신이 진 국가의 신보다 우월한 지위를 얻게 된다.
신들의 등급은 이렇게 정해졌다.
이미 언급한 대로 당시 왕들은 신들과 동격이었으므로 왕은 신들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통치했다.
구약성서에 언급되는 바벨탑, 즉 지구라트는 현재 터전만 남아 있는데 이보다 먼저 기원전 3000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믿어지는 우룩Uruk(이를 성서에는 Erech로 표기하고 있다)의 도시 와르카Warka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처음 건축하기 이전에 건축한 것들로 수메르인의 건축술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우룩에는 긴 담이 있는데 벽의 두께가 18피드에 길이가 6마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립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들이 가파른 길을 내고 계단을 만들어 성전에 오를 수 있도록 건축한 건물의 높이는 40피드로 벽돌들이 하얗게 변색되어 사람들은 이를 '하얀 성전 White Temple'이라고 부른다.
이 성전에 오르면 신을 상징하는 조각이 있으며 신전에서 수메르인들은 동물을 불에 태워 굶주린 신의 밥통을 채워주었다.
유대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피를 뺀 후 불에 태워 야훼의 배를 채웠다.
원시종교에서는 신의 밥통을 채워주는 것으로 신에게 아양 내지는 재롱을 떨었다.
'하얀 성전'은 하늘을 상징하는 신 아누Anu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학자들은 짐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보스의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


인간의 어리석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 The Stone Operation(the Cure of Folly)>이다.
바보를 치료하기 위해 머리에서 돌을 제거하는 수술조차 바보스러운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16세기 바보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후 이런 내용의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그것들이 보스의 작품을 모사한 것인지 영향을 받아 변형시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은 보스의 어떤 비종교화보다도 많은 유형으로 현존한다.

보스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이것은 매우 익살스러워서 관람자는 미소를 지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가슴에 띠를 둘러 의자에 묶인 사내를 외과의사가 칼로 머리를 절단하고 돌 제거 수술에 들어갔다.
오른편 수도사와 수녀가 수술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도 보스가 작업장에서 조수들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에 표정이 없고 묘사가 미숙해서 조수들이 그린 것 같으며 배경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보스가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풍경을 배경으로 들에서 벌어지는 수술은 원형 안에 묘사되어 있고 상단과 하단에는 네덜란드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master snijt die keye ras, mijne name is Lubbert Das.
마스터, 돌을 속히 빼내주십시요. 저는 루베르트 다스입니다.
Master, Cut the stone out quickly, my name is Lubbert Das.

다스Das는 네덜란드 문학에서 주로 저능아의 이름에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 혹은 바보의 머리 속에 돌이 박혀 있다고 믿었으며 머리를 가르고 그 속에 있는 돌을 끄집어내면 어리석음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생각했을 뿐 실재에 적용할 수 있는 수술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자 혹은 바보의 미련한 행위가 도무지 사라지지 않으므로 그런 식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 것이다.
당시 수술 관련 책에는 정신이상자를 수술하면서 해골에 구멍을 뚫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뇌에서 돌을 끄집어낸다는 엉터리 수술이 소설에 등장했으며 수술을 하고 나니 더 어리석어졌다는 이야기가 전래된다.
돌 제거 수술의 테마를 브뢰겔을 포함해 네덜란드 화가들이 다룬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이런 수술에 기대를 걸은 것으로 짐작된다.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외과의사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깔대기와 수녀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붉은색 책이다.
수도사가 들고 있는 주전자는 제거한 돌을 넣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돌 제거 수술에 수도사와 수녀가 입회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엉터리 수술에 입회한 것으로 보아 성직자 계급을 비난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 같다.
놀랍게도 외과의사가 머리에서 꺼낸 것은 돌이 아니라 오른쪽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꽃이다.
더러 학자들은 이 꽃을 튤립으로 보고 16세기 네덜란드어로 튤립이 어리석고 우둔함을 뜻해서 보스가 돌 대신에 튤립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술관에 그림은 없고 사람만 …”


워홀은 영화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캠벨 수프 통조림도 다시 수십 점 그렸는데(그림 138) 그 가운데 한 점은 캠벨사로부터 의뢰받은 것이었다.
그는 사형을 집행하는 전기의자도 여러 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는데 아주 밝은 색을 사용한 것 외에 새로운 시도는 없었다.
10월 워홀은 펜실베니아 대학 현대미술관 관장 사무엘 애덤스 그린이 주최한 자신의 전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에디, 말랑가, 와인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갔다.
에디와 워홀은 주로 밤에 다투었고 낮에는 태연하게 연인들처럼 나란히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중적인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

전람회 전날 많은 사람들이 워홀을 직접 만나기 위해 미술관으로 왔다.
TV 카메라맨이 라이트를 들이댔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려다니는 바람에 그림에 부딪치기도 했다.
관장 그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그림을 망치든지 아니면 도난이라도 당할 것 같아 관리인에게 벽에 걸린 그림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워홀에게 몰려와서 사인을 부탁했고 워홀은 두어 시간 사인을 해주다가 뒷문으로 달아나버렸다.
워홀은 나중에 “별난 전람회였다.
미술관에 그림은 없고 사람만 있었다.
1960년대는 사람의 시대였다”고 술회했다.

사람들이 몰려왔던 만큼 필라델피아에서의 전람회는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워홀과 에디의 관계도 좋아져서 다투는 일이 적어졌다.
얼마 후 워홀과 에디는 할로윈 파티에서 리히텐슈타인 부부와 로젠퀴스트, 인디애나를 만났다.
워홀이 영화제작으로 분주하여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도 그들은 각각 빠르게 성공하고 있었고 늘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