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이 퇴원한 후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는

 

워홀이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솔라니스는 퀸즈의 정신병원에 있었다.
6월 28일 솔라니스는 다시 법정에 섰지만 판사는 그녀가 도저히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고 정신병원에 재차 수감시켰다.

워홀은 두 달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7월 28일에야 퇴원했다.
사실주의 예술가 앨리스 닐은 워홀을 문병 갔다가 총상을 입은 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그림 156).
퇴원하고 집에서 회복을 기다리던 워홀은 2주 후 존슨에게 〈외로운 카우보이들〉 필름을 가져오라고 하여 하루에 두 시간씩 편집일로 소일했다.
공장은 당분간 모리세이가 책임자로 관리했다.
워홀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격사건이 있은 지 3개월 후 9월 5일자 《뉴욕 포스트》 겉표지에 완쾌된 그의 모습이 소개되었을 때였다.
워홀은 거동이 불편했지만 의사가 시키는 대로 코르셋을 하고 매일 공장에 출근했다.
9월 19일에는 공장에서 니코의 최근 취입곡을 축하하기 위해 약 200명을 초대한 파티가 있었다.

워홀이 퇴원한 후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는 동성애가 아닌 이성 간의 사랑행위였고 비바와 루이스 왈든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워홀은 제목을 〈씹 Fuck〉이라고 지었다가 나중에 〈블루 무비〉(1968)로 고쳤다.
10월 어느 토요일 오후 허드슨 강이 보이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아파트에서 촬영한 것으로 침대에서 벌어지는 섹스 행위를 다루었으며 비바와 왈든이 열정적으로 섹스하는 장면이 클라이막스였다.

이 무렵은 예술에서 누드가 공공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이다.
1968년 4월 공연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머리카락〉에서는 완전나체가 소개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된 〈행운과 남자들의 눈〉에는 동성에 의한 강간장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1969년 6월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기 시작한 〈오, 캘커타 !〉에는 남자와 여자 누드가 한꺼번에 나타났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배우들이 옷을 벗는 것은 이제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섹스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도덕적 혼돈은 워홀 영화에서도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공장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워홀은 기절할 것만 같았는데 솔라니스의 전화였다.
12월 16일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솔라니스는 워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1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솔라니스는 워홀에게 기소를 취하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자신이 쓴 원고를 2만 달러에 구입할 것과 자신을 TV 토크 쇼에 출현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만일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지난번에 했던 대로 다시 그 일을 저지르겠다”고 위협했다.
워홀은 솔라니스의 전화내용을 신고했고 그녀는 체포되어 1969년 1월 10일 법정에 선 후 다시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솔라니스는 살인혐의로 6월 9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솔라니스는 판사에게 “다시 그를 죽일 의사는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난 단지 그가 관심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그에게 말하는 것은 의자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고 첨언했다.
그러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가벼운 형벌을 받는데 자신은 이런 일로 3년이나 징역을 살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솔라니스는 웨체스터 카운티에 있는 베드포드 힐 여자교도소로 보내졌다.

이 시기 마이클 하이저와 로버트 스미슨의 대지예술이 뉴욕 미술계의 관심거리로 등장하자 워홀도 비, 바람, 눈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할 것을 숙고하기 시작했다. 1969년 잡지 《에스콰이어》는 워홀을 5월호 표지기사로 소개해 그가 추락하고 있다고 쓰려 했으므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은 예술가들이 12주 동안 공장들을 견학하고 예술에 기술을 도입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프로그램에 워홀이 참여하기를 바랐다.
1969년 2월 로스앤젤레스로 간 워홀은 그때부터 3차원 작품을 제작할 궁리를 했다.

그해 4월 워홀은 세 개의 상자를 만들었다.
하나는 커다란 유리가 달린 것으로 상자 안에 하얀 폴리에틸렌 가루를 넣은 뒤 바람을 넣어 가루들이 상자 안에서 눈송이처럼 떠다니는 것이었다.
두 번째 것은 상자 안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를 넣어둔 것이었고 세 번째 상자는 윗부분에 파이프를 달아 물이 유리를 타고 아래로 흐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미학적인 가치는 없었지만 그가 예술의 첨단 에서 있음을 보여주거나 자위하기에 족했다.

4월에 제작한 〈비가 오는 기계〉는 뉴욕에서 소개된 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릴 1970년 세계박람회(Expo ’70) 미국관에 전시되기로 예정되어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세 개의 상자들은 자신이 생각해도 실패작이었던 모양이다.
워홀은 대신 볼록 렌즈 모양의 플라스틱을 이용하여 입체감이 나는 카드를 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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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지닌 미지의 힘에 끌려서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4일 모스크바 중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에 러시아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성기를 맞고 있었다.
차르 알렉산더 2세는 개혁정치를 폈고 시베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에게 귀환을 허락했다.
칸딘스키 가족도 이때 귀환했는데 동시베리아의 몽고 국경 근처 차 재배지역인 키아크타에서 수십 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칸딘스키의 아버지 바실리 실베스트로비치 칸딘스키는 몽골계 시베리아 출신으로 차를 파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 리디아 이바노브나 티치에바Lydia Ticheeva는 발트 지방의 모스크바 사람으로 미모와 지성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한 자식인 칸딘스키는 세 살 때인 1869년에 부모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가족은 1871년 흑해 연안의 오데사 시로 이주했는데, 아버지가 그곳 차 공장의 책임자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오데사로 이주하고 얼마 안 되어 부모는 이혼했다.
칸딘스키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색은 “싱싱하고 밝은 초록색, 흰색, 양홍빛 빨강색, 검정색, 황토색”이라고 했는데, 색을 기억하는 주관적 직관적 능력도 놀랍지만 최초로 받은 인상 깊은 이런 색들은 평생 창조적 영감을 주는 근원이 되었다.

칸딘스키는 어머니의 언니가 되는 이모 엘리자베타 티치에바의 보호 하에 성장했다.
이모는 칸딘스키와 종종 독일어로 대화했으며 독일 동화를 들려주었다.
칸딘스키는 8살 때부터 피아노와 첼로를 배웠고 소묘도 익혔다.
10살 때 오데사 중학교에 입학하고 1885년까지 오데사에 살면서 아버지와 함께 모스크바에 1년 동안 머물면서 볼라야 강과 카마 강을 배를 타고 여행했다.
어릴 때부터 회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1879년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민속학, 인류학에도 관심이 많아 대학 부속 연구소의 자연과학 협회와 민속학 인류학 협회의 연구 과제를 위해 러시아 북부 볼로그다 지방을 여행했다.
시리아계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그곳에서 농가의 건축, 공예, 장식 모형 등 다채로운 색상과 장식적 민예품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농민법과 이교도 신앙 유물에 관한 논문을 썼다.
논문이 훌륭했으므로 협회는 그를 멤버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는 법학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처음 보았으며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명암에 의한 ‘강력한 화음 mighty chord’을 발견했다.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예술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고 <로엔그린 Lohengrin>을 듣고 ‘매혹적인 모스크바’의 밤 풍경이 발하는 색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경험을 했다.
그때 음악이 지닌 그런 힘이 나타나는 회화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훗날 말했다.
이런 경험은 하나의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에 작용하는 공감각synesthesia으로 그는 색을 대상의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음악과 연관시키기 시작했으며 음악은 이후 그의 창작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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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과 케네디의 저격은

 

오후 7시경 솔라니스는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워홀을 쏜 32구경 자동권총과 다른 주머니에 있던 22구경 리볼버 권총을 직접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휴즈와 존슨이 구금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녀가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병원에 있던 기자들은 몇 블럭 떨어진 경찰서로 몰려갔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솔라니스는 포즈를 취하면서 웃기까지 했다.
왜 워홀을 죽이려 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가 내 인생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대답했다.
9시 35분 컬럼버스 병원의 책임자 마시모 바지니 박사는 32구경 총알이 워홀의 왼쪽 복부에 박혔으며 워홀이 소생할 확률은 50%라고 발표했다.
이튿날 《뉴욕 데일리 뉴스》는 〈여배우가 앤디 워홀을 쏘다〉라는 제목으로, 《뉴욕 포스트》는 〈소생하기를 바라는 앤디 워홀〉이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그림 155).

6월 4일 법정에 선 솔라니스는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소리쳤으며 다음 날 다시 법정에 섰을 때도 변호사는 필요 없다면서 “워홀이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책임이다. 그놈은 거짓말쟁이며 사기꾼이다. 그놈은 입을 열면 거짓말만 한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솔라니스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라고 지시했다.

1936년 5월 뉴저지 주 애틀랜틱 시티에서 태어난 솔라니스는 어려서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메릴랜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으며 남녀의 구별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에 불과한데 남성은 여성을 깔보는 못된 전통이 있다고 분노했다.
생물학적 우연으로 남자가 되었을 뿐이면서 자신들이 여자들보다 낫다는 편견을 가졌다고 남자들을 못마땅해 했다.
그녀는 남성을 혐오하는 그룹 스컴(S.C.U.M :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멤버로 스컴의 선언문을 그리니치 빌리지 커피숍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워홀의 저격기사는 또 다른 저격기사에 가려 단 하루 만에 신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뉴욕 주 상원의원이면서 검찰총장인 42세의 로버트는 6월 4일 민주당 캘리포니아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는데, 앰배서더 호텔에서 요르단 사람에 의해 저격당한 후 26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워홀과 케네디의 저격은 뉴욕 미술계의 암울한 뉴스거리였다.
프랭크 스텔라는 평론가인 아내 바바라 로즈에게 “바비(로버트 케네디)는 죽고 워홀은 살아나다니. 세상은 그런 거다”라고 말해 바바라가 “당신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라이프》 잡지사에서는 워홀과 케네디의 기사를 어떤 비중으로 다룰 것인가에 관해 편집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는데 어느 편집자는 “미국사회에 미친 짓을 소개한 예술가가 정치적 영웅을 밀어낸다”고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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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사람과 칼래의 시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관해 미술평론가 알베르 엘센Albert Elsen은 말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 안에서의 예술가 자신의 모습이다.
예술가이면서 시인인 그는 심판의 자리에 예수 대신 앉아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혼을 지옥으로부터 저주할 수도 구제할 수도 없다.
그러한 힘이 그에게는 없으며, 그는 긴장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서 인간의 비극을 알게 하는 사고와 시각예술로 그것을 사실대로 창조할 것에 관해 골돌히 궁리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제작하였다.
주위에 있는 열정적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처럼 불가능한 일을 위임받는다는 것은 예술가에게도 지옥이나 다름 없다."

<생각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가시덩쿨을 위 아래로 장식했는데 가시왕관은 예술가 자신과 고통받는 인류를 위한 것이다.

<칼래의 시민 The Burghers of Calais>은 로댕이 1884년에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그가 정부로부터 위임 받은 두 번째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가 위임받은 주제는 프로이사르Froissart가 14세기 기록들 중 고상한 자아희생의 이야기로서 백년전쟁 당시 항구 칼래 시의 대표적인 시민 여섯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삼베같은 거친 복장을 하고 그들은 몸에 동아줄로 포박한 채 도시를 포위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발적으로 항복하며 투항했다. 백년전쟁 당시 1347년 유스타스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자신을 다섯 시민들과 함께 스스로 포박하고 항복한 사건을 기념하는 조각에서 로댕은 여섯 사람의 심리적인 복잡함을 표현주의로 묘사했으며 좌절감으로 축늘어진 그들에게서 절망에 가득한 비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각을 평면처럼 본다면 상징주의 화가들 반 고흐와 뭉크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표현주의와 흡사하다.
아직은 사실주의가 난무하던 시기에 이런 표현주의 조각을 제작한 것은 그의 개척정신의 구현이었고 후기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 호감을 주는 도안이었는데 조각은 드라마로부터 극중의 한 장면이 불쑥 떨어져나온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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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 깨어진 남자

 로댕 뮤지엄에서

호텔 객실을 개조하여 전시실로 사용하는 2층은 마루바닥이고 그곳에 소장된 모든 작품은 로댕이 타계하기 한 해 전 정부에 기증한 것들이다.
로댕은 특히 도나텔로Donatello와 미켈란젤로를 좋아했으며 흉상, 서사시적 사람의 모습, 암시적이며 기념비적인 것, 차분하고 침착한 형상과 힘 있고 왜곡한 사람의 모습을 제작하면서 조각예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는데 회화에서 폴 세잔과 견줄 만한 성과였으며 그와 세잔 모두는 새 예술의 원시인들이었다.

로댕은 조각을 "모든 자연적 운동의 잠열적 영웅주의"로 규정했으며 영웅적인 고전 수사에 애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근래 현대 인생의 동력주의를 활기 있는 사실주의로 나타내려고 했다.
그가 비록 과거의 영웅주의 조각들에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는 하나 쾌쾌묵은 전통주의 방법의 터무니없는 우화적인 요소들은 배척했으며 종교적인 주제와 신화를 거부했다.

<코가 깨어진 남자 The Man with the Broken Nose>가 그곳에 있었다.
이 조각은 그가 겨우 23살 되던 해인 1864년에 제작한 것으로 복잡한 그의 표현주의와 야만적 사실주의의 첫 증거가 되는 작품이다.
위대한 시인 마리아 릴케는 이 작은 흉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얼굴에는 균형 잡힌 대칭적인 면이 전혀 없고, 반복되는 것들이 없으며, 비어 있거나 우둔하거나 또는 무심한 구석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릴케는 로댕이 어떻게 이런 형상을 창조했는지에 관해 언급했다.

"로댕의 본질적인 요소는 그의 세계의 근본이다.
그것은 평면으로 다양하게 강조하며 적절하게 가늠하고 모든 것을 산출하는 평면이 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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