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이론이 왜 필요할까

 

 

 

 

흔히 인간은 자유를 누리려면 도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능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에게는 버릇과 관습과 체질적 반응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행동하게 일깨우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만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종종 지금 하는 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간의 행위에는 정당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만 욕구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할까? 아니면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니까 그저 습관으로 할까? 아니면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까? 우리는 자신의 습관이나 체질적 반응에 따라 행위를 멈추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목적을 추구해야 할지, 어떤 이상을 그려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윤리 연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윤리는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려는 고민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남들 앞에서 정당화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왜 내가 그런 방식으로 행동했는지 끊임없이 묻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행위가 특별하거나 기대 이상이거나 의미심장한 결과를 가져왔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남들을 이해시키며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동기 중 하나는 남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여지가 있게 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서서 자신의 행위가 옳았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행위는 하지 않으려 한다. 윤리학은 어떤 행위가 남들이 하나하나 따져보더라도 진실로 변호할 만한 행위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말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른다. 아니면 철학자들이 ‘보통 사람’은 자신을 인도할 윤리이론이 나타날 때까지 무지함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할 때처럼 조금은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물론 얼마만큼의 ‘도덕적 상식’이 믿을 만한지에 관해서는 철학자들마저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상식을 도덕적 사고의 받침돌이자 출발점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오로지 도덕적 상식에만 의존하면 혼란에 빠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도덕적 상식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문제들을 다룰 때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나 낙태 그리고 핵무기를 허용할지에 관해 마음을 정해야 할 대목에 이르면 상식적인 도덕관념으로는 감당하기가 벅참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믿고 의지해온 도덕적 직관을 연장하여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알아야 한다.
도덕적 상식에 의존할 때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분명한 해답을 말해주기 어렵다는 점이다. 도덕의 문제는 (일단 우리가 일상의 상식을 뒤로할 때) 심각한 의견대립의 근원이 된다. 도덕철학은 의견대립의 근원을 밝혀내는 동시에 그러한 대립을 없앨 원칙을 찾아내 대립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윤리가 필요한 또 하나의 특별한 이유는 우리가 몸담은 사회의 성격에 있다. ‘목가적 사회’에서 산다면 모든 사람이 ‘자신이 사는 곳을 잘 알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의문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만한 사회가 아직도 몇몇은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동질사회와 달리 우리 사회에서는 도덕적 의견이 불일치할 때가 잦으며, 다양한 생활양식을 선택할 수 있고, 신념체계 또한 다양하다. 어떤 이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도덕적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까닭에 왜 다른 것을 제쳐놓고 이런 생활양식을 선택했는지 자신에게나 남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불확실성을 피할 수 있든 없든 이렇듯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서 상식만으로는 길을 찾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남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지 않는 한, 이러한 불확실성을 헤쳐 나가야 한다. 따라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욱 포괄적인 견해를 지녀야만 한다. 또한, 그에 비추어 우리가 직면한 일들을 심사숙고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늘 그렇게 해 왔다’는 구실을 내세워 행위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품은 의문을 끝까지 추적해야 비로소 왜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제기될 모든 의문에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먼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갈 길은 이것뿐이다. 이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더는 단순히 전통적인 해답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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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민족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도입한 것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도입한 것은 사료에도 적잖이 기록되어 있듯이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친선을 도모했던 유산을 외면한 것이다. 버나드 루이스는 중세 안달루시아(당시 이슬람 지역)에서 생활한 유대인의 문화를 “유대・이슬람의 공생관계” 로 규정했다.12 이슬람이 장악한 스페인이 쇠퇴하자 안달루시아 유대인들은 무슬림 술탄의 비호 아래 오스만・이슬람 제국 곳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상호 협력하여 십자군에 맞서 예루살렘을 지켜냈다. 또한 유대인 사학자들은 이슬람교를 발견하고 이를 서양 학술계에서 세계문명13으로 승격시키는 데 일조했다.— 유럽
인이 이슬람교와 이를 숭상하는 민족이라면 눈살을 찌푸리는데도 말이다.
오늘날 이슬람주의는 이처럼 긍정적인 기록을 비롯하여, 반유대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뇌리에서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이슬람주의 문헌에서는 루이스의 작품과는 달리 이슬람 역사에서 유대인이 차지했던 긍정적 입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근대화에 대한 식견이 넓어지게 되었다. 프랑스 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은 제국 내 아랍 지역들과 아랍 기독교인에게는 아랍세계의 역할이 현재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은 아랍 진보주의와 세속 민족주의를 지지했으나, 아랍 기독교든, 종교가 없는 무슬림이든, 누구도 서방세계를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라야 옳다. 민족에 대한 열망은 1923년, 이슬람교에 기반을 둔 오스만체제를 해체하고 그 이듬해에는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는 데 일조했다. 터키공화국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초대 이슬람국가이자 첫 번째 세속 국가였다. 그러나 AKP가 집권하자 그 같은 친선관계는 점차 수그러들게 되었다. AKP는 2010년 5월 이후 터키・이스라엘 관계를 냉각시키기 위해 소함대 사건14을 이용해왔고,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 또한 그 사건과 이스라엘을 두고 반유대주의적인 뉘앙스가 밴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중동의 새로운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자가 진보에서 포퓰리스트로 전환되던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돌연 발생했다. 1916년, 프랑스와 대영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아랍의 지지를 얻어낼 목적으로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을 약속했으나 프랑스와 대영제국 모두 이를 지키지 않았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후 프랑스와 영국은 중동의 오스만 영토를 식민지에 편입시키기 위해 사이크스-피코 협정١을 기획했고, 프랑스・영국의 모략에 배신감을 느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식민통치국으로 돌변한 전 동맹국을 강력히 비난하며 독일과 손을 잡는다. 그들은 아랍이 식민 열강이 아닌 “순수” 유럽 국가를 상대하고 있다는 허상을 비롯한 독일애호사상을 부추기

Sykes-Picot plan: 1916년 5월 영국 대표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조르주 피코가 터키령인 아라비아 민족 지역의 분할을 결정한 비밀협정.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 요르단을 세력범위로 하고, 러시아에게도 터키의 동부지방을 주며, 팔레스타인은 공동관리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 민족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독립 약속을 한 뒤였으므로, 이중외교· 비밀외교라 하여 1917년 밸푸어 선언과 함께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 같은 변화는 주로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성격이 강했으나, 나치와 협력하면서 정치색까지 띠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개 친프랑스를 지향하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대 들어 친독일로 기울어졌고, 제삼제국이 집권하자 친독일 성향은 반유대주의 선전의 취약성을 조장했다. 독일의 민족 이데올로기는 아랍이 민족 개념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예외적인 독일의 영향력 가운데 소수민족의 문화공동체를 수용했다. 일부는 반유대사상이 담긴 『시온주의 의정서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를 유포하는가 하면,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의 반유대주의적 사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프랑스와 영국에 저항하기 위해 나치당에 도움을 청할 때 나치당은 별 관심이 없었다. 루이스에 따르면, 그들은 “영국이 나치당과 동맹할 수 없는 원수라는 점과, … 유대인과 영국에 대항하는 데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했을 때” 비로소 마음을 돌이켰다고 한다.17 범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나치 독일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았을 때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가 전체주의와 대량살상의 양상을 띤 반유대주의가 이슬람세계에 들어서게 된 경위다. 당시 범아랍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1941년 이라크의 쿠데타 주동자인 라시드 알리 카일라니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창시자” 로 불리는 예루살렘의 무프티 아민 알후사이니도 있었다.18 그는 1941년 11월, 히틀러를 만난 뒤로 1945년 4월까지 베를린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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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론이란 무엇일까

 

 

 

 

도덕철학(윤리학)은 올바른 윤리적 견해를 지녀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 한 사람이 지닌 도덕성이 단순히 그 사람이 강렬하게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학문적 이론을 동원하여 도덕적 의문에 해답을 가려낼 필요는 없다. 도덕성이 순전히 개인의 일이라면 거기엔 굳이 해답이랄 것 또한 없을 것이다(달리 말하자면, 각자의 해답은 ‘내가 보기에 옳다’일 터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도덕성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옳은 주장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조금 뒤에 이 견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것이다. 그런데 이론상으로는 이 견해가 그럴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 낙태를 해야 할지, 친구 애인과 하룻밤을 보낸 뒤 친구에게 사과해야 할지, 원자력 산업에 취직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 옳은 답을 찾고자 헤매게 된다.
논증을 반박하려면 그 전제가 참인지 의문(‘식인은 나쁜 행위일까?’ 또는 ‘동물은 사람과 다름없을까?’ 같은)을 제기하거나, 전제에 맞는 결론인가(전제가 참일 때 그것이 뒤에 나오는 결론을 보증하거나 강력히 뒷받침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논증의 형태는 다양하다. 하나의 주장이 연역적 추론에 비추어 타당하다면, 전제의 참이 결론의 참을 보증한다.

 

 


■■■ 철학에서 논증을 위한 요건은 무엇일까 ■■■

우리가 어떤 것을 믿을 때 그 까닭을 제시하는 것이 논증이다. 논증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따위를 주장한다. 좋은 논증은 그것을 믿어야 할 좋은 이유를 제공하지만, 좋지 않은 논증은 그것을 믿어야 할 좋은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다. 논증을 효과적으로 제기하고자 일련의 진술을 엮어놓을 수도 있다. 예컨대, “사람을 먹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동물은 사람과 다름없으므로, 동물을 먹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런 경우는 하나의 주장에 들어 있는 요소를 검토하여 그 논증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리기가 쉽다. 논증은 ‘전제’와 ‘결론’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여기서 전제란 결론을 뒷받침하고 이끌어내거나 입증하는 (앞의 예에서 육식이 나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육식이 나쁜 이유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요점들을 말
한다.
논증을 반박하려면 그 전제가 참인지 의문(‘식인은 나쁜 행위일까?’ 또는 ‘동물은 사람과 다름없을까?’ 같은)을 제기하거나, 전제에 맞는 결론인가 (전제가 참일 때 그것이 뒤에 나오는 결론을 보증하거나 강력히 뒷받침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논증의 형태는 다양하다. 하나의 주장이 연역적 추론에 비추어 타당하다면, 전제의 참이 결론의 참을 보증한다. 한편, 귀납적 논증은 지난 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일어날 현상이 어떤 것일지 추론한다. 또 다른 형태의 논증으로 최선의 설명을 위한 귀추법이 있는데, 이 형태에서는 결론을 위해 제시되는 증거들이 결론의 참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은 지금 얻을 수 있는 최선일 뿐이며, 그보다 나은 결론으로 바뀔 수도 있다. 도덕적 논증은 흔히 유추라는 방법을 쓴다. 이 방법은 새로운 상황이 우리가 이미 잘 알고 도덕적 가치와 비슷하여 쉽게 이해할 때 쓰인다(예컨대, ‘동물은 여러 관점에서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늘 윤리적 사고와 더불어 산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에 익숙하다. 우리는 복잡한 윤리적 상황을 능숙하게 헤쳐 나갈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이렇듯 비공식적이고 더러는 불분명하며 때로는 몹시 수준 높게 이뤄지는 윤리적 사고와 ‘도덕철학’은 어떠한 면이 비슷하고 또 다를까? 첫째, 도덕철학은 윤리 문제를 충분히 명쾌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도덕철학자들은 직관이나 감정이 체질적 반응처럼 우리 의식 속에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들을 명백하게 드러내어 공식적인 검토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불분명한 상태에 있던 것들을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말하자면 불분명한 것들을 완전히 밝혀야만 그것들을 평가한 뒤 진정 믿어야만 할 것들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견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것을 옹호하려는 노력은 그 견해가 옳은 것임을 확증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둘째, 도덕철학은 일상의 도덕적 사고와 비교하면 더 포괄적인 경향이 있다. 누구나 특정한 도덕적 견해가 있을 수 있으며, 그럴 때는 대체로 자신들과 직접 관련 있는 것일 때가 잦다. 그리하여 이런 견해는 모든 도덕적 문제의 모든 측면을 다룰 수 있는 포괄적 의미의 도덕성이 되기 어렵다. 그렇지만 도덕철학은 가능한 한 최대한의 포괄성을 지향한다. 도덕철학은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일인지,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설명할 도덕이론을 구축하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에 빠질 수 있으며,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맬 수 있다. 포괄적인 도덕이론은 이렇듯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든든한 안내자 역할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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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반유대주의

 

 

 

“새로운 반유대주의” 는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2005년 8월, 쾰른 회당 연설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널리 알려졌다.6 교황이 이슬람주의를 거론하거나 구체적으로 이를 지적하진 않았지만 서유럽에서도 정치적 이슬람교의 요새 중 하나인 쾰른에서 언급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유대주의에는 변종이 여럿 있는데, 그중 이슬람화된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유럽인과 기독교인에게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대량살상을 자행한 독일의 나치를 비롯하여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 두 단계를 거쳐 아랍세계에 전파되었으며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기독교 아랍 민족이 이를 처음 받아들였으며, 종교와는 무관한 범아랍 민족주의 사상의 일환으로 반유대주의를 수용한 무슬림이 바통을 이었다.

 

2. 유럽에 이식된 반유대주의가 이슬람세계에 편승한 건 새로운 현상이다. 이슬람교식 반유대주의가 세속 아랍 민족주의에서 출현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둘을 혼동하는 건 더 심각한 잘못이다. 이슬람주의와 범아랍 민족주의는 견원지간이긴 하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정치적 이슬람교는 반유대주의에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하여 그것이 서방세계에서 유입된 것이 아닌, 전통 이슬람교의 일부인 양보이게 했다.

3. 따라서 새로운 반유대주의는 나치나 신나치처럼 구태의연한 유럽의 현상을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며, 정치적 이슬람교가 받아들인 탓에 문화적인 기초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진정성을 내세우긴 하나, 꾸며낸 전통에 근간을 둔 것이 대부분인데, 꾸며낸 전통 덕택에 이슬람교식 반유대주의가 문화적으로 익숙한 용어로 회자되기도 한다. 유럽에, 때로는 나치 이데올로기에, 개방적인 세속 아랍 민족주의7에 비교해볼 때, 종교화된 이슬람교식 반유대주의는 국지적인 데다 진정성까지 주장하므로 호소력이 더 강하다. 그래서 종교화된 반유대주의가 훨씬 위험한 것이다.

4. 새로운 반유대주의가 각양각색의 반세계화로 위장할 때도 더러 있다. 때문에 이슬람주의가 우파 이데올로기임에도 반유대주의가 유럽 좌파에 먹히는 것이다. 행여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가 반시온주의로 둔갑하지 않거나,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악하다” 는 이슬람주의자들의 비방과 반미주의가 결합하지 않는다면 유럽 좌파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슬람주의의 반미감정은 유대인이 자본주의 세계화의 쌍둥이 본부인 뉴욕과 워싱턴에서 전 세계를 다스릴 것9이라는 음모론에 일부 근거를 두며, 반세계화는 정치적 이슬람교가 유럽 좌파의 뭇매질을 막는 방어수단이 된다.

5. 반시온주의는 반유대주의의 대역으로 볼 수 있다(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아
랍과 이스라엘의 투쟁』을 쓴 프랑스 사학자 막심 로댕송은 시온주의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서방세계에서는 반시온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차이를 구별하나 이슬람교식 반유대주의는 그러지 않는다. 이슬람주의의 입장에서 시온주의는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유대인의 마스터플랜mukhtat yahudi(무흐타드 야후디)의 일환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인과 시온주의자sahyuniyyun(사휴니윤)를 동일시하며 그들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것이 유대인을 제거해야 하는 이유다.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나타나는 두 가지 주제에는 나름의 반유대주의 사상이 담겨 있다. 첫째는 “포위된 이슬람교” 라는 이슬람주의 사상이고 둘째는 세계의 정치질서를 둘러싼 경쟁사상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인과 십자군이 꾸민 음모mu'amarah(무아마라)11로 이슬람교가 사면초가인 점을 전파하는가 하면, 유대인이 십자군을 선동했다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사실, 유대인도 무슬림처럼 피해자로 보는 것이 옳은데 말이다. 두 번째 주제는 세계에 정치질서를 다시금 창출한다는,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관계가 깊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세계질서를 조성할 기세인 유대인을 상대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믿는다.
이 두 가지 사상이 결합되자 이슬람교식 반유대주의에 스며든 “보편적이고도 극악무도한 악” 이 그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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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명이다

 

 

 

바쁜 일이 없고 각 항목을 천천히 따라 할 수 있을 때 이 수행을 해보라.

 

1단계: 안식처에 귀의하기
이런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출발은 앞서 다룬 안식처에 귀의하기로 시작한다. 고요하고 안전한 느낌을 받
는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

 

2단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명상 자세로 앉고 호흡을 의식하는 데 집중하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고요
한 즐거움을 느껴라. 우리 몸 전체를 느껴라. 몸 전체를 느끼면서 몇 분간 심호흡을 하라. 이제는 몸의 각 부분으로 수행해보라.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발을 느낀다. 숨을 내쉬면서 나는 발에 미소를 보낸다”라고 속으로 말하라. 발을 좀 더 생생하게 의식하게 되었다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발이 내가 아님을 나는 안다. 나는 발 그 이상이다”라고 말하라.
그리고 종아리도 같은 방법으로 수행해보라.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종아리를 느낀다. 숨을 내쉬면서 나는 종아리에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종아리가 내가 아님을 나는 안다. 나는 종아리 그 이상이다”라고 말하라.
다음에 같은 방법으로 손, 팔(상박, 하박), 등, 목, 어깨, 머리, 얼굴, 가슴, 배, 심장, 폐, 그리고 다른 소화기관 등 몸의 각 부분을 대상으로 차례차례 말하라. 다시 몸 전체를 느끼면서 편안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라.

 

3단계: 감관은 내가 아니다
이제 감관과의 탈동일시를 시작해보자. 불교에는 육감, 즉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몸을 느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눈을 의식하라. 원한다면 눈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도록 눈을 감고 손으로 눈꺼풀을 부드럽게 만져보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나는 눈이 내가 아님을 안다”라고 말하라. 같은 방법으로 귀, 코, 혀, 몸, 마음도 말하라.

 

4단계: 오온은 내가 아니다
이제 같은 방법으로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을 수행하라. 여기서 색은 3단계의 몸과 같으므로 약간 중복된다. 그러나 상관없다. 목적은 전면적인 탈동일시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몸은 내가 아니다.” “내 감정은 내가 아니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하라.
5단계: 요소들은 내가 아니다
옛날에는 우주가 땅, 공기, 불, 물로 구성된다고 여겨졌다. 명상에서는 이 네 가지 요소로 사물을 설명하는 방법이 아직도 널리 사용된다. 땅은 우리 내부의 단단한 것을 의미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땅 요소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라. 같은 방법으로 “공기 요소(호흡)는 내가 아니다. 불 요소(체온, 열을 발생시키는 소화 과정)는 내가 아니다. 물 요소(몸속의 유동체)는 내가 아니다” 하고 깊이 생각하라. 주변의 다른 모든 것에서도 이 네 가지 요소를 찾아보라.

 

6단계: 나는 생명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고요하게 다음의 각 구절을 차례대로 생각하고, 그이 의미하는 현실에 마음을 열어라.

 

• 나는 이 몸, 육감, 오온, 네 가지 요소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 나는 삶 그 자체다.
• 나는 시공을 초월해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생명이다.
• 나는 지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속에 있는 생명이다.
• 나는 미래와 과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속에 있는 생명이다.
• 나는 결코 태어나지 않았으며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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