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민족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도입한 것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도입한 것은 사료에도 적잖이 기록되어 있듯이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친선을 도모했던 유산을 외면한 것이다. 버나드 루이스는 중세 안달루시아(당시 이슬람 지역)에서 생활한 유대인의 문화를 “유대・이슬람의 공생관계” 로 규정했다.12 이슬람이 장악한 스페인이 쇠퇴하자 안달루시아 유대인들은 무슬림 술탄의 비호 아래 오스만・이슬람 제국 곳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상호 협력하여 십자군에 맞서 예루살렘을 지켜냈다. 또한 유대인 사학자들은 이슬람교를 발견하고 이를 서양 학술계에서 세계문명13으로 승격시키는 데 일조했다.— 유럽
인이 이슬람교와 이를 숭상하는 민족이라면 눈살을 찌푸리는데도 말이다.
오늘날 이슬람주의는 이처럼 긍정적인 기록을 비롯하여, 반유대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뇌리에서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이슬람주의 문헌에서는 루이스의 작품과는 달리 이슬람 역사에서 유대인이 차지했던 긍정적 입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근대화에 대한 식견이 넓어지게 되었다. 프랑스 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은 제국 내 아랍 지역들과 아랍 기독교인에게는 아랍세계의 역할이 현재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은 아랍 진보주의와 세속 민족주의를 지지했으나, 아랍 기독교든, 종교가 없는 무슬림이든, 누구도 서방세계를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라야 옳다. 민족에 대한 열망은 1923년, 이슬람교에 기반을 둔 오스만체제를 해체하고 그 이듬해에는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는 데 일조했다. 터키공화국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초대 이슬람국가이자 첫 번째 세속 국가였다. 그러나 AKP가 집권하자 그 같은 친선관계는 점차 수그러들게 되었다. AKP는 2010년 5월 이후 터키・이스라엘 관계를 냉각시키기 위해 소함대 사건14을 이용해왔고,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 또한 그 사건과 이스라엘을 두고 반유대주의적인 뉘앙스가 밴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중동의 새로운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자가 진보에서 포퓰리스트로 전환되던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돌연 발생했다. 1916년, 프랑스와 대영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아랍의 지지를 얻어낼 목적으로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을 약속했으나 프랑스와 대영제국 모두 이를 지키지 않았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후 프랑스와 영국은 중동의 오스만 영토를 식민지에 편입시키기 위해 사이크스-피코 협정١을 기획했고, 프랑스・영국의 모략에 배신감을 느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식민통치국으로 돌변한 전 동맹국을 강력히 비난하며 독일과 손을 잡는다. 그들은 아랍이 식민 열강이 아닌 “순수” 유럽 국가를 상대하고 있다는 허상을 비롯한 독일애호사상을 부추기

Sykes-Picot plan: 1916년 5월 영국 대표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조르주 피코가 터키령인 아라비아 민족 지역의 분할을 결정한 비밀협정.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 요르단을 세력범위로 하고, 러시아에게도 터키의 동부지방을 주며, 팔레스타인은 공동관리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 민족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독립 약속을 한 뒤였으므로, 이중외교· 비밀외교라 하여 1917년 밸푸어 선언과 함께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 같은 변화는 주로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성격이 강했으나, 나치와 협력하면서 정치색까지 띠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개 친프랑스를 지향하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대 들어 친독일로 기울어졌고, 제삼제국이 집권하자 친독일 성향은 반유대주의 선전의 취약성을 조장했다. 독일의 민족 이데올로기는 아랍이 민족 개념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예외적인 독일의 영향력 가운데 소수민족의 문화공동체를 수용했다. 일부는 반유대사상이 담긴 『시온주의 의정서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를 유포하는가 하면,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의 반유대주의적 사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프랑스와 영국에 저항하기 위해 나치당에 도움을 청할 때 나치당은 별 관심이 없었다. 루이스에 따르면, 그들은 “영국이 나치당과 동맹할 수 없는 원수라는 점과, … 유대인과 영국에 대항하는 데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했을 때” 비로소 마음을 돌이켰다고 한다.17 범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나치 독일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았을 때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가 전체주의와 대량살상의 양상을 띤 반유대주의가 이슬람세계에 들어서게 된 경위다. 당시 범아랍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1941년 이라크의 쿠데타 주동자인 라시드 알리 카일라니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창시자” 로 불리는 예루살렘의 무프티 아민 알후사이니도 있었다.18 그는 1941년 11월, 히틀러를 만난 뒤로 1945년 4월까지 베를린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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