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인기인을 찾아서


1972년 워홀은 집세가 오르자 작업실 ‘공장’을 떠나기로 하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860 브로드웨이 3층을 세 얻었다.
그가 세든 3층은 1,000평방미터로 아주 넓었으며 방문객들은 비디오 카메라로 감시를 받는 등 보안이 철저해 마음에 들었다.
《인터뷰》 잡지일도 넓은 곳에서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인터뷰》가 아직은 이익을 주지 않았지만 3년 전 창간했을 때에 비하면 구독자 수가 배로 증가했다.
직원도 세 명에서 이제 열다섯 명으로 늘어났으며, 잡지의 후원자 가운데는 10달러를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더러 100달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뷰》의 편집인 밥 콜라첼로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1973년 3월호는 48페이지에 달했고 광고가 11페이지였으며 발행부수는 5만 5,000부에 이르렀다.
워홀은 잡지의 취지를 “새 얼굴과 새 인재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워홀은 새로운 작업실로 온 후 실크스크린 사업에 전념했는데 그야말로 유명인들의 초상화들을 찍어내는 일이었다.
연예인으로는 라이자 미넬리, 폴 앵카, 믹 재거, 패션계 인물로는 이브 생 로랑, 디아네 폰 푸르스텐버그(그림 163), 폴스톤, 엘렌느 로샤, 캐롤라이나 헤레라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정당으로부터 의뢰받은 정치가들의 초상화도 많았으며, 대통령 제네랄드 포드와 지미 카터,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 등의 초상화와 외국 정치가들의 초상화도 제작했다.

워홀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이용하여 초상화를 실크스크린하기 좋아했지만 사진이 없을 때는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사진을 이용했다.
색을 사용하면서 미니멀리즘 예술가 엘스워스 켈리와 프랭크 스텔라의 회화방법을 응용하기도 했다.
거친 붓질로 표현주의적 요소가 힘있게 나타나도록 했으며,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빠른 붓놀림을 응용했는데 드 쿠닝의 방법이 엿보이기도 했다.
비록 실크스크린이지만 워홀은 아크릴이 젖었을 때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터치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느낌을 주어 자신이 진지한 태도로 제작했다는 것을 구매자들이 알아주기 바랐다.
그의 초상화에는 모델의 정신상태가 얼어붙은 것처럼 나타났는데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워홀의 그러한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레,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클레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훗날 논문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 정밀한 시도 Exakte Versuche im Bereiche der Kunst>에서 “음악에서 이미 18세기 말에 실행된 것이 미술에서는 아직까지 고작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라고 적었는데 음악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그는 미술의 수준을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회화와 음악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소질을 나타냈으며, 시를 즐겨 썼고, 음악과 문학은 이후 그의 회화 창작에 중요한 소재가 된다.
회화를 위해 음악가과 문학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189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10월 19살의 클레는 뮌헨으로 가서 아카데미에 입학해 처음에는 하인리히 크니르Heinrich Knirr, 1900~01년 겨울 학기에는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클레가 칸딘스키를 처음 만난 것은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서였다.
칸딘스키는 클레보다 13살이 많았으며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클레는 1899년에 피아니스트 릴리 슈툼프Lily Stumpf(1876~1946)를 만났는데 그녀는 미래의 아내였다.
클레는 1900년에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가 클레의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11월 5~29일 동안만 생존하다 죽었다.
그 해 5~9월을 베른에서 지낸 후 10월에 뮌헨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겨울 학기에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고 회화에 대한 열정이 더욱 커졌지만 훗날 폰 슈투크의 학생이 된 것이 영광스러웠으나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회상한 것으로 봐서 배움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기 전 19살 때에 그린 드로잉 <베토벤의 눈>(1898)을 보더라도 소묘에 탁월했음을 알 수 있는데, 통찰력 있는 날카로운 눈으로 악성 베토벤을 표현했다.
그는 소묘에 재능을 타고났으며 소묘는 평생 창작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가 평생 제작한 작품 1만 점 가운데 약 4,500점이 소묘작품임이 이를 입증한다.

클레는 결국 색에 있어서 뛰어난 대가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만 피에르 보나르, 로베르 들로네, 앙리 마티스 등과 같은 화가들과는 달리 색에서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
1898년부터 15년 동안이나 색의 기본적 문제와 씨름했으며 색에 대한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은 1914년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아프리카의 발현하는 순색들을 보고서였다.
이후 5년 동안 그는 좀더 진전된 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화가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14년을 기점으로 화가에 대한 자각심이 생기기 전까지는 견유주의 혹은 냉소주의의 태도를 취했음을 일련의 드로잉에서 알 수 있다.

클레는 매주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을 연주했다. 1901년 3월 폰 슈투크의 회화반을 나와 조각반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학시험이 너무 어려워 포기했다.
이때 처음으로 에칭을 실험했다. 뮌헨에서의 학업을 종료하고 6월 말 베른으로 돌아오기 전 그는 릴리 슈툼프와 약혼했다.
베른과 오베르호펜에서 여름을 보내고 10월에 친구 헤르만 할러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6개월 동안 지내면서 이듬해 봄까지 밀라노, 제노바, 피사, 렉혼, 로마 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 성당, 미술관, 고대 유적지 등을 돌아보면서 역사에 대한 지식이 생겼으며 많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감상했다.

헤르만 할러Hermann Haller(1880~1950)
베른 태생의 스위스 화가, 조각가 헤르만 할러는 1899~1903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건축을 수학한 후 뮌헨으로 가서 회화를 공부했다.
1903년부터 카를수루에 태생의 독일 조각가 카를 호퍼Carl Hofer(1878~1956)와 함께 테오도르 라잉하르트-폴카르트 박사를 주축으로 한 젊은 화가들 그룹에 참여했다.
호퍼와 함께 로마에 거주하는 동안 에트루리아 미술에 관심이 생겼고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909~14년에는 매년 카프레라에서 여름을 보냈으며, 파리에서 생활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취리히에 정착했다.
1949년 취리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화가 카를 발저의 초상을 비롯해 많은 테라코타 작품이 빈터투어에 있는 오스카르 라인하르트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 이상한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소묘에 타고난 재능

파울 클레는 1879년 12월 18일 스위스 북부 베른 근교의 뮌헨부흐제에서 태어났다.
친증조부는 튀링기아의 오르간 연주자였고, 운터프랑켄 태생의 독일인 아버지 한스 클레Hans Klee(1879~1940)는 대학에서 음악과 성악을 가르쳤다.
훗날 클레의 아들 펠릭스는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일곱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고 말했다.
펠릭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훌륭한 음악교사였지만 매우 권위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인물로 1879년 베른으로 이주하기 전 스위스의 세 도시에서 직장을 스스로 버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베른의 대학이 맘에 들었는지 한스 클레는 베른-호프빌Bern-Hofwil 대학에서 1931년 은퇴할 때까지 52년 동안 성악,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클레의 어머니 이다 마리 프리크Ida Marie Frick(1855~1921)는 베장송 태생의 스위스인으로 슈투트가르트 음악원에서 성악 교육을 받은 음악 교사였다.
한스 클레는 이다와 결혼하고 이다의 청을 받아들여 독일에서 스위스로 이주해왔다.
펠릭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만은 두려워했다.
이다 프리크는 43살 때 불수가 되어 휠체어를 타야했다.

클레는 음악의 요람에서 성장했고 처음 드로잉과 채색법을 배운 것은 외할머니 안나 카타리나 로시나 프리크Anna Catharina Rosina Frick(1817~84)로부터였다.
외할머니는 클레가 네 살 때 크레용을 선물로 주었다.
클레가 여섯 살 때 그린 <노란 날개가 있는 아기 예수>와 <다섯 자매>를 보면 어린 나이에 상상한 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회화에 대한 재능은 아홉 살 때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는데, 외삼촌 에른스트 프릭의 레스토랑에 있는 대리석 탁자 표면의 무늬를 보고 복잡하게 얽힌 선에서 기괴한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내어 연필로 묘사한 것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과 뛰어난 상상력이 어려서부터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클레는 훗날 처음으로 “이상한 것들에 대한 애착”이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클레는 일곱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뛰어난 음악 교육자이며 지휘자인 바이올린 교사 칼 요한Karl Jahn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의 집에서 미술책을 보게 되었다.
칼 요한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요제프 요아킴Joseph Koachim의 제자였다.
클레는 어머니와 함께 음악회에 자주 갔다. 열 살 때는 어머니와 함께 베르디G. Verdi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를 감상했다.
트로바토레는 중세 음유시인들이 펼친 사랑과 복수의 대서사시이다.

클레는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을 보여 열한 살 때 베른 뮤직 소사이어티Bernische Musikgesellschaft의 특별주자로 활동했다.
열세 살 때 <베른의 윤케른가세>을 드로잉했는데 베른의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거주지 중 한 곳으로 베른 대성당의 남동쪽 모퉁이서 바라본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곳의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그가 어떻게 사실적으로 그렸는지 가늠할 수 있다.
드로잉은 순간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후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는 노트에 낙서와 같은 드로잉을 하곤 했는데, 1896년에 수학노트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Lohengrin>에 등장하는 인물인 10세기 전반 브라반트의 왕녀 엘자가 노래하는 모습을 그렸다.
위험에 처한 엘자는 기사 로엔그린의 구조를 받아 그와 결혼하게 되지만 엘자가 말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는 바람에 로엔그린은 백조를 타고 성배가 있는 나라로 돌아가고 그녀는 매우 낙담하여 죽는다는 비극을 다룬 오페라이다.

당시 스위스의 유명한 화가는 아놀트 뵈클린,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 프란츠 폰 슈투크였고 독일 화가들이 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
주로 스위스와 이탈리아 풍경을 그린 뵈클린의 초기 작품에는 세련된 채색 효과를 위한 감각과 날카로운 관찰력이 나타나 있다.
이후 지중해 해변 풍경만을 그리는 데 만족해하지 않고 풍경 속에 신화의 인물이나 상징적인 인물을 그려 넣었다.
생애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으므로 그의 작품에는 이탈리아 풍경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베른 태생의 호들러는 초기에 홀바인의 영향을 받았고, 1880년경에 종교적 위기를 체험했으며, 1881년 파리로 가서 장미십자회와 친교를 맺고 그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1890년대에는 상징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종교적 주제의 그림을 그렸으며, 취리히 역사박물관의 벽화와 같이 과장된 역사화를 그렸다.
호들러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낮>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04년 빈 분리파와 함께 개인전을 열었고 제네바에 정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1970년에는 판화가 붐이었는데 값이 비싸지 않아 사람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워홀은 다시 꽃을 주제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에 제작한 10점을 변형시켰는데 그래서 요즈음 미술시장에는 그의 꽃그림이 흔한 것이다.
250점을 한정 제작하여 한 점에 3,000달러에 팔았는데 당시 마를린의 초상화보다 여섯 배나 비싼 가격이다. 그는 진한 빨강, 오렌지, 노랑색을 주로 사용하여 꽃을 화려하게 했다(그림 160).

워홀의 미술관 순회전이 엮어졌다.
큐레이터 존 코플런스가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 뮤지엄(Pasadena Art Museum, 1970. 5. 12~6. 21)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을 도는 순회전을 기획한 것이다.
전람회는 시카고 현대미술관, 네덜란드의 스테데릭 뮤지엄(The Stedelijk van Abbemuseum), 파리의 파리 박물관(Le Mus럆 de la Ville de Paris),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 순으로 순회할 예정이었다.
큐레이터는 워홀이 1962년 이전에 제작한 작품들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예술가가 뮤지엄에서 대규모 전람회를 갖는 순간부터 작품 값은 치솟기 시작한다.
파사데나 뮤지엄에서 회고전이 열린 이틀 후 뉴욕의 경매장에서는 워홀이 1962년에 제작한 〈찢어진 큰 캠벨 수프 통조림〉(그림 75)이 6만 달러에 팔렸다.
8년 전에 제작되었고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여러 점 중 하나에 불과한 수프 통조림 그림이 그 정도 값에 팔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생존해 있는 예술가의 판화 값으로는 고액이었다.
취리히의 예술품 중개상 브루노 비쇼프버거가 사들인 이 작품은 지금 취리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워홀의 명예로운 고액기록은 다른 예술가에 의해 곧 깨졌는데 리히텐슈타인의 〈Big Painting No.6〉(1965)가 그해 11월 7만 5,000달러에 거래된 것이다.

워홀이 1974년에 열 개의 이미지들을 병렬해 250장 한정판으로 제작한 〈손으로 색칠한 꽃〉은 경매에서 한 점에 13만 5,000달러에 팔렸다.
영화에서는 돈을 많이 못 벌었지만 그림에서의 수입은 넉넉했다.
1975년 가을에는 워홀이 자신의 예술과 돈과 명예에 대한 견해를 적은 《앤디 워홀의 철학 : A부터 B까지 그리고 다시 A로 The Philosophy of Andy Warhol: From A to B and Back Again》가 출판되었다.
부와 성공에 대한 집념을 솔직하게 고백한 그의 저서 역시 많이 팔려나갔다.

예술의 다음 단계는 사업예술(Business Art)이다.
난 상업미술가로 출발했으며 사업예술가로 마치기를 바란다.
… 사업을 잘 한다는 것은 매혹적인 예술이다.
…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1971년 봄 워홀은 즐거워했는데 파사데나 뮤지엄에서 열었던 회고전이 휘트니 뮤지엄에서 다시 열리고 있었고 몇 주 후에는 웨스트 47번가 고덤 북 마트(Gotham Book Mart)에서 팝아트 이전의 작품 약 300점을 ‘앤디 워홀 그의 초기 작품들 : 1947-1959’(1971. 5. 26~6. 26)이란 주제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명한 그룹 롤링 스톤즈의 앨범 재킷을 디자인하게 되어 더욱 신이 났다.
실제 지퍼를 사용하여 제작한 롤링 스톤즈의 앨범은 4월에 시판되어 2주 만에 50만 장이나 팔렸다(그림 153).
워홀은 “당신들은 믿기지 않을 거에요. 그렇게 앨범이 많이 팔렸는데도 난 돈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어요. 다음에는 한 장에 50센트를 달라고 할 참이에요”라고 불평했다.
한 장에 50센트면 25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1971년 6월에는 비틀즈 그룹의 존 레논과 아내 오노 요코가 뉴욕에 잠시 들러 워홀과 함께 며칠을 지냈다.

이 무렵 한때 워홀의 화려한 커플이었던 에디 시즈윅은 마약복용 치료를 위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바바라의 요양소에 있었다.
1971년 1월부터 6월까지 20회 이상의 전기치료를 받은 에디는 마약을 구하기 위해 매매자와 성관계를 갖는 등 육체와 정신이 병들대로 들어 있었다.
남자들은 실리콘으로 부풀린 그녀의 젖가슴을 보고 싶어 했고 에디는 자신의 젖가슴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에디는 병원에서 역시 마약복용 치료를 받고 있는 스무 살의 마이클 브렛포스트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7월 두 사람은 결혼하여 산타바바라에 아파트를 얻어 보금자리를 차렸다.
에디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더니 11월 어느 날 아침 괘종시계 소리에 잠을 깬 마이클이 에디를 안으려고 만지니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겨우 28세의 나이로 에디는 세상을 떠났다.
5년 동안 에디를 만나지 못했던 워홀은 그녀의 사망소식을 듣고 매우 우울해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칸딘스키는 뮌헨 분리파가 기획한

 
칸딘스키는 뮌헨 분리파가 기획한 전시회에 가서 유겐트슈틸 작품을 보았으며 유겐트슈틸은 뮌헨에서 가장 성행한 양식이었다.
유겐트는 젊음이란 뜻이다. 칸딘스키는 1898년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기 위해 뮌헨 아카데미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스스로 노력한 끝에 다시 입학을 시도하여 1900년에야 받아들여졌다.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 화가로 알려진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은 것은 1년 미만이었다.
칸딘스키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드로잉 기교를 배웠는데, 그에게 드로잉 반에 들어가라고 권한 것은 폰 슈투크였다.
드로잉을 배운 후 그는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폰 슈투크는 칸딘스키의 표현적 드로잉을 칭찬했지만 “지나치게 색을 남용하는” 데에 반대하여 한동안 검정색과 흰색으로 작업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형태에 대해 연구하라”고 충고했다.
칸딘스키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음을 후기 목판화와 검은색을 배경으로 한 컬러 드로잉에서 알 수 있다.
폰 슈투크는 칸딘스키의 자발적인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융합해야 하는지에 관해 가르쳤으며, 칸딘스키는 훗날 그가 “하나의 어조로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치명적인 무능력을 치료해주었다”고 말했다.
칸딘스키가 폰 슈투크에게서 배운 것은 하나의 모티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서 폰 슈투크의 조수 에른스트 슈테른Ernst Stern, 파울 클레, 알렉산더 폰 잘츠만, 한스 푸르만Hans Purrmann 등을 만났으며, 폰 슈투크의 반에서 나온 것은 1900년 가을이었다.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1863~1928)
바이에른의 테텐바이스 태생의 화가, 조각가, 판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는 1893년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되었고 2년 후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베를린, 드레스덴, 스톡홀름, 밀라노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었다.
19세기 말에 유겐트슈틸 운동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며 뮌헨의 자택을 중심으로 유겐트슈틸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장식적이고 평편한 색을 사용하여 회화의 분위기를 조절한 것은 어느 정도 후대의 발전을 예시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