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1970년에는 판화가 붐이었는데 값이 비싸지 않아 사람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워홀은 다시 꽃을 주제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에 제작한 10점을 변형시켰는데 그래서 요즈음 미술시장에는 그의 꽃그림이 흔한 것이다.
250점을 한정 제작하여 한 점에 3,000달러에 팔았는데 당시 마를린의 초상화보다 여섯 배나 비싼 가격이다. 그는 진한 빨강, 오렌지, 노랑색을 주로 사용하여 꽃을 화려하게 했다(그림 160).
워홀의 미술관 순회전이 엮어졌다.
큐레이터 존 코플런스가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 뮤지엄(Pasadena Art Museum, 1970. 5. 12~6. 21)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을 도는 순회전을 기획한 것이다.
전람회는 시카고 현대미술관, 네덜란드의 스테데릭 뮤지엄(The Stedelijk van Abbemuseum), 파리의 파리 박물관(Le Mus럆 de la Ville de Paris),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 순으로 순회할 예정이었다.
큐레이터는 워홀이 1962년 이전에 제작한 작품들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예술가가 뮤지엄에서 대규모 전람회를 갖는 순간부터 작품 값은 치솟기 시작한다.
파사데나 뮤지엄에서 회고전이 열린 이틀 후 뉴욕의 경매장에서는 워홀이 1962년에 제작한 〈찢어진 큰 캠벨 수프 통조림〉(그림 75)이 6만 달러에 팔렸다.
8년 전에 제작되었고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여러 점 중 하나에 불과한 수프 통조림 그림이 그 정도 값에 팔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생존해 있는 예술가의 판화 값으로는 고액이었다.
취리히의 예술품 중개상 브루노 비쇼프버거가 사들인 이 작품은 지금 취리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워홀의 명예로운 고액기록은 다른 예술가에 의해 곧 깨졌는데 리히텐슈타인의 〈Big Painting No.6〉(1965)가 그해 11월 7만 5,000달러에 거래된 것이다.
워홀이 1974년에 열 개의 이미지들을 병렬해 250장 한정판으로 제작한 〈손으로 색칠한 꽃〉은 경매에서 한 점에 13만 5,000달러에 팔렸다.
영화에서는 돈을 많이 못 벌었지만 그림에서의 수입은 넉넉했다.
1975년 가을에는 워홀이 자신의 예술과 돈과 명예에 대한 견해를 적은 《앤디 워홀의 철학 : A부터 B까지 그리고 다시 A로 The Philosophy of Andy Warhol: From A to B and Back Again》가 출판되었다.
부와 성공에 대한 집념을 솔직하게 고백한 그의 저서 역시 많이 팔려나갔다.
예술의 다음 단계는 사업예술(Business Art)이다.
난 상업미술가로 출발했으며 사업예술가로 마치기를 바란다.
… 사업을 잘 한다는 것은 매혹적인 예술이다.
…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1971년 봄 워홀은 즐거워했는데 파사데나 뮤지엄에서 열었던 회고전이 휘트니 뮤지엄에서 다시 열리고 있었고 몇 주 후에는 웨스트 47번가 고덤 북 마트(Gotham Book Mart)에서 팝아트 이전의 작품 약 300점을 ‘앤디 워홀 그의 초기 작품들 : 1947-1959’(1971. 5. 26~6. 26)이란 주제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명한 그룹 롤링 스톤즈의 앨범 재킷을 디자인하게 되어 더욱 신이 났다.
실제 지퍼를 사용하여 제작한 롤링 스톤즈의 앨범은 4월에 시판되어 2주 만에 50만 장이나 팔렸다(그림 153).
워홀은 “당신들은 믿기지 않을 거에요. 그렇게 앨범이 많이 팔렸는데도 난 돈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어요. 다음에는 한 장에 50센트를 달라고 할 참이에요”라고 불평했다.
한 장에 50센트면 25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1971년 6월에는 비틀즈 그룹의 존 레논과 아내 오노 요코가 뉴욕에 잠시 들러 워홀과 함께 며칠을 지냈다.
이 무렵 한때 워홀의 화려한 커플이었던 에디 시즈윅은 마약복용 치료를 위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바바라의 요양소에 있었다.
1971년 1월부터 6월까지 20회 이상의 전기치료를 받은 에디는 마약을 구하기 위해 매매자와 성관계를 갖는 등 육체와 정신이 병들대로 들어 있었다.
남자들은 실리콘으로 부풀린 그녀의 젖가슴을 보고 싶어 했고 에디는 자신의 젖가슴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에디는 병원에서 역시 마약복용 치료를 받고 있는 스무 살의 마이클 브렛포스트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7월 두 사람은 결혼하여 산타바바라에 아파트를 얻어 보금자리를 차렸다.
에디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더니 11월 어느 날 아침 괘종시계 소리에 잠을 깬 마이클이 에디를 안으려고 만지니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겨우 28세의 나이로 에디는 세상을 떠났다.
5년 동안 에디를 만나지 못했던 워홀은 그녀의 사망소식을 듣고 매우 우울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