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 이상한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소묘에 타고난 재능

파울 클레는 1879년 12월 18일 스위스 북부 베른 근교의 뮌헨부흐제에서 태어났다.
친증조부는 튀링기아의 오르간 연주자였고, 운터프랑켄 태생의 독일인 아버지 한스 클레Hans Klee(1879~1940)는 대학에서 음악과 성악을 가르쳤다.
훗날 클레의 아들 펠릭스는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일곱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고 말했다.
펠릭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훌륭한 음악교사였지만 매우 권위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인물로 1879년 베른으로 이주하기 전 스위스의 세 도시에서 직장을 스스로 버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베른의 대학이 맘에 들었는지 한스 클레는 베른-호프빌Bern-Hofwil 대학에서 1931년 은퇴할 때까지 52년 동안 성악,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클레의 어머니 이다 마리 프리크Ida Marie Frick(1855~1921)는 베장송 태생의 스위스인으로 슈투트가르트 음악원에서 성악 교육을 받은 음악 교사였다.
한스 클레는 이다와 결혼하고 이다의 청을 받아들여 독일에서 스위스로 이주해왔다.
펠릭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만은 두려워했다.
이다 프리크는 43살 때 불수가 되어 휠체어를 타야했다.

클레는 음악의 요람에서 성장했고 처음 드로잉과 채색법을 배운 것은 외할머니 안나 카타리나 로시나 프리크Anna Catharina Rosina Frick(1817~84)로부터였다.
외할머니는 클레가 네 살 때 크레용을 선물로 주었다.
클레가 여섯 살 때 그린 <노란 날개가 있는 아기 예수>와 <다섯 자매>를 보면 어린 나이에 상상한 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회화에 대한 재능은 아홉 살 때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는데, 외삼촌 에른스트 프릭의 레스토랑에 있는 대리석 탁자 표면의 무늬를 보고 복잡하게 얽힌 선에서 기괴한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내어 연필로 묘사한 것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과 뛰어난 상상력이 어려서부터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클레는 훗날 처음으로 “이상한 것들에 대한 애착”이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클레는 일곱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뛰어난 음악 교육자이며 지휘자인 바이올린 교사 칼 요한Karl Jahn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의 집에서 미술책을 보게 되었다.
칼 요한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요제프 요아킴Joseph Koachim의 제자였다.
클레는 어머니와 함께 음악회에 자주 갔다. 열 살 때는 어머니와 함께 베르디G. Verdi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를 감상했다.
트로바토레는 중세 음유시인들이 펼친 사랑과 복수의 대서사시이다.

클레는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을 보여 열한 살 때 베른 뮤직 소사이어티Bernische Musikgesellschaft의 특별주자로 활동했다.
열세 살 때 <베른의 윤케른가세>을 드로잉했는데 베른의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거주지 중 한 곳으로 베른 대성당의 남동쪽 모퉁이서 바라본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곳의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그가 어떻게 사실적으로 그렸는지 가늠할 수 있다.
드로잉은 순간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후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는 노트에 낙서와 같은 드로잉을 하곤 했는데, 1896년에 수학노트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Lohengrin>에 등장하는 인물인 10세기 전반 브라반트의 왕녀 엘자가 노래하는 모습을 그렸다.
위험에 처한 엘자는 기사 로엔그린의 구조를 받아 그와 결혼하게 되지만 엘자가 말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는 바람에 로엔그린은 백조를 타고 성배가 있는 나라로 돌아가고 그녀는 매우 낙담하여 죽는다는 비극을 다룬 오페라이다.

당시 스위스의 유명한 화가는 아놀트 뵈클린,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 프란츠 폰 슈투크였고 독일 화가들이 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
주로 스위스와 이탈리아 풍경을 그린 뵈클린의 초기 작품에는 세련된 채색 효과를 위한 감각과 날카로운 관찰력이 나타나 있다.
이후 지중해 해변 풍경만을 그리는 데 만족해하지 않고 풍경 속에 신화의 인물이나 상징적인 인물을 그려 넣었다.
생애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으므로 그의 작품에는 이탈리아 풍경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베른 태생의 호들러는 초기에 홀바인의 영향을 받았고, 1880년경에 종교적 위기를 체험했으며, 1881년 파리로 가서 장미십자회와 친교를 맺고 그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1890년대에는 상징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종교적 주제의 그림을 그렸으며, 취리히 역사박물관의 벽화와 같이 과장된 역사화를 그렸다.
호들러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낮>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04년 빈 분리파와 함께 개인전을 열었고 제네바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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