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클레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훗날 논문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 정밀한 시도 Exakte Versuche im Bereiche der Kunst>에서 “음악에서 이미 18세기 말에 실행된 것이 미술에서는 아직까지 고작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라고 적었는데 음악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그는 미술의 수준을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회화와 음악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소질을 나타냈으며, 시를 즐겨 썼고, 음악과 문학은 이후 그의 회화 창작에 중요한 소재가 된다.
회화를 위해 음악가과 문학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189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10월 19살의 클레는 뮌헨으로 가서 아카데미에 입학해 처음에는 하인리히 크니르Heinrich Knirr, 1900~01년 겨울 학기에는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클레가 칸딘스키를 처음 만난 것은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서였다.
칸딘스키는 클레보다 13살이 많았으며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클레는 1899년에 피아니스트 릴리 슈툼프Lily Stumpf(1876~1946)를 만났는데 그녀는 미래의 아내였다.
클레는 1900년에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가 클레의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11월 5~29일 동안만 생존하다 죽었다.
그 해 5~9월을 베른에서 지낸 후 10월에 뮌헨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겨울 학기에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고 회화에 대한 열정이 더욱 커졌지만 훗날 폰 슈투크의 학생이 된 것이 영광스러웠으나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회상한 것으로 봐서 배움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기 전 19살 때에 그린 드로잉 <베토벤의 눈>(1898)을 보더라도 소묘에 탁월했음을 알 수 있는데, 통찰력 있는 날카로운 눈으로 악성 베토벤을 표현했다.
그는 소묘에 재능을 타고났으며 소묘는 평생 창작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가 평생 제작한 작품 1만 점 가운데 약 4,500점이 소묘작품임이 이를 입증한다.

클레는 결국 색에 있어서 뛰어난 대가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만 피에르 보나르, 로베르 들로네, 앙리 마티스 등과 같은 화가들과는 달리 색에서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
1898년부터 15년 동안이나 색의 기본적 문제와 씨름했으며 색에 대한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은 1914년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아프리카의 발현하는 순색들을 보고서였다.
이후 5년 동안 그는 좀더 진전된 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화가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14년을 기점으로 화가에 대한 자각심이 생기기 전까지는 견유주의 혹은 냉소주의의 태도를 취했음을 일련의 드로잉에서 알 수 있다.

클레는 매주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을 연주했다. 1901년 3월 폰 슈투크의 회화반을 나와 조각반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학시험이 너무 어려워 포기했다.
이때 처음으로 에칭을 실험했다. 뮌헨에서의 학업을 종료하고 6월 말 베른으로 돌아오기 전 그는 릴리 슈툼프와 약혼했다.
베른과 오베르호펜에서 여름을 보내고 10월에 친구 헤르만 할러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6개월 동안 지내면서 이듬해 봄까지 밀라노, 제노바, 피사, 렉혼, 로마 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 성당, 미술관, 고대 유적지 등을 돌아보면서 역사에 대한 지식이 생겼으며 많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감상했다.

헤르만 할러Hermann Haller(1880~1950)
베른 태생의 스위스 화가, 조각가 헤르만 할러는 1899~1903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건축을 수학한 후 뮌헨으로 가서 회화를 공부했다.
1903년부터 카를수루에 태생의 독일 조각가 카를 호퍼Carl Hofer(1878~1956)와 함께 테오도르 라잉하르트-폴카르트 박사를 주축으로 한 젊은 화가들 그룹에 참여했다.
호퍼와 함께 로마에 거주하는 동안 에트루리아 미술에 관심이 생겼고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909~14년에는 매년 카프레라에서 여름을 보냈으며, 파리에서 생활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취리히에 정착했다.
1949년 취리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화가 카를 발저의 초상을 비롯해 많은 테라코타 작품이 빈터투어에 있는 오스카르 라인하르트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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