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야수주의의 영향


일요일마다 마르셀은 퓌토로 가서 자크를 만났다.
맑게 개인 날이면 퓌토의 예술가들은 파티를 열었다. 방문하는 예술가들이 합세할 때는 파티의 규모가 커졌는데 마르셀이 그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
그는 또 형과 체스두기를 좋아했다.
마르셀이 열한 살 때 자크가 그에게 체스두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뒤샹 가족 모두 체스를 좋아했으므로 가족이 한데 모일 때면 으레 체스 게임이 벌어졌다.

형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셀도 아버지로부터 매달 생활보조비로 150프랑을 받았다.
외젠느는 은퇴했지만 세 아들을 위해 그만한 돈을 쓸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했으며, 바닷가에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마르셀은 1907년부터 4년 연속 8월이 되면 디페와 르 아브르 사이 노르만디 바닷가에 위치한 아버지의 별장에서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가 1907년 여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야수주의 예술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다리에 걸터앉은 두 누드>와 아버지를 모델로 한 <창가에 앉아 있는 남자>는 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림이다.
1910년의 <검정 스타킹을 신은 누드>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사라지고 야수주의의 영향만이 현저함을 볼 수 있다.

1905년 제3회 가을전에서 앙리 마티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를 비롯하여 마티스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술가들의 그림을 관람한 마르셀은 “1905년의 가을전에서 본 마티스의 그림은 내게 대단한 감동을 주었다”고 했다.
그해 10월 18일에서 11월 25일까지 열린 가을전은 르누아르, 마네, 앵그르 등 지난 30년간 프랑스 예술가들이 제작한 1,636점의 작품이 소개된 대규모 전시회였다.
따로 마련된 방에는 마티스가 밝은 색을 사용하여 그린 <모자를 쓴 여인>과 <선원들>, 드랭의 경쾌한 그림 <콜리우르의 항구>, 블라맹크의 아름다운 신기루 같은 <말리의 세느 계곡>이 다른 그림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곳에는 망갱의 <시에스타>와 발타가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린 <선원들>도 있었는데, 이들 젊은 예술가들은 나이 많은 마티스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드랭과 블라맹크는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마티스를 중심으로 야수주의 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빛나는 스펙트럼 색을 사용하여 매우 밝고 경쾌한 그림들을 그렸는데, 브라운색이 주류를 이루는 어두운 뮤지엄의 그림들에 비하면 눈이 부실 정도로 현란했다.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는 살롱 도톤느(가을전)를 관람한 후 무지개색의 물결침에 경악하면서 “예술가들이 한 동이의 물감을 대중의 얼굴을 향해 퍼부은 것 같았다”라는 소감을 『르 피가로』에 적었다.
루이 복셀도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도나텔로 양식의 작은 르네상스 조각 한 점을 발견하고 “도나텔로가 야수들 틈에 끼어 있군!”이라고 말했다.
복셀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야수주의Fauvism란 말이 20세기의 첫 주의ism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마티스는 “야수들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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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자살한 아실 고키

아실 고키와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새 교사로 부임했다. 고키는 마흔네 살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가 뉴욕파 예술가들에게 준 영향은 적지 않았고, 폴록은 그로부터 미학적 도움을 직접 받았다. 고키는 1904년에 아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일차대전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고키와 그의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키와 여동생은 난민들 틈에 끼여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 배에 승선했는데 아버지는 그때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키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로비던스와 보스톤(Boston)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스물한 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에 그만두었지만, 나중에는 교사로 재직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중요한 예술가이며,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Color-Field)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는데 로드코는 고키가 아주 엄격한 교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로드코의 개인전람회가 열렸을 때 고키는 화랑으로 와서 그림들을 아주 진지하게 들여다보다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제자 한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 부분을 조금 엷게 해라”고 말해 다같이 웃었다고 회상했다.

고키는 처음에 세잔느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 회화방법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별명은 ‘워싱턴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그리니치 빌리지 중앙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는 뉴욕 대학교(New York University)의 정원과도 같은 곳으로서 지금도 대학생들뿐 아니라 무명예술가들이 한가롭게 스케치를 하거나 행위예술가들이 이벤트를 벌이는 정감있는 장소이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기자 프랑스의 이브 탕기와 앙드레 마송, 칠레의 로베르토 마타, 그리고 피카소와 같은 나라 스페인의 호앙 미로의 그림들을 연구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는 친구 예술가들을 화실로 초대한 후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우리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점일세”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피카소가 회화의 모든 가능성들을 실험했다는 의미였다. 이때는 예술가들이 피카소에 의해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을 예사로 할 때였다.

폴록과 다른 학생들은 고키와 데이비스가 학교식당에서 미술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폴록은 벤턴의 소개로 학교식당 탁자를 청소하는 일을 했으므로 고키가 식당에서 미인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주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인 고키는 육 척 장신에 검은 머리칼을 앞이마에 떨어뜨린 매력적인 모습이었고, 수염을 길렀으며, 숙고하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소유자였다. 학교식당에 자주 와서 미인들에게 그의 특유의 우수에 찬 음성으로 “나의 화실로 와서 애인이 되어준다면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겠다”며 유혹하곤 했다. 미술학교에 재학했던 필립 페이비어는 “고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1930년 여름부터 재학중이었던 휘트니 대로우(Whitney Darrow)는 “고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1934년 고키의 첫 개인전이 필라델피아의 멜론(Mellon) 화랑에서 열렸으며, 이 시기에 그는 드 쿠닝과 우정이 두터웠는데 드 쿠닝은 고키를 가리켜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그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정받는 예술가였고, 1937년에 휘트니 뮤지엄은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으며 이듬해에는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했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에 줄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전람회 카탈로그를 앙드레 브르통이 쓰기도 했다. 브르통은 “고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기술하였다.

고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고, 고키의 아내는 고키와 마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에 화재가 나서 고키의 그림 스물일곱 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분실되었고, 다음달에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1948년 6월 26일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이 부러졌으며, 그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그와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키는 우울증으로 번민하며 지내다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에 있는 화실에서 자살하여 세상을 버렸다. 브르통은 “고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그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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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알코올 중독이 되다


폴록은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재료들과의 싸움을 캔버스에 남겼다. 그는 물감, 목탄, 연필, 잉크를 사용하면서 이미지들을 창조하려고 했지만 그의 그림들은 벤턴의 눈에 하찮게 보였다. 벤턴은 폴록을 “저주받은 대단한 다색주의자(colorist)”라고 불렀다. 폴록은 이제 막 그린 그림들을 감히 1932년 4월에 있었던 제2회 워싱턴 스퀘어 아웃도어 쇼(Washington Square Out Door Show)에 출품하고는 길에 앉아 5달러나 10달러 정도의 가격으로 자신의 그림을 사갈 사람을 종일 기다렸다.

당시의 폴록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의 친구 톨레지언에 의하면 193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와 폴록은 술에 취해 있었는데, 촛불행진하던 교인들을 보고는 폴록은 목적도 없이 그 행렬을 쫓아 2번가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교회까지 따라갔다. 그는 강단에 올라가더니 촛불, 십자가, 성찬배 등등 기물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교인들의 신고로 두 사람은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며 보석금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톨레지언의 말로는 폴록이 술에 취한 채 경찰서로 연행되어갔던 것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또 어느 토요일 밤에 폴록은 톨레지언과 함께 허드슨 강가에 있었는데, 폴록은 서양문명에 관해 말하다 갑자기 분노하더니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톨레지언은 그때 물에 뛰어들어 그를 구출하지 않았더라면 폴록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고 주장하였다. 1932년에 폴록과 어울렸던 한 친구는 “잭슨이 자살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상식이었다”고 말했다.

벤턴은 뉴욕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대한 독설로 고립을 자초한 후 1935년 10월, 23년 동안의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미조리 주의 캔자스 시티로 돌아가 1975년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방의 장면들을 그리면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박물관 관장들을 공격하는 등 적을 많이 만들었으나 그의 벽화들은 우수했으므로 위임을 받아 그림을 그리면서 경제적으로도 성공하고 있었다. 그는 뉴욕의 한정판 클럽(The Limited Edition Club)에서 상을 받았으며 미국 전역에서 이름을 날렸다.

벤턴 부부가 뉴욕을 떠날 때 누구보다 서운해 했던 사람은 폴록이었다. 리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절망처럼 여겨졌다. 폴록은 폭음하면서 몇 차례나 자살에 관해 말했다. 1937년 벤턴이 뉴욕에 잠시 다니러와서 8번가에 있는 폴록의 화실을 방문했고, 폴록에게 샌드, 톨레지언과 함께 캔자스 시티로 오라고 초대했으므로 세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그의 집에 묵었다. 그때 폴록이 에피소드를 남겼는데 비극인지 익살인지, 그도 아니면 희비극에 가까운 사건을 연출하고 말았다.

폴록이 캔자스 시티 미술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거의 매일 밤 술에 취하는 것을 보고 벤턴은 폴록에게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와 리타는 잭슨이 여기 오기 전에는 그에게 이런 증세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리타를 다시 만나자 폴록은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으며, 그래서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채 그녀에게 가서 그녀를 줄곧 사랑해왔으며 자신은 그녀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라며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리타에게 실망한 폴록은 벤턴에게 가서 “빌어먹을 놈,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고 벤턴이 친구에게 전했다.

그날 밤 폴록은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면서 만취한 상태에서 이튿날 아침 겨우 벤턴의 집으로 돌아왔고, 리타는 허겁지겁 옷을 입고 그를 의사에게로 데리고갔다. 폴록은 결국 뉴욕 주의 화이트 플레인즈 시에 있는 주립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1938년 6월 12일 월요일이었다.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판사는 폴록이 일 년 미만 동안 주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고, 그는 병원에서 금주치료를 받았다.

그해 9월 30일, 폴록은 104일 동안의 치료를 마치고 다시는 음주하지 않겠다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 후 퇴원하였다. 벤턴은 폴록의 퇴원을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난 네놈이 재능있는 예술가임을 알고 있지만 술만 마시고 작업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넌 빌어먹을 놈이다.” 리타도 동봉한 편지에서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폴록은 두 달 후부터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정신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였고 때로는 자학의 수단이었으며 우울증에 대한 스스로의 처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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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 중에서

뒤샹의 스페인 친구 후앙 그리


마르셀은 몽마르트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스페인에서 온 후앙 그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리와 함께 카페에 자주 갔으며, 두 사람 모두 당구를 좋아해서 당구를 칠 때가 많았다.
이 시기 마르셀은 삽화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그리와 삽화에 관한 공통 관심사를 논했고, 신문에 함께 응모하기도 했다.
마르셀과 동갑인 그리의 본명은 호세 빅토리아노 곤잘레즈였고, 같은 나라 사람 피카소보다 6살 어렸다.
그리는 1906년에 파리로 와서 피카소를 만났는데 피카소는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싸구려 가옥 바토 라보아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리는 1887년 마드리드의 부자상인 카스틸리안의 13번째 아들로 태어나 공학기사가 되려는 생각으로 1902년 공학학교에 입학했지만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중퇴했다.
그는 그때 『블랑코』, 『네그로』, 『마드리드 코미코』에 삽화를 기고할 정도로 드로잉에 재능을 나타냈고,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청운의 꿈을 안고 19살 때 파리로 왔다.
그가 살던 바토 라보아를 피카소의 친구인 시인 막스 야곱은 “떠내려 가는 빨래”라고 불렀다.
그리는 피카소를 통해 피카소 일당들을 만났다. 피카소를 중심으로 모이는 그룹에는 시인 앙드레 사몽,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야곱이 있었다.
파리로 온 후 그리는 『라시에테 오 부르』와 『르 샤리바리』에 유머스러운 삽화를 기고했으며, 1910년부터 커다란 수채화를 그리면서 상업미술가보다는 순수예술가로 성공하기를 기대했다.

그리는 주변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장면들을 주제로 삼으면서 친구의 초상화, 풍경화, 도시의 장면들을 주로 그렸다.
그가 피카소를 존경한 이유는 입체주의 그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카소와 함께 여행을 하는 등 꾸준히 우정을 나누면서 그로부터 직접적으로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12년의 <피카소의 초상>은 입체주의의 창시자들인 조르주 브라크와 피카소의 화법과 상이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회화를 추구한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과도 비교될 정도로 매우 독특했다.
그는 정물화를 주로 그렸는데 <신문>, <꽃>, <신문이 있는 정물> 등이 포함되었다.
그는 단색을 주로 사용하여 독특한 색의 개성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곧 출현할 브라크와 피카소의 종합입체주의를 앞서 예고했다.
브라크가 1912년에 풀로 종이를 붙이는 새로운 기법의 콜라주를 사용하자 그리도 이 기교를 받아들여 신문이나 잡지를 잘라 캔버스에 풀로 붙여 아름답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종합입체주의 그림이 되게 했다.
마르셀도 이 시기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렸지만 피카소를 만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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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 첫 스승 벤턴을 만나다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1930년 뉴욕에 온 폴록은 먼저 그해 9월 29일 소문으로 들은 바 있는 미술학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형 찰스와 함께 입학했다. 리는 이미 그곳에서 수학한 후 2년 전에 떠나고 없을 때였다. 맨해턴 웨스트 57번가에 있는 모래색의 프랑스 르네상스풍 건물에 있었던 이 학교는 1875년 개교 이래로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었다. 반드시 마쳐야 하는 과목들이 따로 있지도 않고 학기도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학생들의 출석을 부르지도, 성적을 매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등록은 매달 한 과목당 12달러만 내면 되었다. 이처럼 자유방임주의적으로 가르치고 자유롭게 입학을 허용했던 학교이지만 교사진은 아주 훌륭했다. 그 중에는 토마스 이킨즈, 조지 벨로우즈 등이 있었다. 1931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책임자로 부임한 존 슬론은 이 학교가 금세기 미국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 학교는 미술에 굶주린 학생들에게 다양한 영양분이 있는 메뉴를 제공해주고, 보수주의에서부터 극단적인 모더니즘까지를 제공한다.”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평론과목은 화요일과 목요일 두 번, 미국 벽화예술가로 악명높은 토마스 하트 벤턴(Thomas Hart Benton 1889~1975)의 5층 화실 9에서 있었다. 폴록은 입학한 다음날 그의 첫 강의를 들었다. 벤턴은 담배를 씹는 습관이 있었으며 7시부터 10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가르쳤다. 그는 헐레벌떡 5층 계단을 뛰어올라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필요하냐? 내 비평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는 학생들이 아무 말을 안 하면 도로 층계를 내려가버렸다. 그 거친 성격 때문에 벤턴은 훌륭한 교사는 못 되었지만 폴록은 사내다운 그를 좋아했다. 폴록은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톰을 지독하게 좋아했다. 그의 방식대로의 사실주의 회화가 내게 지독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추상으로 나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날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의 인생에 변수로 작용했는데, 당시 벤턴은 마흔한 살이었다. 이 날부터 8년 동안 벤턴은 폴록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나중에 폴록은 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괴로워해야 했다. 영향이란 받기는 쉬워도 떨쳐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경험할 것이다. 이 시기 폴록의 수업태도에 관해 벤턴은 195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의 정신은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에 전혀 가망이 없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가르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에 재학하면서 폴록은 음주하기 시작했고 그의 주벽은 곧잘 동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어느 날 밤 학교에서 배를 한 척 빌려 허드슨 강을 유람한 적이 있었는데 폴록은 술에 취한 채 배에 매달려 있는 전구들을 하나씩 뽑아 강물에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선내는 곧 어두워졌고 여학생들은 컴컴한 선내에 있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짓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이 늘자 그는 “내가 전구들을 도로 가져오마”라고 말한 후 갑판으로 올라가 물에 뛰어들려고 했으므로 한 친구가 레슬링을 하다시피하여 그를 끌고 보일러실로 가서 유람이 끝날 때까지 가두어놓았다. 이처럼 폴록은 술에 취하면 곧잘 소동을 벌였는데 모두가 생명을 걸 만한 것들이었다. 학교 강당에서 공연이 있을 때도 그는 만취한 채 강당 중앙에 뻗어버렸는데 사람들이 그를 밟고 지나갈까봐 친구들은 그의 몸을 굴려서 가장자리의 벤치에 올려놓았다. 그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채 뻗어 있었다. 이렇듯 그의 주벽은 기어이 무의식에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사내 중의 사내 벤턴만이 폴록의 카우보이 기질을 좋아하여 그에게 친절했다. 벤턴은 폴록의 두 번째 등록금을 면제해주면서 장학금으로 처리했는데 폴록의 고등학교 동창생 마누엘 톨레지언은 “잭슨은 드로잉할 줄 모른다!”고 불평했다. 학생들은 폴록에 대한 벤턴의 관대한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함께 수학했던 해리 홀츠먼은 “잭슨은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다니듯이 벤턴의 뒤를 따랐다. 그가 무엇을 하던 잭슨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것이 자주 눈에 띄었으며 폴록은 스승의 미학, 화법, 기교, 언행, 그리고 폭음까지도 배웠다.

그의 친구는 “잭슨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그런 논리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가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기란 전혀 가망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폴록에 대한 인상은 남자와 여자친구들에게 각각 달랐다.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한 레지 윌슨(Reggie Wilson)이라는 친구는 폴록이 사람들과 대화할 줄 몰랐고 “그는 갑자기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마치 금방 주먹을 날려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라도 할 태세였다”고 말했던 데 반해 여자친구들은 폴록이 아주 정감을 주는 미소를 지었고 성격이 부드러웠으며 자신을 감출 줄 아는 온순한 성품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스승의 아내 리타를 사랑하다
벤턴의 이탈리아인 아내 리타(Rita)는 ‘스파게티 디너’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그녀는 일요일 밤 남편의 제자들을 위해 스파게티를 만들어주었으며 학생들은 마실 것을 가지고왔다. 어느 날 밤 벤턴은 폴록의 세 형제인 찰스, 프랭크, 잭슨 폴록을 초대했는데 그날 처음 리타를 만난 폴록은 그녀가 다정다감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몰라서 그랬는지는 폴록 자신만이 알 노릇이지만 그는 리타에게 스파게티 먹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리타는 한 손에 포크를, 다른 손에는 스푼을 들고 먹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리타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할 때 폴록에게는 그녀가 천사처럼 보였고, 정감있는 음성으로 말할 때에는 그녀의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 이후 리타는 폴록을 재정적으로 도와줄 겸 일 주일에 한 번 네 살난 아들 돌보는 일을 시켰는데 리타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폴록이 부엌바닥과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겨울에 폴록이 감기에 걸렸을 때 리타는 그에게 비스켓과 크림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렇듯 리타는 보호자처럼 폴록을 대했으며 벤턴은 아버지처럼 그를 도우려 했다.

폴록의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잭슨은 핸섬했고, 어느 영화배우 못지않게 잘생겼지만 나는 그가 여자친구와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왜 여자들에게 그렇게 무관심했던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폴록은 성(性)에 매료되고 있었는데 상대는 불행하게도 어머니같이 그에게 친절했던 리타였다. 리타는 남편의 제자들에게 항상 친절했는데 그녀가 폴록을 매력있는 남성으로 대하자 리타에 대한 그의 연정은 더욱 커갔다.

폴록의 형 프랭크는 폴록과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면서 잭슨은 리타와 몰래 성관계를 여러 번 가졌다고 말했다고 했다. 폴록의 일대기를 처음 쓴 프리드먼(B. H. Friedman)도 “그 사실을 알고 대단히 놀랐다”고 말했다. 폴록과 리타의 관계는 소문이 나서 벤턴도 나중에 알게 되었으며, 폴록이 타계한 후 1964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는 “잭슨이 나를 유감스럽게 만들었다”고 투덜거렸다.

1933년 9월 벤턴과 리타가 그리니치 빌리지 8가 이스트 10번지의 새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그는 화실에 파란 등을 달았으므로 밖에서 그의 화실을 쳐다보면 마치 그의 그림에서 나타난 중서부의 하늘처럼 보였다. 벤턴이 강의하러 가고 리타가 외출할 일이 있을 때면 그녀는 여섯 살 난 아들을 돌보라고 폴록을 부르곤 했다. 그 아이가 커서 “잭슨은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다”고 회상하면서 “어머니는 그를 아들처럼 대해주었다”고 첨언했는데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이 이때 이루어지곤 했는지 모를 일이다. 은밀한 사랑에 관해서는 두 사람 다 함구했으므로 여러분만큼 필자도 모른다. 리타는 아들을 돌봐주는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일 주일에 몇 차례고 폴록을 초대했고, 그는 리타와 함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에게는 리타의 아파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두 사람은 밀애의 시간을 그렇게 늘여나갔던 성싶다.

이 시기에 그는 찰스와 미래의 형수 엘리자베스 잉글랜드(Elizabeth England)와 함께 벤턴의 아파트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폴록이 그의 몫의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고 자주 불평했다. 그녀는 폴록이 난로불을 쬐고 있으면 그가 석탄을 모두 없앤다고 투덜거렸고(이 시기에는 석탄 값이 비쌌다), 그가 낮잠을 자고 있으면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게을러빠졌다고 구박했으므로 그는 더욱 자주 리타의 집에 가서 소일했다.

리타의 오랜 친구였던 헬렌 마롯(Helen Marot)은 폴록을 보자 도우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69세였지만 여전히 매력있는 여인이었고, 포도주색 머리카락에 피부는 희었으며,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대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쯤 되었고, 글을 썼으며, 『다이얼 The Dial』 잡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헬렌은 폴록을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청소부로 취직시켜주었다. 그는 그런 잡일을 하기 싫어했지만 주급 10달러를 벌어 생활비에 보태야 했으므로 일을 하기는 했다. 당시 폴록의 형 샌드가 무일푼으로 뉴욕에 와서 이제 식구가 넷으로 늘었으므로 그는 무슨 일이고 해야 할 처지였다. 리타는 폴록을 돕고 싶어했지만 주저했는데 그녀는 나중에 “잭슨은 아주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했으므로 그에게 돈을 줄 수가 없었다”고 기술했다. 리타는 폴록을 경제적으로 도울 의도로 그에게 도예가 잡 굿맨(Job Goodman)에게 무료로 도자기 제품 제작법을 배우도록 그의 반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폴록은 리타의 말이라면 순순히 따랐다. 그는 도자기 제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벤턴은 “대단히 성공적이다”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때 리타는 벤턴의 지시대로 페라질(Feragil) 화랑에서 유능한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녀는 12월 한 달 동안에 수천 달러에 해당하는 그림을 팔았고, 그후 6개월 동안은 폴록이 제작한 접시와 그릇들을 여섯 점을 제외하고 모두 팔았다. 그 여섯 점은 폴록이 리타에게 선사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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