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자살한 아실 고키
아실 고키와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새 교사로 부임했다. 고키는 마흔네 살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가 뉴욕파 예술가들에게 준 영향은 적지 않았고, 폴록은 그로부터 미학적 도움을 직접 받았다. 고키는 1904년에 아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일차대전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고키와 그의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키와 여동생은 난민들 틈에 끼여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 배에 승선했는데 아버지는 그때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키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로비던스와 보스톤(Boston)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스물한 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에 그만두었지만, 나중에는 교사로 재직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중요한 예술가이며,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Color-Field)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는데 로드코는 고키가 아주 엄격한 교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로드코의 개인전람회가 열렸을 때 고키는 화랑으로 와서 그림들을 아주 진지하게 들여다보다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제자 한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 부분을 조금 엷게 해라”고 말해 다같이 웃었다고 회상했다.
고키는 처음에 세잔느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 회화방법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별명은 ‘워싱턴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그리니치 빌리지 중앙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는 뉴욕 대학교(New York University)의 정원과도 같은 곳으로서 지금도 대학생들뿐 아니라 무명예술가들이 한가롭게 스케치를 하거나 행위예술가들이 이벤트를 벌이는 정감있는 장소이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기자 프랑스의 이브 탕기와 앙드레 마송, 칠레의 로베르토 마타, 그리고 피카소와 같은 나라 스페인의 호앙 미로의 그림들을 연구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는 친구 예술가들을 화실로 초대한 후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우리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점일세”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피카소가 회화의 모든 가능성들을 실험했다는 의미였다. 이때는 예술가들이 피카소에 의해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을 예사로 할 때였다.
폴록과 다른 학생들은 고키와 데이비스가 학교식당에서 미술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폴록은 벤턴의 소개로 학교식당 탁자를 청소하는 일을 했으므로 고키가 식당에서 미인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주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인 고키는 육 척 장신에 검은 머리칼을 앞이마에 떨어뜨린 매력적인 모습이었고, 수염을 길렀으며, 숙고하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소유자였다. 학교식당에 자주 와서 미인들에게 그의 특유의 우수에 찬 음성으로 “나의 화실로 와서 애인이 되어준다면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겠다”며 유혹하곤 했다. 미술학교에 재학했던 필립 페이비어는 “고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1930년 여름부터 재학중이었던 휘트니 대로우(Whitney Darrow)는 “고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1934년 고키의 첫 개인전이 필라델피아의 멜론(Mellon) 화랑에서 열렸으며, 이 시기에 그는 드 쿠닝과 우정이 두터웠는데 드 쿠닝은 고키를 가리켜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그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정받는 예술가였고, 1937년에 휘트니 뮤지엄은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으며 이듬해에는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했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에 줄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전람회 카탈로그를 앙드레 브르통이 쓰기도 했다. 브르통은 “고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기술하였다.
고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고, 고키의 아내는 고키와 마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에 화재가 나서 고키의 그림 스물일곱 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분실되었고, 다음달에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1948년 6월 26일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이 부러졌으며, 그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그와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키는 우울증으로 번민하며 지내다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에 있는 화실에서 자살하여 세상을 버렸다. 브르통은 “고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그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