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 첫 스승 벤턴을 만나다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1930년 뉴욕에 온 폴록은 먼저 그해 9월 29일 소문으로 들은 바 있는 미술학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형 찰스와 함께 입학했다. 리는 이미 그곳에서 수학한 후 2년 전에 떠나고 없을 때였다. 맨해턴 웨스트 57번가에 있는 모래색의 프랑스 르네상스풍 건물에 있었던 이 학교는 1875년 개교 이래로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었다. 반드시 마쳐야 하는 과목들이 따로 있지도 않고 학기도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학생들의 출석을 부르지도, 성적을 매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등록은 매달 한 과목당 12달러만 내면 되었다. 이처럼 자유방임주의적으로 가르치고 자유롭게 입학을 허용했던 학교이지만 교사진은 아주 훌륭했다. 그 중에는 토마스 이킨즈, 조지 벨로우즈 등이 있었다. 1931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책임자로 부임한 존 슬론은 이 학교가 금세기 미국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 학교는 미술에 굶주린 학생들에게 다양한 영양분이 있는 메뉴를 제공해주고, 보수주의에서부터 극단적인 모더니즘까지를 제공한다.”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평론과목은 화요일과 목요일 두 번, 미국 벽화예술가로 악명높은 토마스 하트 벤턴(Thomas Hart Benton 1889~1975)의 5층 화실 9에서 있었다. 폴록은 입학한 다음날 그의 첫 강의를 들었다. 벤턴은 담배를 씹는 습관이 있었으며 7시부터 10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가르쳤다. 그는 헐레벌떡 5층 계단을 뛰어올라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필요하냐? 내 비평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는 학생들이 아무 말을 안 하면 도로 층계를 내려가버렸다. 그 거친 성격 때문에 벤턴은 훌륭한 교사는 못 되었지만 폴록은 사내다운 그를 좋아했다. 폴록은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톰을 지독하게 좋아했다. 그의 방식대로의 사실주의 회화가 내게 지독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추상으로 나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날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의 인생에 변수로 작용했는데, 당시 벤턴은 마흔한 살이었다. 이 날부터 8년 동안 벤턴은 폴록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나중에 폴록은 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괴로워해야 했다. 영향이란 받기는 쉬워도 떨쳐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경험할 것이다. 이 시기 폴록의 수업태도에 관해 벤턴은 195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의 정신은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에 전혀 가망이 없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가르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에 재학하면서 폴록은 음주하기 시작했고 그의 주벽은 곧잘 동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어느 날 밤 학교에서 배를 한 척 빌려 허드슨 강을 유람한 적이 있었는데 폴록은 술에 취한 채 배에 매달려 있는 전구들을 하나씩 뽑아 강물에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선내는 곧 어두워졌고 여학생들은 컴컴한 선내에 있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짓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이 늘자 그는 “내가 전구들을 도로 가져오마”라고 말한 후 갑판으로 올라가 물에 뛰어들려고 했으므로 한 친구가 레슬링을 하다시피하여 그를 끌고 보일러실로 가서 유람이 끝날 때까지 가두어놓았다. 이처럼 폴록은 술에 취하면 곧잘 소동을 벌였는데 모두가 생명을 걸 만한 것들이었다. 학교 강당에서 공연이 있을 때도 그는 만취한 채 강당 중앙에 뻗어버렸는데 사람들이 그를 밟고 지나갈까봐 친구들은 그의 몸을 굴려서 가장자리의 벤치에 올려놓았다. 그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채 뻗어 있었다. 이렇듯 그의 주벽은 기어이 무의식에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사내 중의 사내 벤턴만이 폴록의 카우보이 기질을 좋아하여 그에게 친절했다. 벤턴은 폴록의 두 번째 등록금을 면제해주면서 장학금으로 처리했는데 폴록의 고등학교 동창생 마누엘 톨레지언은 “잭슨은 드로잉할 줄 모른다!”고 불평했다. 학생들은 폴록에 대한 벤턴의 관대한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함께 수학했던 해리 홀츠먼은 “잭슨은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다니듯이 벤턴의 뒤를 따랐다. 그가 무엇을 하던 잭슨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것이 자주 눈에 띄었으며 폴록은 스승의 미학, 화법, 기교, 언행, 그리고 폭음까지도 배웠다.

그의 친구는 “잭슨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그런 논리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가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기란 전혀 가망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폴록에 대한 인상은 남자와 여자친구들에게 각각 달랐다.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한 레지 윌슨(Reggie Wilson)이라는 친구는 폴록이 사람들과 대화할 줄 몰랐고 “그는 갑자기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마치 금방 주먹을 날려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라도 할 태세였다”고 말했던 데 반해 여자친구들은 폴록이 아주 정감을 주는 미소를 지었고 성격이 부드러웠으며 자신을 감출 줄 아는 온순한 성품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스승의 아내 리타를 사랑하다
벤턴의 이탈리아인 아내 리타(Rita)는 ‘스파게티 디너’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그녀는 일요일 밤 남편의 제자들을 위해 스파게티를 만들어주었으며 학생들은 마실 것을 가지고왔다. 어느 날 밤 벤턴은 폴록의 세 형제인 찰스, 프랭크, 잭슨 폴록을 초대했는데 그날 처음 리타를 만난 폴록은 그녀가 다정다감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몰라서 그랬는지는 폴록 자신만이 알 노릇이지만 그는 리타에게 스파게티 먹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리타는 한 손에 포크를, 다른 손에는 스푼을 들고 먹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리타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할 때 폴록에게는 그녀가 천사처럼 보였고, 정감있는 음성으로 말할 때에는 그녀의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 이후 리타는 폴록을 재정적으로 도와줄 겸 일 주일에 한 번 네 살난 아들 돌보는 일을 시켰는데 리타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폴록이 부엌바닥과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겨울에 폴록이 감기에 걸렸을 때 리타는 그에게 비스켓과 크림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렇듯 리타는 보호자처럼 폴록을 대했으며 벤턴은 아버지처럼 그를 도우려 했다.

폴록의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잭슨은 핸섬했고, 어느 영화배우 못지않게 잘생겼지만 나는 그가 여자친구와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왜 여자들에게 그렇게 무관심했던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폴록은 성(性)에 매료되고 있었는데 상대는 불행하게도 어머니같이 그에게 친절했던 리타였다. 리타는 남편의 제자들에게 항상 친절했는데 그녀가 폴록을 매력있는 남성으로 대하자 리타에 대한 그의 연정은 더욱 커갔다.

폴록의 형 프랭크는 폴록과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면서 잭슨은 리타와 몰래 성관계를 여러 번 가졌다고 말했다고 했다. 폴록의 일대기를 처음 쓴 프리드먼(B. H. Friedman)도 “그 사실을 알고 대단히 놀랐다”고 말했다. 폴록과 리타의 관계는 소문이 나서 벤턴도 나중에 알게 되었으며, 폴록이 타계한 후 1964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는 “잭슨이 나를 유감스럽게 만들었다”고 투덜거렸다.

1933년 9월 벤턴과 리타가 그리니치 빌리지 8가 이스트 10번지의 새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그는 화실에 파란 등을 달았으므로 밖에서 그의 화실을 쳐다보면 마치 그의 그림에서 나타난 중서부의 하늘처럼 보였다. 벤턴이 강의하러 가고 리타가 외출할 일이 있을 때면 그녀는 여섯 살 난 아들을 돌보라고 폴록을 부르곤 했다. 그 아이가 커서 “잭슨은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다”고 회상하면서 “어머니는 그를 아들처럼 대해주었다”고 첨언했는데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이 이때 이루어지곤 했는지 모를 일이다. 은밀한 사랑에 관해서는 두 사람 다 함구했으므로 여러분만큼 필자도 모른다. 리타는 아들을 돌봐주는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일 주일에 몇 차례고 폴록을 초대했고, 그는 리타와 함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에게는 리타의 아파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두 사람은 밀애의 시간을 그렇게 늘여나갔던 성싶다.

이 시기에 그는 찰스와 미래의 형수 엘리자베스 잉글랜드(Elizabeth England)와 함께 벤턴의 아파트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폴록이 그의 몫의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고 자주 불평했다. 그녀는 폴록이 난로불을 쬐고 있으면 그가 석탄을 모두 없앤다고 투덜거렸고(이 시기에는 석탄 값이 비쌌다), 그가 낮잠을 자고 있으면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게을러빠졌다고 구박했으므로 그는 더욱 자주 리타의 집에 가서 소일했다.

리타의 오랜 친구였던 헬렌 마롯(Helen Marot)은 폴록을 보자 도우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69세였지만 여전히 매력있는 여인이었고, 포도주색 머리카락에 피부는 희었으며,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대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쯤 되었고, 글을 썼으며, 『다이얼 The Dial』 잡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헬렌은 폴록을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청소부로 취직시켜주었다. 그는 그런 잡일을 하기 싫어했지만 주급 10달러를 벌어 생활비에 보태야 했으므로 일을 하기는 했다. 당시 폴록의 형 샌드가 무일푼으로 뉴욕에 와서 이제 식구가 넷으로 늘었으므로 그는 무슨 일이고 해야 할 처지였다. 리타는 폴록을 돕고 싶어했지만 주저했는데 그녀는 나중에 “잭슨은 아주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했으므로 그에게 돈을 줄 수가 없었다”고 기술했다. 리타는 폴록을 경제적으로 도울 의도로 그에게 도예가 잡 굿맨(Job Goodman)에게 무료로 도자기 제품 제작법을 배우도록 그의 반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폴록은 리타의 말이라면 순순히 따랐다. 그는 도자기 제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벤턴은 “대단히 성공적이다”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때 리타는 벤턴의 지시대로 페라질(Feragil) 화랑에서 유능한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녀는 12월 한 달 동안에 수천 달러에 해당하는 그림을 팔았고, 그후 6개월 동안은 폴록이 제작한 접시와 그릇들을 여섯 점을 제외하고 모두 팔았다. 그 여섯 점은 폴록이 리타에게 선사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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