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다양성 또는 도덕적 불일치가 나타날 여지는 충분하다

 

 

 

 

 

성별 역할에 관한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옳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상대주의자는 해방된 견해가 우리 문화에 ‘적합’하지만, 제약적인 견해는 그들의 문화에 ‘적합’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관점이 충돌한다. 두 문화권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질 때, 그들은 두 가지 답을 내놓을 터이다. 그러므로 상대주의자가 ‘옳은 것’이 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 어떤 충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충돌은 양쪽 사람들의 ‘도덕’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에서 일어나는 충돌일 터이다. 우리가 어긋나는 두 관행이 모두 옳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전에, 두 사회 집단이 두 가지의 관행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문화권이 어떤 일에 관하여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이것이 우리 방식이야”가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해,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쪽에서 내놓는 이야기를 다른 쪽에서 거부하는 가운데, 양쪽은 그들의 행위가 더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도덕성이다. 도덕성은 우리의 행위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정당화하느냐를 주제로 삼는다. 그리하여 도덕성은 단순히 어느 특정 집단의 문화적 관행을 가리키는 것만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더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어느 집단은 어떤 도덕적 문제에 나름의 답내놓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 다양성 또는 도덕적 불일치가 나타날 여지는 충분하다. 그렇다 하여 이것이 곧 도덕성 자체가 상대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성은 각각의 문화가 내놓는 답이 충분한지 평가하는 기준이다. 이것을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도덕성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해 문화마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혼란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견해가 옳은지 의문을 품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그에 답하려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단순히 기술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런 행위나 생각을 평가해야 한다.
도덕성은 단순히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도덕적 신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런 문화에서 자라났기에 이런 신념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도덕적 행위란 곧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따라 한다는 의미밖에 더 될까? 이때의 도덕적 행위는 단순히 사회와의 획일화를 의미하는 것밖에는 없지 않을까? 도덕적 이유란 것이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도덕성은 너무 공허해보일 것이다. 획일적인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강한’ 개인은 획일성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 따라서 도덕성을 단순히 ‘사회가 기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도덕적 신념을 퇴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또한, 자신이 자라나면서 얻은 도덕적 신념에 대한 의문 제기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에 상관없이 우리는 늘 모든 도덕적 신념에 회의를 가져야 한다. 상대주의자들은 아우슈비츠나 어린이를 학대하는 사례에 직면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실행하는 것이 무척이나 나쁜 일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도덕적 회의론과 의견을 달리하고 싶더라도, 이러한 회의론이 어떤 중요한 통찰을 바탕으로 나온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도덕성의 주된 관심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바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모호한 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식인행위가 나쁘다는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누구나 직관으로 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거기에 더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말하자면 식인이란 말만 들어도 역겨움을 느낀다는 것 말고 다른 의미가 있을까? 어떤 행위를 나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우리에게 허용된 행위가 아니라는(금지된, 허용될 수 없는 행위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누가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이 말에 어떤 이가 신을 연상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충분할 터이다. 그런데 신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 그런 사람에게 도덕적 금지란 무엇일까? 이런 식의 도덕적 금지가 실제로 존재할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해 이해하려 한다면, 이내 과학에서 설명하는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과학자들은 실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전자, 입자 같은)의 목록을 건네줄 수 있겠지만, 도덕적 금지에 관하여는 할 말이 전혀 없을 터이다. 이렇게 보면 도덕적 반응이란 인간이 느끼는 바를 바탕으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도덕적 반응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독립된 부분이 결코 아니다. 이 사실을 달리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관심을 두는 도덕이론을 과학이론에 비추어보자. 과학이론은 검증할 수 있는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정을 뒷받침하거나 가정에 어긋나는 증거들을 모아 과학이론을 입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다. 그런데 도덕이론에 증거란 것이 있을까? 과학에서 연소이론이 부정되는 형식으로 도덕이론이 단번에 부정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나의 도덕이론을 부정 또는 인정하는 것은 언제나 개인의 반응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곧 도덕성이 자신과 상관없는 실제의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에 직접
관계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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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命門이 태극太極

 

 

『황제내경』에서 “명문은 눈이다.”라고 했다. 이를 근거로 후대인이 명문을 정명혈睛明穴(눈물샘이 있는 눈 안쪽 뾰족한 부분)이라고 여겼는데, 태양의 경기經氣(경맥經脈 사이를 운행하는 기氣)가 모여 맺히는 곳이다. 오늘날 눈을 명문이라고 한 것을 뇌수腦髓를 가리켜서 명문命門이라고 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생명의 뿌리가 뇌에 있으면서 그 상象이 눈으로 드러나니 뇌수는 체體이고 눈이 용用이라고 말한다.

동진東晋 말기(5세기 초)의 양희楊羲는『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을 저술했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어두운 방안에서 양문陽門을 밝게 비춘다.”, “니환泥丸과 마디마디에 모두 신神이 있다. ... 한 부위의 신은 니환을 종주로 삼는다. 니환과 구진九眞에는 모두 방이 있다.”

니환泥丸은 뇌를 가리킨다. 뇌는 정기精氣의 뿌리로 뭇 신의 종주가 되어 얼굴에 있는 오관五官의 신神을 주재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의 태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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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 휜 사람은 등뼈도 휘었다

 

 

32세의 남성 이씨는 왼쪽 옆구리와 갈비뼈 아랫부분, 즉 허리의 잘록하게 들어가는 부분의 약간 위쪽에서 통증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아프기 시작했을 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해 계속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긴 대로 병이 온다>의 저자 조성태에게 하소연했습니다. 그는 공복시에 복통과 함께 가스가 많이 차고 트림을 자주 하며 멀미가 심해 버스를 타지 못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조성태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그의 비뚤어진 코와 유난히 붉어 보이는 입술이었습니다. 등뼈나 허리가 아프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 등의 한가운데가 아파서 가끔 등을 두드려달라고 할 때가 있어요. 특히 요추하고 흉추 사이가 아주 아파요. 허리 통증도 있구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음낭이 다르게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크기는 잘 모르겠는데, 한쪽은 약간 밑으로 처져있고 한쪽은 올라간 것 같아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코가 휜 것을 등뼈가 휜 것으로 봅니다. 이때 코는 등뼈에 해당합니다. 코가 휘어지는 것은 몸이 냉하기 때문입니다. 배꼽 이하의 생식기 쪽에 기가 차서 그 위로 올라가는 등뼈가 휘는 것이며, 코도 차츰 휜다는 논리입니다. 코가 휜 사람은 등뼈가 휘었기 때문에 등과 어깨가 아프고 뒷목이 늘 뻣뻣합니다. 그리고 눈이 맑지 못하고 침침하며 소화불량 증세와 함께 속이 느글느글 메슥거리며 장이 좋지 않고 심장 통증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조성태는 환자의 코가 비뚤어진 것과 등과 허리가 아픈 것과 음낭이 서로 다른 것을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명문화쇠命門火衰, 즉 배꼽 이하 생식기 계통의 기능이 시원치 않아 밑불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배가 많이 나오면서 성의 능력은 떨어지고 땀이 많아지면서 특히 음낭 밑이 축축하게 땀이 나는 것을 명문화쇠라 하는데 양기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조성태는 밑불이 약하면 몸이 냉해져서 코도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휘어진다고 말합니다. 옆구리와 등, 허리가 아프고 아랫배에 가스가 찬 것처럼 거북한 것도 밑불이 약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좌우를 나누어 왼쪽은 혈이 관장하고 오른쪽은 기가 관장하는데, 온도와 한열寒熱이란 건 양쪽에 똑같이 작용하지 않는다면서 음낭도 인체와 같이 좌우로 나누어져 있어 양쪽 음낭이 서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씨의 경우는 밑불이 시원찮아 몸이 냉하기 때문에 한쪽이 오그라들어 위로 올라가 있다면서 이런 까닭에 옆구리가 아픈 것으로 한의학에서는 산증疝症이라 합니다. 산증이란 고환이나 음낭이 커지면서 아프거나 아랫배가 켕기며 아픈 증상 혹은 차고 눅눅한 환경에 있거나 과도한 성생활, 과로 등으로 인해 생긴 증상을 말합니다. 산증의 증상을 보면 남자의 경우에는 음낭이 가끔 붓고 아프며, 여자의 경우에는 질에서 통증이 느껴집니다. 또 아랫배와 옆구리가 불쾌하고 아프면서 신경질과 짜증이 늘어납니다. 그 밖에도 장열오한壯熱惡寒(극심하게 열이 나면서 추위를 느끼는 증상)이라 해서 감기 몸살처럼 오슬오슬 추울 대가 있으며 코가 막히기도 합니다. 고관절과 심장, 가슴 부위 등이 아프며 소화도 잘 안 되고 메슥거릴 때가 있습니다. 또한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고 어지럽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한 경우도 있습니다.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배에서 소리가 나며 소변이 시원찮은 증상이 나타나며 오른쪽이나 왼쪽 어깻죽지로 통증이 옵니다. 이씨의 경우에는 위의 증상들이 모두 적용되었습니다. 조성태는 그에게 온신산溫腎散을 처방했습니다. 온신산은 신과 명문이 허하고 차서 허리와 등골이 무겁고 아픈 데 처방하는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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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후사이니는 종교의 권위자 겸 아랍 민족주의자였다

 

 

 

알후사이니는 종교의 권위자 겸 아랍 민족주의자였다. 그래서 이를 혼동한 몇몇 학자들은 그의 신원을 정치적 이슬람교와 결부시켜 왔다. 비록 그가 이슬람교 법전 전문가(무프티)로 활동했지만 사상은 이슬람주의가 아닌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었다. 근대 이슬람주의자라면 알후 사이니처럼 나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거나 정치 지도부에 굴복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범아랍식 반유대주의와 이슬람교식 반유대주의의 차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연속성은 단절 뒤에 온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알후 사이니를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과도기적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37년 말, 베를린에서 알후사이니는 이슬람교와 유대인에 대하여 이슬람주의적 관점으로 논쟁을 벌였는데, “이슬람교식 반유대주의” 라는 전통을 꾸며낸 장본인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범아랍 민족주의19는 세속 이데올로기이자 유럽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아랍세계에 국한된 건 아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세속 아랍 민족으로서 보편적인 무슬림 공동체를 정치적 실체로 간주하려는 사상을 버렸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생각대로, 음모보다는 시류를 포용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미합중국도 그랬지만, 아랍 민족을 한 국가로 통일하려는, 범아랍 민족의 비전은 민족의 근간에 달려 있다. 범아랍주의에 비아랍 무슬림이 포함되지 않는 까닭은 그들에게는 종교적 성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범아랍주의자들과는 달리,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를 비롯한) 초기 범이슬람주의자들은 모든 무
슬림을 단일 칼리프 제국으로 통일한다는 이데올로기를 표방했으나, 무슬림 공동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서까지 칼리프를 확장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는 범이슬람주의와 범아랍주의는 닮았다. 2장에서 논했듯이, 이슬람주의 체제인 신이슬람 질서nizam Islami(니잠 이슬라미)는 서방세계가 주장하는 칼리프 체제보다 근대적이면서도 훨씬 범위가 넓다.
제프리 허프가 『아랍세계를 향한 나치 선전Nazi Propaganda for the Arab World』(2009)에서 밝혔듯이, 범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나치로부터 반유대주의를 배운 셈이다.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중동에 적극 유포했다고 버나드 루이스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또한 버나드 루이스는 비시 정권이 시리아 등의 프랑스 식민지를 나치에 개방한 탓에 나치 독트린이 아랍세계에 전파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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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은 모두 상대적일까

 

 

 

이 시점에서 윤리 연구가 처음부터 기본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설명을 통해 도덕이론은 옳고 그름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을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꽤 야심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도덕이론의 야심찬 가정에 따르면, 도덕적 의문에는 반드시 답이 있는바 우리는 그 답이 옳은지 그른지 판별할 수 있다. 윤리 연구를 경시하는 이들은 윤리라는 분야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음을 부정한다. 이들이 볼 때 도덕성은 주관적 문제일 뿐이다. 이들은 한 사람의 도덕적 신념은 그의 성장환경이나 심리상태처럼 그와 관련 있는 요소들에 따라 결정되며, 그와 아무 상관없는 세상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장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있을 때 이들의 신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문화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투우경기가 말할 수 없이 잔인한 행위지만,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인간적 용기의 고상한 표현이다. 이들의 견해는 분명히 다르지만, 다른 성장환경을 고려하면 어느 한 사람의 견해를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입맛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음식을 맛보고 나서, 한 사람은 맛있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구역질을 참기 어려워한다면, 이들은 다만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일 뿐 논쟁할 일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상대주의 관념이다.

말하자면, 한쪽 사람이나 한쪽 문화의 판단은 ‘그들 자신에게 옳은 것’일 뿐 다른 쪽의 견해를 비난할 일은 아니다.상대주의자는 도덕성을 일련의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문화의 불일치를 반영하는 어느 정도의 도덕적 불일치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문화에서는 식용으로 삼는 것을 다른 문화에서는 더없이 혐오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문화에 젖은 사람들이 완전히 옳다고 여기는 행위를 다른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과 관습을 달리한다.
종교와 도덕은 방향을 같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도덕적 신념과 관행이 다르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상대주의자는 도덕성을 ‘도덕’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특정 문화에서 보편화한 도덕적 신념이자 관행이다. 도덕성에 이 이상의 다른 것이 없다면, 도덕성은 어떤 특정 종류의 사회적 사실로 비칠 것이다. 도덕성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 문화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주의가 늘 타당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리에게는 특정 사회집단의 도덕과 관련되는 여러 사실을 초월하는 그 이상의 어떤 도덕성 개념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여성의 권리를 생각해보자. 서구사회가 이전에는 남성만 누리던 자유를 근래에 이르러 여성에게 허용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었다. 남성은 돈과 정치와 이상을 위해 집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근래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이 옳
은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이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이룬 것은 확실히 도덕적 진보라 할 만하다. 다른 문화권(선택할 수 있는 문화권이 많이 있지만)의 사정을 생각해보자. 사회 문제에 관한 정책결정의 토론장에서 여성은 여전히 제외되어 있다. 그들 문화에서는 좀처럼 바뀔 리 없는 분업제가 모든 가정에 확립되어 있다. ‘현실적인’ 여성은 가정을 돌보고 ‘현실적인’ 남성은 넓은 바깥일을 살핀다. 이런 문화에서는 성별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비웃고, 서구식 자유를 탈선으로 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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