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봄의 청년과 소녀>

<봄의 청년과 소녀>는 마르셀의 복잡한 정신세계의 한 단면을 드러낸 듯하다.
중앙에 검정색으로 동그랗게 표시한 곳에 있는 모호한 제스처의 누드가 그림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발레리나와 같은 제스처를 취한 땅 위에 있는 누드는 상상의 세계에 있는 동그라미 안의 누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마르셀만이 알 수 있는 개인적인 상징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그가 이 상징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이 그림이 무엇을 은유하는지 알 길이 없다.
봄에 그린 이 그림을 그해 여름에 결혼한 수잔느에게 선물한 것으로 미루어 여동생과 관련 있는 듯한데, 여동생의 결혼선물로 누드 그림을 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심리적인 요소가 다분한 <봄의 청년과 소녀>에 관해 훗날 평론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스와 이집트의 전설로부터 성서, 힌두, 불교에 이르기까지 그 해석이 분분했으며, 이런 것들과 관련 있는 이야기들을 마르셀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 이론을 적용해서 여동생에 대한 은밀한 근친상간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해석한 평론가도 있었다.
금기로 된 근친상간을 억누르기 위해 마르셀이 아담과 이브의 모습으로 자신과 수잔느를 표현했다는 평론가의 해석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그가 쇠를 금으로 만들려는 연금술사처럼 불가능한 일에 강한 집념을 나타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평론가가 없었다.
마르셀은 “내가 만약 연금술을 행위하고 있다면 지금과 같이 이를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봄의 청년과 소녀>와 관련지어보면 이 그림은 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마르셀 자신도 관람자도 지각할 수 없는 상태로 표현한 것이다.

훗날 마르셀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이탈리아인 아르투로 슈바르츠는 1969년에 『마르셀 뒤샹의 모든 작품the Complete Works of Marcel Duchamp』이란 책을 발간했는데 <봄의 청년과 소녀>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림에서의 청년은 마르셀 자신으로 장차 <큰 유리>에 나타날 독신자이고, 소녀는 수잔느로 장차 나타날 신부이다.
두 사람은 성별의 구별 외에는 거의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모습으로 팔을 높이 쳐들고 Y자 모양을 했는데 두 사람 모두 같은 열망을 가졌음을 가리키는 모습이며, 이는 기본적인 자웅동체적·정신적 경향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거의 독자적으로 나타났다.
… 떨어져 있는 두 세계의 각 젊은이는 두 반원형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노력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슈바르츠는 이 그림뿐만 아니라 마르셀의 모든 작품을 억눌린 그의 근친애와 연계하여 설명했다.
수잔느가 결혼한 후 마르셀은 이본느와 막들렌느의 초상화를 네 점 그리면서 입체주의 방법으로 두 여동생의 모습을 부서뜨린 후 재구성했다.
파리로 돌아온 10월 그는 같은 방법으로 <초상 둘시네아>를 그렸는데, 키가 큰 다섯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으로 세 여인은 의상을 제대로 갖춘 데 비해 두 여인은 몸을 부분적으로 노출한 모습이었다.
제목 둘시네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돈 키호테가 짝사랑한 여인의 이름이면서 실제 여인에 대한 가명이었다.
마르셀은 1966년 미술사학자 피에르 카반느에게 “둘시네아는 뉠리(마르셀이 거주한 동네) 거리에서 만난 여인으로 나는 이따금 그녀를 만났지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 그녀는 개를 데리고 산보했고, 이웃에 산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그녀의 이름조차 모른다”라고 했다.

카반느는 장시간에 걸쳐 마르셀과 나눈 대화를 『마르셀 뒤샹과의 대화Dialogues with Marcel Duchamp』란 제목으로 1967년에 프랑스어로 발간했고 1971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카반느는 1966년 뒤샹이 80회 생일을 맞기 몇 달 전에 인터뷰했는데 뒤샹은 1년 반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될 때 로버트 마더웰이 소개말을 썼고, 살바도르 달리가 서문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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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바람 난 막스 에른스트

이차대전이 일어나고 독일 폭격기는 연일 런던에 폭탄을 투하했으며 윈스턴 처칠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영국을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구하려 했다. 페기는 폭격으로 런던에 있는 그림들이 잿더미가 될까 염려되어 1941년 초에 그림들을 모두 뉴욕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그녀는 유럽에 미련이 많았으므로 그곳에 머물렀고 이번에는 ‘아버지 같은’ 또 다른 초현실주의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다. 그가 바로 페기보다 열 살 많으며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였는데 그 또한 여자를 밝히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예술가였다. 페기의 남편이기 때문이 아니라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예술가이며 또 미국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므로 그를 좀더 가까이서 살펴보자.

막스 에른스트는 1891년 4월 2일 쾰른과 본 사이에 있는 조그만 동네 브룰(Bruhl)에서 여섯 자녀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농아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맑은 눈을 가진 유머있는 여인이었다. 아버지는 주말이면 그림을 그리던 아마추어 화가였으므로 에른스트는 어려서부터 회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성적이었다. 1906년에 그는 사랑하던 핑크색 앵무새와 막내 여동생의 출생에 동시에 감동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는 그때 새와 사람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었다고 술회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그는 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그 시절에 뮌헨에 있는 청기사(The Blue Rider) 그룹 예술가들에 동조했던 아우구스트 막케를 알게 되었다. 에른스트는 남자의 누드를 그려달라는 부탁에 따라 그려준 <십자가 처형 Crucifixion>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1913년 8월에 파리로 가서 미술관과 화랑들을 둘러보며 모더니즘에 탄복했다. 그는 장 아르프를 만났고, 쾰른에서 미술관 책임자로 있던 루이즈 스트라우스(Louise Strauss)라는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에른스트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금방 이루어졌지만 이혼도 마찬가지여서 1921년에 헤어졌다. 그후부터 결혼과 애정행각은 그의 인생의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그는 뮌헨에서 막케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파울 클레를 만났으며 다른 예술가들과도 교류가 잦았다. 쾰른에서는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다다 Dada’ 첫 전람회를 공중변소 뒷마당에서 개최했다. 그들은 그때 도끼를 준비하고 누구든 전람회를 방해한다면 그들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시인 트리스탄 차라가 “독일에서 다다 예술가들은 적을 찾아나선다”고 말한 대로 독일 예술가들의 그림은 과격했으며 정치를 은유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에른스트는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흥미있는 콜라주 작품 <모자가 남자의 모습을 만든다 The Hat Makes the Man(The Tailor is the Style)>를 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쾰른에 있는 식당에 갔다가 옷걸이에 모자와 코트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밝혔다. 1921년에는 <코끼리 셀레베스 The Elephant Celebes>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그는 보일러 몸통 같은 거대한 몸 위에 입체주의 모습의 관을 그리면서 황소 대가리 같은 머리를 꼬리처럼 생긴 끝에 매달고 꼬리 모양을 파이프처럼 묘사했다.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던 해인 1924년 그는 나무에다 <나이팅게일의 위협을 받는 두 아이들 Two Children are Threatened by a Nightingale>(48)을 그리면서 키리코의 온화한 꿈의 세계 대신에 악몽 같은 꿈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묘사했다. 어린아이들의 악몽은 18세기 후반 고딕 소설에서 자주 등장했던 이야기로서 에른스트는 그의 콜라주 그림에서 좀더 실제처럼 꿈의 장면을 탐험하면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에 낯선 물질을 병렬시켰다. 그는 나무로 문을 만들어 그림에 부착시킴으로써 실제와 비실제 사이를 그 문으로 연결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환상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적절하게 묘사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1925년에 프로타주(frotage)라고 불리는 회화기법을 창조했다. 그 기법은 종이조각에 연필을 문질러서 생기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서 그는 나무 또는 다른 질의 평면에 그 기교를 응용했다. 1936년에 레오노르 피니를 알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영국 여인 캐링턴(Carrington)을 만났는데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을 돈 주앙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페기를 만난 것은 1941년이었다. 두 사람은 그해 7월 13일에 뉴욕으로 왔는데 페기는 전 남편에게서 얻은 두 아이를 데리고왔다. 그녀는 피처럼 진한 립스틱을 발랐고, 푸른색으로 눈썹을 칠했으며, 서로 다른 모양의 귀걸이를 하기를 좋아했고, 교묘하게 찢어진 옷을 입어 자신이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도록 의상에 신경을 썼다. 당시에는 모든 유행이 파리에서 시작되었으므로 그녀의 차림새는 미국 사람들에게 최첨단의 것으로 보였다. 그녀가 뉴욕에 도착하고 얼마 후 『타임 Time』지는 그녀가 미국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천사”라고 적었다. 뉴욕에 와서 수주 동안에 그녀가 사들인 그림들이 꽤 되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람회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서’가 열린 지 일 주일 후 1942년 10월 20일에 페기는 화랑 ‘금세기 예술’을 개관했다. 화랑을 개관하던 날 페기는 한 쪽 귀에는 탕기가 디자인한 귀걸이를, 다른 귀에는 칼더가 디자인한 귀걸이를 장식했는데 그 이유는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 사이에서 공평할 것”을 시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페기는 뒤샹의 친구로서 늘 뒤샹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타가 브르통을 능가하려 했던 구상인 ‘새 미국인 자동주의자들’에 관심을 나타냈고, 마더웰도 그녀와 자주 만나고 있었다.

전쟁중이었지만 많은 언론들이 새 화랑의 출현을 보도하면서 그녀의 화랑이 현대미술의 요람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화랑이 “새 아이디어들을 위한 연구실습실”이 될 것이며 “과거를 기록하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공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뉴욕의 예술가들은 그들이 그러한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새 화랑의 개관을 환호했다.

페기의 눈은 항상 새로운 것들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새 예술, 새 예술가, 그리고 새 애인을 찾았다. 페기에 비하면 덜하지만 바람기가 있던 에른스트는 그해 여름 페기가 화랑을 개관하느라고 분주한 틈을 이용하여 롱아일랜드에 셋집을 얻어 미국의 초현실주의 예술가 도로시아 타닝과 밀애를 즐겼다. 페기는 이번에도 초현실주의 예술가와 헤어져야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초현실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마저 생길 정도였다. 에른스트는 1943년 3월에 페기의 집을 나왔는데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으므로 타닝과 함께 뉴욕으로부터 먼 곳으로 달아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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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잭슨 폴록의 이력서

1942년 폴록이 그림을 세 점밖에 못 그렸던 것은 그와 리가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해 12월 정부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WPA 프로그램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는데 이유는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수백만 명이 군수품 제조와 관련한 공장에 직장을 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는 수천 점의 그림을 경매에 붙였고, 공항이나 우체국에 그려진 벽화들에 정부의 색인 푸른색을 칠해 지워버렸다. 수많은 그림들이 무게로 달아 1파운드(453g)에 4센트라는 헐값에 매매되었다. 그 중에는 폴록의 그림도 몇 점 포함되어 있었다. 폴록과 동료 예술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오히려 3달러 내지 5달러에 구입하겠다고 정부에 항의했다.

예술가들은 WPA에서 실직했고, 폴록은 브루클린에서 8일 동안 철판을 제작하는 일을 했는데 임금을 40달러 깎이는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다. 리, 부사, 바지오츠는 정부가 알선해준 뉴욕 상업학교에 취직되어 주급 7달러를 받고 기계를 드로잉했는데 리도 곧 해직되고 말았다. 두 사람이 모두 실직하자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폴록의 그림이 팔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방가르드 화가들이 그림을 팔아 생활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으므로 그들은 따로 직업을 가져야만 했다. 예를 들면 허버트 퍼버와 세이모어 립턴은 치과의사였고 드 쿠닝과 존 리틀은 디자이너였다. 아내가 돈을 벌어왔던 행운의 예술가들로는 아돌프 고틀립과 바넷 뉴먼이 있다. 마더웰과 불트먼은 가족들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귀족과도 같은 예술가들이었다.

미술품 중개상들은 잘 알려진 유럽 예술가들의 그림들을 선호했으므로 뉴욕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이 그림을 팔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폴록은 재료를 살 돈이 없었으므로 재료상 라우 로젠탈(Lou Rosenthal)에게 가서 25달러에 해당하는 재료를 주면 그림 한 점을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로젠탈은 이를 거절하면서 자신의 아파트는 무명작가들의 그림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폴록은 조셉 메이어(Joseph Mayer)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폴록은 할 수 없이 재료들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메이어가 상점 안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폴록을 눈여겨보니 그가 코트 주머니에 물감 튜브들을 계속 넣고 있었다. 그가 폴록의 곁으로 가서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폴록은 “아뇨, 내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물감을 계속 집어넣었다. 그것은 아주 서툰 도둑질이었는데 메이어는 친절하게도 폴록이 그 상점을 나갈 때까지 제어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예술가를 도왔다.

페기의 화랑 ‘금세기 예술 Art of this Century ’에서 젊은 예술가들을 고용한다는 말을 듣고 폴록은 취직을 신청했는데 화랑에서는 그에게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이력서를 써본 적이 없었던 그가 제출한 이력서를 보고 화랑측에서는 그가 자서전을 썼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는 취직이 되어 엘리베이터를 운전하고, 관람객의 수를 셌으며, 지하실에서 액자들을 만들기도 했다. 화가이며 음악가인 를랜드 벨(Leland Bell)이 그와 함께 일했다. 폴록이 벨에게 장 아르프의 그림을 가리키며 “나도 아르프와 같은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고 말하자 벨은 수긍했지만 그가 파울 클레의 그림을 가리키며 똑같은 말을 했을 때에는 허튼 소리를 한다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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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내가 자연이다”

폴록의 우수한 그림들은 1942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예술가들로부터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엄의 미학이론, 피카소의 입체주의 화법, 융과 그의 제자 헨더슨의 정신분석학, 마타의 자동주의 회화기교, 미로의 환상적인 이미지들, 마티스의 무지개색, 그리고 시쿠에이로스의 즉흥적 이미지 만들기 등이 그에게 영향을 끼친 것들이었다.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폴록은 세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속기술적 모습 Stenographic Figure>(44) <달 여인 The Moon Woman>(43) <남성과 여성 Male and Female>(45)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들은 여태까지 그렸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좀더 복잡하고 고유한 것이었다. 이런 성숙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뉴욕으로 온 후 12년을 좌절하면서도 인내한 것이었다.

그가 초기에 그린 <자화상>(11)은 크기가 고작 13×18㎝였던 데 비해 <남성과 여성>은 높이가 175㎝나 되었고, <달 여인>은 그보다 약간 작은 크기였으며 <속기술적 모습>은 가로가 142㎝에 이르렀다. <속기술적 모습>은 반추상 이미지로서 비스듬히 기댄 누드화였다. 몇몇 평론가들은 그 그림이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두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견해에도 타당성은 있었다. 폴록의 그림은 비스듬히 기댄 누드를 주제로 했으므로 그림에 나타난 파란 삼각형은 여지없이 여인의 머리를 상징했던 것이며, 아래 두 개의 유기적인 붉은 원형들은 여인의 젖가슴이 분명했다. 연속적인 유연하고 검은 선들은 아마 그가 두 다리 또는 남자와 여자의 갈비뼈들을 상징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그 그림은 폴록이 과거의 회화방법과 단절했다는 보증물로서 충분한 것으로서 피카소와 미로에게 영향받은 입체주의적 화법과 생리적 형태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남성과 여성>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한 점인 중요한 그림으로서 칸딘스키의 <줄무늬 Striped>와 유사한 점이 있다. 칸딘스키의 <줄무늬>는 1942년 초에 이미 맨해턴의 ‘니렌도르프 Nierendorf ’ 화랑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다.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수직으로 세운 다섯 패널들 또는 줄무늬들은 동그라미, 반달, 달팽이 같은 형태, 그리고 다른 기하학적 형태들에 상반되게 구성된 것으로서 그 중 두 형태는 모호하나마 인간의 모습처럼 보였다. 이 두 형태가 폴록의 <남성과 여성>에 나타난 두 개의 머리 형태와 관련이 있어 보였으며,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폴록도 다섯 수직선을 사용했다. 이 그림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성적 충동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검정, 하양, 노랑, 빨강색들이 푸른색 배경에 흩뿌려져 있는데 이는 5년 후 그가 물감을 뿌려서 그릴 그림들을 벌써 시사하는 듯하다.

그의 그림들은 나중에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들었다. 원래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은 모마의 관장 알프레드 바가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화들에 붙였던 표현이었으며, 그 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40년대 중반부터였다. 바는 모마가 개관될 때 스물일곱의 나이로 관장에 추천된 하버드 출신의 능력있는 미술사학자로서 현대미술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다. 모마가 미술의 요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폴록은 ‘추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세계에서는 추상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와 다름없었으며 그것들이 모두 분출되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칼더가 폴록의 화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칼더는 10년 전에 이미 움직이는 조각들을 제작하여 파리에서 인정받았던 조각가였는데, 그는 자신의 조각을 ‘움직이는 몬드리안’이라고 불렀다. 칼더는 몬드리안의 화실을 방문하여 자연의 모든 선들을 그가 수직과 수평의 쇠창살로 제한하면서 색들을 순수한 색들로 단순화시킨 데에 감명을 받았으며 그러한 조형주의가 객관주의의 극치임을 깨닫고 “나는 움직이는 몬드리안을 만들기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쇠조각들에 순수한 색들을 칠한 후 아주 정교하게 철사줄로 균형을 이루게 하여 공중에 매달았다. 여러분이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게 되면 친구와 친지들의 영접만 반가워할 게 아니라 천정을 한 번 쳐다보기 바란다. 거기에 칼더의 ‘움직이는 몬드리안’이 있다.칼더는 폴록의 화실로 와서 그림들을 둘러본 후 그의 그림들에는 자신의 조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아함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것들은 아주 조밀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런데 폴록이 “아, 조밀하지 않은 것들을 보고 싶소?”라고 말하더니 밖으로 나가서는 더욱 조밀하게 그린 그림들을 들고 들어오자 칼더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호프만은 그때 폴록의 아파트 옆 건물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리의 권유로 그는 폴록의 화실로 와서 그림들을 둘러본 후 폴록이 사용했던 기교에 관해 묻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번에는 폴록이 아주 불쾌해 했다. “자넨 재능이 있어. 내 강의실에 와서 꼭 배우기 바라네.” 그러면서 호프만이 폴록에게 “자네는 자연으로부터 그림을 그리는가?”고 묻자 폴록은 볼멘 소리로 그의 유명한 말 “내가 자연이오!”라고 대답했다.

벤턴은 “잭슨은 분석적인 면에서는 균형을 찾지 못했지만 근원적인 리듬을 발견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폴록이 자연에 내재한 동력주의를 느낄 수 있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거나, 아니면 잠재의식과 의식의 분별이 결여된 정신분열 증세를 가졌거나, 그도 아니라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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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소나타>도 이런 종류의


브라크는 정물화 <바이올린과 팔레트>(1909)를 그렸는데 현재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을 보면 바이올린을 부서뜨려 투명한 수정처럼 광채가 나도록 엷은 색으로 묘사했으며, 평면의 공간과 형태가 연계되도록 부서진 바이올린의 조각들을 연결시켰다.
그는 그림 상단에 그린 못에 팔레트를 걸고 못의 그림자를 묘사했는데,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환상주의를 못의 그림자로 상기시키고 자신이 발견한 입체주의와 병렬시킴으로써 입체주의가 미술사의 주류가 될 수 있음을 시위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담배 파이프, 포도주병, 악기, 탁자, 눈에 띄는 일상용품, 친구와 애인의 얼굴을 닥치는 대로 분석적 입체주의 방법으로 부서뜨렸다.
1908년의 가을전은 두 사람을 위한 전시회였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그림을 관람하면서 이들이 파리 미술계의 선두주자들임을 의심치 않았다.
가을전을 관람하고 감동한 사람들 중에는 장 메쳉제, 앙리 르 호코니에,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자크와 레이몽 비용, 그리고 마르셀 뒤샹, 피카소가 “튜브쟁이”라고 별명붙인 페르낭 레제가 포함되었다.
르 호코니에, 글레이즈, 레제 세 사람은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메쳉제, 들로네와 더불어 입체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 예술가들이었다.
이들 모두 브라크와 피카소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회화에 전념했으며, 두 사람과는 달리 공식화된 입체주의 이론을 그림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마르셀의 <소나타>도 이런 종류의 그림들 중 한 점에 불과했다.
가을전에 브라크와 피카소의 그림이 소개된 것은 그해가 마지막이었고, 두 사람은 칸바일러의 화랑에 소속되었으므로 그 후부터는 그곳에 가야만 관람할 수 있었다.

평론가 올리비에 우르카드는 입체주의에 관해 언급하면서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근원적인 진실 안에서 사물들을 쪼개고 재현했으나 진실을 지나치거나 진실 밖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면서 “예를 들어 예술가는 컵이 둥근 것을 알지만 시각적인 거짓말로 사변적인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브라크와 피카소의 분석적 입체주의는 사물을 부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부수는 것이었으므로 논리적 귀결로서 거의 완전추상에 근접해갔다.
피카소는 회화에서 완전추상이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0년에 수채화로 완전추상에 도달했으며, 그는 인류가 그림을 그려온 이래 완전추상에 도달한 첫 번째 예술가로 미술사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겼다.
칸딘스키는 피카소가 거짓 예언자임을 1910년에 시각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또한 들로네가 1913년에 유화로 거의 완전추상에 도달했고, 몬드리안과 말레비치가 뒤이어 완전추상의 승리를 전 세계에 알렸다.

글레이즈와 메쳉제가 1912년에 발간한 『입체주의에 관하여Du Cubisme』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사고 안에서 오로지 실제의 세계가 된다.
… 세상에는 실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우리의 느낌과 정신적 방향의 동시발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감각에 인상을 주는 사물들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사물들이 마음에 주는 이미지들에 관한 확신은 없다.
… 사물들이 어떤 절대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들을 지니고 있으며, 형태만큼이나 의미의 폭도 다양하다.

평론가들은 브라크와 피카소가 1912년 이전에 그린 그림들을 분석입체주의로 분류하며 이후에 그린 것들을 종합입체주의로 분류하는데, 두 사람은 1912년 이후부터 여태까지 분석한 사물들의 형태들을 모아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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