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바람 난 막스 에른스트
이차대전이 일어나고 독일 폭격기는 연일 런던에 폭탄을 투하했으며 윈스턴 처칠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영국을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구하려 했다. 페기는 폭격으로 런던에 있는 그림들이 잿더미가 될까 염려되어 1941년 초에 그림들을 모두 뉴욕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그녀는 유럽에 미련이 많았으므로 그곳에 머물렀고 이번에는 ‘아버지 같은’ 또 다른 초현실주의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다. 그가 바로 페기보다 열 살 많으며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였는데 그 또한 여자를 밝히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예술가였다. 페기의 남편이기 때문이 아니라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예술가이며 또 미국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므로 그를 좀더 가까이서 살펴보자.
막스 에른스트는 1891년 4월 2일 쾰른과 본 사이에 있는 조그만 동네 브룰(Bruhl)에서 여섯 자녀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농아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맑은 눈을 가진 유머있는 여인이었다. 아버지는 주말이면 그림을 그리던 아마추어 화가였으므로 에른스트는 어려서부터 회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성적이었다. 1906년에 그는 사랑하던 핑크색 앵무새와 막내 여동생의 출생에 동시에 감동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는 그때 새와 사람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었다고 술회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그는 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그 시절에 뮌헨에 있는 청기사(The Blue Rider) 그룹 예술가들에 동조했던 아우구스트 막케를 알게 되었다. 에른스트는 남자의 누드를 그려달라는 부탁에 따라 그려준 <십자가 처형 Crucifixion>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1913년 8월에 파리로 가서 미술관과 화랑들을 둘러보며 모더니즘에 탄복했다. 그는 장 아르프를 만났고, 쾰른에서 미술관 책임자로 있던 루이즈 스트라우스(Louise Strauss)라는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에른스트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금방 이루어졌지만 이혼도 마찬가지여서 1921년에 헤어졌다. 그후부터 결혼과 애정행각은 그의 인생의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그는 뮌헨에서 막케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파울 클레를 만났으며 다른 예술가들과도 교류가 잦았다. 쾰른에서는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다다 Dada’ 첫 전람회를 공중변소 뒷마당에서 개최했다. 그들은 그때 도끼를 준비하고 누구든 전람회를 방해한다면 그들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시인 트리스탄 차라가 “독일에서 다다 예술가들은 적을 찾아나선다”고 말한 대로 독일 예술가들의 그림은 과격했으며 정치를 은유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에른스트는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흥미있는 콜라주 작품 <모자가 남자의 모습을 만든다 The Hat Makes the Man(The Tailor is the Style)>를 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쾰른에 있는 식당에 갔다가 옷걸이에 모자와 코트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밝혔다. 1921년에는 <코끼리 셀레베스 The Elephant Celebes>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그는 보일러 몸통 같은 거대한 몸 위에 입체주의 모습의 관을 그리면서 황소 대가리 같은 머리를 꼬리처럼 생긴 끝에 매달고 꼬리 모양을 파이프처럼 묘사했다.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던 해인 1924년 그는 나무에다 <나이팅게일의 위협을 받는 두 아이들 Two Children are Threatened by a Nightingale>(48)을 그리면서 키리코의 온화한 꿈의 세계 대신에 악몽 같은 꿈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묘사했다. 어린아이들의 악몽은 18세기 후반 고딕 소설에서 자주 등장했던 이야기로서 에른스트는 그의 콜라주 그림에서 좀더 실제처럼 꿈의 장면을 탐험하면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에 낯선 물질을 병렬시켰다. 그는 나무로 문을 만들어 그림에 부착시킴으로써 실제와 비실제 사이를 그 문으로 연결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환상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적절하게 묘사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1925년에 프로타주(frotage)라고 불리는 회화기법을 창조했다. 그 기법은 종이조각에 연필을 문질러서 생기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서 그는 나무 또는 다른 질의 평면에 그 기교를 응용했다. 1936년에 레오노르 피니를 알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영국 여인 캐링턴(Carrington)을 만났는데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을 돈 주앙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페기를 만난 것은 1941년이었다. 두 사람은 그해 7월 13일에 뉴욕으로 왔는데 페기는 전 남편에게서 얻은 두 아이를 데리고왔다. 그녀는 피처럼 진한 립스틱을 발랐고, 푸른색으로 눈썹을 칠했으며, 서로 다른 모양의 귀걸이를 하기를 좋아했고, 교묘하게 찢어진 옷을 입어 자신이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도록 의상에 신경을 썼다. 당시에는 모든 유행이 파리에서 시작되었으므로 그녀의 차림새는 미국 사람들에게 최첨단의 것으로 보였다. 그녀가 뉴욕에 도착하고 얼마 후 『타임 Time』지는 그녀가 미국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천사”라고 적었다. 뉴욕에 와서 수주 동안에 그녀가 사들인 그림들이 꽤 되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람회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서’가 열린 지 일 주일 후 1942년 10월 20일에 페기는 화랑 ‘금세기 예술’을 개관했다. 화랑을 개관하던 날 페기는 한 쪽 귀에는 탕기가 디자인한 귀걸이를, 다른 귀에는 칼더가 디자인한 귀걸이를 장식했는데 그 이유는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 사이에서 공평할 것”을 시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페기는 뒤샹의 친구로서 늘 뒤샹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타가 브르통을 능가하려 했던 구상인 ‘새 미국인 자동주의자들’에 관심을 나타냈고, 마더웰도 그녀와 자주 만나고 있었다.
전쟁중이었지만 많은 언론들이 새 화랑의 출현을 보도하면서 그녀의 화랑이 현대미술의 요람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화랑이 “새 아이디어들을 위한 연구실습실”이 될 것이며 “과거를 기록하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공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뉴욕의 예술가들은 그들이 그러한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새 화랑의 개관을 환호했다.
페기의 눈은 항상 새로운 것들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새 예술, 새 예술가, 그리고 새 애인을 찾았다. 페기에 비하면 덜하지만 바람기가 있던 에른스트는 그해 여름 페기가 화랑을 개관하느라고 분주한 틈을 이용하여 롱아일랜드에 셋집을 얻어 미국의 초현실주의 예술가 도로시아 타닝과 밀애를 즐겼다. 페기는 이번에도 초현실주의 예술가와 헤어져야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초현실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마저 생길 정도였다. 에른스트는 1943년 3월에 페기의 집을 나왔는데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으므로 타닝과 함께 뉴욕으로부터 먼 곳으로 달아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