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소나타>도 이런 종류의
브라크는 정물화 <바이올린과 팔레트>(1909)를 그렸는데 현재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을 보면 바이올린을 부서뜨려 투명한 수정처럼 광채가 나도록 엷은 색으로 묘사했으며, 평면의 공간과 형태가 연계되도록 부서진 바이올린의 조각들을 연결시켰다.
그는 그림 상단에 그린 못에 팔레트를 걸고 못의 그림자를 묘사했는데,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환상주의를 못의 그림자로 상기시키고 자신이 발견한 입체주의와 병렬시킴으로써 입체주의가 미술사의 주류가 될 수 있음을 시위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담배 파이프, 포도주병, 악기, 탁자, 눈에 띄는 일상용품, 친구와 애인의 얼굴을 닥치는 대로 분석적 입체주의 방법으로 부서뜨렸다.
1908년의 가을전은 두 사람을 위한 전시회였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그림을 관람하면서 이들이 파리 미술계의 선두주자들임을 의심치 않았다.
가을전을 관람하고 감동한 사람들 중에는 장 메쳉제, 앙리 르 호코니에,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자크와 레이몽 비용, 그리고 마르셀 뒤샹, 피카소가 “튜브쟁이”라고 별명붙인 페르낭 레제가 포함되었다.
르 호코니에, 글레이즈, 레제 세 사람은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메쳉제, 들로네와 더불어 입체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 예술가들이었다.
이들 모두 브라크와 피카소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회화에 전념했으며, 두 사람과는 달리 공식화된 입체주의 이론을 그림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마르셀의 <소나타>도 이런 종류의 그림들 중 한 점에 불과했다.
가을전에 브라크와 피카소의 그림이 소개된 것은 그해가 마지막이었고, 두 사람은 칸바일러의 화랑에 소속되었으므로 그 후부터는 그곳에 가야만 관람할 수 있었다.
평론가 올리비에 우르카드는 입체주의에 관해 언급하면서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근원적인 진실 안에서 사물들을 쪼개고 재현했으나 진실을 지나치거나 진실 밖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면서 “예를 들어 예술가는 컵이 둥근 것을 알지만 시각적인 거짓말로 사변적인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브라크와 피카소의 분석적 입체주의는 사물을 부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부수는 것이었으므로 논리적 귀결로서 거의 완전추상에 근접해갔다.
피카소는 회화에서 완전추상이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0년에 수채화로 완전추상에 도달했으며, 그는 인류가 그림을 그려온 이래 완전추상에 도달한 첫 번째 예술가로 미술사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겼다.
칸딘스키는 피카소가 거짓 예언자임을 1910년에 시각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또한 들로네가 1913년에 유화로 거의 완전추상에 도달했고, 몬드리안과 말레비치가 뒤이어 완전추상의 승리를 전 세계에 알렸다.
글레이즈와 메쳉제가 1912년에 발간한 『입체주의에 관하여Du Cubisme』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사고 안에서 오로지 실제의 세계가 된다.
… 세상에는 실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우리의 느낌과 정신적 방향의 동시발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감각에 인상을 주는 사물들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사물들이 마음에 주는 이미지들에 관한 확신은 없다.
… 사물들이 어떤 절대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들을 지니고 있으며, 형태만큼이나 의미의 폭도 다양하다.
평론가들은 브라크와 피카소가 1912년 이전에 그린 그림들을 분석입체주의로 분류하며 이후에 그린 것들을 종합입체주의로 분류하는데, 두 사람은 1912년 이후부터 여태까지 분석한 사물들의 형태들을 모아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