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첫 개인전으로 승리자가 되다

1943년에 있었던 폴록의 전람회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아방가르드 화가가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그리고 평론가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전람회에는 모두 열여섯 점이 소개되었다. 작은 그림은 사방 30.5㎝보다 조금 큰 <충돌>부터 아주 큰 그림까지, 가격은 25달러부터 750달러까지였다. <비밀의 수호자들>은 가격을 750달러로 매겨놓았다. 리는 입구에서 관람객들에게 일일이 카탈로그를 나누어주면서 폴록의 거동을 살폈는데 연신 그를 쳐다보았던 이유는 테이블에 술병이 여러 개 놓여 있었으므로 그가 그것들을 실컷 마실까봐 염려되어서였다. 그날 폴록은 여느 때처럼 분별없이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지는 않았는데 리에게는 여간 다행한 노릇이 아니었다.

폴록의 전람회에 관해서 주요 잡지들인 『타임 Time』 『선 Sun』 『뉴요커 New Yorker』 『네이션 Nation』 『파티잔 리뷰 Partisan Review』 『아트 뉴스 Art News』 『아트 다이제스트 Art Digest』 『뷰 View』가 일제히 보도하면서 그의 그림들을 칭찬했다. 그날은 진정 폴록을 승리자로 미술계에 알리는 날이었다.

그린버그는 『네이션』 잡지에서 “잭슨은 미로, 피카소, 멕시코 회화들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서른한 살에 그것들의 다른 면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붓놀림에 의해서였다”고 기술하면서 “아직까지 미국 화가들이 그렸던 그림들 가운데 이처럼 힘있는 그림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고 첨언했다. 어느 평론가는 “잭슨의 그림에는 인디언의 영상이 나타났지만 아주 개성적이었다”고 적었다. 『뉴요커』는 “잭슨은 피카소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기본적인 힘과 대담함은 그가 젊은 서부 예술가임을 말해준다”고 적었다.

전람회는 3주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평론가들에게 과분한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한 점밖에 안 팔렸고, 그의 그림을 산 케네스 맥퍼슨조차도 폴록의 그림에 대단히 만족하지는 않았다고 페기가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여러 주에 있는 화랑을 순례하면서 팔리기 시작하여, 토마스 헤스가 <상처 입은 동물>(52)을, 로이드 부인이 <남성과 여성>을 각각 구입했다.

그린버그가 페기의 아파트를 방문했다가 폴록이 그녀의 아파트에 그린 벽화를 보고 “난 잭슨이 이 나라의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될 것을 알고 있다”며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린버그의 폴록에 대한 자신감은 폴록에게 아주 중요했는데 그는 유능한 평론가로서 작가에 대한 그의 홍보는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9개월 동안 팔린 폴록의 그림값은 모마에서 구입한 <암이리>를 포함하여 모두 1,500달러였다. 페기는 원래 <암이리>에 650달러를 달아놓았는데 모마가 그 그림을 450달러에 팔라고 흥정해왔고 결국 페기가 조금 양보하여 600달러에 매매했다. 그 그림을 모마가 구입한 것은 스위니가 관장 알프레드 바를 설득했기 때문이었는데, 폴록의 그림을 미술관에서 구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


뒤샹은 <초상 둘시네아>와 <소나타>에 관해 말했다.
“그것들은 입체주의에 관한 당시 나의 이해였다.
일반적으로 인물들을 구성하는 방법과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들이었다. 같은 사람을 네 번 또는 다섯 번 누드와 드레스 차림으로 반복해서 그렸다.
둘시네아의 독특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본래의 의도였으며, 동시에 자유롭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입체주의를 비이론화한 것이었다.”

뒤샹에게 운동에 관한 관심이 생긴 것은 1911년경이었다.
“내가 둘시네아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같은 여인을 다섯 이미지로 그린 후 세 여인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두 여인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그 그림에는 이미 운동에 관한 개념이 있었다.
잠재적이었는지는 몰라도 난 둘시네아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운동을 묘사했다.
그리고 나는 1911년 10월에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슬픈 젊은이는 물론 나 자신으로 가족을 만나고자 파리에서 루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 그림에는 젊은이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다.
슬픔 또한 충분치 않았다. 어느 것도 충분치 않은 채 입체주의의 영향만 현저할 뿐이다.
이 시기 나의 입체주의에 관한 이해는 해부학적이거나 관망적인 것이 아닌 도식적인 선의 반복이었다.
평행되는 선들을 통해 움직이는 사람의 상이한 위치를 운동으로 나타냈다.”

뒤샹은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온전한 그림으로 간주하지 않고 스케치로 여겼지만 훌륭한 그림이었다.
그는 사람을 로봇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탁한 노란색, 브라운색, 그리고 검정색을 주로 사용했으며, 어떤 운동인지는 분명치 않게 나타났다.
제목을 슬픈 젊은이라고 했는데, 8월에 사랑하는 수잔느가 결혼한 후 처음 가족을 만나기 위해 12월에 루엥으로 가는 기차를 타면서 자신이 슬픈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2월에 그린 이 그림이 중요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기교를 사용하여 운동을 나타냈고, 그가 말한 “초보적 평행주의”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작가들이 스냅사진을 연결해서 사람과 동물의 운동을 보여준 데서 기교를 발견했다.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는 1882년에 카메라 셔터를 발명하여 움직이는 물체를 한 장의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런 사진들을 1893년에 『라 나투르』에 기고했다.
뒤샹은 그의 사진을 보아서 운동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인 에드위어드 머이브릿지도 배터리를 카메라에 연결시켜 날아다니는 새와 달리는 말의 운동을 정지한 모습으로 찍어 『운동하는 사람의 모습the Human Figure in Motion』이란 제목으로 1885년에 출간했는데, 책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24개의 이미지로 나열되어 있었다.
뒤샹도 이 책을 보았을 성 싶은데, 그는 머이브릿지의 책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마레의 사진을 『라 나투르』에서 보고 운동 개념을 그리게 되었다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페기와 폴록의 관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당시 폴록은 지쳐 있었고, 풋젤은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 그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다. 리 역시 폴록을 근처 술집으로 데려가지만 않는다면 친구들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술이 가장 두려운 적이었다. 풋젤이 폴록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의 전람회가 페기의 화랑에 대한 평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뿐더러 폴록을 집요하게 추천했던 자신의 평판과도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근히 염려가 되어서이기도 했다.

리는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는 등 폴록이 그림들을 빨리 완성할 수 있도록 내조했다. 폴록이 <파시패>를 커다란 크기(1140×244㎝)로 그린 것을 보고서 풋젤은 화상들이 커다란 그림을 사는 투기를 꺼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좀더 쉽게 팔릴 수 있는 작은 그림들을 그리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당시는 예술의 수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림의 크기로 값을 정하는 아주 고약한 풍조가 있었다. 우리는 작은 고급시계가 덩치만 큰 괘종 시계보다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림은 클수록 비싸단 말인가. 작은 고급 그림들을 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안목을 넓히는 일일 것이다.

폴록이 화실에서 온종일을 보내고 있는 동안 페기는 새 애인을 발견했다. 그는 빨간 머리카락을 한 젊고 잘생긴 영국인 케네스 맥퍼슨(Kenneth Macpherson)이었다. “맥퍼슨은 내가 남자를 필요로 할 때 내 인생에 나타났다. 그는 내가 평화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의 팔에 안기면 아주 큰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런 행복은 수년 만에 처음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했다. 이제 페기가 에른스트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리는 아주 바빴다. 그녀는 공중전화를 이용하여 폴록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에게 그의 작업을 위해 시간을 절약해줄 것을 부탁했고, 그림을 운반하는 것에 관해서 풋젤과 의논하는 등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빠짐없이 해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리가 해낸 장한 일은 페기를 잘 다룬 것이었다. 페기의 자서전을 쓴 작가는 “대개 페기에게 친절했고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은 최소한 그녀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었다”고 적었는데 리도 물론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리는 페기와 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동성연애자를 애인으로 둔 적이 있었으며 알코올 중독자를 남편으로 맞이했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서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리는 페기를 ‘암내 풍기는 여자이며 돈은 많지만 멋을 제대로 모르는 여자’라고 생각했고, 페기는 리를 ‘수준 낮은 러시아 유태인’이라고 업신여기려 했다. 리는 “페기가 폴록과 매일 그녀의 침대에서 섹스를 즐겼으면 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어서 최소한 한 번은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

페기가 폴록에게 눈독을 들였으면서도 그동안 그에게 성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성관계를 가졌던 사내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주 길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페기는 자신과 만난 모든 사내들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은 말해주었다. 소문에는 그녀가 개와도 섹스를 했다고 하였다. 그녀는 사내들을 손쉽게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였지만 “페기가 알프레드 바와 성관계를 가지기까지는 지독하게 힘이 들었다”고 모마의 책임자 도로시 밀러는 알려주었다. 페기는 특히 동성연애 사내들을 좋아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런 사내들이 중년 여인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룻밤 섹스 파트너를 술집에 가서 고르기도 했는데 폴록은 그런 경우에 속했다.

1945년 초 어느 날 밤, 마침 리가 외출중이었고 폴록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 페기는 폴록을 그녀의 침대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페기는 폴록이 그날 그녀의 침대에 오줌을 쌌다고 투덜거리면서 그날 밤의 성관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폴록이 침대에 오줌을 싼 것은 그녀의 침대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침대에서도 간혹 있는 일이었다. 그의 오줌에 관해서도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 소개는 뒤로 미룬다.

몇 년이 지난 후 폴록에게 페기와 성관계를 가졌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농담으로 “내가 아마 섹스를 했겠지만 만일 안 했다면 그건 페기가 가치없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을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일 페기와 섹스를 해야 한다면 넌 먼저 수건으로 그 여자의 얼굴을 가려야만 할 것이다”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페기의 아파트에는 많은 남성 동성연애자들이 출입했는데 페기의 아들 신드배드(Sindbad)는 “그들이 어머니를 찾은 것은 그들에게 섹스 상대 사내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내들이 군대에 징집되어 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많은 동성연애 사내들은 징집대상에서 자격미달이 되어 군대에 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무의식 세계의 신화적 이미지를 표현하다

폴록은 뉴욕으로 온 지 13년 만에 찾아온 행운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자신이 위대한 예술가임을 고지하기 위해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했다. 폭 6m가 넘는 벽화를 그리기에는 그의 화실이 협소함을 느끼고 자신의 화실과 리의 화실을 가르는 벽을 허물어 공간을 넓히고 싶어했다. 그렇게 되면 그의 화실은 1/3이 더 넓어지지만 리는 그 의견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럼, 난 어디서 그림을 그리란 말이야?”라고 물었다. 두 사람이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있을 때 폴록과 고등학교 때부터 우정을 나누어온 친구 조각가 루벤 카디시가 방문했다. 카디시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후 자신의 화실 근처 웨스트 12번가에 빈 방이 하나 있으므로 그곳에 리의 화실을 꾸미라는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리는 선뜻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폴록은 망치로 벽을 쳐부수었고, 리와 그는 밤늦도록 부서진 벽 조각들을 양동이에 담아 5층 층계를 여러 번 오르내리며 밖으로 내다버렸다. 이제 그는 넓어진 공간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되었고 리는 그가 딴전을 부리지 않도록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폴록은 화실에 앉아서 직관이 잘 작용하도록 눈을 감은 채 감지하기 어려운 무의식 세계에 있는 이미지들을 조심스럽게 인식 안으로 운반했다가 재빨리 캔버스에 담으려 했다. 그는 무의식 세계의 모호한 이미지들을 탐험하기 위해서 신명이 나도록 직관의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무의식 세계에 오래 남아 있으려고 그는 비이성적인 생각들을 일깨웠으며 원시인처럼 회화에 대한 지식과 기교들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그저 감성으로 붓을 움직이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폴록은 고유한 방법으로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는 먼저 <암이리 She-Wolf >(51)를 완성했다. ‘암이리’는 로마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물로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들에게 젖을 먹여 키운, 로마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이리였다. 이 그림은 신화를을 참조한 것 같지는 않고, 두 동물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의 동물은 황소로서 피카소의 황소 그림을 연상케 하며, 오른쪽의 것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서 미국의 5센트짜리 동전에 그려져 있는 들소와도 같다. 두 동물은 두툼한 붉은 화살로 황소의 심장으로부터 들소의 머리까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화살은 인디언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회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암이리>는 유럽의 황소와 미국 들소의 만남이었고, 두 놈은 인디언의 화살 같은 것에 맞아 폴록의 전리품이 되고 말았다.

폴록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설명하기를 꺼렸는데 특히 이 그림에 관해서는 함구했다. 미술품 중개상 시드니 재니스는 1943년에 『미국의 추상과 초현실주의 예술 Abstract and Surrealism Art in America』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면서 폴록의 <암이리>를 게재했다. 그는 폴록에게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는데 폴록은 “‘암이리’가 그려지게 된 것은 내가 그렇게 그렸기 때문이다”라고만 말했고 재니스는 그의 대답이 설명이 아니라서 유감스러워했다.

폴록은 곧이어 <비밀의 수호자들 Guardians of the Secret>(54)과 <파시패 Pasiphae>(53)를 그렸다. 그 그림들은 특히 무의식 세계와 연계된 것이었다. 폴록의 화실을 방문했을 때 스위니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네 개의 토템 같은 모습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발견했다. 그는 그 그림에 매료되어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폴록이 그림을 가리키며 그건 ‘모비 딕(Moby Dick: 장편소설 제목)’이라고 하자 스위니는 ‘파시패’라고 소리지르면서 폴록의 말을 무시한 채 “그건 파시패다”라고 거듭 말했다. 모비 딕은 흰 고래의 이름인데 소설에서는 자연을 상징한다. “빌어먹을 파시패가 누구야?”라고 폴록이 물었다. 스위니는 “파시패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스(Minos)의 아내이며 또 흰 황소와 섹스하여 황소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미노타우어(Minotaur)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고 말해주었다. 폴록은 다시 “모비 딕이 어때서 그래요?”하고 물었고, 스위니는 “그건 판에 박힌 진부한 제목이다”라고 대답했다. 폴록은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림의 제목을 ‘파시패’로 정했다.

더러 평론가들은 40년대 초의 폴록의 그림을 “신화적 그림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특별한 관계가 없었다. 그러한 평은 로드코나 고틀립의 그림들에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파시패’는 다만 토템 이미지를 그린 신비스러운 주제로서 당시 폴록이 영향을 받은 잠재의식에 관한 융의 시각이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하는 쪽이 오히려 적당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가 헨더슨에게 치료를 받을 때 그의 주문대로 많은 드로잉을 그렸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폴록은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을 그렸는데 이제 그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피카소의 후기 입체주의 화법, 미로의 추상적 이미지 창조법, 그리고 마송의 자동주의 화법들을 혼용하여 그 특유의 이미지들로 변형시키고 있었다. 그로서는 혼신을 다해 그린 그림들이었다. 헨더슨이나 정신과 의사가 그의 그림을 보면 그러한 점을 곧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폴록의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의 솔직한 성격이 무의식 세계에 있는 이미지들을 정직하게 운반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폴록은 주위 사람들이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에 감사하면서 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더욱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그는 꿈 속에서도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이미지의 환상을 보았다. 이런 일은 예술가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만한 집념이 없이는 자화자찬할 만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9월에 그는 <상처 입은 동물 Wounded Animal>(52)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표현주의 예술가 프란츠 마르크가 일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불길한 예감으로 그렸던 상처 입은 사슴의 그림을 상기시킨다. 폴록은 이 그림 외에도 몇 점을 완성했지만 제목을 정할 수 없어서 그냥 무제로 남겨두었는데, 나중에 이러한 그림의 제목들을 이웃 사람들에게 짓게 한 적도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희망


“나는 앙리 베르그송과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변화와 인생은 동의어이다.
… 변화는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뒤샹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두 철학자의 저서를 읽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종류의 책도 열심히 읽은 적이 없었다.
그는 훗날 니체와 같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저술을 읽을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고를 전달하는 데 언어가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그는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면서 “우리가 생각을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하려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모두 달라지고 만다”고 했다.
그가 가장 신뢰한 언어의 형태는 시였다. 말라르메의 시를 특히 좋아했고 “언어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제자리에 있을 수 있는 곳은 시다”라고 했다.

1910년 2월 20일자 『르 피가로』 일면에 이탈리아 밀라노인들의 ‘미래주의 선언문’이 크게 보도되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신문을 수백 장 구입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일일이 발송했다.
미래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으로 1908년 시인 필립포 토마소 마리네티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선언문들이 1909∼1910년에 연속적으로 발표되었다.
미래주의는 한마디로 밀라노인들의 운동으로 이탈리아의 문화를 재건하려는 자주적인 노력이었다.
첫 선언문에서 그들은 과거에 속한 도서관, 뮤지엄, 그리고 학교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네티의 이탈리아 문화재건운동에 움베르토 보치오니, 카를로 카라, 루이지 루솔로가 1909년 초에 동조했고 지노 세베리니와 자코모 발라가 나중에 가세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입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속력과 과격한 행위, 동력적인 운동,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면서 운동을 정지시키고, 미묘한 색조를 사용하여 명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주로 그리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입체주의 회화공식에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기계문명을 찬양하여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기차를 문명의 자랑스러운 자식들로 여겼으며, 나중에는 전쟁을 세계를 재건하는 위생학이라는 위험한 생각까지도 했다.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은 파리의 모든 예술가들도 품고 있던 믿음이었다.
벨기에의 상징주의 시인 에밀 베르헤렌은 1909년에 예언적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미래여, 나의 신이 나를 한번 의기양양하게 했던 것처럼 네가 나를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마리네티가 1910년에 파리에서 발표한 선언문에는 “현대 도시의 혁명적인 무수한 색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다성곡, 반짝이는 전기의 달 아래 군수품 창고와 항구의 한밤중과 새벽 … 공장들은 방사한 연기가 만든 구름에 매달려 있다”고 적혀 있는데,
공장에서 방사하는 매연은 오늘날 반드시 퇴치시켜야 할 오염물질이지만 마리네티에게는 기계문명의 향기처럼 아름답게만 보였다.
기계의 발달이 미래주의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그들은 도시생활을 찬양했고, 도시의 장면들을 주로 그렸으며, 문명의 자식답게 정장 차림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유행을 따라 무늬가 있는 양말에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그들은 과거 미술의 사망과 미래 미술의 시작을 공표했다. 선언문 발표하기를 좋아한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열서너 편의 선언문을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마리네티가 처음 선언문을 발표할 때 그의 나이는 30살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변호사 아버지는 그가 장차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아버지의 바람에 부응하여 그는 제노바대학에서 법을 전공했지만 문학에 관심이 생기자 파리로 가서 상징주의 그룹의 작가들과 어울렸다.
그는 “과거의 연못으로부터 공포적인 유령이 악성 유행병 연기처럼 태어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신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아폴리네르는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문’을 읽고 “그가 마비된 이탈리아를 깨웠다.
그는 프랑스를 예로 삼았는데 프랑스는 예술과 문학의 선진국이다”라고 했다.
마리네티는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에 심취하여 니체가 말한 초인을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다.
그는 선언문에서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문명화된 가치들에 대적하며”라고 했는데 이는 더욱 니체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파리의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1912년 2월에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들의 그림 38점이 이 화랑에서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1906년부터 파리에 거주한 세베리니와 프랑스인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베리니는 로마의 동료 예술가들에게 파리로 가서 전시회를 열 것을 권유했으며,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두주자 보치오니는 예술의 수도에서 전시회가 성공한다면 그들이 표방하는 미래주의는 전 세계로 파급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세베리니는 브라크와 피카소의 친구로서 동료 예술가들을 두 사람에게 소개하여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피카소를 중심으로 모이는 작가들 야곱, 사몽,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보치오니는 카페에서 알렉산더 아키펭코, 콘스탄틴 브랑쿠시, 그리고 레이몽을 만나 모던 아트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보치오니는 <밀라노에서의 미래주의자 이브닝 파티>를 스케치로 그렸는데 여기서 미래에 대한 그들의 열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1911년에 그린 <마음의 상태들: 작별들>에는 그림에 숫자를 적어 넣었으며 심상을 동력주의로 표현했다.
동력주의는 미래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발라의 <추상 속력과 소리>와 루솔로의 <자동차의 동력주의>에서도 이것이 발견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