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희망
“나는 앙리 베르그송과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변화와 인생은 동의어이다.
… 변화는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뒤샹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두 철학자의 저서를 읽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종류의 책도 열심히 읽은 적이 없었다.
그는 훗날 니체와 같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저술을 읽을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고를 전달하는 데 언어가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그는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면서 “우리가 생각을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하려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모두 달라지고 만다”고 했다.
그가 가장 신뢰한 언어의 형태는 시였다. 말라르메의 시를 특히 좋아했고 “언어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제자리에 있을 수 있는 곳은 시다”라고 했다.
1910년 2월 20일자 『르 피가로』 일면에 이탈리아 밀라노인들의 ‘미래주의 선언문’이 크게 보도되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신문을 수백 장 구입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일일이 발송했다.
미래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으로 1908년 시인 필립포 토마소 마리네티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선언문들이 1909∼1910년에 연속적으로 발표되었다.
미래주의는 한마디로 밀라노인들의 운동으로 이탈리아의 문화를 재건하려는 자주적인 노력이었다.
첫 선언문에서 그들은 과거에 속한 도서관, 뮤지엄, 그리고 학교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네티의 이탈리아 문화재건운동에 움베르토 보치오니, 카를로 카라, 루이지 루솔로가 1909년 초에 동조했고 지노 세베리니와 자코모 발라가 나중에 가세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입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속력과 과격한 행위, 동력적인 운동,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면서 운동을 정지시키고, 미묘한 색조를 사용하여 명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주로 그리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입체주의 회화공식에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기계문명을 찬양하여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기차를 문명의 자랑스러운 자식들로 여겼으며, 나중에는 전쟁을 세계를 재건하는 위생학이라는 위험한 생각까지도 했다.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은 파리의 모든 예술가들도 품고 있던 믿음이었다.
벨기에의 상징주의 시인 에밀 베르헤렌은 1909년에 예언적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미래여, 나의 신이 나를 한번 의기양양하게 했던 것처럼 네가 나를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마리네티가 1910년에 파리에서 발표한 선언문에는 “현대 도시의 혁명적인 무수한 색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다성곡, 반짝이는 전기의 달 아래 군수품 창고와 항구의 한밤중과 새벽 … 공장들은 방사한 연기가 만든 구름에 매달려 있다”고 적혀 있는데,
공장에서 방사하는 매연은 오늘날 반드시 퇴치시켜야 할 오염물질이지만 마리네티에게는 기계문명의 향기처럼 아름답게만 보였다.
기계의 발달이 미래주의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그들은 도시생활을 찬양했고, 도시의 장면들을 주로 그렸으며, 문명의 자식답게 정장 차림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유행을 따라 무늬가 있는 양말에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그들은 과거 미술의 사망과 미래 미술의 시작을 공표했다. 선언문 발표하기를 좋아한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열서너 편의 선언문을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마리네티가 처음 선언문을 발표할 때 그의 나이는 30살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변호사 아버지는 그가 장차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아버지의 바람에 부응하여 그는 제노바대학에서 법을 전공했지만 문학에 관심이 생기자 파리로 가서 상징주의 그룹의 작가들과 어울렸다.
그는 “과거의 연못으로부터 공포적인 유령이 악성 유행병 연기처럼 태어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신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아폴리네르는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문’을 읽고 “그가 마비된 이탈리아를 깨웠다.
그는 프랑스를 예로 삼았는데 프랑스는 예술과 문학의 선진국이다”라고 했다.
마리네티는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에 심취하여 니체가 말한 초인을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다.
그는 선언문에서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문명화된 가치들에 대적하며”라고 했는데 이는 더욱 니체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파리의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1912년 2월에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들의 그림 38점이 이 화랑에서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1906년부터 파리에 거주한 세베리니와 프랑스인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베리니는 로마의 동료 예술가들에게 파리로 가서 전시회를 열 것을 권유했으며,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두주자 보치오니는 예술의 수도에서 전시회가 성공한다면 그들이 표방하는 미래주의는 전 세계로 파급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세베리니는 브라크와 피카소의 친구로서 동료 예술가들을 두 사람에게 소개하여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피카소를 중심으로 모이는 작가들 야곱, 사몽,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보치오니는 카페에서 알렉산더 아키펭코, 콘스탄틴 브랑쿠시, 그리고 레이몽을 만나 모던 아트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보치오니는 <밀라노에서의 미래주의자 이브닝 파티>를 스케치로 그렸는데 여기서 미래에 대한 그들의 열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1911년에 그린 <마음의 상태들: 작별들>에는 그림에 숫자를 적어 넣었으며 심상을 동력주의로 표현했다.
동력주의는 미래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발라의 <추상 속력과 소리>와 루솔로의 <자동차의 동력주의>에서도 이것이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