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고독한 개척자 클리포드 스틸

클리포드 스틸(Clifford Still 1904~80)은 노스 다코타 주에 있는 그랜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가족들은 이듬해에 워싱턴 주로 이주했으며 1910년에는 캐나다의 알버타 남부로 다시 이주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며 색, 빛, 사물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내면서 화가가 될 소질을 나타냈고 음악과 문학, 시에도 관심이 많았다.

1925년 스물한 살 때 그는 뉴욕을 처음 방문하고 그 소감을 일기에 적었다.
“나는 먼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가서 내가 모방한 적이 있었던 대가들의 그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는 대가들의 그림을 보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해 11월 6일 그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
하지만 첫날 강의 45분 만에 학교를 떠나면서 “학교 공부는 내가 수년 전에 이미 실습했던 것들이었고, 그것들을 다시 배운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이다”라고 말했으며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몸이 가늘고 통뼈였으며 웃지 않는 얼굴이 늘 성난 사람처럼 보였고 툭 튀어나온 이빨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스틸은 모든 것들을 못마땅해 했다”고 니콜라스 카론은 회상했다.
그는 1926년 가을에 워싱턴 주에 있는 스포케인(Spokane)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학기를 마친 후 자퇴하고 캐나다로 갔다.
1931년 가을에 그는 스포케인 대학에 복학했는데 이번에는 장학금을 받았으며 1933년 봄에 졸업했다.
1934년 이전까지 그가 그렸던 그림들은 모두 175점 가량 되는데 그것들은 그의 소장품들로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곧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1941년까지 가르치면서 개인적으로 회화를 연구했다.
그는 학교에서 철학과 함께 문학비평도 공부했는데 그가 연구했던 사람들은 플라톤, 롱기누스, 베네데토 크로체였다.

“나는 고전 유럽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익살스러운 주장과 풍자적인 프란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그리고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 또는 1910년대와 20년대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색다른 외국문화인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를 거부했다.”(1935)
“나는 캔버스에서 공간과 사물의 모습들을 온전하게 정신적인 본체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오로지 나의 에너지와 직관의 한계에 의해 융합하는 도구가 되었다.
자유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이제 절대적이며 무한히 쾌활해졌다.
30년대 중반부터 나는 이 문제들을 자유롭게 친구와 예술가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1941)

1941년 12월부터 1943년 여름까지 해군에 복무하면서 군수품 제조공장에서 근무했다.
1943년에는 그의 첫 개인전이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다. 1945년 이전까지 그가 그린 그림들은 450점 이상이었다.
스틸이 로드코를 만난 것은 1943년 친구의 집에서였는데, 그때 두 사람은 서로 유사한 미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우정을 나누면서 떨어져 있을 때에는 편지를 교환했다.
두 사람의 유사한 미학이란 고도의 이성주의에 근거한 컬러-필드 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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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1950년대에 로드코의 명성이 높았으며

페기가 경제적으로 실패하고 유럽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화랑을 폐쇄하자 그녀와 견줄 만한 중개상으로 베티 파슨즈가 부상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실존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함께 조각을 수학한 적이 있었던 여인으로 페기와는 달리 자신의 생각이 뚜렷했다.
페기처럼 사람들에게 게걸스럽게 그림을 사라고 강요하는 쪽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평판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었다.
페기의 부탁으로 그녀가 폴록과 계약을 하기 전에 그녀는 이미 로드코와 스틸의 그림들을 그녀의 화랑에서 전적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로드코의 명성이 높았으며, 1954년에는 그의 그림 한 점이 4,000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그의 컬러-필드 그림들은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가 폴록과 드 쿠닝 그리고 프랜츠 클라인의 그림들을 이벤트라고 생각하여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로 분류한 것에 비해 좀더 사변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감성 문제와 고뇌를 감각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그는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내가 인간적이게 되고 친밀해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난 추상예술가는 아니다. … 나는 색, 형태, 또는 어느 것과의 관계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오로지 기본적인 인간의 감성들을 표현할 따름이며 비극, 희열, 운명들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울거나 나약해지는 것은 나의 인간적 감성이 그들에게 전해진 까닭이다.
…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종교적 경험을 하는 사람들로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그러한 경험을 한다.
만일 당신이 색들의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초점을 잃을 것이다.”

그의 그림값은 앙등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그는 60년대에 팝아트(Pop Art)가 성행하자 격노하여 “팝 예술가들은 사기꾼들이고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젊은 예술가들이 우리를 살해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폭음했고,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요양소로 보내졌다.
동맥류로 고생하던 그는 1970년 초에 동맥을 끊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말년에 그가 정신적으로 고독해지면서 빛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그의 그림들은 자꾸만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밤의 풍경화와도 같았다.
1978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대규모로 그를 위한 기념전을 개최했는데 당시 그의 그림 한 점이 19만 7천 달러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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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신부>에 관해 말했다

<신부>에 관한 아이디어는 뮌헨에서 7, 8월 <처녀>와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드로잉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처녀 No.1>을 먼저 연필로 드로잉하고 다음에 <처녀 No.2>를 드로잉한 후 수채를 조금 칠했다.
그런 뒤 이것을 캔버스에 옮겼다.
<신부와 독신자들the Bride and Bachelors>을 생각한 것은 그 후였다.
그때 그린 드로잉들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그린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을 많이 두는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라고 적었는데 부사adverb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그림과 무관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답게 시위한 부사적인 부사가 된 것이다.
의미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반감각적antisense’ 언어는 문장의 관점에서 시적 차원으로서 내게 흥미로웠고 앙드레 브르통이 매우 좋아했다.
내게는 봉헌식과도 같았는데 사실 그렇게 제목을 부칠 때 가치에 관하여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영어로도 마찬가지이다.
‘조차even’는 온전한 부사로 의미하는 바는 없다.
좀 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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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마크 로드코, 신문배달부에서 빛의 시인으로

 

마크 로드코(Mark Rothko 1903~70)는 1903년에 러시아 비테브스크의 드빈스크에서 네 자녀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유태인 아버지는 약사였으며 가족들은 1913년에 미국으로 이민와서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에 안주했다.
그해에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는데 동유럽에서 많은 난민들이 왔으며 그 가운데에는 유태인들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위장병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더니 미국에 도착한 지 7개월 후인 1914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어린 로드코는 신문을 배달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 그는 배고픔을 경험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는 학교성적이 우수했으므로 1921년에 명문대학 예일(Yale)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피아노와 만돌린을 연주했고 시를 썼는데 그의 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내가 화가가 된 이유는 뒤떨어진 회화를 음악과 시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는데 클레의 말을 상기시킨다.

당시 아이비 리그(Ivy League) 대학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던 반유태주의 감정으로 인해 로드코는 학교측으로부터 더 이상 장학금을 지불할 수 없으며 원한다면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융자해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유태인 학생들에 대한 명문대학들의 차별정책 때문에 뉴욕에 거주하던 우수한 학생들은 헌터 칼리지(Hunter College)와 시티 칼리지(City College)로 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티 칼리지를 가난한 학생들의 하버드 대학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1920년 당시 두 대학의 학생들 가운데 무려 팔구십 퍼센트가 유태인들이었다.
로드코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1923년에 대학을 자퇴하고 ‘여기저기 서성거리는 거지’가 되어버렸다.
그는 뉴욕으로 가 봉제공장에서 천을 자르는 일도 했으며 1925년 10월에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하여 막스 베버의 정물화반에서 6개월 동안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폴란드에서 온 젊은 피아노 연주자 아더 게이지(Arther Gage)와 함께 방을 쓰고 있었다.
그는 게이지에게 “내가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고등어 통조림 하나와 빵 한 줄 그리고 훔친 우유로 사흘 동안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레지나 보거트(Regina Bogat)는 “로드코는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처럼 외로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의 친절한 성격은 그가 부분적으로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1932년 여름부터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캠프에 갔다가 그의 만돌린 연주 솜씨에 반한 에디스 사차(Edith Sachar)라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사차는 브루클린에 거주하던 유태인이었는데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고 사차는 로드코의 첫 아내가 되었다.
로드코는 1929년부터 브루클린에 있는 센트럴 아카데미의 강사로 재직했으며 이때부터 3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사차는 보석 디자인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수입이 넉넉했으므로 로드코에게도 자기와 같은 일을 하라고 종용했다.
그녀는 로드코와 그의 친구 예술가들의 그림을 야만적으로 공격하는 등 두 사람의 인연에는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로드코는 많은 예술가들과 만났다.
그들 가운데에는  드 쿠닝, 고키, 폴록도 있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던 아돌프 고틀립과 우정이 두터웠다.
고틀립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으므로 로드코와 수준 높은 미학을 논의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로드코와 클리포드 스틸은 서로 먼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만나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고 헤어져 있을 때면 서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서신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스틸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말대가리 얼굴에 안경을 낀 그는 보기에도 지성인이었으며 상당한 철학적 지식이 있었다.

1944년 늦게 로드코는 스물세 살 난 메리 앨리스라는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유태인이 아니었고 그와는 나이 차이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6개월 후에 결혼했다.
이듬해에 화랑 ‘금세기 예술’에서 소개된 그림들은 모두 신화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 그는 고틀립과 거의 매일 만나 신화에 관해 대화하면서 신화에서 그들의 주제들을 발견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그의 그림이 『휘트니 연감 Whitney Annual』에 수록되었고 휘트니 미술관은 그의 그림을 구입했지만 로드코는 미술관과 사이가 나빴다.
1947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릴 그룹전에 초대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면서 자신의 그림이 평범한 사람들의 그림들과 함께 소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로드코는 초현실주의 화법으로 바다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1947년에 그는 이미 사각형태로 물감을 캔버스에 젖게 하여 마치 사각형이 물에 떠내려가는 듯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떠내려가는 색들은 분명한 형태를 띠지 않기가 예사였으며 미세한 운동과 색들이 제공하는 촉감들이 평면에서 깊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그림들은 이후 5년 동안 진전되면서 대개는 커다란 사각 형태들로 색이 있는 배경 위에 그려졌다.
그의 그림과 스틸의 그림들은 당시 가장 유력했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컬러-필드(color-field)’ 회화라는 말로 명명되었다.
물감을 물에 엷게 적신 듯이 다양한 색조를 가지고 있는 로드코의 형태들은 캔버스에서 구름처럼 시각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그가 1950년에 그린 <초록·빨강·오렌지 Green·Red·Orange>(78)는 거대한 크기의 그림인데 형태와 색이 아주 단순화되어 있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로드코의 그림을 구입하고 싶어했지만 그는 휘트니 미술관이 “쓰레기들의 매매장”이라고 빈정거리면서 그림을 팔지 않았다.
그는 또한 경쟁심이 대단했다. 폴록이 어느 날 그를 화실로 초대하여 아직 완성하지 않은 그림 <파란 막대기들 Blue Poles>(109)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위대한 그림이 아니겠느냐?”고 물었는데 그렇게 물었던 폴록의 방자함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는 “잊지 말게. 우리 모두 화가들일세”라며 구태여 경쟁심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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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묵시의 네 승마자들

페기의 노력으로 베티 파슨즈의 무릎에 버려진 폴록은 베티의 화랑에 소속되었다. 그 화랑에는 로드코, 뉴먼, 스틸이 전속되어 있었고 이제 폴록이 가세하자 베티는 그들 네 사람을 가리켜 “묵시의 네 승마자들”이라고 불렀다.

폴록이 베티의 화랑에 소속된 후 그녀의 화랑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곳에서 전람회가 열릴 때면 폴록이 참석했는데, 그는 거기서 술을 마시고는 취기가 오르면 자연히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조각가 허버트 퍼버는 “잭슨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에 공손할 줄 모르는 예술가이다”라고 말했다. 폴록은 자신이 같은 세대 화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어떤 때는 자신을 잃고 자가당착에 빠졌으며 화가들의 친구가 되거나 그들로부터 자신이 따로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날 브래들리 워커 탐린이 폴록에게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넌 어떻게 흐르는 색조들을 동시에 조절하느냐?” 폴록은 화를 내면서 “말해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탐린은 시라큐스에서 뉴욕으로 온 예술가로서 그 또한 캔버스를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올 오버 방법을 창조한 예술가들 중 하나였다. 탐린은 폴록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곤혹스러워서 그렇게 대꾸했다고 이해하고는 그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폴록에게 탐린과 같은 아량을 베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각가 토니 스미스는 수년 전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있었던 파티에서 처음 폴록을 만난 뒤로 유난히 그를 따랐다. 토니는 “난 이 친구의 언행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폴록을 욕했는데 얼마 후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토니는 이따금 스프링스로 폴록을 방문했고 두 사람은 부엌 식탁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내용에는 전혀 알맹이가 없었다. 잭슨은 항상 동네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그러니까 토니가 모르는 사람들에 관해서 누가 어떻게 했다느니 누가 저렇게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 폴록은 이따금 회화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그의 그림을 가져갔다느니 은퇴하고 지금은 아무 일도 안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그림 한 점을 가져갔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그럴 때면 토니는 화를 내면서 “잭슨! 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빌어먹을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고 말해서 폴록의 말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파슨즈 화랑에서 가장 유력했던 예술가는 폴록과 로드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천재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시기심 때문에 우정을 나눌 수가 없었다. 로드코는 몸집이 크고 앞이마가 벗겨졌으며 키가 크고 갈색 눈에 두꺼운 테를 두른 안경을 썼다. 그는 유난히 평론가들과 전람회를 주최하는 자들에게 미움이 많았다. 그는 동료 예술가들에게는 친절하고 호감을 주었지만 폴록에게만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폴록이 자신의 평판만을 생각하고 다른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로드코는 이러한 생각을 1947년 6월 뉴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표현했는데 폴록과 잘 지내고 있던 뉴먼은 로드코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잭슨은 그림을 그리는 데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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