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1950년대에 로드코의 명성이 높았으며

페기가 경제적으로 실패하고 유럽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화랑을 폐쇄하자 그녀와 견줄 만한 중개상으로 베티 파슨즈가 부상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실존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함께 조각을 수학한 적이 있었던 여인으로 페기와는 달리 자신의 생각이 뚜렷했다.
페기처럼 사람들에게 게걸스럽게 그림을 사라고 강요하는 쪽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평판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었다.
페기의 부탁으로 그녀가 폴록과 계약을 하기 전에 그녀는 이미 로드코와 스틸의 그림들을 그녀의 화랑에서 전적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로드코의 명성이 높았으며, 1954년에는 그의 그림 한 점이 4,000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그의 컬러-필드 그림들은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가 폴록과 드 쿠닝 그리고 프랜츠 클라인의 그림들을 이벤트라고 생각하여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로 분류한 것에 비해 좀더 사변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감성 문제와 고뇌를 감각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그는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내가 인간적이게 되고 친밀해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난 추상예술가는 아니다. … 나는 색, 형태, 또는 어느 것과의 관계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오로지 기본적인 인간의 감성들을 표현할 따름이며 비극, 희열, 운명들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울거나 나약해지는 것은 나의 인간적 감성이 그들에게 전해진 까닭이다.
…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종교적 경험을 하는 사람들로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그러한 경험을 한다.
만일 당신이 색들의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초점을 잃을 것이다.”

그의 그림값은 앙등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그는 60년대에 팝아트(Pop Art)가 성행하자 격노하여 “팝 예술가들은 사기꾼들이고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젊은 예술가들이 우리를 살해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폭음했고,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요양소로 보내졌다.
동맥류로 고생하던 그는 1970년 초에 동맥을 끊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말년에 그가 정신적으로 고독해지면서 빛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그의 그림들은 자꾸만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밤의 풍경화와도 같았다.
1978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대규모로 그를 위한 기념전을 개최했는데 당시 그의 그림 한 점이 19만 7천 달러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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