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폴록의 물감 흘리기

여러분이 폴록의 그림들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그가 사용했던 물감 흘리기(dripping) 기교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가 그러한 기교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기 바로 전 그에 관한 남은 이야기를 먼저 한다.

폴록이 파슨즈 화랑에 오는 날이면 베티는 은근히 긴장해야 했다.
그녀는 폴록이 자신에게 말을 걸라치면 그의 안색부터 먼저 살피는 습관이 생겨나 있었다.
혹시라도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안색에서 발견하게 되는 날이면 바짝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잭슨은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부끄럼을 타고 거의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그는 싸우려고 했다. … 난 달아났다”고 베티는 말했다.

폴록이 그녀의 화랑에 소속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베티는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살필 겸 스프링스로 그를 방문하려고 했다.
뉴먼 부부가 마침 동행하겠다고 해서 그녀는 그들과 함께 뉴먼의 차로 그곳에 갔다.
폴록 부부와 뉴먼 부부 그리고 베티는 거실에 앉았다.
그날 뉴먼은 일제 연필들을 선물로 가져갔으며, 베티는 폴록이 그 연필로 드로잉하는 것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폴록은 처음에는 잘 그렸으나 연필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곧 연필이 부러졌다.
다른 연필로 그리는데 또 부러지고 다시 연필을 쥐고 그렸지만 역시 부러지자 ‘빌어먹을 연필’이라고 화를 내며 욕지거리를 했다.
“잭슨은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지나쳤다. 만일 그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그날 이후 베티가 소감을 전했다.

1947년 폴록은 파슨즈 화랑에서 처음으로 열릴 전람회를 위해 8월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가을까지 그는 그림에만 전념했다.
바람이 부는 날은 찬 바람이 헛간 화실 안으로 스며들었으므로 10월부터 난로에 불을 지펴야 했다.
리는 그가 난로를 사용하자 부주의로 불이나 나지 않을까 은근히 염려했다.
헛간 바닥은 나무로 된 데다가 작았으므로 그런 염려를 할 만도 했다.
더욱이 폴록은 유화 물감들을 바닥에 즐비하게 늘어놓았는데 그것들은 화염물질이므로 화실 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폴록은 열대여섯 점을 그려서 그것들을 벽에 기대놓거나 걸어두기도 했다.
리는 그것들을 벽장 안에 넣어두라고 했지만 폴록은 자신이 바라볼 수 있게 펼쳐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있었는데 작가들은 자신의 과거의 아이디어가 현재의 아이디어를 보완해주거나 또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그림을 바라봄으로써 자화자찬하는 나르시시즘도 즐길 수가 있었다.
리도 자신의 제안이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연신 바라보다가 싫증이 나거나 창조자로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면 어느 날 그것들을 폴록처럼 난로 속에 처넣거나 칼로 난도질해버린다.
칼로 자신의 실패한 그림들을 찢다가 미학적 경험을 했던 루치오 폰타나는 그때부터 고의로 캔버스를 찢어서 작품으로 내놓았으니 미학적 경험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고 일어날 수 있음과 과오는 곧 창조의 시작이기도 함을 새삼 알려준 예라 하겠다.
드 쿠닝은 “퍽 자주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망친다.
폴 세잔이 그랬고 피카소도 입체주의 그림들을 망쳤다.
폴록도 많은 그림들을 망쳤다”고 말했다.

폴록은 여러 가지 물감들을 실험했다.
그는 화가들이 사용하는 유화 물감 외에도 상업용 에나멜 페인트, 배관공들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페인트, 그리고 가정용 페인트도 썼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마치 무대에서 행위하듯이 그림을 그렸으므로 액션 페인팅은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는 유화 물감을 묽게 타서는 깡통에 붓고 막대기로 물감을 젓다가는 허공에 휘휘 저으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했다.
그러면 캔버스에는 아주 가는 선들이 강줄기처럼 나타났으며 물감이 막대기에서 거의 흘러내렸을 때에는 더욱 가는 선들이 나타났다.
그는 이런 방법을 반복했다.
그가 물감을 천천히 떨어뜨릴 때면 강줄기는 불어났으며, 속도를 가하면 강줄기는 길어졌고, 캔버스 가까이 흘린 물감은 부드러운 선이 되었다.
그가 팔을 휘휘 젓게 되면 거친 동그라미들이 생겼으며, 물감이 묽을 때에는 동그라미들이 멀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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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피카비아 아내에게 품은 뒤샹의 연정


애인 마리 로렌싱을 떠나보내고, 피카소를 멀리하기 시작한 아폴리네르는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가 필요했다.
그는 피카비아를 자주 만났는데 그의 사내다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뒤샹이 뮌헨이 있는 동안 아폴리네르는 혼자 피카비아를 독점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셨으며, 밤새 대화하고 아편을 함께 피웠으며, 피카비아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파리 시가를 빠른 속력으로 누볐다.
피카비아는 자동차를 여러 대 가지고 있었고, 돈을 물 쓰듯 했다.

이 시기 피카비아는 육안으로 분별할 수 있는 사물의 색보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감성적인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하늘을 빨간색으로 땅을 파란색으로 칠하는 표현주의 방법을 즐겼다.
그러한 그의 그림은 만화경처럼 보였다.
그는 말했다.
“나의 그림에서 주관적인 표현은 제목에 있으며, 그림은 객체일 뿐이다.
하지만 객체는 객체임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기도 한 이유는 제목을 나타내는 판토마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체가 인간의 심장과도 같은 잠재적인 요소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제시해준다.”

피카비아는 아폴리네르를 만나고부터 부쩍 추상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가브리엘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이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뮌헨에서 돌아온 후 뒤샹은 1912년 10월 20일 아폴리네르와 함께 피카비아의 차를 타고 스위스 국경 근처에 있는 주라로 갔다.
그곳 산 정상에 있는 작은 동네 에티발에는 피카비아의 장모가 살고 있었으며, 피카비아의 아내 가브리엘도 그때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피카비아가 12시간 동안 운전하는 동안 아폴리네르와 뒤샹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편안하게 왔지만 피카비아는 폭우를 뚫고 달리느라 여러 차례 노선 밖으로 위험하게 차를 몰았다.
밤늦게 에티발에 도착한 세 사람을 가브리엘과 장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묵었다. 가브리엘의 어머니 미세스 부페는 누구와도 대화할 줄 아는 사교적인 여인으로 훌륭한 가문 출신답게 예를 갖추었다.
미세스 부페는 유명한 식물학자의 손녀딸로 할아버지는 라마르티느, 샤토브리앙, 마담 레카미에르의 친구였다.
가브리엘의 기억에 의하면 아폴리네르는 미세스 부페에게 그곳 동네 존느에 관해 혹은 18세기 조상들에 관해 물으면서 자기가 18세기의 지성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미세스 부페는 사위의 친구가 자랑스러운 자신의 집안에 관해 묻는 것에 의기양양해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폴리네르와 대화했다.
비가 자주 왔으므로 그들은 벽난로 앞에서 게임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었고, 미세스 부페는 할머니가 예전에 그랬듯이 옛 이야기들을 사위와 사위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뒤샹은 7살 연상인 가브리엘에게 연정을 품었다.
그러한 그를 그녀는 친절히 대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을 은근히 부추겼다.
뒤샹은 파리의 찰스 프로크에 있는 피카비아의 커다란 아파트에 자주 가서 밤이 깊도록 그들 부부와 함께 지냈으므로 가브리엘은 뒤샹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름다운 몸매에 지성을 갖춘 가브리엘은 피카비아와 결혼하면서 음악을 포기할 것을 약속했다.

가브리엘은 뒤샹에 관해 회상했다.
“마르셀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요.
… 그는 시골사람으로 존경하는 형들에게 너무 집착해 있었고, 혼자 속으로만 혁명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답니다.
… 피카비아가 그에게 준 영향은 대단했고, 저의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 제가 마르셀을 그의 가족으로부터 끌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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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시장 후보 바넷 뉴먼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70)은 스스로 무정부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여느 무정부주의자들처럼 모순된 일을 했다.
그는 연신 그룹을 결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뉴먼은 토요일 오후에는 주로 파슨즈 화랑에서 소일하면서 화랑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누구나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들은 정치, 조류학, 지질학, 어학 등이었는데, 특히 그가 원시예술에 관해서 말할 때는 그 해박한 지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를 능가할 수 없었던 어떤 사람은 “예술가들을 위해서는 미학이고, 새들을 위해서는 조류학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침묵으로 듣는 사람은 폴록뿐이었다.
폴록은 이따금 고개를 끄덕거리며 뉴먼의 의견에 동조를 표했으므로 뉴먼은 그에게 말할 때에는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이따금 폴록은 “바니(바네트의 애칭), 넌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아냐? 내 생각에 너는 말 엉덩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폴록의 말투를 뉴먼은 자신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뉴먼은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라기보다는 컬러-필드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할 테지만 컬러-필드라는 말은 나중에야 그린버그가 사용했고, 당시에는 그러한 구별이 없었다.
천재는 오래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뷔퐁(Buffon)의 말처럼 뉴먼은 인정받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오래 인내해야 했다.

뉴먼은 맨해턴에 정착한 폴란드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이브래험은 여느 이민자들처럼 무일푼으로 미국에 온 후 의류 공장을 경영하여 성공한 인물이었다.
오늘날에도 뉴욕의 의류업계는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 의류뿐이랴.
미술사에 자랑스럽게 오른 예술가들 가운데 유태인들을 꼽자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뉴먼은 네 형제자매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성공했으므로 그는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뉴먼은 1922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  

1923년부터 27년까지는 시티 칼리지에 재학하면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도 다녔는데 그곳에서 아돌프 고틀립을 알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2년 동안 자신과 함께 사업에 종사한다면 그를 동업자로 대우해주며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당시의 10만 달러는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뉴먼은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했는데 불행하게도 1929년 10월 말에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제공황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의 사업은 파산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그 제의는 자연히 뜬구름이 되고 말았다.

뉴먼은 10년 동안 의류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미술교사로서 가르치는 일도 했다.
1937년 아버지가 심장질환으로 사업에서 은퇴하자 뉴먼은 사업체를 팔았다.
그동안 뉴먼은 자신의 평판을 쌓아왔고 1933년에는 감히 라 구아르디아(Fiorello La Guardia)에 대적하여 뉴욕 시장선거에 출마했다.
그가 선거유세에서 언급한 공약들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했다.
그의 네 가지 공약은 대중을 위한 화랑과 카페를 지어 늘이는 것, 뉴욕 시를 위한 오페라단을 구성하는 것,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대기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러한 부서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뉴먼이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지만 사람들은 놀라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라 구아르디아는 능력있는 3선 시장으로서 뉴욕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퀸즈에 있는 라 구아르디아 공항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어느 날 뉴먼은 교사들의 모임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우수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때 젊은 여교사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으므로 두 사람은 얼굴이 상기되도록 논쟁을 하게 되었고 여인은 그곳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아날리 그린하우스(Arnalee Greenhouse)라는 이 여인은 1936년에 뉴먼의 아내가 되었다.
1944년부터 뉴먼은 씨앗에 관한 드로잉을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과거에 그렸던 그림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때 그는 맨해턴 4번가에 조그만 화실을 장만했는데 그 화실은 드 쿠닝의 화실 건너편에 있었다.

그가 화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48년에 <하나인 하나 Onement One>가 소개되고부터였다.
이 그림은 단색조의 그림으로서 어두운 붉은색 캔버스에 밝은 오렌지색으로 한 줄을 길게 그은 그림이었다.
사람들은 웃기는 그림이라고 했지만 평론가들은 그 그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틀립의 전람회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화가라기보다는 이론가라고 생각했다.

뉴먼의 그림들은 독특했다. 그는 그림에 수직선들을 가늘게 그려넣었는데 미술사가 로버트 로젠블럼은 그의 그림을 ‘낭만적 고상함’이라고 묘사했으며, 붉은색은 ‘바다’로서 우리를 이기심의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오게 한다고 기술했다.
로젠블럼이 설명한 그 그림이 관람객에게 제공하는 미학적 경험은 동시에 지성적으로 도전하게 했다.
예를 들면 그의 커다란 붉은색은 조절하는 힘이 없이 치솟는데 집(Zip)이 그것을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에서의 수직선들은 기하학적 조직으로서 관람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작용하여 그림 전체에 안정감을 주었다.
한편 그는 원시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글을 자주 발표했는데 그중에 ‘최초의 인간은 예술가였다 The Firstman was an Artist ’가 있다.

그는 파슨즈 화랑에 소속된 후 스틸과 로드코 그리고 폴록과 잘 어울렸다.
이 ‘묵시의 네 승마자들’은 함께 그룹전을 가지기도 했다.
베티는 “사람들은 여기에 참여한 화가들의 그림을 추상이라고 간주하지만 이 그룹의 예술가들은 추상화가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별은 중요한 것으로서 그녀는 “이 예술가들이 진정한 추상세계를 창조했고 … 이러한 그림들은 오로지 형이상학적으로만 의논이 가능한 그림들이다”고 첨언했다.
조각을 공부한 예술가인 그녀의 말은 평론가의 말보다 더욱 웅변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뉴먼은 1949년부터 단순하게 그림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림들 가운데 <침묵의 종말 End of Silence> <화합 Concord>, 약속 The Promise> 등이 있다.
1958년에 그의 그림 네 점이 모마에서 소개되었으며, 같은 해에 그의 전람회가 그린버그에 의해서 베닝턴(Bennington) 대학에서 열렸는데 그린버그가 카탈로그 서문을 썼다.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으며, 1966년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 <십자가의 상태들 Stationa of the Cross>이 소개됨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1970년에 타계했고, 3년 후 그의 그림 한 점이 14만 달러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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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스틸은 제목에 숫자를 사용했다

스틸은 그림의 제목들에 숫자들을 사용하였는데 <1945(PH-233)>과 <July 1945-R(PH-193)>은 그가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 그렸던 중요한 그림들이다.
1946년에 페기가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는데 그때 <July 1945-R(PH-193)>이 전시되었고, 이듬해 파슨즈 화랑에서 열렸던 그룹전에서도 그 그림이 소개되었다.
사실 그는 그룹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로드코에게 말했는데 로드코는 자기에게 맡겨두었던 스틸의 그림을 본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품한 것이었다.
스틸은 로드코에게 화를 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종결지었다.

1945년 스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뉴욕으로 갔으며 로드코를 통해 페기를 만났다.
페기의 화랑 ‘금세기 예술’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은 그가 뉴욕을 대표할 만한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지하는 중요한 전람회였다.
다음해인 1947년 4월에는 파슨즈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는 대중들이 무감각하고 주의산만하다고 비난했으며 “근래의 사회윤리는 전제주의의 함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장사꾼들에 의해서 미술계가 조작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장사꾼들은 예술가들의 존엄성이나 번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평론가들은 백정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중들의 창자를 위해 햄버거로 만든다.
학자들은 단순히 마비되었다”고 푸념한 적도 있었다.

스틸은 로드코와 아주 가까왔다.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폴록이 여느 예술가들과 나누었던 대화들과 비교할 때 전혀 수준이 다른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그림에는 신경질적인 이성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감성도 고도로 문명화된 것으로서,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이해가 가능한 그런 그림들이었다.
“내가 그림을 드러낼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며 나 자신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미지들이 형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모두가 살아 있는 정신 안으로 융합되기를 바란다.”

40년대 후반에 스틸이 한 말이다.
그는 회화가 어떠한 것들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또는 상징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에게 회화는 그 자체의 권리를 가지며 전체처럼 존재했다.
그래서 그는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는 “검정색은 죽음의 색이지만 공포의 색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검정색은 자신에게 “따뜻하고 생산력이 있게 느껴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파슨즈 화랑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몇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1951년에는 뉴욕의 헌터 칼리지에서 가르쳤고, 이듬해와 1953년에는 브루클린 대학과 시티 칼리지에서 판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폴록에게 자신은 “근본적으로 회화방법을 바꾸었다”면서 폴록이 물감을 흘리면서 검정색을 쏟아부어 추상을 추구했던 방법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폴록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스틸은 폴록이 미술계에서 희생된 것이라면서 그를 딱하게 여겼으며 폴록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했으므로 더욱 폴록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스틸이 폴록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폴록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폴록은 그 편지를 수없이 읽었는데 편지의 내용은 차차 소개하려 한다.

스틸은 천성이 학자였고 철학자였으므로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에는 간단하게 언급하더라도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는 로젠버그의 평론에 반발하는 글을 쓰면서 폴록과 자신의 그림을 동시에 변명하기도 했다.
로젠버그는 그를 “살롱 좌담가”라고 부르면서 “지성적으로 촌놈”이라고 빈정거렸다.
폴록은 자신을 동정하는 스틸의 우정을 고마워했으며, 자신과 스틸 그리고 뉴먼 세 사람이야말로 미국회화의 마지막 최선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폴록을 가리켜 그린버그는 “처음으로 잭슨은 그룹에 동조했다.
처음으로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폴록은 스틸과 친해지려고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와 함께 야구장에도 갔는데 그린버그의 말로는 폴록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행동하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틸은 1952년 모마에서 열렸던 ‘15인의 미국인들’전에도 참여했다.
베티는 스틸이 그녀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자신의 화랑을 떠나자 그것을 불평했다.
하지만 스틸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당신은 단지 중개상에 불과할 뿐인데 감히 예술가의 행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느냐?”고 나무랐다.
두 사람의 사이는 그때 아주 나빠져서 수년 동안 냉랭했다.
어느 누구도 스틸이 규정한 엄격한 도덕규범에 합당한 사람은 없었다.
딱 한 사람 스틸 자신만이 그러한 규범 안에서 도도했다.
그는 “고독한 개척자”로서 홀로 도덕적, 예술적으로 최전방에 속해 있었다.
1957년 그는 모마로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으며, 그후 세 차례나 더 참가를 거절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성을 비난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에 평론가 케네스 렉스로스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그림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서는 불평없이 그 안에 넘어진 후 아무 말 없이 그곳으로부터 걸어 나온다.”

그의 그림에서 흰색은 검정색과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그는 흰색을 칠하기도 했지만 캔버스의 하얀 부분을 그냥 남기는 방법도 함께 사용했다.
1967년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이 그를 위한 기념전을 제안했지만 그때도 그는 전람회 기간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거절했다.
1972년 스틸은 미국 아카데미로부터 메릿 메달(Merit Medal)을 수여받았고 1978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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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기욤 아폴리네르의 감옥행

이 시기 기욤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를 가장 잘 옹호하는 평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뒤샹은 퓌토 예술가들의 그룹에서 그를 만났는데 재능 있는 시인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아폴리네르는 황금 섹션의 그룹전을 관람한 후 뒤샹의 그림에는 그다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다만 “낯선 드로잉”이라고만 적었다.

아폴리네르는 가정교사, 은행 서기, 언론인, 사진사 일을 하다가 1910년부터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의 그림을 미학적으로 옹호하면서 평론가로 부상했으며 피카소를 만난 것은 1903년이었다.
그는 퓌토에 왔지만 그곳 예술가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그들을 만나는 것을 피카소와 브라크에게 미안한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브라크는 아폴리네르의 미술에 대한 식견을 별로 신용하지 않았다.
“아폴리네르는 재능 있는 시인이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미술에 대한 그의 지식은 우리를 통해서 생긴 것이다”라고 꼬집어 말했다.

아폴리네르는 1907년 벨기에인 게리 피에르를 비서로 채용했는데, 피에르는 훔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였다.
하루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돌로 된 작은 조각 두 점을 코트 안에 넣어 훔쳐오기도 했다.
피카소의 일대기를 쓴 작가 존 리처드슨에 의하면 피카소는 루브르에 새로 전시된 기원전 5, 6세기경의 고대 이베리아인의 돌조각에 대단한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피에르가 훔쳐온 이베리아인 조각 두 점을 보자 피카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한다.
피카소는 피에르에게 돈을 주고 그것들을 샀다.
그가 1907년에 그린 그의 대표작이자 20세기의 대표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등장하는 두 여인의 얼굴이 이베리아인의 조각 모습과 유사해서 피에르에게서 산 돌조각과 관련 있다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피에르는 미국으로 가서 4년 동안 지내다가 1911년 봄 아주 비싼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왔다.
그의 돈 씀씀이는 헤펐으며, 많은 돈을 경마에 탕진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폴리네르는 그에게 돈을 꾸어주기도 하고, 잠자리까지 제공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피에르는 아폴리네르에게 진 빚도 갚을 겸 돈이 필요해서 다시 루브르로 가서 이베리아인의 돌조각을 훔쳐왔다.
결국 아폴리네르는 1911년 8월 21일에 그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내쫓았다.
피에르가 아폴리네르로부터 주문을 받고 돌조각을 훔쳤는지, 아니면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훔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에르는 아폴리네르에게 주려고 그것을 훔친 것이다.

그날 파리의 모든 신문에서는 <모나리자>가 루브르에서 도난당했음을 일제히 보도했다.
범인은 루브르에 고용된 빈센조 페루지아였다.
그는 <모나리자>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그 그림을 벽에서 떼어 계단으로 가져간 후 그곳에서 캔버스를 액자로부터 분리했다.
그는 <모나리자>를 둘둘 말아 코트 안에 넣고 유유히 루브르를 빠져 나왔다.
페루지아는 2년 후 <모나리자>를 구입할 사람을 찾다가 50만 리라에 구입하겠다는 플로렌스인의 제의를 받았다.
페루지아는 그때 쇠고랑을 찼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나리자>는 조금도 상한 데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1911년 8월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하면,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사실이 보도된 후 『파리 저널』은 그것을 되돌려주는 사람에게는 신분을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거액을 보상하겠다고 제의했다.
피에르는 꾀가 나서 아폴리네르의 아파트에 있는 이베리아인의 조각을 가져다 『파리 저널』에 건네주고 돈을 받은 후 루브르의 안전상태가 매우 허술하다고 말해주었다.
『파리 저널』은 약속대로 피에르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이베리아인의 조각을 루브르에 돌려주었다.
이 사실을 안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피카소가 피에르로부터 과거에 구입한 이베리아인의 조각 두 점 때문에 불안해했다.
아폴리네르는 과거의 비행이 탄로가 날 것을 염려하여 피에르에게 160프랑을 주면서 기차를 타고 마르세이유로 도망치라고 권했다.
그런 후 아폴리네르는 조각 두 점을 가방에 넣어 센 강에 던져버리려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다시 그 조각을 『파리 저널』로 가지고 가서 자신의 신분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누가 경찰에 신고했는지 9월 7일에 경찰관이 아폴리네르의 아파트를 뒤졌고 아파트에서 피에르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경찰관은 아폴리네르를 체포한 후 그가 <모나리자>를 훔친 자와 공모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상테 구치소에 수감했다.

아폴리네르는 구치소에 엿새 동안 감금되었는데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경찰관은 피카소를 의심하고 심문하기 위해 연행했다.
심문관은 아폴리네르를 피카소가 있는 방으로 데려온 후 아폴리네르를 아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겁에 질린 피카소는 창백한 얼굴로 평생 수치스럽게 여길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난 이 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훔친 조각품인 줄 알면서도 구입한 피카소는 법에 따라 스페인으로 추방되어야 마땅했는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결국 풀려났지만 그때부터 피카소를 비겁한 놈으로 여겼다.
두 사람의 미학적 우정은 결국 금이 갔다.
그 후 아폴리네르는 퓌토의 예술가들과 좀 더 가까이하면서 마르셀의 형들과 우정을 나누었고, 황금 섹션 전시회를 관람한 후 그들의 작품에 관한 글도 썼다.
이는 피카소로부터 배신당한 미학적 화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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