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스틸은 제목에 숫자를 사용했다
스틸은 그림의 제목들에 숫자들을 사용하였는데 <1945(PH-233)>과 <July 1945-R(PH-193)>은 그가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 그렸던 중요한 그림들이다.
1946년에 페기가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는데 그때 <July 1945-R(PH-193)>이 전시되었고, 이듬해 파슨즈 화랑에서 열렸던 그룹전에서도 그 그림이 소개되었다.
사실 그는 그룹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로드코에게 말했는데 로드코는 자기에게 맡겨두었던 스틸의 그림을 본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품한 것이었다.
스틸은 로드코에게 화를 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종결지었다.
1945년 스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뉴욕으로 갔으며 로드코를 통해 페기를 만났다.
페기의 화랑 ‘금세기 예술’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은 그가 뉴욕을 대표할 만한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지하는 중요한 전람회였다.
다음해인 1947년 4월에는 파슨즈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는 대중들이 무감각하고 주의산만하다고 비난했으며 “근래의 사회윤리는 전제주의의 함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장사꾼들에 의해서 미술계가 조작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장사꾼들은 예술가들의 존엄성이나 번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평론가들은 백정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중들의 창자를 위해 햄버거로 만든다.
학자들은 단순히 마비되었다”고 푸념한 적도 있었다.
스틸은 로드코와 아주 가까왔다.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폴록이 여느 예술가들과 나누었던 대화들과 비교할 때 전혀 수준이 다른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그림에는 신경질적인 이성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감성도 고도로 문명화된 것으로서,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이해가 가능한 그런 그림들이었다.
“내가 그림을 드러낼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며 나 자신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미지들이 형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모두가 살아 있는 정신 안으로 융합되기를 바란다.”
40년대 후반에 스틸이 한 말이다.
그는 회화가 어떠한 것들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또는 상징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에게 회화는 그 자체의 권리를 가지며 전체처럼 존재했다.
그래서 그는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는 “검정색은 죽음의 색이지만 공포의 색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검정색은 자신에게 “따뜻하고 생산력이 있게 느껴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파슨즈 화랑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몇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1951년에는 뉴욕의 헌터 칼리지에서 가르쳤고, 이듬해와 1953년에는 브루클린 대학과 시티 칼리지에서 판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폴록에게 자신은 “근본적으로 회화방법을 바꾸었다”면서 폴록이 물감을 흘리면서 검정색을 쏟아부어 추상을 추구했던 방법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폴록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스틸은 폴록이 미술계에서 희생된 것이라면서 그를 딱하게 여겼으며 폴록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했으므로 더욱 폴록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스틸이 폴록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폴록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폴록은 그 편지를 수없이 읽었는데 편지의 내용은 차차 소개하려 한다.
스틸은 천성이 학자였고 철학자였으므로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에는 간단하게 언급하더라도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는 로젠버그의 평론에 반발하는 글을 쓰면서 폴록과 자신의 그림을 동시에 변명하기도 했다.
로젠버그는 그를 “살롱 좌담가”라고 부르면서 “지성적으로 촌놈”이라고 빈정거렸다.
폴록은 자신을 동정하는 스틸의 우정을 고마워했으며, 자신과 스틸 그리고 뉴먼 세 사람이야말로 미국회화의 마지막 최선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폴록을 가리켜 그린버그는 “처음으로 잭슨은 그룹에 동조했다.
처음으로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폴록은 스틸과 친해지려고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와 함께 야구장에도 갔는데 그린버그의 말로는 폴록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행동하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틸은 1952년 모마에서 열렸던 ‘15인의 미국인들’전에도 참여했다.
베티는 스틸이 그녀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자신의 화랑을 떠나자 그것을 불평했다.
하지만 스틸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당신은 단지 중개상에 불과할 뿐인데 감히 예술가의 행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느냐?”고 나무랐다.
두 사람의 사이는 그때 아주 나빠져서 수년 동안 냉랭했다.
어느 누구도 스틸이 규정한 엄격한 도덕규범에 합당한 사람은 없었다.
딱 한 사람 스틸 자신만이 그러한 규범 안에서 도도했다.
그는 “고독한 개척자”로서 홀로 도덕적, 예술적으로 최전방에 속해 있었다.
1957년 그는 모마로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으며, 그후 세 차례나 더 참가를 거절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성을 비난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에 평론가 케네스 렉스로스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그림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서는 불평없이 그 안에 넘어진 후 아무 말 없이 그곳으로부터 걸어 나온다.”
그의 그림에서 흰색은 검정색과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그는 흰색을 칠하기도 했지만 캔버스의 하얀 부분을 그냥 남기는 방법도 함께 사용했다.
1967년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이 그를 위한 기념전을 제안했지만 그때도 그는 전람회 기간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거절했다.
1972년 스틸은 미국 아카데미로부터 메릿 메달(Merit Medal)을 수여받았고 1978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