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시장 후보 바넷 뉴먼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70)은 스스로 무정부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여느 무정부주의자들처럼 모순된 일을 했다.
그는 연신 그룹을 결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뉴먼은 토요일 오후에는 주로 파슨즈 화랑에서 소일하면서 화랑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누구나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들은 정치, 조류학, 지질학, 어학 등이었는데, 특히 그가 원시예술에 관해서 말할 때는 그 해박한 지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를 능가할 수 없었던 어떤 사람은 “예술가들을 위해서는 미학이고, 새들을 위해서는 조류학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침묵으로 듣는 사람은 폴록뿐이었다.
폴록은 이따금 고개를 끄덕거리며 뉴먼의 의견에 동조를 표했으므로 뉴먼은 그에게 말할 때에는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이따금 폴록은 “바니(바네트의 애칭), 넌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아냐? 내 생각에 너는 말 엉덩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폴록의 말투를 뉴먼은 자신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뉴먼은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라기보다는 컬러-필드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할 테지만 컬러-필드라는 말은 나중에야 그린버그가 사용했고, 당시에는 그러한 구별이 없었다.
천재는 오래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뷔퐁(Buffon)의 말처럼 뉴먼은 인정받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오래 인내해야 했다.

뉴먼은 맨해턴에 정착한 폴란드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이브래험은 여느 이민자들처럼 무일푼으로 미국에 온 후 의류 공장을 경영하여 성공한 인물이었다.
오늘날에도 뉴욕의 의류업계는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 의류뿐이랴.
미술사에 자랑스럽게 오른 예술가들 가운데 유태인들을 꼽자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뉴먼은 네 형제자매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성공했으므로 그는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뉴먼은 1922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  

1923년부터 27년까지는 시티 칼리지에 재학하면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도 다녔는데 그곳에서 아돌프 고틀립을 알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2년 동안 자신과 함께 사업에 종사한다면 그를 동업자로 대우해주며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당시의 10만 달러는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뉴먼은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했는데 불행하게도 1929년 10월 말에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제공황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의 사업은 파산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그 제의는 자연히 뜬구름이 되고 말았다.

뉴먼은 10년 동안 의류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미술교사로서 가르치는 일도 했다.
1937년 아버지가 심장질환으로 사업에서 은퇴하자 뉴먼은 사업체를 팔았다.
그동안 뉴먼은 자신의 평판을 쌓아왔고 1933년에는 감히 라 구아르디아(Fiorello La Guardia)에 대적하여 뉴욕 시장선거에 출마했다.
그가 선거유세에서 언급한 공약들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했다.
그의 네 가지 공약은 대중을 위한 화랑과 카페를 지어 늘이는 것, 뉴욕 시를 위한 오페라단을 구성하는 것,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대기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러한 부서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뉴먼이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지만 사람들은 놀라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라 구아르디아는 능력있는 3선 시장으로서 뉴욕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퀸즈에 있는 라 구아르디아 공항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어느 날 뉴먼은 교사들의 모임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우수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때 젊은 여교사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으므로 두 사람은 얼굴이 상기되도록 논쟁을 하게 되었고 여인은 그곳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아날리 그린하우스(Arnalee Greenhouse)라는 이 여인은 1936년에 뉴먼의 아내가 되었다.
1944년부터 뉴먼은 씨앗에 관한 드로잉을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과거에 그렸던 그림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때 그는 맨해턴 4번가에 조그만 화실을 장만했는데 그 화실은 드 쿠닝의 화실 건너편에 있었다.

그가 화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48년에 <하나인 하나 Onement One>가 소개되고부터였다.
이 그림은 단색조의 그림으로서 어두운 붉은색 캔버스에 밝은 오렌지색으로 한 줄을 길게 그은 그림이었다.
사람들은 웃기는 그림이라고 했지만 평론가들은 그 그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틀립의 전람회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화가라기보다는 이론가라고 생각했다.

뉴먼의 그림들은 독특했다. 그는 그림에 수직선들을 가늘게 그려넣었는데 미술사가 로버트 로젠블럼은 그의 그림을 ‘낭만적 고상함’이라고 묘사했으며, 붉은색은 ‘바다’로서 우리를 이기심의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오게 한다고 기술했다.
로젠블럼이 설명한 그 그림이 관람객에게 제공하는 미학적 경험은 동시에 지성적으로 도전하게 했다.
예를 들면 그의 커다란 붉은색은 조절하는 힘이 없이 치솟는데 집(Zip)이 그것을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에서의 수직선들은 기하학적 조직으로서 관람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작용하여 그림 전체에 안정감을 주었다.
한편 그는 원시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글을 자주 발표했는데 그중에 ‘최초의 인간은 예술가였다 The Firstman was an Artist ’가 있다.

그는 파슨즈 화랑에 소속된 후 스틸과 로드코 그리고 폴록과 잘 어울렸다.
이 ‘묵시의 네 승마자들’은 함께 그룹전을 가지기도 했다.
베티는 “사람들은 여기에 참여한 화가들의 그림을 추상이라고 간주하지만 이 그룹의 예술가들은 추상화가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별은 중요한 것으로서 그녀는 “이 예술가들이 진정한 추상세계를 창조했고 … 이러한 그림들은 오로지 형이상학적으로만 의논이 가능한 그림들이다”고 첨언했다.
조각을 공부한 예술가인 그녀의 말은 평론가의 말보다 더욱 웅변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뉴먼은 1949년부터 단순하게 그림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림들 가운데 <침묵의 종말 End of Silence> <화합 Concord>, 약속 The Promise> 등이 있다.
1958년에 그의 그림 네 점이 모마에서 소개되었으며, 같은 해에 그의 전람회가 그린버그에 의해서 베닝턴(Bennington) 대학에서 열렸는데 그린버그가 카탈로그 서문을 썼다.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으며, 1966년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 <십자가의 상태들 Stationa of the Cross>이 소개됨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1970년에 타계했고, 3년 후 그의 그림 한 점이 14만 달러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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