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라이프』를 통해 폴록이 알려진 후

많은 편지들이 미국 내에서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폴록의 그림이 가장 훌륭했다고 칭찬하기도 했고, 폴록의 자필 서명을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그림엽서를 동봉하면서 물감을 몇 방울 떨어뜨려 보내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폴록을 찾는 방문객들의 수가 부쩍 늘었다.
『라이프』를 통해 폴록이 알려진 후 그와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그와 리가 초대받는 경우도 아주 많아졌다.
도예가 로잔느 라킨(Rosanne Lakin)은 이스트 햄프턴에 있는 그녀의 화실로 폴록을 초대하고는 그에게 도자기 제품을 만들어보라고 권하면서 자신의 도구들을 사용하게 했다.
잡지 『뉴요커』에 약에 관한 글을 기고하던 버튼 루에세는 폴록에 관해 글을 쓰고 싶다고 알려왔다.
이스트 햄프턴의 유지들 중 한 사람으로 방송국과 신문사를 가지고 있던 발렌타인과 해피 매이시는 그에게 고전가구들을 트럭으로 실어다 주었는데 거기에는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빅토리아 스타일의 소파와 커다란 오크 나무로 된 테이블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났다.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그를 도왔던 사람은 알퐁소 오소리오였다.
필리핀 사람 오소리오는 마닐라에 사탕수수 농장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성장한 후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다.
베티가 웨익필드 책방 아래층에서 막 화랑을 개업했을 때인 1941년 오소리오는 그곳에서 개인전을 가진 후 사람들에게 화가로 알려진 후 20년 동안 꾸준히 파슨즈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졌다.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 그러한 작품들을 콜라주로 제작한 것들은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더욱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폴록이 물감을 흘려 그린 그림 한 점을 1,500달러에 구입했는데 그 금액은 여태까지 폴록이 팔았던 그림값의 두 배였다.
나중에 그는 그 그림을 폴록에게 가지고와서는 부분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의 주장은 옳았다.
폴록은 그림을 일주일 동안만 두고 가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수정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 후 그것을 고쳤는지 걱정이 되어 화실로 갔던 리는 그 그림이 보이지 않자 비명을 질렀다.
폴록은 수정하는 대신에 완전히 다른 그림으로 다시 그렸던 것이다.
리는 “잭슨, 당신은 오소리오를 모르고 있어요. 그가 아마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라며 걱정했지만 오소리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값진 교훈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예술가에게 그의 그림을 수정하도록 하지 마라. 그러나 그림을 개선하고 싶거든 수정시켜라”였다.

어느 날 오소리오는 용기를 내서 자신의 그림들을 폴록에게 보여주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폴록은 그림 한 점을 말없이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그림 한구석에 녹아흐르는 아이스크림 콘을 가리키면서 “이 그림에서 이것이 전체를 말해준다”고 평했다.
그의 의견은 오소리오를 아주 만족시켰다.
그는 수년 동안 친구들에게 폴록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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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라이프』지에 보도되다(1949년 8월)

폴록이 이렇게 지내고 있을 때 베니스에서는 그를 위한 축제가 열렸다.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페기가 폴록의 그림 여섯 점을 출품한 것이었다.
앞서 알린 대로 페기는 베니스에 안주하면서 그곳에 뮤지엄을 개관하고 실력있는 중개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녀를 위한 별관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별관과 나란히 따로 있었다.
이는 페기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페기는 “나는 내가 유럽의 새 나라가 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1949년 1월 24일부터 2월 12일까지 폴록의 전람회가 파슨즈 화랑에서 열린 후 많은 평론가들이 폴록에 대한 그린버그의 반복되는 칭찬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에밀리 제나우어는 『월드 텔리그램 World Telegram』에서 “베티 파슨즈의 화랑에서 보여준 잭슨 폴록의 그림들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 이상이 아니었다.
난 그것들을 빗으로 빗고 싶어진다”고 적었다.
그해 2월 7일에 발행된 『타임』지에서는 “잭슨 폴록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게티스버그 전투 지도를 그린 것 같았다”고 기술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해 11월 11일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의 가장 힘 있는 화가이다”고 적었다.

모마는 <Number 4, 1948>을 250달러에 구입했다.
그것은 폴록의 그림이 두 번째로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서 일 년 후 모마는 웃돈을 주고 그 그림 대신에 좀더 큰 그림 <Number 1, 1948>로 바꾸었다.
폴록은 모마가 자신의 그림을 또 구입한 데에 흡족했고, 스프링스에 살고 있는 배관공에게 선물을 하나 했다.
자신의 집에 난방장치와 온수시설을 하라고 시킨 것이다.

1949년 2월 아놀드 뉴먼(Arnold Newman)이 스프링스로 폴록을 방문했다.
그는 서른 살의 프리랜스 사진작가로서 『라이프』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라이프』사는 여름에 폴록을 소개할 때 사용하도록 폴록의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을 찍어오게 했다.
폴록은 기꺼이 뉴먼이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면서 그의 청에 응했다.
그가 폴록이 작업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를 바라자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깡통의 물감을 막대기로 저어 캔버스에 뿌렸다.
폴록은 자신의 작업현장을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5백만 독자를 가진 『라이프』에는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폴록은 화실 밖에 서 있다가 사진을 다 찍고 조수와 함께 나오는 뉴먼에게 “돈이 필요한데 150달러를 꾸어줄 수 있겠소?”라고 묻고는 잠시 사라지더니 그림 한 점을 들고 왔다.
그러나 뉴먼은 다음 달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돈을 아껴야 한다면서 폴록의 청을 거절했다.

1949년 7월 18일 『라이프』지와 인터뷰하기 위해 폴록과 리는 타임-라이프 빌딩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맞아 인터뷰를 했던 도로시 사이벌링의 말에 의하면 “리가 잭슨의 말을 확대기처럼 반복해주곤 했다.
그녀가 나섰던 것은 아니었고 잭슨을 위해 그의 말을 정돈한 것인데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사이벌링이 기록을 보니 폴록이 한 말인지 리가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의 인터뷰에 의하면 폴록은 토마스 벤턴에게서 수학한 것이 ‘완전한 손해’였으며 1935~44년 사이는 문제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회화기교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전에 벤턴이 한 말을 반복했는데 “실제 화가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만 하고 그것은 개성적이어야 한다. … 학생들은 기교에는 관심을 덜 가져야 하며 무엇인가를 웅변하는 것에 열중해야 한다”고 했다.

폴록은 좋아하는 작가로 20세기 화가들 중 드 쿠닝과 칸딘스키를 꼽았고, 옛 대가들 중에서는 엘 그레코, 고야, 그리고 렘브란트라고 대답했다.
20세기 대가들 가운데 피카소와 마티스를 제쳐놓고 폴록이 드 쿠닝을 꼽았던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혹시 그가 미국 작가 한 사람을 구태여 말함으로써 미국미술이 유럽 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인터뷰를 마친 사이벌링은 폴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자연적인 발전”이라고 피력했다.

두 사람의 인터뷰 내용은 그해 8월호에 소개되었다.
『라이프』는 ‘잭슨이 미국에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하면서 “서른일곱 살의 잭슨은 미국미술의 새 현상으로 빛나고 있다”고 알렸다.
『라이프』의 보도효과는 대단했다.
그것은 5백만 명의 독자들이 한꺼번에 폴록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을 의미했다.
스프링스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폴록이 『라이프』에 등장한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점에 대해 이웃에 살았던 밀러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이프』 가 잭슨보다 더 미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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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291 화랑

아모리 쇼가 끝나고 이틀 후 피카비아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스티글리츠 화랑은 맨해튼 5번가 291번지에 소재했으므로 사람들은 주소를 따서 291화랑이라고 불렀다.
291화랑은 모더니즘의 황무지와도 같은 미국 미술계에 오아시스였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불리운 피카소와 마티스의 그림을 뉴욕에 처음 소개한 것도 이 화랑이었으며, 다양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하여 미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화랑은 진보주의 사고를 가진 미국 예술가들의 온상으로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곳에서 전시회를 가진 예술가들 중에는 존 마린, 찰스 데머스, 마스덴 하틀리, 그리고 아서 도브가 있다.
피카비아는 이들과 만났고, 그들은 피카비아를 통해 파리의 근래 미술현황을 들을 수 있었다.

유대인 스티글리츠가 화랑을 연 것은 1905년이었다.
친구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첸과 함께 개업했는데 사진작가로 유명해진 스티글리츠는 처음에는 사진만 소개하다가 차츰 유럽 예술가들의 그림과 조각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프리카의 원시주의 미술품도 소개했으며, 유럽 모더니즘의 기류와 더불어 다양한 미술이 있음을 홍보했다.
화랑을 건립한 목적을 그는 “솔직한 자아표현, 전통주의 독재로부터 솔직한 혁명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와 스타이첸은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우정을 나누었고, 파리에 거주하는 작가 스타인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스티글리츠는 어느날 젊은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보고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여 전시회를 열어주고 경제적으로 돕기도 했는데, 두 사람은 곧 연인의 관계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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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로젠버그도 그린버그와 마찬가지로 폴록이

로젠버그는 폴록의 이웃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이 시기에 그는 평론에서 독주하던 그린버그와 쌍벽을 이루는 평론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로젠버그의 말솜씨는 대단했으므로 폴록은 그저 말없이 듣기만 했고, 로젠버그도 그린버그와 마찬가지로 폴록이 자신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폴록과 그의 관계는 지성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는 “두 사람은 애들처럼 놀았고, 포커 게임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돌을 던지거나 했다”고 전하면서 “마치 개와 고양이 같았다”고 덧붙였다.

1948년 여름 폴록은 두 사람과 어울렸다.
한 사람은 폴록을 처음 만난 후 “이자를 만난 것은 비극이었다”고 말한 조각가 토니 스미스였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주량이 대단했으므로 가히 폴록과 견줄 만했다.
그는 폴록의 그림들을 “순수한 혼돈”이라고 말했지만 폴록은 그와 우정을 나누었다.
다른 한 사람은 스물네 살의 해리 잭슨이었는데, 그는 폴록의 그림 <암이리>를 보고 “완전히 필연적이며 정직하고 바닥까지 드러낸 실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폴록은 그를 좋아했다.
해병대 출신 예술가 해리는 말했다.
“잭슨은 거칠게 그림을 그리며, 손가락 끝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잭슨의 그림을 보면 내가 전투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것은 나의 장을 침범했다.”
폴록은 그에게 “날 깔보았다가는 너의 혼이 달아나게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주 다정한 말투였다.

두 사람은 잔디에 앉아서 풀을 씹거나 메뚜기의 다리를 잡아당겼고, 밤새 맥주를 마시며 잡지나 오래된 책들에 실려 있는 작품들에 관해 대화했다.
두 사람이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자 리는 폴록에게 “이제 잘 시간이다”고 말했는데, 폴록은 리에게 “입닥쳐! 빌어먹을 시팔년. 가서 커피나 끓여와!”라고 말했다고 해리는 전했다.
“잭슨은 리에게 ‘빌어먹을 암캐’, ‘시팔년’ 또는 ‘네가 잘하는 건 씹밖에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해리가 술회했다.
그런 식으로 폴록은 스승 벤턴이 리타를 대했던 것을 똑같이 재현함으로써 미학은 벤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행위는 여전히 벤턴을 닮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폴록은 일부러 리에게 거칠게 굴면서 해리에게는 “저 여자는 정들기 쉬운 여자다. 해리, 난 이 점을 말해주고 싶다”고 말해 두 사람은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고 해리는 회상했다.

그러나 리가 언제나 폴록에게 복종한 것은 아니었고, 반대의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자넷의 말에 의하면 “리는 잭슨에게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리는 잭슨에게 ‘아직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어?’라고 추궁했다”고 전하면서 “그녀는 항상 잭슨을 귀찮게 굴었다”고 말했다.
샤롯 파크는 어느 여름 날 리가 폴록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고 보면 양쪽의 말을 모두 들은 후에라야 여러분은 폴록 부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폴록과 리의 행위를 종합하여 공평하게 논평한 어니스틴 라소우의 말을 참고하기 바란다.
“어떤 때는 폴록이 리에게 명령했지만 다음날에는 리가 폴록에게 명령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이중적이었다.”
그의 말로는 하루는 리가 죽어 지냈지만 다음날은 폴록이 고양이의 자리를 리에게 양보했다는 뜻인데, 이런 부부들을 여러분도 간혹 본 적이 있을 줄 안다.

폴록은 파슨즈 화랑에서 이듬해(1949년) 1월에 전람회를 가지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주로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면서 여름을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잭슨을 노골적으로 좋아하여 그러한 점을 리가 알아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리는 그 여자와 몹시 다투었다.
화가 난 잭슨은 현관 밖에 나가 앉았고 리가 따라가서는 그 곁에 앉았다.
잭슨은 “꺼져 시팔년! 난 너의 참견이 귀찮다”고 말했지만 리는 잭슨에게 매달려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잭슨의 화가 사그러질 때까지 키스를 계속했다.

이런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서 리의 전남편 이고 팬투호프가 그들을 방문했다.
비타 피터슨(Vita Peterson)은 한눈에 그가 동성연애자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고가 동성연애자라고 생각했는데 리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비타가 석연찮게 말했다.
피터슨 부부는 이고의 ‘동양적 매력’에 호감을 가졌지만 폴록은 그와 인사를 나눌 때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고 그곳에 있었던 메이가 증언하면서 이고가 폴록의 집에 오래 머물수록 폴록의 표정은 어두워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폴록은 이고를 기분 나쁘게 대했으며, 바닷가에 갔을 때는 갑자기 이고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피터슨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고는 계속 폴록의 집에 머물렀다.
며칠 후 식사 파티에 존 리틀도 참석했는데 폴록은 술에 취해 접시와 가구 그리고 가구 위에 진열해놓은 그릇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리는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폴록은 몸을 비틀거리면서 이고를 잡으러 다녔고 이고는 앞마당으로 달아났는데 막 비가 그친 후라서 땅이 질퍽했는데도 폴록은 질퍽한 땅을 밟으며 그를 찾았다.
이고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폴록과 땅 위에서 뒹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레슬링 같았다고 베넷이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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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아모리 쇼에 자신이 초대된

패츠는 자크 비용에게 뒤샹 삼형제의 작품들이 팔린 사실을 알렸다.
뒤샹이 네 점을 팔아 번 돈은 972달러였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는 각각 324달러에 팔렸으며, 나머지는 각각 162달러에 팔렸다.
이는 큰 돈은 아니었다.
미국 박물관으로서는 메트로폴리탄이 처음으로 세잔의 <포브르의 언덕>을 가장 비싼 가격인 6,700달러에 구입했다.
마티스의 <붉은 화실>(당시의 제목은Panneau Rouge였다)은 팔리지는 않았지만 가격이 4,050달러였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가운데 피카비아만이 유일하게 뉴욕으로 가서 아모리 쇼를 직접 관람했다.
그는 뉴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며 그는 모더니즘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가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주력했으므로 미국 사람들은 그가 입체주의 운동의 선두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인터뷰는 적중했고 사람들은 그가 출품한 밝은 색상의 그림 네 점이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들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스 입체주의가 피카비아와 뒤샹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는 줄로 알았다.


뒤샹은 아모리 쇼에 자신이 초대된 경위와 모더니즘이 미친 영향에 관해 말했다.

나를 초대한 사람은 월터 패츠였다.
그는 1910년에 프랑스로 와서 형들의 친구가 되었는데, 난 형들을 통해 그를 만났다.
그가 1912년에 아모리 쇼를 위해 그림을 수집할 때 우리 삼형제의 작품을 많이 가지고 갔다.
입체주의가 대단히 성행할 때였다.
그는 내 그림을 네 점 가지고 갔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 <체스두는 사람들>, 그리고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였다.

패츠가 1914년에 다시 프랑스에 와서 나로 하여금 미국에 갈 수 있도록 했다.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우리는 10월 혹은 11월에 데 고벨링 애비뉴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내게 “왜 미국으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성공적이었다고 말해주었고 난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 염려했다.
반 년 안에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난 징병에서 제외되었지만 출국을 허락받아야 했다.
아모리 쇼는 물론 미국 예술가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동시에 미술에 관해 조금밖에 관심이 없던 미국인들에게 미술에 관한 개념을 심어주었다.
돈이 있는 엘리트들만이 유럽 예술가들의 미술품을 살 수 있었다.
대규모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미국 예술가들의 그림을 구입하는 데 별 이의가 없었다.
아무튼 미국 사람들은 흥미 있는 화가들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화가들도 알게 되었으며, 파리의 미술계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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