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아모리 쇼에 자신이 초대된

패츠는 자크 비용에게 뒤샹 삼형제의 작품들이 팔린 사실을 알렸다.
뒤샹이 네 점을 팔아 번 돈은 972달러였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는 각각 324달러에 팔렸으며, 나머지는 각각 162달러에 팔렸다.
이는 큰 돈은 아니었다.
미국 박물관으로서는 메트로폴리탄이 처음으로 세잔의 <포브르의 언덕>을 가장 비싼 가격인 6,700달러에 구입했다.
마티스의 <붉은 화실>(당시의 제목은Panneau Rouge였다)은 팔리지는 않았지만 가격이 4,050달러였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가운데 피카비아만이 유일하게 뉴욕으로 가서 아모리 쇼를 직접 관람했다.
그는 뉴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며 그는 모더니즘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가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주력했으므로 미국 사람들은 그가 입체주의 운동의 선두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인터뷰는 적중했고 사람들은 그가 출품한 밝은 색상의 그림 네 점이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들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스 입체주의가 피카비아와 뒤샹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는 줄로 알았다.


뒤샹은 아모리 쇼에 자신이 초대된 경위와 모더니즘이 미친 영향에 관해 말했다.

나를 초대한 사람은 월터 패츠였다.
그는 1910년에 프랑스로 와서 형들의 친구가 되었는데, 난 형들을 통해 그를 만났다.
그가 1912년에 아모리 쇼를 위해 그림을 수집할 때 우리 삼형제의 작품을 많이 가지고 갔다.
입체주의가 대단히 성행할 때였다.
그는 내 그림을 네 점 가지고 갔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 <체스두는 사람들>, 그리고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였다.

패츠가 1914년에 다시 프랑스에 와서 나로 하여금 미국에 갈 수 있도록 했다.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우리는 10월 혹은 11월에 데 고벨링 애비뉴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내게 “왜 미국으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성공적이었다고 말해주었고 난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 염려했다.
반 년 안에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난 징병에서 제외되었지만 출국을 허락받아야 했다.
아모리 쇼는 물론 미국 예술가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동시에 미술에 관해 조금밖에 관심이 없던 미국인들에게 미술에 관한 개념을 심어주었다.
돈이 있는 엘리트들만이 유럽 예술가들의 미술품을 살 수 있었다.
대규모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미국 예술가들의 그림을 구입하는 데 별 이의가 없었다.
아무튼 미국 사람들은 흥미 있는 화가들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화가들도 알게 되었으며, 파리의 미술계를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