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라이프』지에 보도되다(1949년 8월)
폴록이 이렇게 지내고 있을 때 베니스에서는 그를 위한 축제가 열렸다.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페기가 폴록의 그림 여섯 점을 출품한 것이었다.
앞서 알린 대로 페기는 베니스에 안주하면서 그곳에 뮤지엄을 개관하고 실력있는 중개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녀를 위한 별관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별관과 나란히 따로 있었다.
이는 페기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페기는 “나는 내가 유럽의 새 나라가 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1949년 1월 24일부터 2월 12일까지 폴록의 전람회가 파슨즈 화랑에서 열린 후 많은 평론가들이 폴록에 대한 그린버그의 반복되는 칭찬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에밀리 제나우어는 『월드 텔리그램 World Telegram』에서 “베티 파슨즈의 화랑에서 보여준 잭슨 폴록의 그림들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 이상이 아니었다.
난 그것들을 빗으로 빗고 싶어진다”고 적었다.
그해 2월 7일에 발행된 『타임』지에서는 “잭슨 폴록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게티스버그 전투 지도를 그린 것 같았다”고 기술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해 11월 11일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의 가장 힘 있는 화가이다”고 적었다.
모마는 <Number 4, 1948>을 250달러에 구입했다.
그것은 폴록의 그림이 두 번째로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서 일 년 후 모마는 웃돈을 주고 그 그림 대신에 좀더 큰 그림 <Number 1, 1948>로 바꾸었다.
폴록은 모마가 자신의 그림을 또 구입한 데에 흡족했고, 스프링스에 살고 있는 배관공에게 선물을 하나 했다.
자신의 집에 난방장치와 온수시설을 하라고 시킨 것이다.
1949년 2월 아놀드 뉴먼(Arnold Newman)이 스프링스로 폴록을 방문했다.
그는 서른 살의 프리랜스 사진작가로서 『라이프』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라이프』사는 여름에 폴록을 소개할 때 사용하도록 폴록의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을 찍어오게 했다.
폴록은 기꺼이 뉴먼이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면서 그의 청에 응했다.
그가 폴록이 작업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를 바라자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깡통의 물감을 막대기로 저어 캔버스에 뿌렸다.
폴록은 자신의 작업현장을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5백만 독자를 가진 『라이프』에는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폴록은 화실 밖에 서 있다가 사진을 다 찍고 조수와 함께 나오는 뉴먼에게 “돈이 필요한데 150달러를 꾸어줄 수 있겠소?”라고 묻고는 잠시 사라지더니 그림 한 점을 들고 왔다.
그러나 뉴먼은 다음 달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돈을 아껴야 한다면서 폴록의 청을 거절했다.
1949년 7월 18일 『라이프』지와 인터뷰하기 위해 폴록과 리는 타임-라이프 빌딩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맞아 인터뷰를 했던 도로시 사이벌링의 말에 의하면 “리가 잭슨의 말을 확대기처럼 반복해주곤 했다.
그녀가 나섰던 것은 아니었고 잭슨을 위해 그의 말을 정돈한 것인데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사이벌링이 기록을 보니 폴록이 한 말인지 리가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의 인터뷰에 의하면 폴록은 토마스 벤턴에게서 수학한 것이 ‘완전한 손해’였으며 1935~44년 사이는 문제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회화기교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전에 벤턴이 한 말을 반복했는데 “실제 화가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만 하고 그것은 개성적이어야 한다. … 학생들은 기교에는 관심을 덜 가져야 하며 무엇인가를 웅변하는 것에 열중해야 한다”고 했다.
폴록은 좋아하는 작가로 20세기 화가들 중 드 쿠닝과 칸딘스키를 꼽았고, 옛 대가들 중에서는 엘 그레코, 고야, 그리고 렘브란트라고 대답했다.
20세기 대가들 가운데 피카소와 마티스를 제쳐놓고 폴록이 드 쿠닝을 꼽았던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혹시 그가 미국 작가 한 사람을 구태여 말함으로써 미국미술이 유럽 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인터뷰를 마친 사이벌링은 폴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자연적인 발전”이라고 피력했다.
두 사람의 인터뷰 내용은 그해 8월호에 소개되었다.
『라이프』는 ‘잭슨이 미국에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하면서 “서른일곱 살의 잭슨은 미국미술의 새 현상으로 빛나고 있다”고 알렸다.
『라이프』의 보도효과는 대단했다.
그것은 5백만 명의 독자들이 한꺼번에 폴록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을 의미했다.
스프링스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폴록이 『라이프』에 등장한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점에 대해 이웃에 살았던 밀러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이프』 가 잭슨보다 더 미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