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의 미학적 혼돈, 완전추상을 버리다

폴록은 다시 재기해보려는 신념으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1951년 봄 리가 그의 화실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는 바닥에 널린, 검정과 흰색으로 그린 그림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년 만에 폴록은 이미지들이 베일 속에 은은히 나타나는 그림들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완전추상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폴록은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기교를 버렸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폴록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만 친구인 조각가 토니 스미스는 폴록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토니는 잭슨의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고 토니의 아내 제인(Jane)이 말했다.
토니와 폴록은 함께 술을 마시면 대화를 많이 했지만 몇 시간이고 침묵하기도 했다.
폴록의 어두운 영상들이 차츰 아일랜드인인 토니의 마음에 비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옥의 길로 동행하는 여행자들이었다”고 불트먼이 말했다.
토니를 폴록에게 소개한 사람은 제임스 브룩스였다.
“잭슨은 토니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토니와의 우정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해리 잭슨은 전하면서 “시팔, 해리. 토니는 건축에 관해서 구석구석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알려주었다.

토니의 아내 제인이 1950년 늦게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유럽으로 떠나자 아내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는 폴록과 좀더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토니는 주말마다 폴록을 찾았다.
두 사람은 수십 밤을 함께 지내면서 술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동양철학에서 시작해서 근래의 폴록의 꿈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대화했다.
“내게는 잘 구성된 꿈이 있는데 토니가 그것을 해몽해주어서 다행이었네”라고 폴록은 파리에 있는 오소리오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토니는 폴록에게 새로운 것을 그리도록 하라고 독려했다.
토니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폴록이 그렇게 커다란 크기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가을 리듬>과 <하나>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토니는 정말이지 잭슨을 고문했던 것인데, 토니는 그 점을 몰랐다”고 부휘 존슨은 말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자주 목격했던 존슨이 전하는 내용이다.

“토니는 ‘자, 네가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야.
잭슨, 그러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진전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발전하는 것이지?’라고 말하면서 잭슨이 무엇인가 달라져야만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잭슨을 아주 우울하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잭슨에게 그렇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토니는 너무했다.”

특히 토니는 폴록에게 이미지들을 그릴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함께 스케치를 한 적도 있었는데 토니는 폴록에게 자신의 스케치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폴록이 다시 이미지들을 그리게 된 것은 토니의 압력 때문이었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토니의 상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리가 폴록의 화실에서 보았던 이미지들은 멕시코 벽화예술가 시쿠에이로스로부터 받았던 영향을 반영한 작품들로서 젖가슴이 매달려 있는 거대한 여인의 모습과 낯선 야수들, 이그러진 얼굴들이었다.
감성적으로 불안했던 시기에 그는 멕시코 예술가의 그림에 매료되었었는데, 그 무렵의 변화는 사람이 한 번 받았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실감나게 하는 것이었다.

폴록이 다시 이미지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토니의 탓도 있지만 그 스스로가 미학적으로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술가들의 일반적인 증세인 좌절감으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눈덩이처럼 커지자 자신의 중량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누군가를 의지하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연약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토니가 나타나 그에게 용기를 준답시고 했던 행위들은 폴록 스스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유인했던 것이 아니라 토니 자신의 미학을 처방했던 것이었다.
이제 폴록은 정말 추락하려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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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이 시다에서 벌인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폴록이 시다에서 벌인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화장실 문을 부수었다든가 화장실 벽을 부수었다든가, 또는 드 쿠닝과 클라인을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에게 펀치를 가했다든가 그래서 그들로부터 맞았다든가 등등의 것이었다.
그린버그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누가 폴록에게 맞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너무 많아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어느 날 예일 대학에 재학하던 스무 살의 잘생긴 오드리 플랙이라는 여학생이 그곳에 왔다.
그녀는 평소에 폴록을 영화배우처럼 우상화하고 있었다.
폴록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내 뒤를 잡아당겼으며 내 면전에서 트림을 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하면서 그를 만나고는 실망했다고 덧붙였다.
래리 리버스는 어느 날 애인과 함께 그곳에 있었는데 “내가 화장실에 간 동안 잭슨이 내 애인에게 나와 헤어지게 되면 자기와 만나자고 했다면서 투덜거렸다”고 했다.

어느 날 폴록은 시다에 나타나서 토마스 헤스와 대화를 나누었다. 주제는 헤스가 출판한 책 『추상회화: 배경과 미국의 상태 Abstract Painting: Background and American Phase』에 관해서였다.
책의 내용은 폴록의 빰을 한 대 갈기는 것과도 같았다.
증인의 말에 의하면 “잭슨은 그의 책을 꼭 쥐고 있었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으스러뜨려 부수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고 했다.
헤스와 대화하면서 폴록은 몇 번이고 펄쩍 뛰기도 했으며 그의 의자를 미는 등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마침내 폴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책을 드 쿠닝을 향해 집어던졌다.
“왜 이러는 거야?”라고 드 쿠닝이 화를 내자 폴록은 “좋은 책이군. 썩은 책이야”라고 말하면서 “헤스는 네가 나보다 낫다고 한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1951년 1월, 나무스가 작년 여름에 찍었던 폴록의 사진들이 『포트폴리오 Portfolio』에 소개됐다.
『아트 뉴스』 1월호는 지난 연말 파슨즈 화랑에서 열렸던 폴록의 전람회에 관하여 보도하면서 존 마린 및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전람회와 더불어 그의 전람회가 세계적인 수준의 전람회였다고 칭찬했다.
아직도 폴록을 위대한 예술가로 대접하는 평론가들이 있었으며 3월에는 폴록의 <라벤더 안개>와 <가을 리듬>이 『보그 Vogue』 에 모델을 배경으로 소개되었다.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5월에 열렸던 ‘국제 수채화 전람회’에 폴록의 드로잉 이 함께 소개되었다.
같은 달에 나무스가 찍은 사진들이 『아트 뉴스』에 다시 게재되었는데 이번에는 로버트 굿나우가 폴록의 물감 흘리기 기교에 관해 정감있게 묘사한 글도 함께 실렸다.
5월에는 이탈리아인 레오 카스텔리가 대규모로 ‘9번가 쇼 Ninth Street Show’를 개최하면서 폴록의 그림 를 포함시켰고, 시카고의 아트 클럽에서 개최됐던 10월 전람회에는 벤 샨과 드 쿠닝의 그림들과 함께 폴록의 그림들도 소개됐다.

이제 폴록의 그림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관람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베니스인 평론가는 「무의식 회화 Automatic Painting」라는 제목으로 폴록에 관한 글을 썼으며, 일본에서는 ‘제3회 도쿄 독립미술 전람회 The Third Tokyo Independant Art Exhibition’에서 그의 그림들을 소개했고, 아이오와 주의 웨슬리언 대학(Wesleyan College) 교수는 폴록의 기교를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
베니스에 거주하고 있던 페기는 폴록의 그림 열아홉 점을 암스테르담, 브뤼셀, 취리히에서 소개했으며, 미국에서는 모마의 순례전에 폴록의 를 포함시켰다.
파리에서는 미셸 타피에가 폴록의 그림을 전람회에 포함시켰고, 소련인 평론가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폴록에 관해 알고부터는 그를 ‘데카당트(퇴폐주의) 부르주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폴록은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아트 뉴스』에 게재된 자신의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오래된 영화 속의 모습처럼 느꼈다.
리는 존 케이지를 통해서 폴록을 다시 조명했으면 하고 케이지를 만났다.
그는 당시 잘 알려진 작곡가였지만 “난 잭슨의 그림들을 인내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
난 이자를 용납할 수 없다”며 냉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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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

뮌헨에서 돌아온 뒤샹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루엥으로 갔다.
그는 루엥 대성당 북쪽에 있는 보봐시느 거리를 걷다가 가멜링의 과자집 진열장에 있는 초콜릿 분쇄기를 보았다.
어렸을 적에도 그는 그 기계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북처럼 생긴 둥근 것이 3개 달린 초콜릿 분쇄기는 천천히 회전하면서 코코아와 식물성 기름, 설탕을 갈고 섞어서 브라운색으로 반죽하는데 기계 아래에서 지피는 불로 그것들을 용해시킨다.
뒤샹은 말했다.
“나는 늘 회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생을 통해서 알았다.
회전 … 그것은 일종의 자아도취이며, 자아만족, 또는 자위행위이다.
기계는 원을 그리며 회전하면서 놀랍게도 초콜릿을 생산해낸다.
난 그 기계에 매료당했다.”

뒤샹은 1913년 2월에 <초콜릿 분쇄기 No.1>란 제목으로 그 기계를 유화로 그렸는데 그것은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위한 습작이기도 했다.
초콜릿 분쇄기를 떠받치는 테이블의 다리모양을 루이 15세의 양식으로 하고 상업용 프린트 전문가로 하여금 금색으로 제목과 제작일자를 가죽에 프린트하게 해서 그림 오른쪽 구석에 풀로 부착했다.
그는 그것을 “새로운 기교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그것은 <커피 분쇄기>보다 더욱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기계를 실제로 드로잉하면서 뒤샹은 “문제는 어떻게 드로잉하느냐는 것이며, 동시에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큰 유리>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는 “과학의 정밀하고 정확함”을 미술에 투입시키려고 했으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은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기가 말한 방법으로 “유쾌한” 그림 <큰 유리>를 그린 것이다.

뒤샹은 과거에 메모한 내용들을 묶어서 1967년에 『부정사 안에서A l'infinitif』란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가스통 드 폴로우스키의 『사차원의 땅으로 항해Voyage au pays de la quatrieme dimension』에서 인용한 내용이 많았다.
뒤샹은 드 폴로우스키의 저서가 1912년에 출판되기 전에도 신문지상을 통하여 그의 글을 읽었다.
뒤샹은 프랑스 수학자인 앙리 포잉카레와 파스칼 에스프리 주프르의 저서들도 읽었으며, 수학에 관심이 많아 수학을 통해서 사차원을 이해하려고 했다.
아폴리네르는 르네상스 화가들은 삼차원의 환상을 이차원으로 표현했다면서 현대 예술가들은 실제의 모방이 아니라 실제 자체를 나타내려 한다고 주장했으며, 뒤샹이 그의 주장에 동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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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해프닝이 있은 후 이틀이 지나고 폴록은 뉴욕에 가서 내일 시작되는 자신의 전람회를 준비했다.
전람회는 파슨즈 화랑에서 11월 28일에 시작됐다.
그의 그림 서른두 점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화랑을 채웠는데 어떤 사람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곳에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왔다.
폴록의 형 제이도 왔고, 리는 문 앞에 서서 연신 미소를 띄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물론 그녀는 틈틈이 폴록의 거동을 살피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폴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잭슨이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적으면서 그가 추락하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추락일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폴록은 자신이 추락하리라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그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 두렵게 느껴졌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술로 번민을 줄여보려 했지만 술은 기름과도 같아서 번민이라는 화염을 더욱 태우는 법이다.
폴록이 술에 취한 채 친구 조 미르트의 집으로 가서는 “나 좀 들여보내줘. 갈 데가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기에 늦은 시각이면 그는 술집에서 옛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난 위대한 예술가야. 내가 잭슨 폴록이고 위대한 예술가야!”라고 말했다.
친구의 아내는 “난 네가 렘브란트라도 상관하지 않겠어. 밤중에 전화하지 말아야지!”라고 대꾸했다.

그가 추락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그린버그의 말은 적중했는데 우선 전람회에서 그의 그림이 팔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람회에 와서는 유명한 예술가를 직접 보려고 했지 그의 그림을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상에 오른 예술가의 그림값이 비싼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라벤더 안개>(102)는 4,000달러였고 는 5,000달러였으며  <하나 One >와 <가을 리듬>은 각각 7,500달러였다.
아주 작은 그림에도 300달러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베티는 전람회가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서른두 점 가운데 <라벤더 안개>만 팔렸는데 그것도 오소리오가 깎아서 1,500달러에 구입했으므로 대단한 수치였다.
“내게 그 일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고 베티가 말했다.

그날 밤 폴록은 그린버그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당신이 나에 대하여 여태까지 쓴 것들이 나에게는 빌어먹을 이익이 되지 않았다.
난 어리석게도 당신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는 시드니 재니스에게 전화를 걸어 “나 잭슨 폴록이오. 난 당신이 내 그림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한 점도 사지 않았소?”라고 물었다.
전람회에 대한 사람들의 침묵이 폴록에게는 고문처럼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폴록이 추락을 예감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드 쿠닝은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드 쿠닝의 캠프”와도 같았다.
그들은 8번가에 있는 시다 술집에서 만나곤 했다.
시다에는 당구대가 없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뮤직 박스가 없었으며, 텔레비전이 없었다.
그곳에는 예술가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소음들이 없었으므로 예술가들에게는 안락한 곳이었다.
그리고 창이 있어서 술집 밖에서도 안에 누가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창을 들여다보면 클라인이나 구스턴이 있는 경우도 있었고, 드 쿠닝과 헤스, 또는 그린버그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래리 리버스와 로젠버그가 있을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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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시작된 폴록의 추락

 

1950년 폴록의 그림들이 제 2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됐는데, 그해 11월 20일자 『타임』 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잭슨 폴록의 추상화는 보통사람들이나 전문가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보통사람들은 그가 물감을 흘려서 그린 미로와도 같은 그림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그에 관해서 뭐라고 써야 좋을지를 모르고 있다.

주말에 그린버그가 스프링스로 와서 폴록이 다음 전람회를 위해 그린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폴록은 그린버그를 이스트 햄프턴 역까지 바래다주었는데 두 사람은 차에 앉은 채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폴록은 그날 유난히 풀이 죽어 있었다고 그린버그는 회상했다.
“잭슨은 무엇인가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가올 전람회에 관해 대화했다.
그린버그는 폴록에게 다음 전람회는 여태까지보다 더 훌륭한 전람회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폴록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기차가 도착하자 그린버그는 폴록에게 굿 바이라고 하면서도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 역시 무엇인가가 나쁠 것이란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추수감사절 오후인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
폴록은 돈도 참을성도 좋은 날씨도 그에게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날은 11월 25일 토요일이었고 맑고 쌀쌀한 날씨였다.
나무스는 폴록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해야 했고, 정거장에 서 있는 폴록은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웠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함을 나무스는 볼 수 있었다.
“이제 끝났다. 아주 잘 됐어. 아주 훌륭했어요”하고 나무스는 11분짜리 컬러 영화의 촬영을 마치고 소리쳤다.
폴록은 집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리는 조금 늦었지만 칠면조를 굽고 있었다. 촬영을 마친 것도 자축할 겸 8시에 시작될 저녁식사에 리가 사람들을 초대했다.
폴록은 말없이 응접실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버번 위스키를 잔에 가득 따르고는 “한스(나무스), 이리 와서 나와 함께 한잔하자!”고 소리쳤다.
폴록이 두 잔을 연거푸 마시자 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폴록은 “2년 만에 처음 마시는 술이야”라고 소리쳤고 나무스는 미련한 짓 하지 말라며 그를 말렸지만 폴록은 계속 마셔댔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부휘 존슨이 자기 집에 와서 한잔하자는 내용이었다.
폴록은 곧 가마고 대답했다.

이때 리가 초대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족바움 부부, 존 리틀, 알폰소 오소리오였다.
폴록이 나무스에게 “넌 사기꾼이야!”라고 말하자 “난 사기꾼이 아닙니다. 당신이 사기꾼입니다”라고 나무스가 대꾸했고, 리는 두 사람을 말리면서 다들 식탁에 와서 앉으라고 권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계속했는데 갑자기 폴록이 벌떡 일어서더니 “넌 내가 사기꾼인 줄 아는데 내가 사기꾼이 아니고 네놈이 사기꾼이다!”라고 말하면서 탁상을 내리쳤다.
그러자 칠면조가 식탁에서 떨어지면서 바닥에 뒹굴었다.
리는 그것을 주워서 씻은 후 도로 식탁에 가져다놓았다.

폴록은 다시 식탁을 들어올렸다.
접시, 컵, 그릇,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커다란 대접들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면서 커다란 소리를 내었다.
마지막 접시가 때굴때굴 구르다가 멈추자 침묵이 시작됐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폴록은 부엌 뒷문을 꽝 하고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아마 존슨의 집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리가 무안해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 커피는 거실에 가서 마시도록 해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왜 폴록이 과음하기 시작했는지에 관해 의견들을 나누었다.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정상에 올랐던 그가 과음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필자의 의견은, 정상에 오른 사람은 추락을 두려워하며 그때를 먼저 감지하는 것도 정상에 오른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는 데 가속이 필요한 만큼 추락하는 데에도 가속이 작용한다.
백남준 역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점을 지적하면서 예술가는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까 봐 조심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일렀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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