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진은 송설 조맹부의 화풍을 본받았으며


조석진은 철종 4년인 1853년 1월 13일 황해도 강령(현재 옹진) 신흥방 방축동에서 당대의 저명한 화가 임전 조정규(1791~)의 친손자, 조용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정규는 첨사僉使의 벼슬을 했는데 첨사는 종삼품從三品의 무관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약칭이며 지방 수비대장격이다.
그는 도화서 소속의 직업화가 화원畵員으로서 산수화, 인물화, 어해도에서 유명했다.
옹진 지방에서 첨사를 지내다가 퇴임한 후 그곳에 눌러앉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후손 집안에 전해지는 바로는 관직에 있을 때 상소사건으로 유배된 것이라고 한다.
조석진이 태어날 때 조정규는 63살이었으며 손자가 화가로 성공할 것을 예견한 듯 손자에게 산수화 8폭을 그려 주었다.
조석진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작은 임전’이란 뜻으로 아호를 소림小琳이라 하여 가통을 이었고, 이는 뒤에 소정 변관식이 외손이 되어 더욱 뚜렷해진다.
조석진은 20살 전후에 해주 태생의 이청혜와 결혼하여 1876년에 장남 인순을 낳았고 3년 후 장녀 정숙을 낳았다.
그는 서울에 살던 집안의 13촌 조성완의 양자로 입적하고 처자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조성완은 대민부서였던 행혜민서行惠民署의 하급 관리인 주부主簿를 지내고 있었다.
그의 양자가 된 것은 조석진으로 하여금 서울에서 출세하는 기회가 되었다.
훗날 장녀 조정숙이 변창연과 결혼하여 변관식을 낳았다.

1882년 연말 안중식과 함께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 두 사람은 정부가 청나라 기술자들을 오게 하여 서울에 설치한 기계국에서 한동안 기계도면을 그리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부 기관에 오래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1894년에 김홍집의 개화파 내각이 갑신정변의 일환으로 설치한 군국기무소의 회의 장면을 기록화로 그린 작은 그림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1898년에 탁지부度支部 전환국典珤局의 기수技手로 임명되었으며 1902년 3월에는 장례원掌禮院 주사主事로 발령받았다.

조석진은 송설松雪 조맹부(1254~1322)의 화풍을 본받았으며 스스로 송설후신松雪後身으로 자처했다.
조맹부는 송조의 귀족이었지만 원조가 정권을 잡은 후 송대의 유일遺逸로서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인정을 받아 병부랑중兵部郞中을 제수받아 기용되었고, 강절江浙 등의 유학제거儒學提擧를 역임했으며, 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는 남송말과 원초에 걸쳐 살았는데, 당송시대부터 발전되어 온 봉건문화는 원조의 민족적·계급적 압박과 파괴에 의해 매우 심각한 좌절을 입었고, 더우기 농촌경제는 외부인이 조종하는 상업경제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여러 가지 정치적 불평등 현상, 특히 지식인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더해 졌다.
이런 정치적·경제적 제 현실은 곧 조맹부의 미학사상에 “고의古意가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貴有古意”는 강렬한 복고주의적 경향이 형성되게 했다.

명나라 장축張丑(1577~1643)의 『청하서화방 淸河書畵舫』에 조맹부가 두루마리 그림에 스스로 쓴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고의古意가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만약 고의가 없으면 비록 교묘하다 하더라도 이익 되는 것이 없다.
요즈음 사람들은 다만 붓 쓰는 것이 섬세하고 고운 것만 알고는 곧 스스로 능수라 이르는데, 이는 고의가 이미 잘못되면 온갖 병이 마구 생기는 것을 특히 모르는 것이니 이러한 그림을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내가 그린 그림은 간략하고 꾸밈이 없는 듯 하지만 그러나 아는 이는 그것이 예전 그림에 가까움을 알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아는 사람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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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개혁은 중단되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후퇴했던 일본은 1894년 농민전쟁이 발발할 때 청나라와 체결한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1894년 농민전쟁의 실패로 돌아갔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 혹은 개화운동이었다.
농민항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대중은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사회를 변혁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대규모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 농민층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제거하여 농민경제를 자립·안정시키고 봉건지배세력 및 외국 자본주의세력의 침탈로부터 소상인과 다수 빈농층을 보호하려고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농민전쟁은 좌절되었다.
농민전쟁에서 제기된 농민군의 요구는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되어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지주제를 유지·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농민군의 지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농민전쟁 이후에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농민군의 반봉건·반침략 지향은 다시 대한제국기의 민중운동, 1905년 이후의 의병전쟁으로 계승되었다.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면서 미리 계획한 대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 일파를 몰아낸 데 이어 청나라와의 전쟁을 도발했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게 되자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우선 이용가치가 없어진 대원군계열을 제거하고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해주는 20개조 개혁안을 강요했다.
이어 갑신정변 때 망명한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과 연립내각을 구성하게 하면서 군국기무처도 해체시켰다.
정부 각 부서에는 일본인을 고문관으로 들여보내 개혁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게 했다.
나아가 고종으로 하여금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게 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왕실의 정치 간여를 철저히 배제했다.
왕실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일본은 1895년 10월 명성왕후를 살해했다.
그러나 김홍집내각은 이 사건이 일본인과는 무관하다고 일본을 옹호했다.
이에 개화파 내각에 대한 규탄이 빗발쳤고 전국 각지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으며 고종은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함으로써 개화파정권은 무너졌다.
이로써 개혁은 중단되고 개화파관료들은 대부분 살해·유배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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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는 1519년 5월 2일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시신은 앙부아즈의 성 플로렌탱 교회에 안장되었다.
매장증명서에는 같은 해 8월 12일에 다시금 매장식이 거행된 것으로 적혀 있다.

1802년 황제 나폴레옹은 원로원의 의원 한 명을 선임하여 앙부아즈의 기념물들에 대한 복구를 명령했는데 당대의 약탈과 프랑스 혁명시기의 만행으로 항폐해졌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은 성 플로렌탱 교회는 보존할 가치가 없어 보인다고 보고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놀라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묘비들이 나동그라져 있고 무덤은 파헤쳐진 상태였다.
폐허가 된 교회터에서 아이들이 무덤 밖으로 파헤쳐져 나온 뼈를 놀이에 사용할 정도였다.
정원지기가 뼈들을 추스러 모아 정원 모퉁이에 묻었다.
모든 무덤이 파헤쳐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도 레오나르도의 무덤이 어느 것인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이 갖고 놀았던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1863년 시인 아르세느 우사에는 성 플로렌탱 교회가 세워졌던 곳을 발굴해 하나의 완전한 골격을 발견했다.
흥미롭게도 팔이 굽었고 한 손 위에 해골이 얹혀진 상태였다.
시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묘석 파편들이 있었는데, 불완전한 글이지만 '레오나르도스 빈치우스 EO DUS VINS(Leonardus Vincius)'라고 짐작할 수 있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시인은 해골이 보통 것들보다 컸다고 적으면서 지성인의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것이란 심증을 가졌다.
이 뼈는 성 내 성 위베르 예배당에 안치되었고 사람들은 이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완전한 글이 적힌 묘석의 파편은 현존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후 가장 친근한 제자 멜치는 곧바로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고 1519년 8월 20일에도 레오나르도가 머물던 앙부아즈에 남아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가져온 그림들을 그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것 같다.
멜치가 밀라노로 온 건 1520년이거나 그 이듬해였다.
레오나르도의 유산 수령인인 멜치는 이탈리아로 귀국하면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스승의 노트와 모든 드로잉, 사용했던 용품들, 그리고 스승이 작품을 제작할 때 사용했던 도구들을 갖고 왔다.
1523년 롬바르디로 돌아온 그는 바프리오 저택의 방 하나를 스승의 노트를 전시하는 용도로 사용하면서 방문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페라라 공작의 외교사절 알퐁소 베네데토는 공작에게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해부학에 관한 책들과 그 밖의 많은 훌륭한 것들을 멜치가 소유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바사리, 로마조, 루이니 등은 멜치가 보관한 것들을 통해 레오나르도의 활약을 알 수 있었다.
멜치는 스승의 노트를 분류했고 두 명의 필기사를 고용해 일부를 복사하게 하여 출간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미완성 기록은 어찌 된 일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밀라노 예술가가 소유하게 되었고 우르비노 공작의 손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바티칸의 소유가 되었다.

멜치는 1570년에 타계했다.
그의 아들 오라지오는 아버지와 달리 레오나르도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아버지가 전시해놓은 노트를 바프리오의 다락방 커다란 상자 안에 넣었다.
오라지오가의 가정교사 렐리오 가바르디는 열세 권의 분량에 달하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입수하여 토스카니 공작에게 바쳤다.
성 바나바 수도원의 밀라노인 수도승은 노트를 회수하여 멜치 가문이 이를 보관하기를 희망했지만 멜치가는 노트가 너무 많아 필요 없으므로 그 정도는 공작이 가져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멜치 가문은 레오나르도 노트의 중요성을 몰랐으며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결국 19세기 말까지 이 노트들은 사고 파는 거래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러 나라 여러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일부는 사라진 채 현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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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급진개화파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1884년 봄부터 무장정변을 준비하고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축하연 때 자체 무장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그들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입헌군주제적 정치구조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변은 3일 만에 종료되었다.
청나라가 예상외로 신속히 개입하여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와의 정면충돌은 아직 시기상조라 여긴 일본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주요 원인은 그들을 지지할 만한 부르주아 사회계층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일본의 지원만 믿고 성급하게 정변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문제는 전혀 민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일본 군대와 일본 차관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성공할 수도 없었고 또한 성공해서도 안 될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민중을 기반으로 하기에는 정치적·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재필이 지적한 대로 ‘대중의 무지”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정변의 책임자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갑신정변의 의의를 찾는다면 한국 역사상 최초의 부르주아 개혁운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갑신정변으로 급진개화파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망명했지만 정부의 근대화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정부는 전환국典珤局, 기기창機器廠, 직조국織造局, 광무국鑛務局 등의 기관을 설립하여 근대적 산업기술을 도입했다.
또한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여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여 양반자제들에게 근대적 문물을 교육시켰다.
이런 근대화정책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대체로 온건개화파와 신진개화관료들이었다.
조석진과 안중식의 만남은 고종 18년인 1881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할 때였다.
정부는 김윤식의 인솔하에 청나라의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 젊은 학도 38명을 파견하여 군기제조 등 신문물을 익혀 오게 했다.
이 때 화도畵圖라는 종목으로 일종의 제도법도 포함되었으며 이 분야의 학도로 조석진과 안중식이 선발되었다.
영선사 김윤식이 저서 『운양집 雲養集』에서 밝힌 대로 두 사람은 천진의 화도창에 배속되어 열심히 배웠다.
김윤식은 안중식에 관해 “사람 됨됨이가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중국말도 점차적으로 능통하여 갔다”고 적었다.
이 때 조석진은 28세 안중식은 20세였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 서양의 과학과 문화는 물론 서양화도 볼 수 있었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자 귀국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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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환상과 미적 지각

르네상스 때 와서 미술에 대한 인식이 한층 고양되었는데, 이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네오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피치노에 의해서였다.
그가 행한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주석과 플로티노스의 번역으로 해서 고대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연관이 회복되었으며 이는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성과있는 일이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피치노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의 저작 번역을 마친 후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번역했다.

피치노는 상상력을 감각에 의한 표현을 조화시키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환상Phantasie을 미적 지각의 문제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으로 간주했다.
사람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들의 순수한 이성적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므로 이런 내적 집중이 예술적 창조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때 영혼이 미를 체험하게 되며 이는 미가 낮은 수준의 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지성적인 능력에 의해 포착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된다.
피치노에 의해 미술은 매우 고상한 예술로 격상되었다.

피렌체에서 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과 피사에서 의학과 철학을 수학한 피치노는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389-1464)의 후원 하에 설립된 플라톤 아카데미Platon-Akademie의 학장이 되었다.
이 아카데미는 플라톤에게 바쳐진 학문의 전당으로 고대 플라톤주의와 중세 카톨릭 신앙을 철학의 범주에서 새롭게 종합하여 당대의 철학적 사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한 피치노는 플라톤의 학설과 카톨릭의 신학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354-430)의 저서들을 읽는 가운데 플라톤의 철학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가 영향력있는 플라톤의 『향연』의 주석을 쓴 것은 1469년이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신학, 영혼들의 불멸성에 관하여 Theologi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rum』의 집필을 1469년에 마치고 그후 좀더 보완하여 1484년에 처음 출간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 피타고라스의 거의 종교적인 신념인 영혼의 불멸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저서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플라톤 철학과 카톨릭 신학의 일치에 촛점이 맞추어졌다.
영혼의 불멸에 대한 그의 논증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및 그 밖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한데 섞인 것이었다.
그는 플로티노스에 관한 번역과 주석을 1484년에 쓰기 시작하여 1492년에 발간했다.
피치노는 영혼이야말로 신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진정한 매개체로서 상위의 존재들과 하위의 존재들 사이 중간에 있고 상위와 하위의 일부 속성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언급한 대로 에로스 혹은 사랑을 모든 사물을 한 데 묶는 행위적인 힘으로 받아들인 그는 인간의 영혼이 그것의 사고와 사랑을 상위의 사물들로부터 하위의 사물들에 이르기까지 만물에 확장한다고 주장했는데, 영혼은 정녕 만물의 중심이었다.

자연의 모든 경이로운 사건들 가운데 영혼이 가장 위대한 점은 만물을 혼용하고, 만물의 중심이며, 만물의 힘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적 체험을 중시한 그의 사상은 16세기에 매우 영향력이 컸다.
그의 사상은 네오플라톤주의뿐 아니라 중세의 신비사상과도 더러 관련이 있다.
사유를 통해 영혼이 더욱 심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사유의 삶이 영혼으로 하여금 항상 더 고상한 수준의 진리와 존재로 상승하게 하며, 종국에는 일시적으로 신의 비전과 지식 안에서 절정에 달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상승이란 신비주의에서 절대존재와 일체를 이루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플로티노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런 최상의 체험은 현세에서 가능하며 최소한 소수 특별한 자들에게 일어난다고 했는데, 자신도 그런 체험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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