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는 1519년 5월 2일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시신은 앙부아즈의 성 플로렌탱 교회에 안장되었다.
매장증명서에는 같은 해 8월 12일에 다시금 매장식이 거행된 것으로 적혀 있다.
1802년 황제 나폴레옹은 원로원의 의원 한 명을 선임하여 앙부아즈의 기념물들에 대한 복구를 명령했는데 당대의 약탈과 프랑스 혁명시기의 만행으로 항폐해졌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은 성 플로렌탱 교회는 보존할 가치가 없어 보인다고 보고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놀라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묘비들이 나동그라져 있고 무덤은 파헤쳐진 상태였다.
폐허가 된 교회터에서 아이들이 무덤 밖으로 파헤쳐져 나온 뼈를 놀이에 사용할 정도였다.
정원지기가 뼈들을 추스러 모아 정원 모퉁이에 묻었다.
모든 무덤이 파헤쳐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도 레오나르도의 무덤이 어느 것인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이 갖고 놀았던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1863년 시인 아르세느 우사에는 성 플로렌탱 교회가 세워졌던 곳을 발굴해 하나의 완전한 골격을 발견했다.
흥미롭게도 팔이 굽었고 한 손 위에 해골이 얹혀진 상태였다.
시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묘석 파편들이 있었는데, 불완전한 글이지만 '레오나르도스 빈치우스 EO DUS VINS(Leonardus Vincius)'라고 짐작할 수 있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시인은 해골이 보통 것들보다 컸다고 적으면서 지성인의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것이란 심증을 가졌다.
이 뼈는 성 내 성 위베르 예배당에 안치되었고 사람들은 이 뼈가 레오나르도의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완전한 글이 적힌 묘석의 파편은 현존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후 가장 친근한 제자 멜치는 곧바로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고 1519년 8월 20일에도 레오나르도가 머물던 앙부아즈에 남아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가져온 그림들을 그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것 같다.
멜치가 밀라노로 온 건 1520년이거나 그 이듬해였다.
레오나르도의 유산 수령인인 멜치는 이탈리아로 귀국하면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스승의 노트와 모든 드로잉, 사용했던 용품들, 그리고 스승이 작품을 제작할 때 사용했던 도구들을 갖고 왔다.
1523년 롬바르디로 돌아온 그는 바프리오 저택의 방 하나를 스승의 노트를 전시하는 용도로 사용하면서 방문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페라라 공작의 외교사절 알퐁소 베네데토는 공작에게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해부학에 관한 책들과 그 밖의 많은 훌륭한 것들을 멜치가 소유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바사리, 로마조, 루이니 등은 멜치가 보관한 것들을 통해 레오나르도의 활약을 알 수 있었다.
멜치는 스승의 노트를 분류했고 두 명의 필기사를 고용해 일부를 복사하게 하여 출간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미완성 기록은 어찌 된 일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밀라노 예술가가 소유하게 되었고 우르비노 공작의 손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바티칸의 소유가 되었다.
멜치는 1570년에 타계했다.
그의 아들 오라지오는 아버지와 달리 레오나르도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아버지가 전시해놓은 노트를 바프리오의 다락방 커다란 상자 안에 넣었다.
오라지오가의 가정교사 렐리오 가바르디는 열세 권의 분량에 달하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입수하여 토스카니 공작에게 바쳤다.
성 바나바 수도원의 밀라노인 수도승은 노트를 회수하여 멜치 가문이 이를 보관하기를 희망했지만 멜치가는 노트가 너무 많아 필요 없으므로 그 정도는 공작이 가져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멜치 가문은 레오나르도 노트의 중요성을 몰랐으며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결국 19세기 말까지 이 노트들은 사고 파는 거래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러 나라 여러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일부는 사라진 채 현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