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급진개화파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1884년 봄부터 무장정변을 준비하고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축하연 때 자체 무장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그들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입헌군주제적 정치구조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변은 3일 만에 종료되었다.
청나라가 예상외로 신속히 개입하여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와의 정면충돌은 아직 시기상조라 여긴 일본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주요 원인은 그들을 지지할 만한 부르주아 사회계층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일본의 지원만 믿고 성급하게 정변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문제는 전혀 민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일본 군대와 일본 차관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성공할 수도 없었고 또한 성공해서도 안 될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민중을 기반으로 하기에는 정치적·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재필이 지적한 대로 ‘대중의 무지”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정변의 책임자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갑신정변의 의의를 찾는다면 한국 역사상 최초의 부르주아 개혁운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갑신정변으로 급진개화파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망명했지만 정부의 근대화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정부는 전환국典珤局, 기기창機器廠, 직조국織造局, 광무국鑛務局 등의 기관을 설립하여 근대적 산업기술을 도입했다.
또한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여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여 양반자제들에게 근대적 문물을 교육시켰다.
이런 근대화정책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대체로 온건개화파와 신진개화관료들이었다.
조석진과 안중식의 만남은 고종 18년인 1881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할 때였다.
정부는 김윤식의 인솔하에 청나라의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 젊은 학도 38명을 파견하여 군기제조 등 신문물을 익혀 오게 했다.
이 때 화도畵圖라는 종목으로 일종의 제도법도 포함되었으며 이 분야의 학도로 조석진과 안중식이 선발되었다.
영선사 김윤식이 저서 『운양집 雲養集』에서 밝힌 대로 두 사람은 천진의 화도창에 배속되어 열심히 배웠다.
김윤식은 안중식에 관해 “사람 됨됨이가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중국말도 점차적으로 능통하여 갔다”고 적었다.
이 때 조석진은 28세 안중식은 20세였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 서양의 과학과 문화는 물론 서양화도 볼 수 있었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자 귀국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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