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개혁은 중단되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후퇴했던 일본은 1894년 농민전쟁이 발발할 때 청나라와 체결한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1894년 농민전쟁의 실패로 돌아갔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 혹은 개화운동이었다.
농민항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대중은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사회를 변혁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대규모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 농민층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제거하여 농민경제를 자립·안정시키고 봉건지배세력 및 외국 자본주의세력의 침탈로부터 소상인과 다수 빈농층을 보호하려고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농민전쟁은 좌절되었다.
농민전쟁에서 제기된 농민군의 요구는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되어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지주제를 유지·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농민군의 지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농민전쟁 이후에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농민군의 반봉건·반침략 지향은 다시 대한제국기의 민중운동, 1905년 이후의 의병전쟁으로 계승되었다.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면서 미리 계획한 대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 일파를 몰아낸 데 이어 청나라와의 전쟁을 도발했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게 되자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우선 이용가치가 없어진 대원군계열을 제거하고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해주는 20개조 개혁안을 강요했다.
이어 갑신정변 때 망명한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과 연립내각을 구성하게 하면서 군국기무처도 해체시켰다.
정부 각 부서에는 일본인을 고문관으로 들여보내 개혁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게 했다.
나아가 고종으로 하여금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게 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왕실의 정치 간여를 철저히 배제했다.
왕실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일본은 1895년 10월 명성왕후를 살해했다.
그러나 김홍집내각은 이 사건이 일본인과는 무관하다고 일본을 옹호했다.
이에 개화파 내각에 대한 규탄이 빗발쳤고 전국 각지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으며 고종은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함으로써 개화파정권은 무너졌다.
이로써 개혁은 중단되고 개화파관료들은 대부분 살해·유배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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