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은 민족이 지닌 감성을 드러내는 것이 한국화라고 믿었다


김용준은 조선의 색채가 사용되고 조선의 풍물이 묘사되었다고 해서 한국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공기를 실은(載), 조선의 성격을 갖춘, 누가 보던 저건 조선인의 그림이군 할 만큼 조선 사람의 향토미가 나는 회화”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의 마음을 논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마음을 애조哀調에서 찾은 데 반신반의했다.
그는 다음과 계속해서 논했다.

“고담枯淡한 맛!
그렇다!
조선의 예술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고담한 맛이 숨어 있다.
… 호방豪放한 기개와 웅장한 화면이 없는 대신에 가장 반도적인 신비적이라 할 만큼 청아한 맛이 진실로 속이지 못할 조선의 마음이 아닌가 한다.
뜰 앞에 일수화一樹花를 조용히 심은 듯한 한적한 작품들이 우리의 귀중한 예술일 것이다.
이 한아閑雅한 맛은 가장 정신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의식적으로 표현해야 되는 것이 아니요, 조선을 깊이 맛볼 줄 아는 예술가들의 손으로 좀 더 진보되는 날 자연생장적自然生長的으로 작품을 통하여 비추어질 것으로 믿는다.”

김용준은 민족이 지닌 감성을 드러내는 것이 한국화라고 믿었다.
그는 월북한 후에도 이런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준의 민족적 감성론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를 가장 강렬하게 비난한 사람이 평론가 김복진이었다.
김복진은 1937년 12월호 『조광朝光』에서 ‘정축丁丑(1937년) 조선미술대관’이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조선적’ ‘향토적’ ‘반도적’이라는 수수께끼를 가지고 미술의 본질을 규정하는 모험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이것이 예로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진한 수많은 공예품에서 현저히 보는 것이니 이것은 지나가는 외방인사外方人士의 촉각에 부딪치는 ‘신기’ ‘괴기’에 그칠 따름이고 결코 ‘조선적’이나 ‘반도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본래 향토적 의미는 미술 소재의 지방적 상위相違와 종족의 풍속적 상이相異와 각개 사회의 철학의 상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의연 미술의 본질은 그 구성 요건의 별립別立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 미술전람회의 수당數當한 공예품과 또는 조선적 미각을 가졌다는 우수한 회화는 통털어 외방인사의 ‘향토산물적’ 내지 ‘수출품적’ 가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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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의 정체성

이구열은 『한국현대미술전집2』 ‘도입기의 양화’에서 녹향회의 선언문을 기술했다.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족미술은 명랑하고 수명秀明하고 오색五色이 찬연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한다.
그러기 위하여 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 배운 일본적 암흑暗黑의 색채를 파렛트로부터 구축한다.”

녹향회의 취지는 당시 불분명했는데 1931년 제2회전에 대한 인상을 기술한 유진우의 글에서 이런 점이 발견된다.

“녹향회의 주의 주장에 대하여는 재작년 심영섭 씨가 자기 일신의 미술론을 전개하는 한편 녹향회의 그것에 관하여 신문 잡지를 통해 논하였던 바 있다고 기억한다.
심씨의 ‘아세아주의 미술론’과 사당집 채색칠 같은 그의 그림은 세인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프로레타리아 미술운동에 대립, 항쟁하랴 하였던 것이다.
… 녹향회는 프로 미술운동에 직접 나서지 아니하였고 또 아직 같아서는 나설 기맥도 보이지 아니하는 이상 프로 미술단체가 아님은 자명하다.
… 녹향회를 흔히 소부르조아 미술단체라 한다.”

“사당집 채색칠 같은” 심영섭의 그림이 당시 사람들에게 반감의 대상이 되었다는 유진우의 지적은 “찬연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부당하게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
한국화에 대한 요구는 동미회의 설립 취지에서도 드러나는데, 김용준은 1930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동미전을 개최하면서’란 제목의 글에서 “우리의 진정한 향토미술을 찾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요구는 이념을 배경으로 또는 탈이념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일본인들의 신일본주의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물밀 듯이 들이닥치는 서양 문화로부터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데서 스스로 무장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화의 정체성은 신일본주의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서양을 모방하는 자들을 비난하며 각성을 요구하는 데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전망되었다.
홍득순은 제2회 동미전을 앞두고 초현실주의, 신상징주의 등 다양한 유파를 현실도피적 경향으로 보고 “썩은 곳에서 박테리아가 나타나듯” 병든 서구 사회에 뒤를 이어 출현한 것이라면서 1931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양춘陽春에 꾸밀 제2회 동미전을 앞두고’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우리는 현실을 초월한 어떠한 유파에 속하여 되지 않은 모방을 하려는 소위 첨단적 화아畵兒를 배격하는 바이다.
필자는 단언하여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다운 예술을 오리지네이트하며, 우리다운 정신적 기온氣溫을 심볼하도록 노력하고 싶다.
대가의 뒤를 밟는 것도 좋으며, 원시로 돌아가는 것도 좋다.
… 그러나 그들의 개성에는 각기의 민족적 정신의 기온이 흘러 있는 것을 우리 또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걸쳐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생겼다.
문학에서는 농만소설 혹은 농촌소설이 등장했고 미술에서는 향토색 혹은 민족적 특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겼다.
미술에서 향토색에 대한 관심은 처음 선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일본인들이 ‘조선적·반도적’ 특징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1930년대에 일어난 한국화에 대한 정체성의 요구가 향토색에 대한 논란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한국화와 관련해서 김용준의 향토색론과 홍득순의 정신적 기온 혹은 민족성론이 두드러졌다.
홍득순의 민족성론은 자연히 전통 계승론으로 이어졌다.
김용준은 서양의 양식을 통해 향토미술을 창조해내는 데서 한국화의 정체성을 갖출 수 있다고 보고 1936년 5월 3일~5일 세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에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상·중·하)’란 제목으로 향토색론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일반 예술에서, 특히 회화에 있어서 지나간 수년을 두고 향토색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의문을 막연하나마 품고 있는 분이 화가 이외에도 많이 있었다.
향토색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정의 부치다시피 한 분도 몇 사람 있었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유야무야한 가운데서 구체적 결론을 짓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 중에서 이론으로 나타난 것은 별로 문제 삼아 볼 만한 것이 없고 실제상 작품으로 향토색을 표현하려고 애를 써본 것을 두셋 들어보면, 3, 4년 전에 고 김종태 군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인상>과 재작년엔가 김중현 씨가 서화협회전에 출품한 <나물 캐는 처녀>라 제한 두 개의 작품이 가장 현저하게 조선 고유의 맛을 내여보려고 한 의도가 보이는 작품이었다.
김종태 씨의 작품은 … 분홍 저고리에 연두빛 치마를 입은 부인네가 등의자에 걸터앉고 그 앞에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개나리꽃이라든가 복숭아꽃이라든가 한 꽃을 화병에 꽂아 놓았고 배경은 흑黑에 가까운 색을 발라서 이 각가지 원색이 더욱 날카롭게 빛나도록 강조한 것이다.

이 작가가 고심한 내용을 분석해 보면 ‘로칼 칼라’를 애썼다고 단언내릴 수 있다.
… 그리하여 색채상으로 조선적인 리듬을 찾아내는 것이 곧 향토색이 최선한 표현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김종현 씨의 <나물 캐는 소녀>란 제의 작품은 화제부터 조선의 공기를 느끼게 하는데, 화면은 그야말로 아리랑고개를 연상케 할 만한 고개 너머 좁다란 길옆에서 처녀가 나물바구니를 들고 있는 장면인데 색채는 약간 우울한 편의 그림이었다.
이런 취재(소재)로 그린 그림이 비단 김씨에 한한 바는 아니로되 씨의 그림과 화제가 주는 여러 가지 인상이 직감적으로 … 관중에서 무엇을 소訴하려는 것까지도 충분히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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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 관해서 알려진 바는 
 

소크라테스에 관해서 알려진 바는 적으나 그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비교해서 책을 쓴 사람도 있는데 그만큼 소크라테스는 서양에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서양세계에 유명하게 만든 것처럼 플라톤이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당시 아테네는 소피스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프로타고라스는 유명하다.
소피스트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돈을 받고 가르쳤다면 그는 소피스트로 알려지고 철학자란 명예로운 명칭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는 논쟁의 명수로 많은 논쟁이 전해오며 결국 논쟁으로 인해 기원전 399년에 사형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 약 70세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유명했는데 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가 작품 <구름 The Clouds>에서 철학자는 세상사에 어두운 인간이라고 조롱했으므로 더욱 유명해졌다.
철학에 대한 작가의 이런 공격은 결국 플라톤으로 하여금 작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철학자의 입장에서 본 작가는 사실을 왜곡시키는 사회의 위험인물이라는 논리가 제기되었다.
예술은 모방의 모방이라는 논리가 플라톤으로부터 비롯했는데 이면에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염두에 둔 공격적인 면도 있었다.

우리는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관해 알게 되는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너무 많이 포함시켰으므로 그의 저서를 읽으면서 어디서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생각인지 분명하게 선을 긋기가 어렵다.
플라톤은 철학자이면서 글쓰기 솜씨가 빼어나 작가의 기질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문장의 매우 수려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활약할 때 어린이였으므로 그가 직접 소크라테스로부터 들은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지만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기록한 저서를 보면 마치 옆에서 직접 듣고 쓴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상상력과 문장력이 여느 소설가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역사가historian로서는 적당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의 저서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소설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매우 흥미로운 성격의 인물이라서 플라톤이 자신의 취향대로 소크라테스의 성격을 만들어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 관해 말할 때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이라고 해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된다.
또는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보면'이라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플라톤의 저서들 중 소크라테스에 관한 가장 역사적 기술은 <변명 Apology>인데 소크라테스가 판사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는 재판소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 재판이 있은 지 여러 해 후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지 여러 해 후에 플라톤이 기억을 더듬어서 쓴 것으로 이 또한 얼마만큼 사실에 입각해서 쓴 것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역사란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되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보면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역사를 기록한 사람의 의도를 함께 이해하면서 역사를 바라볼 때 역사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현인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믿고 찾았다.
결국 그는 현인을 찾지 못했다.
그 자신이 바로 현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현인이었으므로 자신감을 갖고 젊은이들을 계몽시키려고 했다.
젊은이들이 자각하게 되고 말이 많아지자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들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따지려고 들자 그 원인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서 비롯함을 알게 되었다.

아테네의 유일한 현인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워 사형을 주장한 사람은 아니터스Anytus이다.
민주주의 신봉자 정치가로 알려졌다.
바극시인 멜레터스Meletus가 아니터스에 관해 기록한 것이 있어 그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젊고 유명인은 아니며 여위어보이는 머리를 했고 빈약한 수염에 메부리코를 했다."

이 자가 감히 아테네의 현인을 기소한 것이다.
그는 기소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악을 행하는 자evil-doer로서 호기심이 많으며 땅속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찾아나섰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악한 것들을 생각해냈고 그것들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포함한 제자들이 마련해준 돈 30minae로 벌금을 내려고 했지만 법원은 그 돈이 너무 적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수결로 사형을 확정했다.
이는 그가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겉으로 나타난 사형에 대한 기소는 그가 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신들을 소개했고 이런 신들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성불경죄가 가장 간단하게 그를 사형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적용한 것이고 실제로는 그가 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제비뽑기식이라서 얼간이들도 정치에 참여하게 되므로 이를 소크라테스가 반대한 것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무식한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가 아니다.
다수가 원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철학자가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정치가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은 자가 국민의 추대를 받아 정치를 하는 체제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정치를 주장한 것이다.
자연히 귀족정치를 주장한 셈이고 민주주의 신봉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반체제인사인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반국가적 정치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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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는 광주에 정착하여

오지호는 광주에 정착하여 그곳 풍경을 그리던 중 1960년 4·19학생의거가 자유당 독재정권을 붕괴시켰고, 민주당이 들어섰지만 이듬해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정치·사회 모든 분야에 구조적인 재편성이 뒤따랐다.
오지호는 4·19때 한 사건의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일 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정신적·신체적 고통으로 쇠약해졌고 그의 화면은 전과는 달리 어둡고 칙칙한 색조가 나타났으며 조형적 긴장감도 완화되었다.
1964년에 그린 <열대어>는 유영하는 붉은색의 열대어 한 마리를 보고 그린 것이지만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완전 추상작품을 보는 듯하다.
열대어 주변에는 짙은 청색의 원이 둘러져 있고 배경이 거친 붓질에 의한 적갈색면으로 구성되었다.
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고 형태와 색질의 대비로 마티에르의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추상의 의지를 현저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조형적·기법적 실험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특이하다.

그는 1968년에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를 출간했고,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혹은 초대작가로 참여하면서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82년 12월 25일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에 적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화가다.
그런데 이 땅에 생을 받았다는 이유로, 또 내가 내 자신이 믿는 바를 굽힐 줄 모르는 내 생래生來의 성격 때문에, 나는 내 예술과는 생판 동떨어진 다른 일들로 많은 인과 욕을 겪었다.
사변 전후의 일들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다.
예술과는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인연이 끊긴 몇 해 동안의 그 막된 생활의 뒤, 1953년 초 겨울에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초옥에 들게 되었다.
- 여식 하나를 데리고 이 집이 자리 잡고 있는 당시의 지산동 - 비어 잇는 논바닥, 파랗게 싹들이 돋은 보리밭, 복숭아나무 과수원들, 그 주위를 둘러 있는 산봉우리들!
그때, 봄볕처럼 따뜻한 이 산골짜기는 몸과 마음이 한 가지 상처투성이가 된 나를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이 안아 주었던 것이다.
진정!
오래간만에 얻은 마음의 평온이었고, 생의 희열이었다.
윗글은 그때, 내 자연에 대한 뼛속에서 스며 나오는 그 고마움의 조그만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일 년만 있다가 온다던 개성에 십 년을 살았고, 사변 후 오늘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있고, 또 내 태생의 땅인 동복에, 40년 전에 내가 지은 집을 지금도 그대로 두고 있는 이유의 태반은 내가 사는 그 집과 그 집 주위의 자연 - 그 산과 들과 내와 풀과 나무들에 든 그 정 때문이다.
196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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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훌륭했던 소피스트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에는 회의주의가 만연했다.
이는 이성주의가 두드러지면서 생긴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아테네에서는 소피스트sophist들의 활약이 현저했는데 이들 중 가장 훌륭했던 소피스트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였다.
소피스트를 오늘날로 말하면 교수professor에 해당한다.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들은 지식을 팔아서 생활했다.
당시에는 학교가 없었으므로 소피스트들은 부유한 자제들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아테네와 주변의 도시국가들에는 민주주의가 발달했으므로 귀족들이 부를 축적했고 그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돈을 쓰며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당시 민주주의는 노예제도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를 부려 다욱 부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부자들은 부도덕했으며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는 여자와 노예의 인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오늘날 어느 나라의 민주주의보다도 더욱 민주화되어 있었다.
더욱 민주화가 되어 있었단 말은 당시에는 제비뽑기가 대유행이었다.

판사들과 대부분의 관리들은 제비뽑기로 선출되었으며 짧은 기간동안만 근무했고 그들은 오늘날처럼 전문인력이 아니라 보통시민들로서 영국과 미국의 배심원들jurymen 같았다.
재판에는 많은 수의 판사들이 참여했고 피고와 원고, 또는 기소자와 피기소자들은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고 재판정에서 스스로 변호했다.
자신을 잘 변호할 줄 아느냐에 따라서 판결이 정해진다.
변명문은 전문가에게 위탁해서 작성하는데 이런 일을 소피스트들이 했다.
오늘날 변호사에 해당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첫 번재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쳤으며
사건을 의뢰받을 경우 패소하면 돈을 안 받았고 승소하면 돈을 청구했다.

프로타고라스는 기원전 500년경 데모크리터스의 고향인 압데라Abdera에서 태어났고 아테네를 두 번 방문했는데 그의 두 번째 방문은 기원전 432년 이전에 있었다.
그는 불경죄로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실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당시로서는 불경스러운 말을 했는데
저서 <신들에 관해 On the Gods>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들에 관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의 유명한 말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of things that are that they are, and of things that are not that they are not.

이 말은 인간 각자 만물의 척도이며
각자 견해를 달리 할 경우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된다.
홍길동도 만물의 척도이지만 임꺽정도 만물의 척도이기 때문에 만약 홍길동과 임꺽정이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싸울 경우 두 사람 모두 만물의 척도라서 어느 누구도 그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라서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본질적으로 회의론주의이다.
옳고 그른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최대한으로 프로타고라스의 회의주의를 실용적으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홍길동의 의견과 임꺽정의 의견을 비교할 때 어느 누구의 의견이 더 진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비해서 낫다라고는 말할 수 있다.
낫다란 말은 누구의 의견이 더 실용적인지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여러 도시를 순례하면서 강의를 하고 돈을 받았는데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것을 옳지 않게 보았다.
오늘날 교수가 돈을 받지 않고 가르친다고 부덕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지만 당시 아테네의 정서로 볼 때 지식을 파는 행위는 부덕한 일이었다.
소피스트들은 논쟁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오늘날의 변호사처럼 어떤 반박에도 방어할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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