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의 정체성

이구열은 『한국현대미술전집2』 ‘도입기의 양화’에서 녹향회의 선언문을 기술했다.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족미술은 명랑하고 수명秀明하고 오색五色이 찬연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한다.
그러기 위하여 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 배운 일본적 암흑暗黑의 색채를 파렛트로부터 구축한다.”

녹향회의 취지는 당시 불분명했는데 1931년 제2회전에 대한 인상을 기술한 유진우의 글에서 이런 점이 발견된다.

“녹향회의 주의 주장에 대하여는 재작년 심영섭 씨가 자기 일신의 미술론을 전개하는 한편 녹향회의 그것에 관하여 신문 잡지를 통해 논하였던 바 있다고 기억한다.
심씨의 ‘아세아주의 미술론’과 사당집 채색칠 같은 그의 그림은 세인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프로레타리아 미술운동에 대립, 항쟁하랴 하였던 것이다.
… 녹향회는 프로 미술운동에 직접 나서지 아니하였고 또 아직 같아서는 나설 기맥도 보이지 아니하는 이상 프로 미술단체가 아님은 자명하다.
… 녹향회를 흔히 소부르조아 미술단체라 한다.”

“사당집 채색칠 같은” 심영섭의 그림이 당시 사람들에게 반감의 대상이 되었다는 유진우의 지적은 “찬연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부당하게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
한국화에 대한 요구는 동미회의 설립 취지에서도 드러나는데, 김용준은 1930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동미전을 개최하면서’란 제목의 글에서 “우리의 진정한 향토미술을 찾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요구는 이념을 배경으로 또는 탈이념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일본인들의 신일본주의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물밀 듯이 들이닥치는 서양 문화로부터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데서 스스로 무장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화의 정체성은 신일본주의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서양을 모방하는 자들을 비난하며 각성을 요구하는 데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전망되었다.
홍득순은 제2회 동미전을 앞두고 초현실주의, 신상징주의 등 다양한 유파를 현실도피적 경향으로 보고 “썩은 곳에서 박테리아가 나타나듯” 병든 서구 사회에 뒤를 이어 출현한 것이라면서 1931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양춘陽春에 꾸밀 제2회 동미전을 앞두고’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우리는 현실을 초월한 어떠한 유파에 속하여 되지 않은 모방을 하려는 소위 첨단적 화아畵兒를 배격하는 바이다.
필자는 단언하여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다운 예술을 오리지네이트하며, 우리다운 정신적 기온氣溫을 심볼하도록 노력하고 싶다.
대가의 뒤를 밟는 것도 좋으며, 원시로 돌아가는 것도 좋다.
… 그러나 그들의 개성에는 각기의 민족적 정신의 기온이 흘러 있는 것을 우리 또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걸쳐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생겼다.
문학에서는 농만소설 혹은 농촌소설이 등장했고 미술에서는 향토색 혹은 민족적 특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겼다.
미술에서 향토색에 대한 관심은 처음 선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일본인들이 ‘조선적·반도적’ 특징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1930년대에 일어난 한국화에 대한 정체성의 요구가 향토색에 대한 논란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한국화와 관련해서 김용준의 향토색론과 홍득순의 정신적 기온 혹은 민족성론이 두드러졌다.
홍득순의 민족성론은 자연히 전통 계승론으로 이어졌다.
김용준은 서양의 양식을 통해 향토미술을 창조해내는 데서 한국화의 정체성을 갖출 수 있다고 보고 1936년 5월 3일~5일 세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에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상·중·하)’란 제목으로 향토색론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일반 예술에서, 특히 회화에 있어서 지나간 수년을 두고 향토색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의문을 막연하나마 품고 있는 분이 화가 이외에도 많이 있었다.
향토색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정의 부치다시피 한 분도 몇 사람 있었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유야무야한 가운데서 구체적 결론을 짓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 중에서 이론으로 나타난 것은 별로 문제 삼아 볼 만한 것이 없고 실제상 작품으로 향토색을 표현하려고 애를 써본 것을 두셋 들어보면, 3, 4년 전에 고 김종태 군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인상>과 재작년엔가 김중현 씨가 서화협회전에 출품한 <나물 캐는 처녀>라 제한 두 개의 작품이 가장 현저하게 조선 고유의 맛을 내여보려고 한 의도가 보이는 작품이었다.
김종태 씨의 작품은 … 분홍 저고리에 연두빛 치마를 입은 부인네가 등의자에 걸터앉고 그 앞에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개나리꽃이라든가 복숭아꽃이라든가 한 꽃을 화병에 꽂아 놓았고 배경은 흑黑에 가까운 색을 발라서 이 각가지 원색이 더욱 날카롭게 빛나도록 강조한 것이다.

이 작가가 고심한 내용을 분석해 보면 ‘로칼 칼라’를 애썼다고 단언내릴 수 있다.
… 그리하여 색채상으로 조선적인 리듬을 찾아내는 것이 곧 향토색이 최선한 표현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김종현 씨의 <나물 캐는 소녀>란 제의 작품은 화제부터 조선의 공기를 느끼게 하는데, 화면은 그야말로 아리랑고개를 연상케 할 만한 고개 너머 좁다란 길옆에서 처녀가 나물바구니를 들고 있는 장면인데 색채는 약간 우울한 편의 그림이었다.
이런 취재(소재)로 그린 그림이 비단 김씨에 한한 바는 아니로되 씨의 그림과 화제가 주는 여러 가지 인상이 직감적으로 … 관중에서 무엇을 소訴하려는 것까지도 충분히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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