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Philip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Philip은 세습된 왕이 아니라 선출된 왕이었다.
그는 용맹한 장군으로 호메루스 시대에 출현했던 사나운 장군으로 알렉산더가 아버지로부터 호전적인 성격을 물려 받았다.
그리스인은 마케도니아 왕들이 그리스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이는 오래 전의 이야기로 당시에는 야민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마케도니아인은 컴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인들의 나라와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59년에 섭정을 시작한 필립은 군인들을 호되게 훈련시켰다.
그가 남쪽과 북동쪽을 참략했으므로 마케도니아 인근의 나라들은 기원전 355년부터 346년까지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실전을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되자 더욱 더 강한 군대로 성장했다.
필립은 테살리Thessaly와 테르모필애Thermopylae 너머에까지 점령한 뒤 그리스 중앙으로 진출했고 아테네와 테반Theban을 기원전 338년에 공략했다.

필립은 자신이 점령한 나라들에 평화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자신과 더불어 페르시아를 공격할 것을 주문했는데 필립이 사망하자 그리스인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는 그리스를 포함한 여러 나라들의 독립을 꿈꾸는 기운을 아예 뿌리채 뽑아버렸다.
그리스의 수도 테베스Thebes 사람들은 기원전 335년에 마케도니아의 노예가 되었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가 출현한 건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여간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20살을 갓넘은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모든 국가들과 페르시아를 포함한 인근 지역을 통채로 삼켰는데 이런 일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다.
그는 용맹하게도 동쪽으로 진군했고 바빌론Babylon과 다마스커스Damascus를 거쳐 이집트로 향하면서 자신이 정복한 곳들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란 도시명을 사용하게 했다.
그는 북동쪽 트로이Troy까지 진군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우수함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직접 배워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점령한 지역들에 그리스 문화를 심었다.
그리스인의 문화라는 Hellenistic이란 말이 생겼으며 그리스어는 이내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알렉산더가 전쟁에서 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건 그가 용맹한 것이 그 주원인이겠지만 페르시아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데도 원인이 있었다.

시노폰Xenophon이 쓴 <아나바시스 Anabasis>에 의하면 페르시아에는 왕과 동생의 싸움이 있었다.
동생은 그리스인과 결탁해 형을 공격했으며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다만 페르시아의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뿐이다.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의 내분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으며 속국이던 이집트는 이 틈을 이용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는 알렉산더에 의해 패망하는 길을 스스로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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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에 소아시아를 토벌하러 나섰다.
아버지 필립으로부터 물려받은 용맹한 군인들은 그의 목적을 잘 수행해냈는데 그때 알렉산더의 나이 겨우 22살이었다.
그는 소아시아를 점령한 후 페르시아군을 이수스Issus에서 전멸시켰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친 후 몇 차례에 걸쳐 부상당했지만 사막으로 진군했으며 소아시아로 돌아와 두 번째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Darius III를 공격해 페르시아가 더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만든 후 자신이 페르시아의 왕임을 선포했다.
이때가 기원전 331년이다.
다리우스는 이듬해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알렉산더는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더스Indus 너머 160km 지점에까지 진격하면서 푼잡Punjab으로 나갔다.
군인들이 더이상 진격하기를 원하지 않자 알렉산더는 돌아왔는데
2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된 인도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으나 갠지스Ganges 계곡에서 기다리는 5천 마리의 코끼리 부대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알렉산더와 그의 군인들은 그만 기가 질렸다.
그는 바빌론으로 돌아왔으며 그곳에서 기원전 323년 여름 열병이 나 죽었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마케도나아를 떠난 지 꼭 10년째 되던 해였다.
그가 갑자기 사망하자 휘하의 10명 장군들은 그가 차지한 땅가르기에 나섰다.
알렉산더 왕국은 장군들에 의해 넷으로 찢어지게 되었다.

서양사람들은 2천 년이 넘도록 알렉산더의 정벌에 관해 신나게 말하면서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알렉산더의 모습은 그림과 조각의 단골메뉴였으며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아주 잘 생긴 청년의 모습이다.
그림에 나타난 그를 보면 신화의 주인공처럼 뿔이 달린 말을 타고 있고
오른손에 칼을 들었는데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그의 야망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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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7명의 현인이 출현하기 전 

 
그리스에서 7명의 현인이 출현하기 전 고대 조각과 건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집트인과 크레테인 사이의 교역이 성행하고 있었고, 크레테 문화가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으므로 이집트 문화는 자연스럽게 크레테를 통해 그리스 본토에까지 알려졌다.
이집트 문명에 관해 언급할 때 18살에 요절한 미세리누스Mycerinus에 관해 언급했는데 그와 그의 아내를 기원전 2599-71년에 석판에 조각한 작품이 기자Giza에서 발굴되었다.
높이 54.5인치의 작품이다.

그리고 왕자 라호텝Rahotep과 그의 아내 노프레트Nofret를 제작한 조각을 보면 기원전 2580년에 석회암에 색을 친한 작품으로 높이 47.25인치인데 이것과 미세리누스 부부의 조각을 보면,당시 이집트인의 사람을 묘사하는 조각술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음으로 그리스에서 기원전 605년에 석회암으로 제작한 높이 24.5인치의 조각 여인의 모습과 기원전 600년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높이 6피드 1.5인치의 서 있는 청년의 누드를 보면 그리스인이 이집트인의 조각술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 있는 조각을 제작할 때 모델의 왼쪽 앞발을 한발짝 내밀게 한 모습과 여인의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놓게 한 방법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쥔 사내의 손은 영낙없는 이집트인 특유의 방법으로 2천 년이 지난 후에도 그리스인은 여전히 이집트인의 방법대로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 조각은 이집트인의 모사로 자신들의 것이 없었다.
기원전 525년 대리석으로 제작한 <크로이소스 Kroisos>를 보더라도 실재 사람보다 큰 6피드 4인치 높이의 이 조각은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으며 두 손을 움켜쥔 모습이 여전히 이집트인의 조각을 닮았으며 단지 팔과 몸통 그리고 두 다리 사이에 공간이 있는 것이 오랜만에 보는 그리스인의 고유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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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의 개혁정신
 

부다Buddha가 갠지스 끝 북쪽에서 태어난 때는 기원전 6세기였다.
그의 본명은 시다르타 고타마Siddhartha Gautama였고 브라만 계급이 아니라 무사 계급의 왕자였다.
그는 안일한 삶에 불만이 많았고 깨달음을 위해 처자를 두고 가출(혹은 출가)했다.
그는 금욕주의 생활을 하면서 7년 동안 스승들을 찾아다녔지만 자신이 원하는 가르침을 얻지 못했다.
그후 그는 더이상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 금욕주의 윤리로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시작했다.
스스로 스승이 된 것이다.

부다는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라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런 그의 가르침은 별로 새로운 것이 못되었는데 우파니샤드Upanishads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70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한 마디로 말하면 정신이 물질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개인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힌두교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의 가르침과 부다 그리고 자이니즘의 창시자 마하비라Mahavira의 가르침이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과거 힌두교는 요가와 도덕적 행위를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면서 브라만은 자신들을 베다를 통해 은근히 내세웠다.
요가Yoga는 여섯 시스템Six-Systems 중 하나로 그 뜻은 방법 또는 기교인데 몸을 조절하는 것이 명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브라만이 가르친 것이다.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을 요기Yogi라 부른다.

부다와 마하비라는 브라만으로 구성된 계급사회를 반대했으며 특히 부다가 더욱 더 반대했다.

부다는 말했다.
"브라만은 태어날 때부터 브라만일 수 없으며
천한 계급은 태어날 때부터 천한 계급이 될 수 없다.
천한 계급의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서 그리 되는 것이며
브라만 또한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그리 되는 것 뿐이다.'

부다는 사회의 개혁을 외친 용감한 사람이었다.

부다의 중용사상
공자와 마찬가지로 부다에게도 중용사상이 있다.
그는 금욕주의와 무제한의 욕망 사이의 중간 또는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삶을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인식했으며,수행을 위한 힌두교 전통의 요가방법을 실질적인 방법론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부다는 네 가지 고상한 진리Four Noble Truths를 발견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바카스 종교와 마찬가지로 부다는 인생이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존재dukkha는 영원한 윤화의 굴레 속에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2. 훗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우리가 윤회의 굴레에 묶여 있는 이유로 부다는 환상적인 자연현상에 대한 우리의 무지avidja와 그러한 환상에 대한 욕망tanha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3.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물론 무지와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런 행위는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인데 구원이란 열반Nirvana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았다.
4.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여덟 가지의 방법Eightfold Path을 부다는 방법론으로 제시했는데 이런 방법은 윤리sila와 명상samadhi의 혼용으로 지혜panna와 최고의 사유경지Enlightenment(혹은 Bodhi라고도 함)에 도달하는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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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즘Jainism
 

전하는 바에 의하면 (꼭 믿을 수는 없지만)
자이니즘Jainism은 선사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자이니즘의 24 지도자들 중 (Jain은 정복자란 뜻이다)
마지막 자인은 마하비라Mahavira였는데 마하비라는 인도 북쪽 파트나Patna에서 기원전 6세기 중반에 태어났다.

자이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마하비라가 기원전 599년에 태어났다고 매우 확실시 말한다.

마하비라 이전의 지도자 혹은 자인 파르스바Parsva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로 기원전 8세기에 살았다고 하며 자이니즘을 개혁한 사람이 마하비라였다고 한다.

자이니즘은 창조자 신을 부인함으로써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Nirvana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유일한 성취로 보았다.
마하비라는 어렸을 적 부모가 원하는 신부와 결혼했고 부모가 타계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으며 형이 집안을 다스리게 되자 가출(출가?)해 자이니즘의 수도승이 되었고 12년 동안 수도한 끝에 득도했다.

마하비라나 부다는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처자를 내팽개치고 달아난 아무 무책임한 자들이다.
처자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내면적인 문제에만 집착한 자들이다.

마하비라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무지하다면서 물질세계에 집착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고 물질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최고의 평화스러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평화의 경제에 이르면 윤회의 굴레에서조차 벗어나는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그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사랑 아힘사Ahimsa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아힘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Agape와 유사한 개념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대비에 해당한다.

아힘사는 힌두교의 유산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말한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영국인 친구 목사로부터 개종을하라는 권고를 거절하면서 기독교의 아가페와 아힘사가 다르지 않음을 꼽았다.
한두교와 기독교의 궁극적 가르침을 같다고 본 것이다.
간디는 마태복은 5-7장을 읽고 아힘사와 아가페가 같음을 알았으며 그렇다면 구태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힌두교 신자로 남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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