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미술이 시작된 때는 3세기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가들 로렌조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와 조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는 콘스탄틴 대제의 등극과 더불어서 고대 세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기독교는 콘스탄틴 대제의 승인 이후 급격히 확산되었으며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이 두드러졌던 세계에 등장한 기독교 미술은 서양 미술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기독교 미술이 시작된 때는 3세기였다.
근동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와 안디옥Antioch에서 이미 기독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3세기 이전의 기독교 미술은 발견되지 않는다.
유대교로부터 파생한 신흥 종교라서 초기 기독교는 이미지 혹은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계명을 지키느라 시각화하는 이미지 미술을 창조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전파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달하는 데 시각적 효과가 매우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신자들 때문에 마찰이 생겼다.

스페인 교회는 300년경 엘비라Elvira 공의회를 통해 교회 내부에 어떤 그림이라도 장식하는 걸 금한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런 이미지 만들기를 우상숭배와 관련시킨 보수주의자들의 반대 외에도 기독교 미술이 늦게 출발한 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는데 묵시주의였다.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묵시주의자들은 세계가 곧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면서 종말을 맞기 전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세계의 종말을 믿은 그들이 오래 보존될 미술품을 창조하는 데 찬성할 리 없었다.

기독교 미술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의 첫 50년 이탈리아와 로마 제국 동쪽에서였다.
로마 제국 내 기독교인들은 3세기에 이방인들의 미술 형식을 사용해서 만남의 집 Meeting-Rooms, Churches과 무덤을 장식했는데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을 주로 영향받았다.
로마 미술은 그리스 미술의 모방이었으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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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십자가를 장식했다
 

초기 기됵교 운동은 탄압으로 인해 지하운동으로 서서히 그러나 결집력을 지니고 퍼져나갔다.
예수 타계 이후 약 3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부자 크리스천의 집에서 간소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렸다.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전도되었는데 당시 그리스어는 국제적 통용어와도 같았다.
기독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주로 성행했으며 그후 이탈리아인에게도 알려졌다.

미술과 관련해서 기됵교를 언급하려는데
기독교 미술이 시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306-337 재위)가 313년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통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고 선포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크리스천의 수가 로마 인구의 20% 미만에 불과했지만 크리스천의 결집력은 매우 강했으므로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세력이 되었고 따라서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서 국민의 단합이 필요했고 국민의 단합을 위해서라면 어떤 종교라도 국교로 인정해야 할 판이었다.
어머니와 누이가 크리스천이었으므로 그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는 데 두 여인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가이샤라Caesarea의 주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콘스탄틴이 말년에 자기에게 한 말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콘스탄틴이 로마의 티베르 강Tiber River 너머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에서 막센티우스Maxentius와 격전을 벌이기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는데 십자가에는 "이 부호를 갖고 정복하라 In this sugn, conquer"고 적혀 있었다.
다음 날 밤 콘스탄틴의 꿈에 그리스도가 그 부호와 함께 나타났는데 부호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X자 위에 P자를 올려놓은 십자가로서 그리스어로 그리스도Christos의 첫 두 글자 chi(X)와 rho(P)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것을 크리스몬Chrismin 혹은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이라고도 한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십자가를 장식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부터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듬해 그와 동료 황제 리시니우스Licinius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제국 내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국교the official state religion로 선포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의 후원 하에 기독교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콘스탄틴은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교리의 문제로 분열을 일으키자 주교들의 종교회를 통해 통일된 교리를 만들어 분열을 막는 등 기독교 발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스스로 국가와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했는데 고대 이집트와 근동의 국가에서는 왕이 종교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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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종교는 고유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3세기 로마제국 통치지역 내에는 각종 종교가 성행했다.
이렇게 종교가 성행한 것은 로마제국이 점차 붕괴하면서 사회적으로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태어난 이후 첫 3백 년 동안 소아시아 발칸을 포함한 근동에는 유대교Judaism, 기독교Christianity, 신교Mithraism(페르시아 빛의 신을 숭배하는 종교), 마니교Manichaeism, 영지주의Gnosticism 외에도 많은 종교가 있어 종교의 백화점과도 같았다.

각 종교는 고유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각각 사용하는 술어들이 달랐지만 거의가 유사한 점이 있었는데
진리를 밝히고,
구원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며,
훌륭한 예언자나 메시야가 있고,
선과 악의 이분법을 주장하며,
사람의 마음을 순결하게 해주는 성스러운 의식 혹은 세례식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을 상대로 개종시켜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었다.
신교와 마니교 그리고 영지주의는 세상을 선과 악이 투쟁하는 곳으로 보았다.
이들 신비주의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을 믿었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Islam가 신흥 종교로 부상했다.
이슬람교 또한 유일신을 주창한 종교로 알라Allah 신을 섬긴다.
무하매드Muhammad에 의하면 어느날 알라 신이 자기에게 나타났고 알라의 계시를 받아적은 것이 코란Koran으로 이슬람교도들이 신봉하는 경전이다.
이슬람교도들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과 예수를 모두 인정한다.
예수도 그들에게는 훌륭한 예언자이다.
그리고 무하매드가 마지막 예언자로 이제 더이상 예언자의 출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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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생명의 춤> 
 

'생의 프리즈'의 주제를 가장 집약적이고 종합적으로 나타낸 것이 1899-1900년에 그린 <생명의 춤 the Dance of Life>이다.
이 그림에는 뭉크의 인생관이 응축되어 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나의 첫 사랑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에 관한 기억을 그린 것이다.
곱슬한 금발의 미소짓는 여인을 다음에 그렸는데 누구라기보다 만개한 꽃과 같은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맞은편 검정색 의상을 한 여인은 춤추는 한쌍을 고통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춤을 출 때 내가 소외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녀도 소외되었다."

이 그림은 뭉크가 즐겨 찾는 아스가드스트란트 나무 아래 풀밭에서 유쾌한 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늘날에도 여름 밤이면 아스가드스트란트 나무 아래서 사람들이 춤을 춘다.
그러나 그는 나무 아래가 아닌 기분 나쁜 음산한 곳에서 춤추는 것으로 변형시켰다.
오른쪽에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춤추는 남자는 흥에 겨운 모습이다.
<달빛>(1895)에서 묘사한 기다란 유리관과 같은 달을 배경에 삽입하여 달빛 아래 사람들이 춤을 추도록 구성했다.

<생명의 춤>에서의 세 여인은 중앙의 뭉크와 관련이 있다.
그의 사랑놀이, 경험, 환멸이 상징적으로 세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여자의 세 시기>와 상통한다.
바다를 배경으로 남자의 등에 팔을 감은 여인의 붉은색 드레스가 남자의 검정색 의상과 더불어 강렬한 색상의 느낌을 주고,
흰색 드레스의 여인은 인생의 가능성과 기대를 상징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얼어붙은 듯 서 있는 검정색 드레스의 여인은 과거 혹은 잃어버린 세계를 피안에 서서 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뭉크의 여성관을 알게 해주는 수수께끼 같은 세 여인을 본다.
왼쪽 정숙한 옷차림을 한 금발의 처녀는 순결과 순수함의 표상이다.
오른쪽의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체념의 운명 속에 갇혀 있는 어머니의 표상이자 고통받고 침묵하는 하녀의 모습이다.
부동의 자세를 취한 두 여인의 가운데서 선정적인 댄스로 남자를 이끄는 붉은 머리의 여인은 흡혈귀 같은 여인의 상징으로 치명적인 유혹과 상대를 집어삼키는 관능성을 지니고 있다.
뒤에는 남녀 몇 쌍이 즐거운 기색도 없이 달빛 아래서 춤을 추고 있다.

이 그림을 포함한 일련의 '생의 프리즈' 작품을 본 평론가 칼 셰프라는 뭉크에게서 "광기에 이끌려 세상의 지옥을 방황하는 숙명"을 보았다면서 그의 그림이 "표현주의 회화를 예고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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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는 개인적 판단을 근거로 서술되었다 
 

미술사가 대학에서 교과과목으로 채택된 건 1840년대 독일에서였다.
그후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미국 대학에서의 미술사 연구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현재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대부분의 미술사 관련 저술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던 예술가들을 선별해서 그들의 일대기와 그들을 중심으로 계보를 이루고 좀더 폭넓게 다음 시대·사람·장소에 끼친 영향이 어떻게 작용했고
또 어떻게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간략하게 말하면
미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주된 동기들과 그 해석이 후세에 미친 영향과 결과를 개인적 판단에 근거해서 서술한 것이다.

미술사가 개인적 판단을 근거로 서술되었음을 지적하기란 쉽다.
영국인·독일인·프랑스인·스페인인·미국인 등이 쓴 미술사 관련 저술들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저마다 내용이 같지 않고 편집 방법 또한 각양각색이다.
예를 들면
영국인이 본 미국의 팝아트와 미국인이 본 팝아트 그리고 미국인이 본 유럽의 신사실주의와 유럽인이 본 신사실주의는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다.
스페인인이 쓴 미술사에서 미국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언급되지 않고 미국 미술사에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던 스페인 예술가들이 언급되는 것은 그 나라 미술사학자가 자국 미술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빚은 결과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동양 미술을 다룬 미술사에서 중국과 일본 미술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한국 미술에는 지면을 아낀 것이라든가
또 한국 미술의 고유성을 무시 혹은 모르는 채 중국 미술의 그늘 아래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미술쯤으로 과소평가하는 내용은 전혀 받아들일 만하지 못하다.
여러 권의 미술사 관련 저술들에서 어느 한 권이 그 외의 것들에 비해서 낫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한 권이면 서양미술을 그리고 동양미술까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는 전혀 단정할 일이 못된다.
그 외의 저술들에서 보완될 만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그룹 연구에 의해 쓰여지지 않고 개인에 의해 편찬되다 보니
자연히 능력의 한계로 영향력을 행사한 예술가들을 선별하는 일과 영향력의 비중을 역사의 저울에 다는 일이 개인의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감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일대기와 계보의 활약이 충분히 언급되지 못하는 데다
중요한 예술가들이 누락되기 다반사이며,
게다가 서양을 중심으로 동양 미술을 언급하다 보니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이 보기에도 공감하지 못할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 결함이다.
이런 결함은
개인이 역사를 편찬하는 한에 있어서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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