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에곤 쉴레의 이중자화상

 

쉴레는 1910년부터 이중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듬해와 1915년에도 그렸다.
이중자화상을 그린 것은 자아에 대한 분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 자신은 이제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어쩌면 어떤 모습이 참자아인지 자신도 헷갈렸을 것이다.
의식과 잠재의식 어느 것이 더욱 분명한 것일까?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는 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보여진다.
그가 1910년에 그린 <거울 앞의 누드 모델을 드로잉하는 자화상>은 매우 흥미 있는 그림으로 모델을 그리는 데 열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거울에 비친 그리기에 열중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이중적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참고
<이중자화상 Double Self-Portrait>, 1915, 과슈, 수채물감, 연필, 32.5-49.4cm
<예언자(이중자화상) the Prophet (Double Self-Portrait)>, 1911, 유화, 110.3-50.3cm
쉴레가 제목을 <예언자>라고 한 데서 그 자신이 회화에서 미래를 예견하는 작가임을 부각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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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의 친구 오젠은 무대에서 기괴한 제스처로 연기했는데 

 
쉴레는 비엔나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는 1910년 여름을 친구 에르빈 도미닉 오젠과 그의 애인 모아(예명이다)와 함께 크루마우에서 보냈는데 오늘날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스키 크룸로브를 말한다.

크루마우는 쉴레 어머니의 고향으로 어머니는 종종 그곳 친척집에 묵다 오곤 했다.
쉴레가 비엔나를 떠나기 전 페슈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데 그는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비엔나를 꼳 떠나기 바란다네.
이곳은 얼마나 고약한가!
모든 사람이 날 시기하고 모함하네.
대학 동창들이 사악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네.
비엔나에는 그늘이 있어.
도시는 어둡고 모든 것이 천편일률적인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
난 홀로 있기를 바래.
난 보헤미안 숲으로 가고 싶어. 5, 6, 7, 8, 9, 10월.
난 새로운 것들을 보고 연구해야만 하네.
난 깊은 물과 우지직우지직거리는 나무와 회오리바람을 맛보고 싶다네."

쉴레의 친구 오젠은 무대에서 기괴한 제스처로 연기했는데 성적 제스처에도 관심이 많았다.
무대에서의 그의 다양한 연기가 쉴레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쉴레는 평범한 인간의 행위보다는 무대에서의 연기처럼 어떤 목적을 갖고 강렬하게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에 관심이 있었다.

친구 오젠을 그린 <에르빈 오젠 Erwin Osen>(1910), <마임 반 오젠 Mime van Osen>(1910), <펠트모자를 쓴 남자(에르빈 오젠) Man in a Felt Hat>(1910), 그리고 오젠의 애인을 그린 <댄서 모아 Dancer Moa>(1911)를 보더라도 쉴레는 깡마르고 뼈마디가 불쑥 튀어나온 모델을 선호했는데 그런 육체에서는 강렬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오젠은 화가이자 배우로서 모아와 함께 공연하곤 했다.
쉴레는 <페트모자를 쓴 남자>에서 오젠의 몸을 생략하고 모자를 쓴 얼굴과 뒤틀린 왼손만 묘사했다.
그는 이듬해 오젠의 파트너 <댄서 모아>를 무대의상을 입은 채 돌아 서서 뒤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무대에서의 퍼포먼스 장면을 스냅 사진 찍듯 표현한 것들이다.

클림트도 무대 연기자들을 통해 다양한 제스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있었으며,
코코슈카는 서커스에 등장하는 인물과 광대들로부터 제스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쉴레는 좀 더 파격적인 제스처를 통해 표현의 강렬함을 고조시키려고 했다.
 연기자 오젠과의 교류가 쉴레로 하여금 독특한 회화를 발견하게 했다.
오젠은 1913년에 비엔나 스타인호프 정신이상자 보호소에서 환자들의 행위들을 연구하여 자신의 병적 연기에 활용했는데 그의 연구가 쉴레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쉴레의 자화상과 초상화에 나타난 병적 제스처는 잠재의식의 표현으로 1910년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모델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그런 제스처를 취하게 했고,
모델들 중 일부는 거의 미친 사람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가 1910년에 그린 초상화는 열서너 점 가량이다.
그는 주로 배경을 여백으로 열어놓고 모델의 표정, 손짓, 몸짓으로 표현을 두드러지게 했다.
<서 있는 소녀>와 <팔을 엇갈리게 한 누드 소녀>는 여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한 것들이고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남자 누드>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남자 누드, 뒷모습>은 자신을 모델로 한 것들이다.

쉴레는 초상화를 통해 비정상적인 태도로 관람자들을 바라보았고 관람자 또한 그의 모델을 통해 쉴레의 비정상적인 정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막스 오펜하이머의 초상>에서는 마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모델에 대한 다양한 포즈의 주문은 배우들에 대한 연출자의 요구와도 같아 퍼포먼스의 일면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자신이 거울 앞에서 갖가지 제스처를 취한 데서 이미 퍼포먼스를 예고하고 있었는데 무대 위에서 행하지 않았을 뿐 캔버스를 통해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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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미켈란젤로!

앙드레 말로는 "모던 아트는 의심할 나위없이 예술과 미의 개념이 구분되던 날 태어났다"고 했다.
말로에게 최초의 모던 아티스트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였는데 미가 곧 예술이라는 쾌쾌묵은 관념을 고야가 처음 부정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성modernity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최초의 모던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정해질 것이며
이는 곧 현존하는 미술사의 일부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로와는 달리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마네와 모네를 최초의 모던 아티스트들로 꼽는다.
많은 미술사 저서들이 모던 아트의 출발점을 마네와 모네의 작품들에서 삼고 있음을 본다.
미술사학자들이 두 사람의 작품들에서 전통 미학과 단절하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증거들을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양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통 미학이란 르네상스식으로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르네상스식이란 말을 르네상스 패러다임이란 말로 바꾸어서 이 패러다임은 바자리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그가 <예술가 열전>이란 저술을 남겼으므로 그에 의해서 미술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비교 설명하는 가운데 가장 규범이 될 만한 예술가로 미켈란젤로를 꼽았다.
바자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아티스트가 미켈란젤로였던 까닭은 그보다 더 대상을 정밀하게 바라보고 그 비례를 완벽하게 구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사람들은 완벽한 것을 보면
"오, 미켈란젤로!"
하고 감탄하는데 미켈란젤로를 완벽한 예술가로 보기 때문이다.
대상을 정밀하게 바라보고 그 비례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 19세기 중반까지 서양미술의 전통 미학 혹은 패러다임이었다.

오, 카메라!
"어떻게 하면 대상을 정밀하게 바라볼 수 있고 그 비례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던 화가들에 의해서 19세기 중반 카메라가 발명되었다.
카메라는 원근법의 도구로 착상되어 발명된 것이다.
카메라는 이내 미켈란젤로의 위상을 위협했으며 서양미술의 전통 미학 혹은 패러다임을 위협한 것이 바로 카메라였다.
화가들은 카메라보다 더 완벽하게 대상을 재현할 수 없게 되자 달리 방도를 찾아야 만했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 데서 화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양미술이 더이상 존립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화가들은 미술이 곧 사실주의라는 오래된 관념을 무너뜨리고 미술은 추상과 표현이라고 주장해야 했다.
추상과 표현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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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에서  
 
고갱, 테이블 커버와 야채의 정물에서 세잔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1885년 고갱이 그린 <정물이 있는 실내>는 일반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 정물화는 고갱이 코펜하겐의 아파트를 세얻어 1884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 늦게까지 가족과 함께 지낸 곳에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10년 넘도록 아마추어 화가로서 노력한 끝에 도달한 결정판이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정물을 그리면서 테이블 뒤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묘사했다.
테이블 커버와 야채의 정물에서 세잔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벽지의 경우 그가 소장하던 세잔의 정물화에서의 벽지를 그대로 사용했음을 본다.

이 정물화에서 특기할 점은 고갱은 정물을 그리면서 배경에 인물을 그림으로써 정물화와 인물화의 구분을 없애고 두 장르를 혼용한 것이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점은 공간에 대한 배분으로 창문 옆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침대가 유난히 높고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은 침대보다 낮으며 다섯 사람이 보이는데 그들의 관계를 알 수 없다.
테이블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사용하는 붉은색 나무로 제작된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컵 탱가드tankard가 방쪽을 향한 열린 문을 앞으로 하고 위치되어 있는데 컵 너머로 열린 방안의 모습을 화가가 보고 그린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 뒤 벽에 부착된 거울에 반대편의 방안 장면이 비쳐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고갱은 천을 배경으로 나무로 제작된 탱카드와 물주전자만을 사용해 1880년에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다.

반 고흐가 1885년에 그린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Open Bible>과 같은 해 고갱이 그린 <정물이 있는 실내>를 비교하면 두 사람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두 사람의 회화적 경향은 이후 그들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 정물화 모두 전통을 무시한 창작이었으며 상징주의 요소가 강렬하게 나타난 것들이고 자신들의 미적 정체성을 발휘한 작품들이다.

반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4년 동안 스스로 노력한 끝에 에밀 졸라의 소설과 성경책 그리고 촛대를 사용해 정물화를 그렸다.
특히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과 노력이 이 정물화에서 결실을 맺었다.
이 작품에서 그가 사변적으로 구성했음을 알 수 있는데 졸라의 소설은 낡고 덮인 채로, 그러나 성경책은 펼친 페이지로 모노크롬으로 그리면서 조명 효과에 의한 밝은색을 사용한 점과 두 권의 책에 대한 묘사 등에서 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펼쳐진 성경은 구약의 이사야서 35장으로 '종의 노래 Servant Songs'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장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성경 앞 낡은 소설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이다.
커다란 성경책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비해 작은 소설은 그렇지 못하지만 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이 작품에서 성경은 한 달 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반 고흐의 아버지를 상징한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목사가 되려고 했지만 신학교에 입학할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해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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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그리면서
 

아를에 비하면 조그만 항구 마을 퐁타방은 훨씬 원시적인 곳이었다.
당시 아방 강River Aven의 삼림 언덕을 따라 형성된 아를의 인구는 2만 3천 명이었던 데 반해 퐁타방의 인구는 불과 1,516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퐁타방에서는 농업, 제분업, 어업 등이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1860년대 이후 경제적 수입은 그곳을 찾는 관광객이나 작가들의 숙소와 음식물 제공에 의존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의 보헤미안 홈'으로 알려진 마이송 글로아느Maison Gloanec 여인숙에 묵으면서 여주인 마리 장느Marie-Jeanne로부터 방과 하루 두끼를 제공받고 매달 60프랑을 지불했다.
그는 빚에 쪼들리고 있었으며 고맙게도 마리 장느가 외상을 허락했으므로 당장 먹고 자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가 에밀 베르나르와 샤를 라발 그리고 메이어 드 한을 만난 곳도 바로 여인숙에서였다.
여인숙은 예술가들이 즐겨 묵던 곳으로 고갱은 훗날 그곳으로 여행온 폴 세루제에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는 곧 고갱의 제자가 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그리면서 피사로, 세잔, 드가로부터 익힌 화법들을 응용해 자신의 독창적인 기교를 찾아내려고 고심했다.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발견하지 못하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이미 경험한 그로서는 자신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해야만 했다.
반 고흐가 아를에서 그곳 풍경을 그리면서 혹독한 훈련에 들어간 바로 그때 고갱도 1888년 6월 중순 퐁타방의 풍습을 그렸는데 <춤추는 브르통 소녀들, 퐁타방 Breton Girlfs Dancing, Pont-Aven>에서 새로운 각도로 그림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추수를 마친 들을 배경으로 고갱의 연출에 따라 춤 추는 브르통의 세 소녀의 모습으로 뒤로 교회의 탑, 농가의 지붕, 언덕이 보인다.
반 고흐가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는 주민들의 의상에는 관심이 없었던 데 반해 고갱은 주민들의 의상과 풍습에 관심이 많았다.
소녀들의 춤은 가보트 브르통느gavotte bretonne로 알려졌는데 그곳 주민들이 추수기간에 추는 페스티발 그리고 의식적인 성격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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