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은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그리면서
 

아를에 비하면 조그만 항구 마을 퐁타방은 훨씬 원시적인 곳이었다.
당시 아방 강River Aven의 삼림 언덕을 따라 형성된 아를의 인구는 2만 3천 명이었던 데 반해 퐁타방의 인구는 불과 1,516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퐁타방에서는 농업, 제분업, 어업 등이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1860년대 이후 경제적 수입은 그곳을 찾는 관광객이나 작가들의 숙소와 음식물 제공에 의존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의 보헤미안 홈'으로 알려진 마이송 글로아느Maison Gloanec 여인숙에 묵으면서 여주인 마리 장느Marie-Jeanne로부터 방과 하루 두끼를 제공받고 매달 60프랑을 지불했다.
그는 빚에 쪼들리고 있었으며 고맙게도 마리 장느가 외상을 허락했으므로 당장 먹고 자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가 에밀 베르나르와 샤를 라발 그리고 메이어 드 한을 만난 곳도 바로 여인숙에서였다.
여인숙은 예술가들이 즐겨 묵던 곳으로 고갱은 훗날 그곳으로 여행온 폴 세루제에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는 곧 고갱의 제자가 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그리면서 피사로, 세잔, 드가로부터 익힌 화법들을 응용해 자신의 독창적인 기교를 찾아내려고 고심했다.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발견하지 못하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이미 경험한 그로서는 자신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해야만 했다.
반 고흐가 아를에서 그곳 풍경을 그리면서 혹독한 훈련에 들어간 바로 그때 고갱도 1888년 6월 중순 퐁타방의 풍습을 그렸는데 <춤추는 브르통 소녀들, 퐁타방 Breton Girlfs Dancing, Pont-Aven>에서 새로운 각도로 그림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추수를 마친 들을 배경으로 고갱의 연출에 따라 춤 추는 브르통의 세 소녀의 모습으로 뒤로 교회의 탑, 농가의 지붕, 언덕이 보인다.
반 고흐가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는 주민들의 의상에는 관심이 없었던 데 반해 고갱은 주민들의 의상과 풍습에 관심이 많았다.
소녀들의 춤은 가보트 브르통느gavotte bretonne로 알려졌는데 그곳 주민들이 추수기간에 추는 페스티발 그리고 의식적인 성격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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